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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381화 (381/432)

381화 - 제72장. 수미산 도리천(須彌山 忉利天) (1)

제자의 가슴에 기댄 채 조금은 힘겹게 호흡을 이어가면서 전투를 지켜보던 구치상이 가래 낀 듯 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자는 누군가?”

“당가주라고 하더군요. 사천무림에 나타났던 화경의 고수…….”

“과연…… 나보다 더 뛰어나구나.”

하단전의 공허함으로 내공은 빠르게 소실되어 갔으나 오랜 세월 상승의 경지 위에서 단련된 시각은 당혁수가 보여주는 무공의 깊이를 쫓아가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한편으론 단전만 파괴되지 않았다면 언젠가 실력을 겨루는 즐거움을 누렸을 거라는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다.

도인범은 사부의 거대한 등을 쫓아온 몸으로서 그의 상실감이 얼마나 클지 조금은 이해하고 있었다.

“회복하셔서 천하오절이 아직 사부님의 자리임을 보여주셔야지요.”

“아쉽긴 하지만, 이 사부는 이만하면 되었다. 그저 칠성파에 계시는 치소 형님께 죄송할 따름이다. 문파의 위상을 높이는 데 도움을 드리지 못하게 생겼으니.”

구치상이 손으로 배꼽 아래의 상처 주변을 쓰다듬었다. 도인범이 하복부 주변을 점혈하여 출혈이 어느 정도는 멎어갔지만, 서늘하고 쓰라린 통증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후우…….”

구치상은 호흡을 고르면서 전장 전체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구마진과 당혁수의 전투도 치열했지만, 단지운과 천무경의 대결은 마치 신의 대결처럼 보이는 완전히 다른 수준과 영역으로 보여졌다.

저 폭풍 너머 천무방 측 전장은 어떤 상황일까?

‘……아마 저쪽도 만만치는 않겠지.’

구치상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슬그머니 보았다.

전투에 의한 굉음들이 지축을 흔들고 대기를 때려대면서 소란을 지속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햇볕도 창창하게 비치는 날씨이긴 했으나 땅 위의 전투로 인해 하늘의 구름들의 형태나 움직이는 모습들이 묘하게 뒤틀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문득 그의 눈에 하늘에 떠 있는 구름들 사이로 알 수 없는 희미한 빛무리가 깜박거리면서 잠깐 머물렀다 사라지는 게 보였다. 어쩌면 내공을 급격하게 잃어가면서 볼 수밖에 없는 착각이었을 지도 몰랐지만, 어쩐지 구치상은 그것이 어떤 징조처럼 느껴졌다.

“인범아.”

“예, 스승님.”

“창천단을 움직여 바깥으로 전장을 물려라.”

“지금 정도로 일단 안전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만, 너무 외곽으로 빠지면 포위가 무색해질 수 있습니다.”

“아니, 지금 시점에선 이런 포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곧 무언가 벌어질지도 모르겠다. 자칫 휘말리면 감당할 수 없는 더 큰 싸움 같은 것이…….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들은 확실히 뒤로 물려야 해.”

도인범은 스승이 토로하는 말속에 담긴 깊은 불안감을 느끼고 표정이 굳어졌다.

“알겠습니다.”

구치상이 불편한 몸을 한 채로 떨어져서 바로 서자 도인범도 스승의 명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도인범이 움직이고 나자 구치상도 천천히 외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당혁수와 구마진이 대결하는 광경에서 고개를 돌리는 그의 얼굴엔 쓰디쓴 약풀을 씹은 듯한 찌푸린 표정과 회한 어린 눈빛을 품고 있었다.

구마진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본래 최초의 시도는 진도건을 혈마로 만들었던 것이었으나 천마신교에 편입하는 데 실패한 상황에서 홍천환이라는 같은 매개로 만든 두 번째 혈마.

붉은 머리카락, 붉은 눈동자와 밖으로 분출하는 모든 기운이 피처럼 붉은 색채를 띤다는 외형적 특징이 눈에 들어왔을 때는 확실히 진도건과 닮았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직접 부딪히면서 무공을 겨뤄보니 그 마기가 가져오는 본질적인 느낌은 물론 외형적인 인식도 완전히 다른 존재처럼 느껴졌다.

특히 그것은 구마진이 피의 장막에서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 이질적인 느낌은 더욱 도드라지게 느껴지고 있었다.

‘누가 진짜 혈마냐고 묻는다면 이놈이라고 얘기하고 싶구나.’

마(魔)가 곧 정(正)의 적이라 한다면 자신과 혈마를 분리 공존하는 진도건보다 완전히 일체화가 된 구마진 쪽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만큼 구마진의 힘은 사혈신마 서문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하고 또 난해했다.

파파파팡!

그를 노리고 휘몰아치는 붉은 기류를 향해 당혁수가 장력을 연속해서 떨쳤다.

혈마강기가 당혁수의 적련장 앞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하지만, 그렇게 공중에 흩어질 줄 알았던 붉은 기운들이 공중에서 꿈틀거리더니 다시 다른 형태와 방향, 전진성을 품은 혈마강기로 합쳐져 연속해서 짓쳐들어왔다.

마치 모든 기운이 생명력을 가진 것처럼 그를 옥죄고 있었다.

하지만, 당혁수는 그리 호락호락한 고수가 아니었다.

휘리릭!

당혁수가 상단과 하단을 각각 두 방향에서 동시에 짓쳐 드는 네 갈래 혈마강기를 눕듯이 공중제비를 돌며 피해냈다.

혈마강기들은 즉각 방향을 돌리며 압박해왔으나, 당혁수는 그 모두를 동시에 피해내면서 얻은 일각의 빈틈 동안 이미 공력을 충분히 끌어모은 상황이었다.

삼양귀원신공 구중양환경.

“힘으로 눌러주마.”

당혁수를 중심으로 부풀어 오르듯 양강의 기운이 퍼져나갔다. 혈마강기들이 밀려나는 것도 모자라 그 뜨거운 열기에 강기가 물처럼 끓어오르면서 증발해나갔다. 그 열구(熱球)가 삽시간에 커지면서 어느새 구마진의 코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구마진은 가까워진 것만으로도 지독하리만치 뜨거운 열통을 느끼면서도 얼굴엔 광기 어린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

“크흐흐! 어디 한 번 해보자!”

이미 머리 위에 여전히 떠 있는 혈청옥으로 인해 내공을 끌어올리는 준비 과정 따위 필요 없이 만전의 상태였다.

백귀혈마공 수라멸구(修羅滅口).

혈청옥을 중심으로 당혁수를 노리던 혈마강기의 줄기들이 일제히 구마진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장 두 거대한 기운의 파장들이 마침내 충돌하기 시작했다.

콰드드드드……!

두 사람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기운의 충돌은 거대한 격랑이 양쪽에서 밀려와 부딪치는 형국과도 같았다.

따지고 보면 이곳에 이르기까지 단 한 번의 전투도 치르지 않았던 당혁수의 신체나 내공의 한도는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구마진은 이미 구치상과 천서은을 상대로 반복해서 싸웠으며 초기 그의 전투 방식엔 진기의 효율 따윈 신경 쓰지 않아 많은 양의 진기가 소진되는 문제가 있었다.

물론 흡성대법의 능력이 가미된 혈청옥을 띄운 이후론 그런 문제를 보완할 수 있었지만, 구치상 이후로 두 번째 화경 고수를 상대로 이만한 정면 대결을 감행하는 건 분명 만용이라고밖에 볼 수 없었다.

콰르르르……!

분명 그것은 만용이었다.

단순하게 당혁수에 대항하여 쏟아내는 힘의 질량 자체는 겉보기에 대등해 보였다. 그러나 진기 자체가 갖는 밀도는 당혁수의 힘이 더 우월했다.

혈청옥을 이용해 쏟아내는 혈마강기가 보통의 경우 충돌로 흩어지면 그것들이 다시 액화하듯이 변하여 혈청옥으로 대부분의 진기가 회수되고 있었다. 그것이 구마진이 무한한 힘과 기세를 유지하는 공식과도 같았다.

하지만, 당혁수가 펼친 구중양환경으로 비롯된 극양의 열기가 혈마강기를 끓어오르게 만들어서 기화시켜 버리니 그것은 곧 구마진도, 혈청옥도 제어 불가능한 기운의 소모로 연결되고 있었다.

‘내 기운이 회수되지 않는다……!’

“크윽……!”

짧은 시간.

팽팽할 줄 알았던 힘의 균형이 당혁수에게로 넘어가자 구마진도 적잖이 당황했다. 그래도 아직 하단전의 깊은 심연 속엔 흡성대법으로 갈취한 내공이 충분히 있었기에 구마진은 한 번 더 거세게 공력을 쏟아냈다.

“크하아앗!”

쿠아아아-!

혈마강기가 폭주하듯 격렬한 기세로 퍼져나갔다.

그 순간 폐부를 옥죄어 오듯 열기의 압력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그가 내뿜은 기운들이 멀리까지 뻗어나갔다.

마치 심장이 뛰고 있는 몸통을 보호하기 위해 똬리를 틀고 있던 아홉 마리의 혈사(血蛇)가 웅크림을 풀고 사방팔방에 일제히 뻗어나가면서 몸통이 열려버린 형국이었다. 그리고 그 몸통에 해당하는 구마진의 두 눈은 뻗어나가는 혈마강기 사이를 헤집고 들어오는 당혁수를 불안한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만천화우 위락경.

뻗어나가는 수십 가닥의 침강이 드러나자마자 구마진은 등골에 소름 끼쳤다.

이미 방사된 기운을 온전히 회수하여 당혁수를 노리는 건 불가능한 일.

구마진은 혈청옥으론 반사적으로 발사한 기운 대부분은 통제를 놓고는 아직 가까이 흐르던 기운만을 돌려 당혁수와 구현된 침강들을 노렸다. 동시에 다시금 하단전에서부터 기운을 끌어올려 몸을 보호하기 위해 방출했다.

하지만, 구마진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푸푸푹!

위락경으로 형성된 침강이 구마진을 노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방향을 틀어 혈청옥에 꽂혔다. 그와 함께 당혁수는 구마진이 직접 방출한 기운을 분쇄하면서 삼양지공을 펼쳤다.

파파팟!

구마진이 잽싸게 손을 놀려 당혁수의 팔을 밀어냈다. 뜨거운 열기를 품은 지풍이 허공을 꿰뚫었으나 두 가닥은 각각 어깨를 스치고 가슴을 직격하면서 타들어 가는 고통을 남겼다. 하지만, 구마진은 공격에 적중당한 사실보다 혈청옥의 상황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당혁수의 노림수가 무엇인지 명확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구마진의 얼굴엔 희열이, 당혁수의 얼굴엔 실망감이 동시에 스쳤다.

침강에 충격을 받기는커녕 단단하게 뭉쳐있을 거로 생각했던 혈청옥이 순식간에 우산처럼 펼쳐지면서 하늘을 뒤덮었기 때문이었다.

콰콰콰콱!

당혁수가 보법을 밟으면서 신형을 움직여 쏟아지는 핏빛 강기의 칼날들을 피했다.

‘저놈의 표정……. 저 붉은 마기의 응집체는 저놈의 의사대로만 움직이는 게 아니로군.’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스스로 움직여 당혁수의 공격을 회피한 것과 지금처럼 자신을 펼쳐서 공격해오는 것 모두 평범한 현상이라 볼 수 없었다.

반면 구마진은 기세가 올라 직접 당혁수를 향해 움직였다.

혈청옥이 그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것 이상으로 이렇게 상황을 보조해주고 있다면 싸우는 방법도 확장할 공간이 열리는 것이었다.

백귀혈마공 야차위령무(夜叉慰靈舞).

양손을 따라 서리는 핏빛 칼날이 그를 주위로 휘몰아치는 혈마강기의 소용돌이와 함께 당혁수를 난도질하기 위해 덮쳤다.

양손으로 초수를 펼치는 공격과 더불어 동작의 빈틈을 메우고 파고드는 혈마강기의 공세는 당혁수로서도 상대하기 어려웠다. 마치 실시간으로 자기 잠재력을 깨우치듯 폭포처럼 쏟아내는 공격들이었다.

그렇기에 이렇게까지 일방적으로 수세에 몰릴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이거 위험……!’

당혁수는 급기야 손발이 어지러워진다는 느낌마저 받자 위험 감지의 본능이 울리는 경종을 들었다. 사고(思考)의 유속(流速)이 줄어들고 본능에 따른 반사적 반응만이 근육 속을 점점 가득 채워갔다. 그럴수록 몸에 새겨지는 상처의 수는 많아지고 점점 깊어져 갔다.

무공이 경지에 오르는 것은 비범한 재능과 노력만 받쳐준다면 홀로 갈고 닦는 것만으로도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싸움의 수가 는다는 것은 치열한 쟁투의 경험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었다.

정파에 속한 사천당문이 꽤 오랜 시간 봉문을 당했던 것, 사혈주와 당문이 서로 상극이고 사혈신마 서문질이 당혁수와 힘의 격차가 애초부터 존재했던 것은 그로 하여금 치열한 쟁투의 경험을 쌓을 수 있는 장이 없었던 것과 다름없는 말이었다.

‘당문을 홀로 나섰던 것이 만용이었나……?’

문득 그런 생각이 무의식중에 스치는 순간에 당혁수는 구마진의 어깨너머로 다른 기척들을 느꼈다.

그 익숙함에 속에서 절로 쾌재를 부르는 순간, 구마진도 느꼈는지 혈청옥에서부터 쏟아지던 기운의 방향이 등 뒤 다른 세 갈래로 나누어져 폭사했다.

파파파팡!

잇따른 폭음이 구마진의 귀엔 허무하게 들렸다.

당혁수를 향해 쏟아내던 공격을 그만둔 채 급히 땅을 박차 자리를 이탈하면서 반격을 위한 기운을 방출했다.

백귀혈마공 극혈수라무.

콰콰콰콰……!

갈래갈래 쏟아지는 핏줄기 같은 강기들은 분명 위협적이었지만, 그것이 가장 위험할 때는 각각의 갈래들이 용과 뱀처럼 날뛰기 시작하는 현상의 정점에 있었다.

이미 구마진을 노리고 달려온 천서은과 영은성, 최현걸 세 사람은 그런 견제 방식을 이미 경험한 바 있었다.

쿠르르릉……!

파파팡!

파천신공의 벽력기와 항룡십팔장의 웅맹한 장풍이 뒤질세라 쏟아지며 극혈수라무의 혈마강기를 떨쳐낸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로 영은성이 도포 자락을 휘날리면서 암향표를 전개해 구마진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파파팟…….

어찌 보면 당혁수가 구마진이 쏟아내던 기운의 공세를 바깥으로 돌린 후, 혈청옥을 노렸던 것과 같은 구도에서 영은성은 다른 선택을 내렸으니,

줄곧 눈 앞을 가리던 핏빛 장막이 없이 구마진의 가슴이 눈에 바로 들어오니 영은성의 품에서부터 검광이 번쩍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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