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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369화 (369/432)

369화 - 제69장. 신마대전(神魔對戰) 상편(上篇) (4)

* * * *

지옥의 마물들이라 하더니 과연 그러할 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전에 조강선과 만난 영역의 경계에서 보았던 균열에서 흘러나온 괴물들도 이 땅에 자생하는 생명체였다면 능히 먹이사슬의 포식자 위치를 뒤엎을 정도였지만, 지금 마주한 마물들은 생김새도 더욱 흉측하고 흉포했다.

힘은 최소 곰과 같았고 민첩함은 산호랑이들을 능가했다.

풍기는 악취는 정신을 혼미하게 할 정도로 코를 찔렀으며 피는 부식성을 가져서 옷깃이 스치곤 하면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검강 수준의 예기가 아니라면 근골을 일검에 잘라내는 건 불가능했다.

단지 거기까지였다.

베고 죽이는 데 드는 힘이 더 필요할 뿐, 진도건과 주백자, 유변, 빌게포첸의 목숨을 위협할 만한 상황은 없었다.

꽤 시간이 걸렸다고 생각했지만, 사방엔 마물의 시체들로 이뤄진 산이 쌓여있었고 네 명의 고수는 그 사이를 지나 냉소평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일월교 세 명의 수라들도 합류하고 있었다. 그리고 냉소평은 팔다리가 뜯기고 몸통만 남은 베르트랑 백작을 발로 밟은 채 나머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찮은 인간들 따위가 어떻게……!”

베르트랑 백작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침통한 심정을 그대로 토해냈다.

바닥에 널브러져 있어서 시야가 확보되지 않았으나 인간들이 모두 모였다는 건 그가 소환한 지옥의 군대가 전멸했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힘을 보존하라고 했건만, 기어이 나섰군. 그리 참기 힘들었나?”

“여기에 들어온 뒤로 힘이 넘쳐흘러서 말이야.”

주백자의 물음에 냉소평이 대수롭지 않은 듯 중얼거렸다.

그의 장포가 여기저기 손상이 가긴 했으나 신체적 피해는 입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베르트랑 백작에게서 느껴졌던 마기나 투기의 크기가 분명 위협적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냉소평이 직접 얘기했듯이 주백자의 눈에도 냉소평이 품은 마기가 훨씬 더 활력을 띄고 있는 것과 동시에 어쩐지 이 영역의 관문에 흐르는 기운과 공명하는 듯이 느껴졌다.

“그놈은 왜 죽이지 않고 붙잡았는가?”

“혹시 영감이 이놈에게 할 말이 있나 싶어서 잡았는데, 필요 없소?”

주백자는 베르트랑 백작 머리 앞에 쪼그려 앉아 잠시 바라보았다.

“……페특랑 백작, 다른 세계 지옥의 상장이 여기엔 무엇을 노리고 왔는가?”

“크큭! 이 베르트랑 백작이 여기에 노리고 왔다고? 차라리 그랬으면 덜 억울했을 것이다. 이 세상 인간들의 수준을 파악하고 더 나은 준비를 거쳐서 이런 치욕은 피할 수 있었겠지. 나는 이 꼴이 된 이제야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되었다. 난 끌어들여진 것이야. 이용당한 것이지.”

주백자는 알리 라 다바스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이용당했다라. 그자는 네가 자기 속내를 눈치채고 방해하기 위해 여기에 관문을 열어서 지옥의 군대를 우리 세상으로 내려보내려 한다고 하였네. 네놈이 한 말과 정반대가 아니더냐?”

“음모와 공작의 신이며 지나가는 길, 한 마디라도 섞은 누구, 손에 닿는 어떤 것이든 혼돈을 야기할 것이라는 저주까지 끌어안고 신이 된 자, 알리 라 다바스. 그놈이 날 낚았듯이 네놈에게 떠든 말 가운데 거짓이 있다는 건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상식이지.”

“그걸 아는 네놈은 속아서 여기 왔고?”

“놈을 경험한 자로서 기꺼이 발을 들이밀 선택을 하는 것이다. 네놈들이 강한 것은 예상 밖이긴 했지만, 여기서 내가 죽는다고 해서 정말 죽는 것이 아니고 말이야.”

“허세를 부리는군.”

냉소평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끼어들었다.

“큭큭큭! 내가 지금 두려워하는 것으로 보이느냐? 내 목을 쳐도 고통은 잠깐뿐이고 이대로 놔둬도 기운이 빠져나가 자연스럽게 죽겠지만, 그것이 나의 소멸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네놈들에게 이런 얘길 해주는 것도 내겐 하등 손해 볼 일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그럼 더 얘기해보게. 페특랑 대공은 알리 라 다바스를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끌어들여졌는지.”

“길게 떠들어 봐야 네놈들이 뭘 이해할 수 있겠느냐? 그저 이거 하나만 기억하거라. 다바스가 개자식이긴 해도 놈이 벌이는 짓거리엔 일관된 방향성이 있다. 그것은 그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이 신을 엿 먹이기 위함이라는 걸 말이야.”

“신이 신을 엿 먹인다……. 나시드를 말하는 겐가?”

그 말을 들은 베르트랑 백작의 얼굴에 웃음이 그려졌다. 그리고 그의 눈빛엔 알리 라 다바스를 거론할 때보다 더 짙은 분노가 끓고 있는 게 보였다.

“아아! 자칭 주신(主神)의 대리자 나시드. 그 재수 없는 썅년이 내가 기꺼이 여기까지 들어오게 한 이유이기도 하지.”

베르트랑 백작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두 신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는 주백자와 조강선, 진도건, 혈마의 표정엔 묘한 떨림이 지나갔다.

“네 눈빛은 다바스보다 나시드에게 더 분노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그건 어찌 된 연유이지?”

“신들의 신. 네가 신이라면 그것을 용납할 수 있겠느냐? 하물며 마주한 적도 없는 주신의 대리자라 주장하면서 각 신들이 관장하는 영역들까지 개입하고 제어하려 드는 그런 신을 용납할 수 있겠느냐? 그런 오지랖이 어찌 신들뿐이겠느냐, 지옥에도 영향을 끼치려 드는 것을. 누군가와 시비가 붙어 원수가 되었다고 한들 가문의 원수와 비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물론 그년을 따르는 신도 있지만, 자기 영역을 멋대로 침탈하고 개입하려 드는 그년이야말로 진정 혼돈이지.”

“악마의 말이라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군.”

곁에서 듣고 있던 유변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베르트랑 백작이 코웃음을 친다.

“흥! 좋을 대로 해석해라. 하지만, 그 악마란 말이 정의를 독점하려는 신이 자기와 다른 질서로 구성된 존재들을 비난하기 위해 붙인 말이라는 정도는 알아두어라. 그리고 어차피 네놈들이 발버둥쳐 봐야 신들이 설계해놓은 굴레를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내겐 보인다. 나시드와 다바스가 짜놓은 굴레가 너희를 속박하고 있음을. 앞으로 닥칠 선택의 기로에서 네놈들은 어느 쪽 손을 들어줄 것인가? 하하하하!”

신들의 굴레 그리고 속박.

그 말이 이곳에 선 사람들에게 주는 무게감은 엄청났다.

단 한 존재만 제외하고.

“크크크! 네놈들은 정말 별 같잖은 내용을 가지고도 잔뜩 무게를 잡으면서 다 아는 것처럼 떠드는구나. 나시드, 그 썅년도 그렇고 너 같은 좃밥도 그렇고 말이야.”

혈마의 난잡한 쌍욕에 진도건도, 주백자 등도 깜짝 놀랐다.

“뭣이?”

“결국 가진 놈이 덜 가진 놈 좌지우지해보려는 짓거리와 뭐가 다르더냐? 힘 센 놈이 약한 놈 제멋대로 굴리는 것과 뭐가 다르더냐? 근사하게 포장하려 들지 마라. 내가 보기에 너희 신들은 그냥 저잣거리 휘젓고 다니면서 으스대는 파락호 따위에 지나지 않아.”

“……하하하하하!”

혈마의 말을 듣고 베르트랑 백작이 웃음을 세게 터뜨렸다.

정말 가슴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오는 진심에 가까운 웃음소리였다.

“큭큭! 다바스도 한때 인간이었을 적에 네놈과 같은 말을 하고 신들의 분노를 샀었지. 그래, 너의 그 모습과 그 상태는 내게도 흥미로운 것임에도 일부러 내 주의 밖으로 밀어내고 있었는데 말이야. 지금은 혈마라고 불린다지? 분명 네 말도 틀린 건 아니다. 그리고 어째서 나시드가 네게 눈독을 들이고 다바스가 관심을 기울였는지 알 것도 같구나. 다시 만나길 기대하겠다. 내가 할 말은 여기까지, 죽여라. 크크크!”

혈마는 베르트랑 백작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면서 웃음을 흘리자 기분이 뒤틀렸다.

“내가 죽인다.”

냉소평은 진도건의 얼굴을 한 혈마가 자신을 쳐다보며 말하자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마음대로.”

냉소평은 베르트랑 백작의 가슴에서 발을 떼곤 한발 물러났다. 그러자 혈마가 베르트랑 백작의 몸통 위에 올라타더니 두 손으로 베르트랑 백작의 머리를 붙잡았다.

“무슨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소용없다. 이곳에서의 죽음은 그저 내 신발을 벗겨서 태우는 걸로 내가 상처 입길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야.”

“하지만, 영혼은 연결되어있으니 이리 주저리 떠들 수 있는 것 아니더냐?”

“뭣?”

바로 그때 혈마에게서 진도건의 형상이 뭉개지면서 붉은 안개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혈무가 일렁이면서 베르트랑 백작의 얼굴 위에 어른거리는 순간, 그의 눈빛이 파르르 떨렸다.

“설마? ……커헉!”

베르트랑 백작의 두 눈으로 파고드는 안개로 변한 혈마.

한쪽으론 진도건과 여전히 연결된 채 자신 대부분을 베르트랑 백작의 영혼으로 파고들었다.

“크커커커컥! ……커허헉!”

베르트랑 백작이 극심한 고통을 느끼고 있는지 머리만 남은 몸통을 펄떡거렸다. 그것도 기괴하긴 하지만, 격하게 뱉어내는 비명에서부터 고통이 느껴질 정도여서 다른 이들이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서게 만들 정도였다.

곧 비명이 멈추었다.

베르트랑 백작의 남은 육신은 바짝 마른 시체처럼 변해버렸다.

혈마도 베르트랑 백작의 두 눈에서부터 안개 형태로 빠져나오더니 다시 제 모습을 갖추었다. 그리고 그가 빠져나가자마자 베르트랑 백작의 육신이 조금씩 타들어 가면서 재로 변하기 시작했다.

“뭐한 거야?”

진도건이 궁금하여 묻자 혈마가 목을 좌우로 돌려 푸는 시늉을 하더니 진도건 안으로 스며 들어가면서 말을 남겼다.

“우리 첫 만남 기억해봐. 그때처럼 했다.”

“놈의 영혼을 삼켰다고?”

다음 말은 진도건의 머릿속으로만 들려서 다른 사람들은 듣지 못했다.

“악마의 영혼이라 그런지 꽤 강력하더군. 하지만, 이 몸에겐 별수 없었지. 완전히 삼키진 못했지만, 완전히 뒤집어났으니……. 지옥이 아마 시끄러울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지옥이란 델 잠깐 봤는데 말이야. 사람 살 곳은 못 되더군.”

“하…….”

혈마의 말에 어이가 없었던 진도건이 헛웃음을 흘렸다.

다른 사람들은 혈마가 무슨 말을 했기에 진도건이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궁금해지기도 했지만, 앞서 말한 ‘혈마와 진도건의 첫만남’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지금 시점에서 굳이 물어보고 싶어한 사람은 없었다.

짝!

“자, 그럼 저 균열을 닫아볼까?”

주백자가 손뼉을 치면서 해야 할 일을 상기시켰다.

“우리가 뭘 하면 되겠소? 어떻게 닫아야 하는 것인지 알려주시오.”

“으음, 나도 그것까지는 모르네. 강선이, 자네는 할 수 있지 않은가? 이미 다른 곳에서 닫아본 경험이 있으니 말이야.”

주율의 물음에 주백자가 조강선을 보며 물었다. 그러나 조강선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가 한 것이 아니네. 내가 할 수 있는 건 봉인 정도지만, 여긴 일반적인 영역의 경계는 아니니까. 그게 필요한 것도 아니고 말이야.”

저벅저벅.

그때 냉소평이 균열 쪽을 바라보며 걸음을 옮겼다.

“주율, 너희의 도움은 나중 일이라고 생각되는구나. 지금은 잘 봐두도록만 해라.”

냉소평의 말에 주백자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방법을 알고 있는 겐가?”

“알고 있다기보다는 알 것 같다고 해두지.”

냉소평이 대답하면서 발걸음을 멈추고 균열을 올려다보았다.

너머에서 느껴지는 마물들의 기척 같은 건 없었지만, 마기가 지속적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베르트랑 백작에게서 느꼈던 그리고 여태까지 천마신교 안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종류의 마기였다.

‘이런 기운이 영향을 미쳐 마성을 발현시키는 것인가? 그렇다면 내가 수용했던 마성도, 지금 이 느낌들도…… 그런 거겠지. 이거 영 모양 빠지는걸?’

냉소평의 웃음을 다른 이들은 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양팔을 펼쳐선 내공을 서서히 운기하기 시작했다.

양손으로 제각각 발현되는 음양의 기운.

그 순간 마치 냉소평이 분출한 공력에 반응하듯이 균열이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그 광경을 본 주율이나 하후무, 곽비 모두 주백자가 무엇을 펼치려는지 깨달았다.

일월혼극마공을 전수받으면 제일 먼저 기본 원리를 터득하기 위한 운용방법 또는 그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정립된, 그러나 싸움에선 잘 쓰이지 않는 일종의 기수식(起手式)이 있었다.

“양의혼천세(兩儀混天勢)인가…….”

주율의 중얼거림 뒤로 냉소평의 양손에서 흐르는 음양기운이 균열과 공명하면서 함께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마치 그 소용돌이의 중심으로 균열 속 어둠이 빨려들 듯이 점점 작아지더니 결국 완전히 사라져버렸고 그렇게 공명하며 흐르던 기운들이 다시 사방으로 바람이 되어 흩어지면서 그들이 서 있던 공간 속에 녹아 들어갔다.

“흐음……!”

“아미타불……!”

진도건은 가볍게 신음을 흘렸고 빌게포첸은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광경에 눈을 질끈 감고 합장하며 불호를 외웠다.

마치 세상이 무너지듯이 존재하던 것들이 재가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그 사이들을 또 다른 무언가가 비집고 들어와 채워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또 다른 작은 세상의 풍경.

일행은 두 번째 관문에 도달했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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