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3화 - 제70장. 신마대전(神魔對戰) 중편(中篇) (3)
“크으……!”
그것은 고통보다 위협을 넘겼다는 안도감에서 흘러나온 신음이었다.
한쪽 뿔을 붙잡은 순간에 백두기는 혁무술의 신체 내부에 흐르는 마기의 흐름을 감지하면서 다른 뿔에 그것이 집중되고 있음을 금방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뿔이 변형하면서 심장이 노려지는 순간, 몸을 움츠림과 동시에 오른손으로 심장에 구멍이 뚫리기 직전 간신히 뿔을 밀어내고 더는 움직이지 못하도록 붙잡을 수 있던 것이다.
그 덕분에 뿔은 아슬아슬하게 왼쪽 겨드랑이를 스치듯 지나감에 그칠 수 있었다.
“크르르……! 인간 주제에 감히 나 광기와 폭력의 지배자인 아라트……!”
푹!
백두기는 잠깐 멍해진 기분이 들었다.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중에 갑자기 씻은 듯 사라졌는데 어느새 다가왔는지 혁무술의 정수리에 기어이 검을 꽂아 넣은 남궁평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혁무술의 머리에서 검을 뽑아 내려오던 남궁평도 백두기가 잠깐 멍하니 있었던 것 같아 불안한 마음에 그의 상태를 물었다.
백두기의 고개가 미약하게 끄덕이고 있었다.
‘그것은 대체…… 아, 그것이 광혈신마를 지배했던 마성의 목소리였던 것이겠구나……!’
머릿속을 채웠던 목소리가 어떤 것인지 깨닫게 되면서 백두기의 심경은 복잡해졌다. 그러나 겉으론 크게 내색하지 않은 채 붙잡고 있던 뿔을 놓으면서 혁무술의 머리를 슬쩍 밀었다.
“난 괜찮…….”
백두기가 말을 멈춘 것은 다름이 아니었다.
거대 변형이 일어났던 혁무술에게 다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육신을 가득 채웠던 뿔과 발톱, 살가죽 일부가 알 수 없이 생겨난 불씨에 의해 재가 되어 떨어져 나갔고 몸은 점점 쪼그라들어 제 크기를 되찾았다. 다만 백두기의 마지막 일격으로 인해 얼굴이나 몸은 이미 곤죽이 되고 비틀려서 온전한 제 모습을 찾았다고는 볼 수 없었다.
쿠구구구궁!
그때였다.
심상치 않은 천둥소리와 함께 지진이 일어나며 일시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을 비롯해 살아남은 모든 이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한 지점에 향했다.
진원지는 명백하게 전장의 중심을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
진도건과 주백자, 냉소평 등은 새로운 영역의 관문 안에 들어섰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어디로 이동하거나 하지 않았음에도 마치 그들이 서 있던 자리가 원래 그 자리였던 것처럼 새로운 영역의 관문 속에 있게 된 것이었다.
특히나 확연하게 달라진 풍경은 일행을 완전히 새로운 기분으로 감싸 안았다.
구름을 밟고 선 듯 바닥에는 짙은 안개가 흐르고 있어서 발을 딛고 있는 땅이 어떤 지대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고 곳곳엔 복숭아나무가 하얀색, 분홍색 꽃들이 만발한 채로 곳곳에 수십 그루, 백여 그루 이상 자라나 있었다. 그런 가운데 제법 바람이 불면서 복숭아나무로부터 꽃잎이 떨어져 흩날리니, 마치 꽃비가 내리는 듯했다.
그렇다고 모든 게 낭만 있게만 보이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하늘은 섬뜩한 느낌이 들 만큼 기이한 것이 한낮이라고 생각할 만큼 밝은 풍경에서 동쪽 하늘엔 태양이, 서쪽 하늘엔 달이 떠 있었는데 두 천체 사이의 하늘이 묘하게 갈라져 마치 기세 싸움이라도 하듯이 물결치는 흐름이 엿보이고 있었다.
쿠릉!
그 가운데 구름은 몇 점 없고 먹구름은 아예 보이지 않는 데도 가끔씩 복숭아나무 쪽으로 벼락이 떨어지고 있었다. 어쩌면 꽃비라 느껴지는 것들이 벼락에 터져나간 복숭아나무들에게서 꽃잎이 대거 탈락하여 발생한 것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 정도였다.
말 그대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인 셈인데 더 놀라운 것은 그런 하늘 아래, 복숭아나무 사이에서 상당한 인원들이 양갈래로 나뉘어져 전투를 벌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여기서 일행을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양쪽 다 인간처럼 보이면서도 아주 기이한 모습도 함께 보인다는 것이었다.
왼쪽 무리 일부는 승복과 같은 복장이기도 하고 또는 근육질의 상체를 드러낸 복장이기도 했는데 종종 한몸에 얼굴이 둘 이상이 달려있고 팔도 여럿 붙어있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그들의 무기는 다양해서 도검뿐만 아니라 가시 달린 곤봉을 휘두르거나 도끼를 휘두르거나 활을 쏘는 자도 있었다.
또 붉은 피부를 가지고 불길을 끌고 다니는 자들은 어째 인간 같지 않은 위압감 넘치는 용모를 하고 있어서 전장 가운데 특히 더 돋보였다.
오른쪽 무리는 상대적으로 수가 적었다. 복색의 구성도 매우 다양하여 거렁뱅이부터 시작해서 상인, 악사(樂士), 노인, 기녀, 소동(小童), 관인(官人), 장군, 도사 등 매우 다양했다. 상대와 같이 기형적인 다면다비(多面多臂:여러 얼굴과 팔)의 특징은 없이 좀 더 사람다운 느낌이었지만, 그런 다양한 군상을 이루고 있는 만큼 싸우는 방식도 다양했다.
“이건 또 익숙하면서도 생경한 풍경인데, 종전에 상대하던 마물과는 또 달리 인간도 보이니까 당황스럽군.”
냉소평이 솔직한 감상을 늘어놓았다.
다른 사람도 그와 비슷했다.
단, 조강선만이 실눈을 뜨면서 전장을 살피고 있었다.
“왜 그러는가?”
주백자가 궁금하여 물었다.
“……저건, ……저 오른쪽은 아무래도 선계의 신선들 같소.”
“신선들?”
조강선의 대답에 주백자가 놀라 반문했다.
주백자는 아직 우화등선하지 못한 현세의 반선이지만, 조강선은 사후 선인이 되었으니 당연히 선계에 발을 들여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몇 되지 않았지만, 설화로만 전해오던 전설 속의 신선을 마주한 경험도 있었다.
“너희가 베르트랑 백작의 관문을 닫은 아이들이로구나?”
일행의 가장 가장자리에 서 있던 진도건은 깜짝 놀라 오른쪽을 돌아보았다.
바로 눈에 보이는 것은 없었으나 곧장 고개를 숙여서 목소리의 주인을 찾을 수 있었다.
“네가 속에 마와 공존한다는 아이고.”
언제부터 그의 옆에 있었는지 앳된 느낌이 남아있는 젊은 청년이 꽃바구니를 옆에 낀 채 진도건의 옆에 쪼그려 앉은 채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진도건은 그를 보고 바로 남자인 걸 알았지만, 또 금방 그 생각이 틀린 건 아닌지 생각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여자처럼 피부를 하얗게 분칠하고 홍조가 돌도록 화장한 얼굴이었기 때문이었다.
냉소평과 일월교 수라들, 빌게포첸 등은 그를 경계했다.
반면 진도건은 그의 등장이 너무 갑작스럽기도 했지만, 또 어떤 적의가 느껴지지 않고 목소리에서 맑은 티가 흘러서 경계할 생각을 못 하게 하는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당신은 누굽니까?”
“강선이는 나를 알지.”
조강선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를 향해 포권을 취했다.
“선인 조강선이 예선(藝仙) 남채화(藍采和)께 인사올립니다.”
조강선이 예를 갖추자 남채화가 빙긋 웃으면서 꽃바구니를 끼지 않은 오른손을 들어 흔들어보였다.
주백자나 진도건이 남채화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전설로 전해지는 도교팔선 중 한 사람이 실제 두 눈으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래, 네가 고생이 참 많다.”
“저분들도 모두 높은 신선들이신 것 같은데,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인지요? 원래는 개입하지 않기로 하셨는데…….”
“너희도 여기까지 왔으니 알리 라 다바스의 존재는 알 테고……. 베르트랑 백작이 자기 세계의 지옥문을 열어 군대를 이동시키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알리 라 다바스에게 경고했지. 지금 선 넘는 거라고 말이야. 그런데 그건 자기가 막을 생각이 있으니 맡기라고 하더구나.”
“알리 라 다바스가 그렇게 말한 게 사실입니까?”
“그래. 놈은 이곳에 뭔가 꿍꿍이를 갖고 오긴 했지만, 실제로 큰일을 벌이진 않았어. 다만 놈에게 영향을 받은 단용후라는 인간이 판을 제대로 벌이는 바람에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던 거지. 물론 인간 기준이지만 말이야. 아무튼 놈이 자기 세상으로 돌아갈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 대체로 하는 행동들은 대부분 방관자에 사실 가까워서 베르트랑 백작이 그 일을 벌였던 것도 우리가 보기엔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것처럼 보여 조금 걱정하던 차였네. 그런데 결국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지.”
남채화가 전장 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여긴 아수라왕(阿修羅王)에 의해 열린 수라도(修羅道)의 중첩세계라네. 저 좌측의 인간 같지 인간들이 바로 수라들이고.”
“수라, 아수라왕……!”
주율과 곽비, 하후무가 그 말에 놀라 중얼거렸다.
일월교 내 직위 이름의 근원적 존재들을 실제로 보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서였다.
“물론 놈들도 저마다 이름들이 있어. 수라도는 업보를 쌓은 인간이 죽어서 환생하는 육도 가운데 하나. 현세에 겹쳐진 또 다른 세상, 인간 위치의 다른 종족이라 보면 편한데, 베르트랑 백작이 자기 세계의 지옥문을 여는 바람에 전쟁의 냄새를 맡은 아수라왕도 똑같이 다바스의 관문에 흐르는 혼돈의 힘을 빌어서 자기 세계를 열려고 하는 것이야. 정말로 현세와 연결이 된다면 말 그대로 아수라장(阿修羅場)이 되는 것이지. 그러니 우리가 나서서 막고 있는 것이고.”
조강선이 남채화의 말을 듣고 우려되는 지점이 있어서 입을 열었다.
“불교 전승에 따르면 아수라를 막는 것은 천도왕(天道王) 제석천(帝釋天)인데 그와 천인들은 어찌하고 신선들께서 막으신단 말입니까?”
“후후! 너희가 여길 거치고 다음 가야 할 곳이 바로 그 제석천이 연 도리천(忉利天)의 관문이야. 지금은 우리 지휘관이랑 면담 중이지.”
“지휘관이라 하시면……?”
“당연히 태상노군이지.”
사람들 모두 남채화와 조강선의 대화를 들으면서 가슴이 덜컥덜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미 아수라장 한가운데 떨어졌다는 느낌을 현실로써 받아들이게 되면서 오히려 현실감이 무뎌지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드는 것이다.
“인간 세상의 아이들아. 지금부터 너희들이 할 일을 일러주마.”
“말씀을 듣겠습니다.”
“신선들이 저마다 능력이 강력하니 능히 수라군(修羅軍)을 막아내고는 있지만, 제한된 공간에서 무한히 쏟아져나올 저놈들을 막는 일이란 그저 시간을 버는 것에 불과하네. 그게 어떤 시간이냐? 첫째가 제석천의 개입을 기다리는 것이요, 둘째가 삼청(三淸) 중 하나가 나서서 직접 쓸어버리는 것이지만, 둘 다 수라들이 인간 세계에 쏟아져 들어왔을 때나 벌어질 일들이니 그럼 이미 늦은 게 아니겠나?”
“둘 다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군요. 그런데 태상노군이 제석천을 만나고 있다면 어째서 여기엔 오지 않은 것입니까?”
“우리는 서로를 개입하지 않네. 관장하는 영역이 겹치기도 하지만, 공존할 수도 있는 건 인간군상이 매우 다양하여 서로 다른 종교를 믿어 우리를 존재케 하기 때문이네. 그래서 우리가 서로의 영역에 개입하고 공격하는 건 이 세상을 파괴하는 것과 다를 바 없어. 이게 알리 라 다바스나 나시드 같은 다른 세상의 신들이 여기에 와서도 자기들 세상에서처럼 제대로 힘을 못 쓰는 것과 같은 이치지. 그들에게도 제약을 주거든.”
“저희가 무얼 하면 됩니까?”
“지금은 나름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지만, 너희는 인간들 가운데서도 특출나게 강하니 저놈들과 싸우는 데 힘을 보태면 분명 기세의 우열을 가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죽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 신선들이 저 수라들과 마치 팽팽하게 싸우는 것처럼 보여도 실상 여유들은 저마다 있으니 너희의 목숨이 온전히 보존되도록 도와줄 것이야.”
“후후후, 그거 재밌겠군.”
가만히 얘기를 듣던 냉소평이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남채화도 씩 웃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전세가 역전되면 아수라가 나타날 것이야. 모든 수라들의 왕, 아수라는 아주 강력하지. 다른 수라들이야 어찌할 수는 있지만, 아수라가 나타나 전투에 가담하려 든다면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네.”
“그럼 싸워선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아수라가 나타나면 자네가 만나러 가게. 다행히 지금 아수라는 당연히 전투를 좋아하긴 해도 매우 지혜롭기도 하고 대범한 품성도 가진 인물이어서 나타났을 때 바로 가면 만나줄 시간 정도는 줄 것이야.”
모두의 시선이 진도건에게 쏠렸다.
남채화의 마지막 시선은 올곧이 그에게만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도건도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무얼 할 수 있습니까?”
“다바스가 벌인 일 때문에 알게 모르게 천인들이나 신선들의 영향력이 지금 인간 세상에 닿고 있네. 물론 사건의 중심인 중원과 서역 무림 위주로 흐르고 있긴 하지만, 어쨌든 우리의 힘을 이은 인간들이 존재하는 셈이지. 그리고 아수라를 굴복시킬 제석천의 영향을 받은 녀석의 성이 천(天)가라네. 어떤 느낌인지 알겠지?”
제석천의 영향을 받은 천씨 성의 인물.
제석천의 권능이 번개, 벽력으로 대표되니 달리 누가 있겠는가?
진도건은 남채화가 말한 인물이 바로 천무경이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