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4화 - 제68장. 옥문관 개전(開戰) (4)
“할아버지, 전 창천단으로 가야겠어요!”
천서은이 백두기에게 소리쳤다.
백두기는 그녀의 얼굴에서 안달 난 표정을 보았다.
그가 손을 뻗어 곧바로 몸을 날리려는 천서은의 어깨를 붙잡았다.
“좋다! 놈은 구 단주가 상대하고 있겠지만, 상황을 보아하니 버거울 수도 있겠구나. 놈의 특징은 널 심히 도발하겠으나 거기에 절대 휘말리지 말아라!”
“걱정하지 마셔요!”
천서은이 곧장 대답하면서 바로 몸을 돌렸다. 그러나 백두기가 다시 한번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
“이거 하나 명심해라!”
“예!”
백두기가 무거운 표정으로 눈빛을 깊이 마주하면서 입을 열었다.
“이 전쟁의 끝은 저 마교의 혈마가 아니라 네 아버지와 마교주의 싸움에서 이뤄질 것이야! 절대 감정에 휘말리지 마라! 그리고 상시 네 아버지에게서 눈을 떼지 마라! 이런 능력을 발휘하고도 네 아버지를 상대할 수 있다면, 어쩌면 저 승부는 가망이 없을지도 모른다.”
백두기의 말에 천서은의 눈빛이 심하게 떨렸다.
“그럼……!”
“절대 네 아버지에게서 신경을 놓고 있지 마라. 가라!”
백두기가 천서은에게 당부를 끝내고는 붙잡고 있던 팔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곧바로 적멸당과 함께 백무당 쪽으로 쏜살같이 날아갔다.
천서은도 곧바로 움직였다.
백두기의 당부에 마음이 무거워짐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이런 전쟁 상황에서 적을 쓰러뜨리는 것 외에 다른 생각을 한다는 건 사치스러운 일이었다.
전장 한 가운데로 뛰어든 천서은은 곧장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며 자신이 발 디딘 주변을 제압해나갔다.
강검과 유검 그리고 쾌검의 자유로운 전환은 파천신공이 제공하는 강력한 기력의 토대 위에서 대단히 위력적이었다. 전장 속에서 개개인이 취할 수 있는 운신의 폭은 동료, 동지들로 인해 매우 좁았지만, 천서은이 가진 검술의 깊이 앞에선 결코 장애가 될 수 없었다.
“큭! 갑자기 어디서 이런 고수가……!”
혈마종의 누군가가 당혹스러운 속마음을 바깥으로 내뱉었다.
창천단과의 전투에서 전체적인 기세는 그들이 어느 정도 우위에 있다고 할 수 있었는데 그녀가 난입한 것만으로도 전장의 분위기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천마령이 떨어지고 구마진의 지시에 의해 대통현 현령 부양호는 싸울 수 있는 모든 인원을 소집했다.
그 숫자는 이천 명이 조금 넘는 수준이었으니 규모 면에서도 구주마종 안에서 손꼽힐 만한 수준이었다.
또한 비록 마공을 수련함으로써 제대로 마도에 빠져들기로 한 사람들은 전체 인원 중이 1, 2할 수준이었으나 그들은 한 마을을 이룬 채 상호 간에 깊이 교류하며 자신들의 무공을 발전시켜와서 고수 층이 두터운 편이었다.
특히 현령인 부양호와 두 간부인 혁진국, 조항의 무공은 강기를 충분히 다룰 수 있는 실력자들이었다.
이 양질의 전력은 전력 누수가 심한 현재 천마신교의 현실을 고려했을 때, 천군만마라고 여길 수 있는 수준이었다. 구마진도 이만한 무리의 수장이 되었다는 점을 꽤 만족스러워했다.
하지만, 단지운의 관점에서 구조적으로 애매한 지점을 내포한 조직이었다.
비록 옥문관에 이르러서 휘하에 두 집단만을 운용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고 해도 만약 혈마종 전원이 마공을 익혔다고 한다면 그가 펼치는 마천경 안에서 환도마종의 환마강진과 유사한 효과를 얻어 힘을 각성시킬 수 있었을 터였다.
그런데 그 같은 효과를 누릴 수 있는 숫자가 고작 3, 400명 수준에 불과했다.
유변이 남긴 명현단, 명천단 같은 영약으로 내공을 안정적으로 증진시킬 수는 있었어도 그들의 마공이 제대로 된 위력이 갖출 정도로 숙성되기엔 혈마종은 스스로 고립되어 있어서 결코 만족스러운 수준이 아니었다.
게다가 어떤 분쟁과도 담을 쌓고 살아왔기에 이런 집단적 전투도 익숙지 않았으니 호기롭게 맞부딪쳤던 첫 충돌 이후로 조금씩 기세가 꺾이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부양호는 현실적인 한계가 보이자 일찍 위기의식을 가졌다.
구마진은 구치상과 꽤 즐거운 싸움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데다가 혈마종의 안위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전장의 분위기를 바꿔 줄 만한 적진의 중요한 장수를 꺾을 필요가 있었다.
그런 그의 눈에 띄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의 검이 춤을 출 때마다 혈마종 무인들의 서너 합 이상 버티지 못하고 속속들이 쓰러져댔다. 그녀가 일으킨 상승세가 주변의 창천단원들에게 전염되어 혈마종 무인들이 크게 밀리고 있었다.
“노부가 상대해주마!”
부양호가 범 같은 호통을 치면서 천서은을 덮쳤다.
큼지막한 칼이 바람을 일으키며 덮치는데 기세가 대단하여 천서은도 부양호에게 신경을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카앙!
불꽃이 튀면서 두 사람의 도검이 붙었다 떨어졌다.
도신이, 검신이 웅웅 울리는데 상대방의 무공의 깊이가 범상치 않음을 절로 느끼게 했다.
잠시 거리를 벌린 부양호와 천서은이 서로에게 쇄도하면서 다시 도검을 맞부딪쳤다.
파천신공에 기반한 검력은 굳이 북천검법의 강검을 펼치지 않더라도 언제나 묵직하고 위력적인 힘을 담았다.
부양호의 도법은 강맹한 면이 짙었는데 천서은의 쾌검이나 변초 등에서도 파천신공의 힘이 실려서 상대하기가 매우 까다롭다 느꼈다. 매 검격마다 풍압에 수염이나 옷자락이 세게 흔들려댔으니 눈앞의 젊고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여인의 무공이 생각보다 더 뛰어날지 모르겠다는 걱정이 들었다.
‘게다가 이따금 검신을 타고 흐르는 저 푸른 섬전은…… 그런가?’
부양호의 눈빛이 가늘게 떨렸다.
아주 젊은 나이에 어째서인지 혈마라는 존재에 취하였으나 단지 그 이유만으로도 평소 가까웠던 인물들에게 위협을 받아 결국 강호무림을 떠나 청해로 넘어온 그였다. 그때 당시에 천무방은 지금처럼 사파 제일을 다투는 문파는 아니었었다.
“이제 보니 천무방주의 여식이었어. 그 나이에 대단한 성취를 이룬 듯하구나, 아이야!”
부양호의 말을 듣고 난 천서은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서로 멸망을 걸고 적대하는 것이 이 전쟁이 가진 절대적 방향성인데, 이렇듯 꽤 편안하게 들리는 어투로 칭찬과 함께 말을 걸어오는 게 무척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가식이라고 여겨지지 않을 정도로 진정성이 눈빛과 목소리에 담겨있었다.
물론 그녀가 느꼈던 것처럼 부양호도 진심으로 한 말이었으니 어느새 두 사람은 싸움을 멈춘 채 그들만의 공간 안에서 서로를 보고 있었다.
“……부족한 실력입니다. 그런데 노선배도 그렇고 다른 자들에게서 마공의 그것이 느껴지는 경우는 별로 없군요.”
“우린 혈마의 추종자들이지만, 그것이 마교도를 뜻하는 건 아니네. 그저 천마신교에게 진 작은 빚을 갚으려고 참전한 것이지. 그나저나 일찍 강호를 떠난 몸이긴 하나 자네와 칼을 맞대다 보니 어릴 적 친구가 떠오르는군.”
“친구?”
“함께 실력을 겨루면서 같은 무공을 연구했었지. 비록 이 노부가 엇나가는 바람에 인연이 끝나버렸지만 말이야.”
나이 지긋한 연장자의 과거 추억에 천서은은 당혹스러운 얼굴이 되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로 적대하는 마당에 잡설이 길어졌군. 다시 겨뤄볼까?”
“잠깐……!”
부양호가 다시 칼을 겨누자 천서은은 자기도 모르게 검 대신 검을 들지 않은 다른 손으로 손바닥을 보이도록 내밀었다.
그것은 혈마종이라는 분명한 소속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여타 마교도처럼 느껴지지 않는 여러 특징 때문에 벌어진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어쩌면 눈앞의 노인을 설득하여 이 전쟁의 구도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문득 들어서였을 지도 몰랐다.
그런 그녀의 앞에서 부양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리는 싸움을 멈출 수 없어. 더군다나 자네 검에 죽은 아이들은 내 친구나 이웃 혹은 이웃의 자제들이었네. 이 노인네 가슴이 꽤 찢어진단 말이지.”
부양호가 그렇게 말하면서 다시 칼을 고쳐 쥐었다. 표정은 차분하지만, 눈빛은 결연한 노인의 모습을 보면서 천서은도 이 전쟁의 흐름이 불가항력이란 생각이 들었다.
“무례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끝내드리겠습니다. 소녀 천서은이라고 합니다. 노선배의 존함이 어찌 되시는지요?”
“껄껄! 예의가 바른 친구로군. 난 부양호라고 하네.”
그때였다.
“양호 영감! 감히 싸움도 멈추고 잔머리를 굴리려고 드느냐!”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그 목소리에 부양호도, 천서은도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부양호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허공에 떠올라 있는 구마진이 피처럼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고, 피처럼 붉은 눈동자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섬뜩함이 등골을 관통하는 기분이 들었으니 지금의 구마진은 부양호에게 있어서 교주 단지운보다 더 두려운 존재였다.
어떤 조직이든 권력은 절제해야 하고, 관계에 있어서 이성적이어야 하며, 폭압적 행태는 통제해야 제대로 굴러갈 수 있는 법이다. 그러나 구마진은 그 모든 지점에서 완전히 상식에 반하는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하는 자였다.
구마진의 경고처럼 만약 부양호가 다른 마음을 먹으려 든다면 즉시 다른 혈마종 무인들을 죽이려 들 것이다.
일전에 그가 대통현에 쳐들어와서 난장을 부렸던 기억이 다시 반복되는 것만큼은 현령으로서 최선을 다해 막을 필요가 있었다.
반면 천서은도 무척 당혹스러웠다.
비록 구마진을 처음 본 것이었지만, 그 외형적 특징은 정말 진도건을 쏙 빼닮았다.
그것은 일순간 진도건을 그리워하게 되면서 동시에 기분이 매우 불쾌해져 버리는 그리 달갑지 않은 경험이었다. 그러나 이런 감정적 반응이 당혹감의 원인은 아니었다.
구마진이 저렇게 발바닥을 땅에 두지 않고 이곳을 쳐다보고 있다는 건 상대하던 구치상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다행히도 그것은 기우에 그쳤다.
구치상이 공중에 모습을 드러내더니 거대한 도강을 일으켜 구마진의 붉은 장막을 내려쳤기 때문이었다.
콰앙!
굉음과 여파로 인한 돌풍도 매우 거세게 느껴지니 아직 건재한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구마진의 여유가 너무 불안하다……. 구 단주님 홀로는 부족할 것 같아.’
천하오절의 고수가 쉽게 꺾일 리 만무하지만, 여태껏 신마라 일컬어지는 존재들은 항상 위협적이었다. 더군다나 구마진은 단지운이 일으킨 마천경 아래에서 힘이 폭주하듯 상승하고 있었으니 열세로 몰려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창천단 측 전세가 일견 보기에 팽팽한 소모전처럼 흘러가는 듯 보여도 전세의 축인 구마진과 구치상 간 대결의 판세가 기울어지면 나머지가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기에 이 상황을 뒤집을 한 수가 필요했다.
천서은은 그것이 직접 구치상을 도와 구마진을 물리치는 방향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한편으론 부양호가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최선을 다하시게. 노부도 사정을 두지 않을 테니.”
부양호의 칼날이 매섭게 춤을 추면서 그녀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칼끝이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도강이 불쑥 튀어나와 위협했다. 천서은이 기민한 반응을 보이면서 피해냈지만, 부양호도 예측한 상황이었는지 이미 다음 동작을 준비한 상태였다.
십자로 쏟아내는 강기의 폭격 위로 부양호의 표정이 비장하다.
콰콰쾅!
그들만의 공간을 가졌기에 시도한 것이겠지만, 또 다른 한편으론 원치 않던 혈마를 향하여 일하고 있음을 시위한 것이기도 했다.
냉철하고 침착하게 다음 상황을 예측하여 떨어지는 기세마저 칼의 흐름 속에 담아 휘둘렀다.
아니나 다를까, 자욱한 먼지를 뚫고 그를 향해 날아와 검을 휘두르는 천서은의 움직임에 맞춰 다시 한번 연환식을 펼쳐냈다.
강력한 고리처럼 동작 하나하나가 묵직하게 맞물려서 휩쓸리는 적을 일도양단할 기세로.
카카카캉-!
부양호는 정말 전심전력을 다 드러내 싸우고 있었다.
구마진의 협박처럼 들려오는 일갈에 전쟁에 대한 회의감에 소극적이었던 태도를 바꿨다. 그리하여 어릴 적 함께 무공을 연구하던 친구를 떠난 이후로 홀로 성취를 이뤄낸 태원강무도법(太元剛武刀法의)의 위력을 고스란히 선보였다.
콰르릉!
도검이 격렬하게 부딪치는 와중, 천둥소리와 함께 부양호는 눈앞이 번쩍거리는 걸 느꼈다. 그리고 시야가 일시 환해졌던 게 사라지자 온몸을 찌르르 울리는 통증과 함께 뒤로 크게 밀려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것이 천무방의 초절기(超絶技) 파천신공의 힘인가……!’
부양호는 자기의 무공이 충분히 위력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더 거대한 힘이 눈앞의 가녀린 여인의 몸에 깃들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가 자신의 무덤이 될 것임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