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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380화 (380/432)

380화 - 제71장. 신마대전(神魔對戰) 하편(下篇) (5)

아수라왕 마하발리.

처음 이 존재의 모습이 눈에 확연히 들어왔을 때는 똑같은 인간인 줄 알았다.

매우 짙은 검은 머리카락에 피부색은 오아시스에 젖은 사막의 모래처럼 짙은 갈색빛을 띠었다. 안와는 깊고 눈썹은 짙었으며 서늘한 벽안(碧眼)을 가졌다. 코는 용모에서 흘러나오는 분위기를 서까래처럼 받쳐주듯 오뚝했으며 입술은 잘 익은 홍시처럼 붉고 부드러워 보였다.

키는 상대적으로 조금 더 크긴 했지만, 햇빛에 반짝반짝 빛나는 금빛 비단으로 지은 듯한 옷으로 하의만을 가림으로써 드러난 다부진 상체가 인상적이었다. 종류를 알 수 없었으나 형형색색의 보석들을 이용해 세공된 목걸이를 세 개나 차고 있었으며 귀에도 비취 귀걸이가 달려 있었다. 그리고 허리 뒤쪽엔 화려한 월도가 비스듬히 걸렸다.

천축에서 산맥을 넘어온 듯한 그런 전체적인 행색이 이국적이라는 것 외에는 특이한 점은 없었다.

하지만, 진도건과 거리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원래는 보이지 않았던 제자리 회전하는 거대한 화륜(火輪)이 그의 등 뒤에서 나타나기 시작했고 또한 언제 생겼는지, 원래 그 자리에 있었는지조차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로 어느샌가 마하발리와 진도건을 중심으로 화염의 장벽이 원을 그리며 흐르고 있었다.

꿀꺽!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는지 머리 위에서 작렬하는 태양의 열기와 더불어 사방의 불길이 뿜어내는 열기까지 더해져 땀이 주륵 흘렀다. 침을 삼켜도 입안이 바짝 마르는듯하여 고통스럽기까지 했다.

이 모든 체감이 마하발리에게서 기인한 것임을 모르지 않았다.

무심한 듯 오만하면서도 마주치는 순간부터 마치 속내를 들여다보는 눈빛은 나시드에게서 느꼈던 것보다 압박감이 심하여 절로 공포를 느낄 지경이었다.

“뭘 긴장하고 있느냐?”

진도건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혈마의 목소리마저 마하발리의 목소리로 착각했을 만큼 극도의 긴장감에 휩싸여 있는 자기 모습에 놀랐다.

“싸우면 죽는다. 그건 너도 알고 저놈도 알지. 그런데 네가 할 일은 대화다. 어차피 길은 하나인데 두려워하고 걱정한들 무슨 의미가 있느냐?”

“네 말이 맞다.”

“그의 말이 맞다.”

혈마의 말에 진도건과 마하발리가 동시에 대답했다.

진도건의 발걸음이 잠깐 멈췄다.

그런 순간에 목소리가 끼어들면 다시 긴장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길이 하나라는 걸 자각한 이상, 주저함을 더 보이는 건 부끄러운 일임을 알고 다시 발걸음을 나아가 마하발리 앞에 섰다.

“진도건입니다.”

“나는 발리다, 아수라왕이고. 마하발리는 나를 존경하는 아수라들과 나를 두려워하는 천인들이 부르는 호칭이지.”

무언가 다른 언어로 말하는 듯하면서도 귀에는 한어로 또박또박 들려온다.

신적 존재들이란 언제든 자신의 의지를 인간에게 전달할 수 있는 법.

“선계의 신선들이 무슨 생각을 굴려서 널 여기에 보냈는지 대충은 알고 있다.”

“인드라?”

“아아, 너흰 제석천이라고 부르는 도리천 천주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래, 너희식대로 불러주는 게 더 낫겠군. 너희끼리 지상에서 잘난 척해대며 번개를 흉내 내봤자 어찌 하늘을 관통하는 제석천의 번개에 비할 수 있겠느냐?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으니 내가 아수라임에도 투쟁심이 일어나지도 않지.”

“저도 그러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만약 여기가 싸울 자리라고 생각했다면 벌써 오금이 저리고 무너졌을 겁니다.”

“네 안의 영주(靈珠)가 한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군. 하지만, 내 관심을 끌어야 네가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을 텐데?”

“제가 원하는 게 무엇입니까?”

“그걸 내게 묻는 것이냐?”

“알리 라 다바스는, 그리고 남채화 신선은 이곳을 닫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려면 마하발리께서 저 아수라의 군대를 물려주셔야 하겠지요. 그러나 제 무공을 좀 익혔다고 해도 이렇게 위대한 존재 앞에선 한낱 재롱에 불과할 텐데 제가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사실 없을 것입니다. 오직 아수라왕의 의지에만 달린 것이지요. 전 신들에 의해 세워진 것일 뿐, 그것이 제가 원하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제 잘난 맛에 가르치려는 듯이 주절거리는 건 제석천과 닮았구나. 그럼 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냐?”

“천마신교를 무너뜨리고 이 전쟁을 끝내는 것. 그리고…….”

“내가 떠남으로써 이 전쟁의 이유가 되는 마지막 굴레까지 사라지게 하는 것.”

진도건과 혈마가 차례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었다.

마하발리의 시선에서도 인간이 속에 다른 영혼을 품어 공존하고 각자의 목소리를 내는 모습은 분명 신기한 것이었다.

“몸을 차지하지 못한 영주의 혼이 이렇게 무르익은 건 또 처음이로구나.”

“영주가 무엇입니까?”

“영주가 뭔데?”

“만들어진 혼. 어린 신이나 천인들은 잘 알지 못하겠지만, 애초에 천인으로 태어난 자들은 천인인 자식은 낳을 수 있어도 인간을 낳을 수는 없다. 죽어서 환생하지 않는 한 말이지. 물론 천인들은 자기 삶에 만족하고 살지만, 가끔은 미치광이도 존재하는 법이지. 영혼을 빚어 산모의 몸에 점지여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거둬가려는 족속이 말이야.”

진도건은 마하발리의 이야기를 전부 이해하진 못했다. 하지만, 선명하게 인식되는 문장은 있었다.

“그 빚은 영혼이 영주라는 것입니까?”

“그런 미치광이가 천인들 가운데 나올 가능성은 정말 만에 하나 정도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놀랍게도 선계에 그런 미치광이가 나타나 계획을 성공시켰으니 저 브리트라의 흑사를 두들겨 패는 나타가 바로 그렇게 태어난 존재다. 물론 저놈 때문에 골치 썩은 천인들이 많아서 두 번 다시 시도하는 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혈마를 영주라고 부르셨습니까?”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 영주라는 것은 결국 만든 주체가 신이든, 천인이든, 신선이든 혹은 나 같은 ‘치린자비 아수라’이든 상관없이 의도적으로 형성된 영혼이라면 그렇게 부를 수 있다고 말이야.”

“그래서…….”

“하지만, 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나타 사태를 겪은 이 땅의 신적인 존재들은 거기서 교훈을 얻었기에 두 번 다시 시도할 생각은 하지 않게 되었지만, 어느 순간 다른 세상의 신이 이곳에 발길이 닿았는데 하필 그 짓거리를 할 줄 아는 신이었다면 두 번째가 나올 수도 있겠지.”

“그럼…….”

“태을진인(太乙眞人)은 영주를 태아에 심으면 아이가 장성하는 과정에서 인격 또한 생겨날 거라 예측했으나 결국 실패했지. 반면 알리 라 다바스는 선계의 태을진인과는 다른 선택을 했네. 이미 장성하였으며 선도의 그릇을 갖추어 또 다른 영혼을 포용할 수 있는 자를 찾았고 그자의 영혼과 자신이 만든 영주가 동화되어 인격이 입혀지기를 바랐네. 그리고 그는 결국 성공했지.”

진도건의 감정이, 혈마의 감정이 동시에 꿈틀거렸다.

지나왔던 시간들 가운데 중요한 몇 개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홍천환을 폭주시켰던 일월신마 냉소평.

그리고 직전의 영역의 관문에서 그에게 공격당하던 순간 베르트랑 백작이 외쳤던 이름과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던 모습.

베르트랑 백작이 이야기한 알리 라 다바스에 관한 대목과 나시드와 만나 나누었던 대화들.

혈마의 폭주로 의식이 잠겨 있다가 조강선에 의해 깨어났던 순간.

혈마를 수용하고 다시 공존의 길로 나아가던 순간.

혈마의 뒤에 숨은 채로 단지운을 무의식의 경계에서 마주했던 순간 등.

잠깐의 침묵 끝에 마하발리가 이야기를 이어간다.

“천인들이든 신선들이든 알리 라 다바스의 동태를 방관하던 기조가 바뀌었던 것도 네 안에 영주를 깨우던 바로 그 순간부터였으니…….”

“마하발리께서도 그때부터 관심을 두셨습니까?”

진도건의 마하발리의 말을 끊고 물었다.

마하발리의 화려한 얼굴에 미소의 꽃이 핀다.

“천계에 존재하는 나를 향한 존경은 투쟁만이 난립하던 아수라도에 나름의 질서를 세워 육도의 안녕에 공로를 세웠다는 것에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수라인 내가 투쟁을 싫어할 리는 없으니 사태의 흐름이 어디로 이어질지 관심을 두었던 게 아니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해주마.”

“큭큭큭!”

“넌 왜 웃는 것이냐, 영주여.”

“네놈 같은 족속들을 만날 때마다 그 오만함에 역겨운 기분만이 쌓여가서 말이야. 어떤 년은 나보고 자길 따라 신이 되어서 다른 신의 졸개 노릇을 하라고 하질 않나. 이전에 만난 자칭 지옥의 백작이란 새끼는 신들에게 휘둘리는 내 신세를 비웃어서 아주 지옥까지 쫓아가 작살을 내놓았는데. 이번엔 대놓고 도구 취급하고 있다는 소리까지 듣는군. 이봐, 아수라왕이여. 넌 뭐 약점 없냐? 지금은 딱 봐도 나보다 세니까 할 수 있는 게 없을 거 같고. 기억해뒀다가 기회를 봐서 등에 칼을 꽂지 않으면 내 이 분노가 사그라지지 않을 거 같거든.”

“후후후! 나타에게 인격이 자라났다면 네 성질과 닮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얼핏 드는군. 그놈은 주먹부터, 칼부터 들어서 말이야.”

진도건의 상체 주변으로 붉은 기류가 넘실거렸다.

“칼만 안 들었지. 똑같을걸?”

혈마의 모습이 진도건의 모습에 겹쳐 드러나더니 더 붉은 눈이 분노로 이글거린 채로 노려보며 으르렁거렸으나 마하발리는 웃음 띤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저 녀석은 그렇게 길게 신세타령부터 하지 않고 일단 공격부터 했을 것이야. 그런 측면에서 자넨 분명히 달라. 그리고 그것이 알리 라 다바스가 바랐던 모습임엔 틀림없겠지. 하지만, 그렇게 인격을 얻고 이성을 다룰 힘도 얻었는데 그리 생각이 안 돌아간다면 정작 본인은 자기 계획이 실패했다고 느낄지도 모르겠군.”

“……응?”

“그게 무슨 말입니까?”

혈마가 마하발리의 말 속에 뼈가 있다는 느낌을 받아 흐릿한 반문을 던졌다. 그 잠깐의 기다림을 견디기엔 궁금증이 가려웠던 진도건이 바로 반문하기도 했다.

“옛날 인간 세상에 상(商)이란 나라가 있었을 때, 진당관총병(陳塘關總兵)이란 관직에 있던 이정(李靖)은 사해용왕의 분노를 사서 자결로 죄를 면피하려 했던 셋째 자식의 부활 시도를 망쳐놨지. 그러나 그 셋째 자식은 태을진인의 손에 끝내 부활했으니 자기를 죽이려던 제 아버지를 죽이려고 들었어. 우여곡절 끝에 이정은 연등도인의 제자가 되어 자식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는 영롱탑(玲瓏塔)을 받았네. 그리고 그는 탁탑천왕(托塔天王)이란 이명의 신선이 되고 다시 북방천을 수호하는 천신에 올랐지. 사람 팔자가 참 극적인데, 셋째 아들 나타가 아니었다면 과연 그 지위에 올랐을지는 그때 그 시점에선 아무도 몰랐을 것이야.”

“흥미로운 고사(古事)지만, 그것이 혈마와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이정에게 필요했던 것은 자식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인간적인 도리가 만드는 경계였네. 하지만, 나타는 인간의 몸을 가졌으나 인격은 갖지 못해서 보통의 아수라처럼 싸우는 것만이 문제의 해결법이라는 본능적 인식만을 갖고 있었지. 결국 영롱탑이라는 보패를 들고 나서야 간신히 대화할 수 있게 되었지만, 끝내는 인간답게 죽는 길은 버려지고 신의 굴레에 묶여버리고 말았지. 아버지도, 아들도 말이야. 알리 라 다바스가 이런 이야기를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신이면서 신을 향한 분노를 품은 자. 그를 위해 세운 계획의 일환이라 할지라도 자기가 빚은 영주가 그저 도구에 그치지 않고 인격을 갖추어서 자기 생각을 말하고 자신과 대화하게 될 날을 머릿속으로 그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지.”

투쟁의 아수라.

단지 그 상징에 그치지 않고 아수라도에 질서를, 육도에 안녕을, 그리고 전쟁을 시작하면 어느 한쪽이 절멸하지 않고서는 싸움을 멈추지 않는다는 아수라의 군대를 단 한 번의 명령만으로 물릴 수 있는 권위를 가질 수 있던 것은 천신들과 비견될 정도의 위대한 통찰력과 지혜를 그 안에 품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아수라와 같은 나타가 이곳에 내려와 아수라 브리트라의 흑사를 때려잡고 있는 그 행위엔 비사문천이 된 이정의 복안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선택의 저편엔 서로 대면해본 적이 있는지는 몰라도 최소한 알리 라 다바스와 인식을 공유하는 지점이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기분이 참 더럽네. 그런 식으로 따져보면 결국 그 자식이 내 아버지란 말이잖아. 그러니 아버지로서 여기까지 자식을 끌어왔다 뭐 이런 건가? 여태껏 마주해오던 일들이 딱 그런데?”

혈마가 짜증이 치밀어오르는 감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러나 마하발리를 바라보는 진도건의 얼굴은 여전히 신중함을 표정에 드러내고 있었다.

“이정은 천신이 되었는데 어째서 인간답게 죽는 길이 버려졌다고 하셨습니까? ……나타와 혈마가 다른 건 어째서 중요한 것입니까?”

진도건의 적안과 마하발리의 벽안이 허공에서 깊이 얽혔다. 그리고 벽안으로부터 현기가 스밀 때, 진도건과 혈마는 어쩌면 이 여정에서 상당히 중요하다 느껴질 만한 대답을 듣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육도 중에서도 불법을 깨우쳐 성불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도에 있다. 신선이 되는 길 또한 마찬가지. 알리 라 다바스는 신이 되기 전 인간이었다고 하더군. 그가 널 자식으로 여길지, 도구로 여길지, 혹은 내가 생각할 수 없는 다른 무언가로 여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네 녀석을 만들 적에 인격을 얻지 못한 나타의 처지도, 아들을 두려워한 아비의 처지도, 그저 강력한 보패인간을 만들려 했던 태을진인의 처지도 고려한 선택을 한 것이라면 분명 신격에 맞는 고민을 했을 것이니라.”

마하발리의 이야기가 끝이 난 바로 그때였다.

진도건과 혈마에게 잠깐의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을 것처럼 하늘에서 빛의 원이 열렸다. 그리고 그 빛 속에서 무언가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순간, 탐탁지 않은 듯 중얼거리는 마하발리의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인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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