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6화 - 제69장. 신마대전(神魔對戰) 상편(上篇) (1)
그것은 주백자로서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머릿속으로 알 수 없는 목소리와 언어가 이따금 흘러들어왔는데, 주백자도 처음엔 그것이 균열에서 흘러들어온 마기를 직접적으로 쐬게 된 탓에 생긴 부작용이라고 여겼었다.
하지만, 어느 날 눈을 떴을 때 주백자는 알 수 없는 공간 속에 서 있었다.
어둠과 빛의 입자들이 느껴지지 않는 바람에 떠밀려 흐르는 기이한 공간이었다.
어떤 물질적인 감각도 느껴지지 않아 텅 빈 것처럼 인식되지만, 또 알 수 없는 기운의 그물에 영혼이 엉겨 있어서 거기서부터 전해져오는 진파(震波)로 인해 어둠과 빛 입자들 외에도 마기라 할 만한 기운이 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 흐름을 쫓아서 뒤를 돌아보게 되었을 때, 주백자는 비로소 자신이 정신을 잃고 균열로 걸어들어온 것임을 깨달았다.
동굴 속에서 몇 날 며칠을 지켜보았던 균열의 형상이 그의 등 뒤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동굴 속에서는 균열로 어둠만을 엿볼 수밖에 없었던 것과 달리 지금은 주위에 흐르는 빛 입자들에 의해 동굴 내 지형들이 균열 너머로 어스름하게 보임으로써 여기까지 들어온 경과를 좀 더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
“기분이 어떤가?”
갑작스레 들리는 목소리에 주백자가 다시 처음 눈을 떴을 때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거기에 한 존재가 서 있었다.
잿빛 머리카락은 지면에 닿을 정도까지 길게 늘어뜨린 데다가 고운 얼굴선과 하얀 피부, 중성적인 용모는 얼핏 여자로 착각하게 할 만한 특징이었다. 그러나 8척이 넘을 듯 올려다볼 수 없는 큰 키에 훤칠함과 다부짐을 동시에 가진 체격 등은 남성적인 느낌이 물씬 풍겨왔다.
하지만, 그런 전반적인 외형은 그리 중요한 특징은 아니었다.
눈.
거리가 다소 떨어져 있어서 작게 보일 수밖에 없는 인체기관이 이상하게 뇌리에 각인될 정도로 명확하고 크게 느껴졌다.
보통 사람이라면 흰자위였을, 피처럼 붉은 자위 위로 금빛 눈동자와 그것을 이중으로 감싼 금빛 고리.
적금의 삼중안.
“반갑네. 난 알리 라 다바스. 다른 세상에서 온 신이라네.”
주백자는 그가 직접 밝히지 않았어도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완전히 다른 존재임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완전히 이국적인, 이질적인 용모와 신체적 특징을 갖고 있으나 그가 얘기하는 언어는 완전한 한어(漢語)였다.
“……그렇군. 네가 천마신교의 뒷배, 이 사단의 원흉이구나.”
알리 라 다바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렇다고 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주백자가 뒤쪽의 균열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 균열로 흘러 들어가는 마기가 네가 원흉이라는 걸 말해주고 있는데 발뺌해봐야 노부를 속일 수 없느니라.”
“하하하! 원흉이라. 그래, 원흉을 발견했으니 제거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겠군.”
다바스가 두 손을 살짝 들어 보이면서 미소를 지었다.
열린 품은 언제든 들어오라는 유혹의 손짓과도 같았다.
그것이 포옹을 위한 행동이든, 비수를 찌르기 위한 행동이든.
스스로 신이라 일컫는 자의 여유.
이 사태의 원흉이 분명함에도 어째선지 적의나 악의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다.
신적인 존재의 치기 어린 장난으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삼중안에서 느껴지는 심연과도 같은 깊이, 정신을 아찔하게 만드는 혼돈, 지글지글 끓고 있는 분노와도 같은 감정이 동시에 느껴지고 있어서 주백자로서도 감히 처음 겪어보는 종류의 눈빛이었다.
“네놈이 원하는 건 그런 쪽인가?”
“음? 그건 왜 묻지?”
“오히려 뭘 하고 싶어 하는 건 그쪽이란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아니면 노부를 여기로 끌어들였을 리 없잖은가?”
“아하하하! 내가 끌어들였다고 생각하는 것이로군? ……뭐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 그래, 어디 한번 나와 놀아줘 보겠나?”
다바스의 말에 주백자는 몸 안에서 내공을 돌려보았다.
회복도 완전해져서 아주 좋은 상태였다.
“그럴까?”
알리 라 다바스.
스스로 신이라 칭한 자.
그것이 고작 참칭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이 그의 전투 방식은 가히 일대종사급의 깊은 이해를 보여주었다. 그 수준이 주백자 자신에 비교해봐도 전혀 뒤떨어진다는 느낌이 한 점 들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신이라 여기기 부족했다.
진정 신이라 여기게 만든 것은 무한에 가까운 듯한 연속성과 마치 주백자의 무공을 시험에 들게 할 정도로 끝없이 증폭되는 위력 때문이었다.
반선지경에 이른 주백자도 굴복을 눈앞에 둘 정도로 압도적인 것이다.
하지만, 알리 라 다바스는 주백자를 굴복시키지 않았다.
어떤 상처도 가하지 않았으며 전투를 끝내고도 충분히 쉬도록 배려까지 해주는 여유를 보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거의 만 하루를 다툰 듯한 느낌이 들었다.
비슷한 수준이었다면 몇 날 며칠을 다툴 수도 있었으나 알리 라 다바스의 압도적인 기력이 주백자의 기운을 강제적으로 소모하게끔 만든 셈이었다.
“원흉의 자비심이 어떤가? 이 정도면 바다와 같다 할 정도가 아닌가?”
주백자는 정녕 신이라 자칭하는 존재가 내세울 만한 자비심이라 여겼다.
굴복하기보다는 당연한 인정을 받아들였다.
“노부에게 원하는 게 무엇이냐? 아니, 네 목적은 대체 무엇이지?”
주백자의 물음에 알리 라 다바스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주백자가 느끼기에 알리 라 다바스는 분명 현 강호무림이 겪고 있는 모든 사태의 원흉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만 하루 동안의 전투 속에서 주백자는 눈앞의 신이 보여준 태도를 통하여 많은 부분을 느끼고 이해할 수 있었다.
이는 알리 라 다바스가 의도적으로 자신의 신성을 주백자에게 열었기 때문이었다.
신의 대리자, 대행자가 신에 대해서 뭘 얼마나 이해할 수 있기에 그런 역할을 자처할 수 있을까?
상식적으론 불가능한 일이다.
신은 스스로를 인간에게 여는 법이 없다. 그러나 열기 시작한다면 인간은 신의 많은 것들을 아주 자연스럽고 물 흐르듯이 이해하고 깨우치기에 그것들을 신의 가르침으로 엮어 중생들을 구제하려는 행동으로 발전되는 것이다.
알리 라 다바스는 주백자를 상대로 그런 식으로 감화시킬 필요도, 그러기엔 주백자가 갖춘 도력 때문에 힘들기도 했었지만, 그의 생각과 목적 등을 관철하기엔 충분하면서도 꼭 필요한 방법이었다.
“주백자여, 때가 다가오고 있다네. 그리고 그때가 되면 난 이 세상에서 떠날 것이야. 그 일이 원만해지도록 그리고 자네의 세상이 다시 본래의 순리를 되찾을 수 있도록 해줘야 할 일들이 있네. 자네는 거부할 수 없어. 왜냐하면 내가 제시하는 일들은 조강선을 돕는 척하면서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한 계략을 꾸미는 나시드의 방향과도 맞아떨어지는 일이기 때문이지. 진도건, 혈마를 품은 그자와 일월교의 아이들을 데려와. 그리고 그들과 함께 내가 만든 관문에 생성된 또 다른 관문 세 개를 닫아줘. 다시 말하지만, 자네는 거부할 수 없지. 나의 이 제안이 악의에 의해서가 아니란 걸 누구보다 지금의 자네가 잘 알고 있으니까.”
* * * *
“씨발, 저것들은 뭐야?”
“끔찍하게도 생겼군.”
하후무와 곽비가 얼굴에 불쾌감을 공유하면서 차례로 중얼거렸다.
그 옆에서 주백자가 두리번거리며 입을 열었다.
“다른 곳으로 떨어졌군.”
“여기가 아닙니까?”
“아니, 맞을게다. 그자와 마주했던 풍경이 아닐 뿐이지 세 개의 관문을 닫아야 한다고 했었거든. 아마 여기로 떨어지도록 인도한 것이겠지.”
주백자와 진도건의 문답을 듣던 냉소평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둘에겐 이미 익숙한 광경인가 보군.”
“저거? 별거 아냐.”
진도건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반응했다.
하지만, 확실히 처음 본 사람들에겐 심적 동요가 크게 일어날 만했다. 상식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수준의 완전히 이질적인 풍경과 함께 수백 개체의 괴물들이 득실거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들의 반대편 너머엔 마치 태양처럼 보이는 듯한 검은 구멍이 하늘에 떠 있었다. 그리고 그것에서부터 이 공간의 모든 환경과 이를 이루는 기운들이 흘러나와 시야에 보이는 세상의 팔 할가량을 메우고 있었다. 괴물들, 마물들은 그들과 검은 구멍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확실히 종(種)을 이해할 수 없는 끔찍한 형상의 괴물들이었으며 지상과 하늘, 늑대 정도의 크기서부터 집채만 한 크기까지 온갖 종류의 괴물들이 모여 그들과 검은 태양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후위의 눈에 띄는 기운을 뿜어내는 존재가 있었다.
그것은 인간형에 가까우면서도 남다른 분위기와 괴이한 생김새, 흉포한 기세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서 저놈들을 쓸어버리고 저 검은 구멍을 닫아라?”
냉소평의 물음에 주백자는 알리 라 다바스와 나눴던 이야기들을 잠깐 떠올렸다.
“얼마나 많은 기운이 소모될지는 모르니까 일월교 자네들은 싸울 생각은 잠시 접어두게. 마지막에 가서 힘에 부치면 안 될 테니.”
“뭐?”
냉소평 등의 얼굴에 불만이 가득 떠올랐지만, 주백자 등은 그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앞으로 걸어나왔다.
주백자와 진도건, 유변, 빌게포첸, 조강선은 일월교 고수들 앞으로 걸어 나왔다. 괴물들은 이미 그들의 등장을 눈치채고 괴상한 신음과 울음소리를 내면서 소란스러운 소음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미타불, 꽤 부담스러운 숫자이군요. 다른 두 곳도 이런 식일까요?”
“어떤 상황이 될지는 일러주지 않았지만, 세 관문이 모두 다른 이유로 열려있다고 했으니 이곳과는 아마 사뭇 다를 것이네.”
“저것들이 대체 뭐라고 합니까?”
빌게포첸은 전면에 보이는 괴물들이 보기가 정말 끔찍하여 주백자에게 물었다.
“자기 세상의 지옥, 마계의 상장(上將) 패특랑(貝特朗:Bertrand의 음차音借) 백작(伯爵)의 군대라 하더군. 자기가 자주 골탕을 먹여서 앙숙이라 생각하는 존재라 했는데 속내를 눈치채고 방해하기 위해 차원을 연결시켰다고 하더군. 자기 군대를 우리 땅에 강림시켜서 재앙을 내리게 할 속셈인 게지.”
주백자는 그렇게 대답하면서 짧은 단상을 머릿속으로만 흘렸다.
‘이것 또한 호의 제공이겠지…….’
반면 빌게포첸은 지옥이란 말을 듣자마자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지, 지옥이라니……. 그런 존재들을 우리 같은 한낱 인간들이 어찌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보게, 땡중. 나 주백자야. 반선이라고. 여기 강선이도 죽은 몸이지만, 선인이고 말이야. 유변 아우야 실력이 좀 떨어지지만 말이야.”
“크흠.”
유변이 헛기침하면서 노려보자 주백자가 껄껄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자네나 여기 도건이나 이미 중원과 서역무림 통틀어서 서열을 가리면 열 명, 스무 명 안에는 충분히 들어가지 않겠나? 다바스가 그러더군. 자기 세계 인간도 마법이란 걸로 천지조화를 부린다고 하지만, 인간 자체의 강함으로 따지면 이 땅의 인간들이 모든 차원을 통틀어 최강 수준이라고 하더군. 아주 소수의 일부는 하위 신과 대적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하는데, 뭐 어쨌든 자네 실력이라면 굳이 쫄 필요 없다는 말이야.”
“흐음…….”
주백자는 어느 정도 이해를 바탕으로 얘기한 것이지만, 빌게포첸으로선 그 말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그때였다.
“다 떠들었느냐, 다바스의 졸개들이여.”
베르트랑 백작의 목소리가 그들이 선 영역 전체로 울려 퍼졌다.
알리 라 다바스의 혼돈을 빌려 만든 관문이었으나 주관은 그의 몫이었으므로 관문 어디에 있든 간에 그의 눈과 귀로부터 숨을 수 없었고 목소리를 듣지 않을 수도 없었다.
“하하하하! 아아, 다 떠들었다네. 패특랑 백작이여, 자네도 쫓겨날 준비는 했는가?”
주백자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면서 두 손을 번쩍 들고 흔들었다.
그의 천진한 대꾸에 베르트랑 백작이 비웃음을 흘렸다.
“흐흐, 불쌍한 피조물들. 신성조차 미치지 않는 땅에서 지옥의 군대를 인간의 힘으로 어찌 막을 수 있을까? 원래 인간 출신인 다바스는 인간의 운명을 건드려 살인마나 광기의 악당을 만들기도 하고 영웅과 대마법사를 키워서 자기가 만든 파멸을 물리치는 짓거리도 일삼는 놈이지. 네놈들이 그중 어느 쪽인지는 모르나 신성이 닿지 않는 땅에서 지옥의 군대가 어떤 재앙이 되는지, 인간의 힘이 얼마나 하찮은지 똑똑히 가르쳐주마! 나 베르트랑 백작의 마군들이여! 저 인간들을 유린하고 또 유린하여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먹잇감이 되는 기분을 느끼도록 해주어라!”
크아아아앙-!
베르트랑 백작의 외침에 거대 괴수의 울부짖음이 관문 전체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동시에 마물들의 군대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그들을 향해 돌격하기 시작했다.
그 압도되는 광경에 빌게포첸이나 삼대수라, 유변 등은 멍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 진도건에게서 붉은 기운이 일어나더니 진도건의 형상을 갖춘 혈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노친네들 뭔 얘기를 그리 길게 하는지 오래 참았다 싶었는데 저것들도 쫑알쫑알……. 영감, 더 할 말 없으면 빨리 쓸어버리러 가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