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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365화 (365/432)

365화 - 제68장. 옥문관 개전(開戰) (5)

‘그래, 이것도 나쁘지 않겠지.’

한 가지 유감스러운 점이 있다면 비록 제 발로 중원을, 강호무림을 떠나 은적(隱迹)한 사람으로서 중원인에게 마교도로 보여지며 죽을 거라는 점이었다.

이반된 정체성 그대로 함께 묻고 죽음의 강을 건너야 한다는 게 이제 와서는 조금 억울해지는 것이다.

다시 달려들려는지 자세를 고쳐잡는 천서은을 보면서 부양호도 칼을 두 손으로 쥐고 최후의 일격을 준비했다.

그야말로 일생의 기운과 기세를 모두 담아 일격을 쏟아부어 볼 참이었다.

“혹시 노선배의 친구 이름이 노지신이 아니었던지요?”

천서은은 달려드는 대신 말 한마디를 먼저 던졌다. 그리고 그 말 한마디는 부양호를 멈칫하게 했다.

“노지신……! 네가 그 이름을 어떻게 아느냐?”

“본방의 삼장로이십니다.”

“……그는 어디 있느냐?”

“4년 전쯤 종남산 기슭에서 일월신마의 손에 돌아가셨습니다.”

천서은이 차분하게 대답하자 부양호의 눈빛이 가늘게 떨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최후의 일격을 준비하려고 했었다는 사실조차 잠깐이나마 머릿속에서 지워졌을 정도였다.

“……아이야, 넌 그걸 어찌 알았느냐?”

“노선배님의 도법이 노지신 장로님의 태원구패도법과 닮았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내 무공은 태원강무도법이다. 나와 그의 무공의 원형은 태원도식(太元刀式)이라는 태원문 무공이었지. 그래, 확실히 녀석은 발산하는 패도를 추구했었지. 나는 내적으로 수렴하는 굳건함을 추구했었고. 녀석도 자신만의 길을 잘 갔었구나.”

천서은은 조금 전까지 그녀와의 싸움을 끝내려고 집중했던 부양호가 회상에 깊이 잠겨있는 모습을 보고 파고들 틈이 있음을 깨달았다.

“선배님, 마교의 교리에 심취해있지도 않으신데 어찌 자신과 형제들, 자손들 모두가 고향의 동족들을 상대로 싸워야만 합니까?”

부양호는 천서은의 의도를 단번에 눈치챘다. 그리고 그 견해에 안타깝게도 그는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아까 말하지 않았느냐? 우리는 천마신교에 빚이 있다고. 우린 혈마종이기에 혈마의 명령을 따라야 하고 천마신교의 보호를 받아온 만큼 그에 대한 보답을 해야 한다. 나는, 우리는 이 전쟁을 멈출 수 없어. 어서 검을 들어라. 네가 검을 들지 않아도 노부는 널 노릴 것이다.”

부양호가 살기마저 내비치니 천서은은 자신이 무리한 시도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슈악, 챙-!

부양호가 덤벼들면서 그녀와 도검을 부딪쳤다.

직전에 부양호가 준비하려 했던 최후의 일격과 같은 공격은 아니었지만, 하나하나가 살수로 매섭고 날카로웠다.

하지만, 그것은 천서은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미 수십 합을 겨루면서 부양호의 무공이 깊긴 해도 근원적인 강함은 자신이 한참 위라는 걸 이미 깨우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를 처치하고 다른 혈마종 무인들을 계속 노리던가, 구치상을 곤경으로 몰고 가는 구마진의 뒤를 노린다거나 하는 것들은 모두 당장 충분히 가능한 흐름이었다.

단지 그녀가 당장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을 뿐.

이런 식으로 부양호와 나누었던 절대 짧지 않았던 대화 속에서 엿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부양호에 대해서도 그렇고 혈마종에 대해서도 그렇고 그들이 어떤 특징점들을 가지고 있는지 천서은이 아는 바는 무척 적었다.

혈마종 자체가 대외활동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 존재를 개방, 하오문 등이 알아차린 것도 불과 얼마 전의 일이었다.

당연히 미리 공부해둘 수 있는 관련 정보 따윈 없었다.

‘정말 이 사람을 죽이는 길밖에 없다고?’

천서은은 왠지 모르게 분한 기분을 느꼈다.

이대로 포기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부양호와 경합하던 중 그의 휘날리는 하얀 머리카락 사이로 구마진의 붉은 머리칼과 그 뒷모습이 잠깐 눈에 들어왔다.

진도건을 잠깐 떠올리면서 불쾌함이 온 기분을 휘감았다.

“진짜 혈마는 따로 있는데! 혈마 원건의 스승으로부터 무공을 전수받은 제자가 따로 있는데 고작 저런 모조품을 받아들이겠다는 건가요?”

“음……?”

“무엇을 숭상했던 건가요? 지금도 그 마음 그대로인가요? 저놈은 제 연인의 모조품에 불과하다고요!”

카앙!

두 사람이 도검이 맞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서로의 눈빛 속에 담은 의도를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분통을 터뜨리면서 가빠진 호흡이 절로 느껴질 정도로 노인과 여인의 거리는 차가운 칼날들을 사이에 둔 채 가까워져 있었다.

“……언젠가 대마의 유변 공께서 진도건이란 이름을 거론한 적이 있었지. 자네 연인이 이 진도건인가?”

“맞아요. 그이는 혈마 원건의 세 스승 중 한 사람인 조강선의 제자이기도 해요. 노선배가 말한 유변도 그 세 스승 중 한 사람이죠?”

“그는 어디 있는가?”

“천마신교를 끝장내기 위해서 움직이고 있어요. 공교롭게도 마교주가 여기에 나타났긴 했지만 말이죠.”

두 사람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속사포로 말을 쏟아냈다.

도검의 칼날을 맞댄 채로 있었으니 서로의 눈빛에서 각자의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알아볼 수 있었다.

노지신을 거론했던 것이 적당한 자극이었고 혈마와 진도건에 관하여 이야기한 것이 불을 지폈다. 혈마 원건의 세 스승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부양호에게 유변과 조강선이 거론됐던 것도 불길에 바람을 불어넣는 꼴이었다.

“상대의 멸망을 바라는 이 전쟁에서 자네는 터무니없는 걸 노리고 있구나.”

“보세요. 지옥은 이미 열렸어요.”

부양호의 눈빛이 떨렸다.

천서은이 단호한 눈빛으로 그의 눈을 뚫어져라 보았다. 그리고 부양호는 그런 그녀의 어깨 너머로 그녀가 말한 지옥의 전조를 보았다.

세상을 피로 물들일 듯이 폭주하는 구마진의 붉은 마기와 어둠과 천둥의 신이 충돌하여 그 여파로 번개폭풍이 일어나 주위의 모든 걸 파괴할 것만 같은 끔찍한 광경이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 부양호는 자신의 몸속에 흐르는 피가 어디에서부터 이어진 것인지 자각했다.

“가라. 저 지옥을 뒤집어다오.”

검을 밀어내던 도에서 힘을 거두고 칼날을 측면으로 돌려 의사를 표시한다.

천서은도 힘을 빼자 부양호가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고마워요.”

“전투를 멈추도록 해보마.”

“저희도 도울 사람들이 있어요.”

천서은의 말에 부양호가 힘이 된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서은은 곧장 경공을 펼쳐 공중에 몸을 띄웠다. 그리고 빠르게 전장을 훑어보고는 한 지점으로 날아갔다.

“영은성! 최현걸!”

창천단의 전장에서 그녀가 찾을 사람은 역시 그들 두 사람밖에 없었다.

“형수님!”

“혈마종이 싸움을 멈출 거야! 너희가 싸움이 쉽게 끝나지 않는 곳들을 찾아서 말려줘!”

“예?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천서은의 이야기는 영은성과 최현걸 뿐만 아니라 가까이에 있던 다른 창천단원들이나 상대 혈마종 무인들의 귀에도 들렸다. 그리고 그들의 반응도 두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혈마종은 나 부양호의 이야기를 들어라! 지금부터 우리는 창천단을 도와 저 혈마를 참칭하는 구마진을 처단할 것이다. 놈이 도주하지 못하도록 포위망을 구축하라!”

하지만, 그때 부양호의 공력을 실은 외침이 전장에 울려 퍼졌다. 그 외침을 듣고 가까이에 있던 혈마종 무인들의 당혹스러워하는 얼굴을 보자 영은성과 최현걸은 천서은의 이야기가 사실임을 깨달았다.

“형수님은 어쩌시려고요?”

“가짜를 잡아야지!”

천서은은 그 말만 남기고 다시 경공을 펼쳐 몸을 던졌다.

이번엔 본격적으로 전신에 파천신공의 벽력기를 두른 채 한 지점을 노리고 쇄도했다.

“킥킥! 이 버러지 같은 놈들이 누굴 처단해? 다 죽여주마!”

구마진이 혈마기를 폭주하듯 쏟아내며 사방에 퍼붓기 시작했다. 마천경의 상승작용은 마공의 위력을 한 단계 높여주니 대통현에서 난동을 부렸던 그때보다 몇 배 더 위협적인 살수나 다름없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은 근처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러나 구마진의 의도완 달리 몇 사람의 목숨을 거두는 것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그를 향해 쇄도하는 천서은의 기세는 절대 가벼이 여길 수 없을 만큼 위협적이기 때문이었다.

“구마지인-!”

콰르릉!

지축을 흔들 듯한 천둥소리가 중앙의 전역 외에도 창천단의 전역에서 거세게 울려퍼졌다.

붉은 마기의 방벽에 부딪친 벼락이 하늘로 가지를 뻗으며 솟구치는 와중에서도 천서은의 폭풍 같은 검격이 추가적인 전광(電光)의 발화를 야기했다.

콰콰콰콰-!

천서은도 파천신공의 공력을 폭발적으로 분출하면서 사방에 피아를 구분하지 않고 살수를 뻗는 구마진의 모든 기운을 노렸다. 덕분에 구마진의 살수가 더는 다른 자들에게 뻗어나가진 못했다.

대신 두 사람을 중심으로 천무경과 단지운이 그러는 것처럼 조금은 작지만, 붉은 구름 속 번개폭풍을 일어나는 권역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다른 자들은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거리를 벌리는 일을 우선하면서 싸움을 끊기 애매하던 이들도 당연히 적대적 행동을 멈출 수밖에 없도록 했다.

부양호는 당연히 혈마종 무인들에게 둘러싸인 채 질문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상황입니까? 적들을 돕다니요?”

“구마진을 죽이겠다고요? 저런 괴물 하나 어찌하지 못한 게 불과 한두 달 전 일입니다, 현령!”

“아니, 시발! 너희들은 기분도 안 더럽냐? 이게 동족상잔이 아니고 뭐야?”

“마공을 익히더니 뇌도 저놈들에게 의탁했냐?”

질문이 쏟아지고 자연스럽게 말다툼으로도 번졌다.

그 사이에서 부양호가 목소리를 높여 다시 외친다.

“구마진을 혈마로 인정할 수 없다! 아니, 우린 천마신교를 탈퇴할 것이므로 혈마의 명령이니, 천마의 명령이니 따를 필요도 없다! 그리고 진정 혈마의 명맥을 잇는 사람은 따로 있으니 우리가 명령을 따라야 한다면 그자의 명령을 따를 것이다. 이 싸움을 지속하고 싶다면 말리지 않겠다. 날 죽이고 다시 싸움을 시작해도 좋다! 하지만, 나 부양호가 감히 너희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오늘 이후로 우리는 우리를 옭아매던 모든 것들로부터 해방될 것이다. 여기 옥문관 전투에서 내린 선택으로 말이다!”

부양호의 외침에 일순간 혈마종 안에서 침묵이 맴돌았다.

공교롭게도 지금 부양호가 외친 자유와 해방에 대한 필요성은 본래 약 10여 년 전쯤 유변이 대통현에 와서 모두에게 지나가듯 얘기했던 말이었다.

당시엔 지나가듯 던진 말이었지만, 꽤 솔깃하면서도 자기 정체성에 의문을 던지는 내용인 탓에 유변이 청의향으로 돌아가고 난 다음 밤늦게까지 마을 안에서 깊은 토론이 오갔던 주제였다.

일부가 마공을 익히면서 더 큰 힘을 추종하긴 했으나 구마진을 증오하는 심리는 대통현 마을 전체가 공유하는 지점이었다.

대통현 간부 혁진국이 무리 사이에서 나오더니 부양호에게 다가갔다.

“정말 구마진을 죽일 수 있겠습니까?”

“저 아이가 호언장담했으니 기대를 걸어봐야겠지.”

대통현 간부 조항도 다가와 그 얘길 듣더니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으로 결정하셨군요. 이렇게 된 이상 끝까지 가 봅시다.”

“그래. 이 결정의 결말이 모두의 죽음이 될지, 족쇄로부터 해방된 날이 될지는 오직 하늘만이 아시겠지.”

부양호뿐만 아니라 혈마종 모두 얼굴에 걱정의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러나 밖으로는 감춰진 가슴 한구석엔 희망의 빛이 움트고 있었다.

폭군으로부터 해방은 곧 완전한 자유를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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