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1화 - 제68장. 옥문관 개전(開戰) (1)
신사산 북쪽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세워진 돈황은 하서주랑을 잇는 무위, 장액, 주천과 함께 서역 교역이 활발히 일어나는 군(郡)이었다. 오아시스만이 아니라 당하(唐河)도 가까이에 흐르고 있어서 교역뿐만 아니라 작물 경작이 이뤄지기도 했다.
그런 돈황을 포함한 하서주랑 네 개 군의 도시와 성을 북방 유목부족들의 약탈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가까운 북쪽엔 한조(漢朝)와 당조(唐朝) 때 축성된 만리장성이 있었다. 그리고 만리장성의 서쪽 시작이자 끝나는 지점에 작은 규모의 정사각형 토성이 있었으니 이곳이 바로 옥문관이다.
옥문관이란 이름은 본디 무위, 장액, 주천, 돈황 네 개 군에서 도성으로 보낼 옥을 들여오기 위해 지나간다고 하여 지어진 것이었다.
의미 그대로 교역을 위한 관문의 역할만 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돈황은 교역로라는 이점과 더불어 사막 속 마을임을 감안해도 오아시스와 강의 담수로 경작할 수도 있었으니 도시로 성장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모난 돌이 정을 맞게 되는 법, 변방에 자리한 한계는 어쩔 수 없었다.
약탈에 대한 위험뿐만 아니라 서역에 준동하는 적들을 방어하기 위한 최전선이란 점에서 지금 사주가 중원에 기반을 두지 않은, 서하라는 이민족 국가가 차지하고 있는 사실도 그 현실을 잘 설명해주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서역에 존재감을 드러내는 나라는 사실상 없다시피 하고 북방의 서하가 이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서역 세력의 침략을 최전선에서 방어할 옥문관은 제대로 된 관리자나 주둔군도 없이 비어있다가 한족 출신이나 일생의 거의 이십여 년에 가까운 시간을 서역에서 보낸 단지운과 그의 세력인 천마신교가 주둔하여 중원 세력의 침공을 방어하기 위한 거점이 되고 있었다.
동틀 녘.
“오질 않는군.”
단지운은 무영 진이 다시 돌아와 보고하길 기다려왔다. 하지만, 떠나간 이후로 소식이 없다.
단지운이 무영들을 감지할 수 있는 범위는 구주신마들보다 배는 넓었다. 그러나 항상 그의 지시나 보고를 위해 맴돌던 무영들이 진이 돌아간 이후로 조금씩 주는 듯하더니 오늘이 되어선 아무도 없는 것이다.
단지운은 무심한 표정으로 옥문관 성보(城堡) 위에서 시야에 들어오는 세상을 바라보았다.
천마신교.
천마의 기치 아래 구주로 대표되는 마도가 모여 이룬 서역 무림 최강의 세력.
하지만, 이 순간 옥문관엔 누가 있는가?
3년 전 호북성에서 성과와 더불어 백제성에서 구룡문을 잡아냈지만, 안효철과 낭인집단 중천에게 패배의 쓴맛을 본 광혈신마 혁무술이 이끄는 광혈마종.
세력을 온전히 보존하고는 있었으나 중원인 출신이 대부분이고 최근까지 대행으로만 유지되던 수장의 자리가 채워졌으나 세력 내에 마공을 익힌 자가 오히려 드문 편이었던 혈마 구마진의 혈마종도 있었다.
이것이 전부였다.
흑풍마종은 몽골초원 전쟁에서 절멸했고, 사혈마종은 본래도 독혈이라는 무리한 연구로 자체 위태로웠던 세력이 사혈신마 서문질의 죽음으로 궤멸 상태에 이르러 잔당들도 녹림에게 사냥당하고 있는 상황.
일월신마 냉소평과 성혈신마 빌게포첸이 북쪽 사막 고비에서 함께 있음을 보았다는 건 그 자체로도 이상하고 의심스러웠는데 지시를 내리고 받을 상황이 아니다 보니 두 마종도 발이 묶여 있었다.
게다가 성혈교는 사실상 상징적인 가치가 클 뿐, 전력으로서 유명무실한 축이었고, 일월교가 수는 적어도 정예라 할 만한 고수들이 있었으나 냉소평의 입지가 절대적이라 그를 거치지 않은 천마령은 통하지 않는 집단이었다.
현재 옥문관 전력 중 한 자리를 차지했어야 할 염황신마 혁련제와 염황마종도 검림의 북상을 확인하면서 마찬가지로 절멸했을 가능성이 높게 점쳐졌다. 구원하러 보낸 검마 양자성과 스칸다의 행적이 묘연한데 염황마종이 절멸했다면 스칸다가 끌고 갔던 마니사조차 무너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적룡신마 마웅패와 휘하의 적룡단은 결국 마적단 출신이라는 한계가 명확했으니 창천맹과 천무방의 전력을 감소시키는 불쏘시개로 그 쓰임을 당하여 잔당들만이 광혈마종 속에 남아있었다.
음지에서 주로 암약했던 환도마종도 청성산에서 전력의 상당수가 소실됐음을 뒤늦게 파악하여 아픈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는데 환도신마 선우도마저 감감무소식. 대신 곁에 둔 비작이 충성으로 그를 보좌하고 있으나 지나치게 침착하여 오히려 께름칙하기도 했다.
정보를 담당할 무영각조차 그 충성심을 의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했으니 이 옥문관에서 시야가 닿는 사방의 모든 땅 위를 가득 채웠어야 할 교도들은 대체 어디로 사라지고 이것밖에 남지 않아 텅텅 빌 수가 있단 말인가?
‘광명대천 천마군림 광명대천 천마군림 광명대천 천마군림…….’
어쩐지 처량하기만 한 옥문관 성보 위에 선 단지운은 가만히 눈을 감고 천마신교의 팔자진언을 외웠다.
광의의 의지가 여덟 자 안에 담겨 있으나 눈앞에 놓인 현실은 적들이 안다면 비웃음을 던질 일.
“교주님.”
비작이 돌아와 그를 불렀다.
“말하라.”
“조금 있으면 적들이 전선에 모습을 드러낼 정도로 가까워졌습니다.”
“남쪽에서 올라오는 자들은?”
“창천맹보다 속도가 완연히 느려서 전쟁의 양상에 따라 조우할 시점도 매우 다를 수 있습니다.”
“……무영 진은 돌아오지 않고 나는 여전히 양자성이나 스칸다의 소식을 알 수가 없군. 당연히 염황신마에 대한 건도. 비작, 이제 네가 내게 얘기할 차례다. 분명 얘기할 수 있는 것이 있을 터.”
단지운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비작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의 머릿속이 잠시 빠르게 회전한다.
무엇을, 어디까지 대답해줘야 할까.
꾸밈도 숨김도 없이 진실만을 말해야 함이 종복으로서 보일 의무이겠으나.
“환도신마 선우도는 사망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환도마종에 염황마종처럼 서로를 느낄 수 있다는 건 아니지만, 그는 제 스승이자 환도의 어버이인 만큼 직감적으로 인지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가 사망하였노라고.”
단지운의 눈빛이 오랜만에 흔들렸다.
짐작은 했어도 사실로서 받아들이긴 힘든 종류의 일들이 있다.
환도신마 선우도의 죽음은 그런 종류의 일이었다. 노우이자 조언자인 선우도가 그에게 보고하지 않고 태상교주의 명령을 받아 은밀히 사라졌음을 알게 되었을 때는 섭섭함이 컸어도 그간 의지했던 기간이 있으니 그리움도 더 크게 피어났음이다.
그렇다 보니 눈빛에 노기도 함께 스쳐 지나갔다.
“마지막 행적으로 보고된 행적이 고비였었지. 그럼 노우의 사망원인도 인지할 수 있느냐? 이를테면 일월신마나 성혈신마와 관련이 있냐는 것이다.”
통제권에서 벗어난 일월신마 냉소평의 행적과 이반된 듯한 성혈신마 빌게포첸의 행적을 떠올려보면 그들이 흉수일 수도 있다는 짐작은 자연스러운 순서.
하지만, 의외로 비작의 고개는 좌우로 젓고 있다.
“아닙니다. 사망을 감지한 방향은 이곳에서 남쪽에 해당합니다.”
“남쪽?”
일견 이해할 수 없는 대답이다. 그러나 환도신마 선우도이기에 가능한 추측도 있다.
“천도환위술로 이동한 것이로군.”
“어느 쪽이든 조우한 결과였을 것입니다.”
양자성과 스칸다, 쫓기던 염황마종, 추격하던 검림 어느 쪽이든.
혹은 그들이 얽혀 격전이 벌어진 곳에서든.
혹은 그런 얽힘 속에서 벌어진 예상 밖의 가능성에 대해서든.
단지운의 눈빛에 어느 때보다 차갑게 가라앉았다.
“……항상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의 뒤엔 그분이 계셨지. 아무래도 오늘의 싸움이 끝난 이후로 심각하게 따져 물어야 하겠구나.”
비작은 단지운이 누구를 지칭한 것인지 대번에 이해했다. 그래서 그도 줄곧 마음에 걸렸던 지점을 조금은 털어놓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움이 필요하거든 자기를 찾는 데 주저하지 말라는 태상교주님의 전언이 있으셨습니다.”
“다른 이들에게도 뒤에서 수작을 부리셨으니 네게도 안 그랬을 리 없겠지.”
단지운은 비작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들렸다.
그간의 반복된 일들이 예민함을 무디게 만든 것이다.
지금 그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이 전쟁을 승리로 마감하는 것.
번뇌를 다 떨쳐버리고 자신감을 갖춘다.
천상천하유아독존.
천마군림은 곧 적들에게 재앙이 될 것이니.
“비작, 네가 판단하는 전력 차를 말해보라.”
“당장 눈앞에 드러난 전력 차는 엇비슷합니다. 교주님과 창천맹주를 각각 논외로 쳤을 때, 우리 측은 혁무술과 구마진이 남아있다면 적들에겐 칠성도존 구치상과 대호거궐 백두기 정도가 비견될 전력입니다. 문제는 수면 위로 아직 드러나지 않은 주요 전력들이 양측에 모두 있다는 것입니다. 이 비작이 감히 우려하는 지점을 말씀드리자면 그런 드러나지 않은 인물들의 목적 일치성이 본교보다 상대측이 더 뛰어날까 하는 것입니다.”
“나도 네 생각과 다르지 않다.”
“송구합니다.”
“넌 여기 남아서 상황을 적절히 지켜보면서 다른 적들의 합류가 있는지 혹은 여기로 오고 있는 제멋대로인 본교의 놈들이 있는지 확인되거든 나를 찾아 전음을 하여라. 난 이 판을 확실히 잡아내야겠다.”
단지운이 지시를 남기면서 옥문관 보 아래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는 지면에 발을 딛는 순간, 그 자리에 돌풍만 남기면서 모습을 감추었다.
비작은 그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면서 허리를 깊이 숙였다.
“존명.”
* * * *
적룡신마 마웅패의 죽음과 적룡단의 궤멸은 큰 성과였지만, 그것이 사기증진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천무방은 장태환이라는 거인과 남월당이라는 중심 전력을 망실했으며 창천단도 적룡단과 치열하게 싸우면서 절반에 가까운 숫자가 죽거나 크게 다쳤다. 부상자들은 장액과 주천에 나누어져 쉴 수 있게 조치되었고 계속 싸울 수 있는 자들은 쉬지 않고 진격하여 돈황에 이르렀다.
광혈마종을 포함한 새로이 나타난 적들의 움직임은 정직하여 쫓아가기엔 어렵지 않았으나 혹여나 또 다른 적들이 나타나서 기습하지 않을까 긴장을 풀 틈이 없었다.
그랬기에 새벽하늘이 조금씩 밝아질 무렵 마침내 지평선 근처로 적들이 보이게 되고 조금 높은 언덕에서는 그 규모가 한눈에 들어올 정도가 되었을 때는 다시 큰 전투를 치러야 한다는 생각과 부담감이 무림 진영 전체에 맴돌았다.
창천단을 좌익으로 하여 적멸당과 백무당이 차례로 대오를 형성하였고 적들을 항해 진격하기에 앞서서 천무경은 각 집단의 수장들을 불러들였다.
창천맹주 천무경과 창천단주 구치상, 적멸당주 백두기, 백무당주 남궁평을 비롯하여 부당주들까지 한 자리에 모였다.
“구 단주, 단원들의 사기는 어떻소이까?
“적룡단에게 입은 피해도 있고, 다들 고생깨나 했으니 사기가 그리 좋지는 않습니다. 그나마 맹주께서 적룡신마를 노부 대신 꺾어줬던 게 힘이 된 모양입니다. 싸울 준비는 되었습니다.”
“단원들의 단합은 어떻소이까?”
“그건 좋습니다. 맹을 떠났을 때보다 더.”
창천단을 조직한 초기엔 정파와 사파 고수들 간에 마찰도 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경계는 점차 허물어져갔다. 그리고 천마신교를 상대로 수 차례 전투를 반복하면서 단합력은 기대 이상으로 높아졌다.
구치상이 덕망 있는 인물은 아니었으나 사안을 바라봄에 있어서 출신 등 따지는 일이 없었다. 적룡단을 상대로 사선대형을 구축할 때도 응당 가장 큰 위험에 노출될 후미에 실력과 임기응변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면서 사파 중심으로 구축하고 정파는 소수만 배치했었다.
그런 결정들이 격전을 반복하면서 신뢰를 구축하게 하였으니 지금은 모든 단원이 문파나 이념이 달라도 기꺼이 등을 맡길 정도였다.
“그건 다행이군.”
구치상의 대답은 천무경이 가장 걱정했던 지점을 덜어주는 것이었다.
그만큼 적룡단과의 싸움은 지독한 면이 있었으니 창천단처럼 통일성이 부족한 집단의 경우 크게 분열될 수 있는 위험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치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좋은 소식도 있습니다. 창천맹에서 부맹주가 정파 고수들을 결속하여 전력으로 달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다른 불만이 터질 수도 있어서 단원들에게 알리진 않았습니다.”
“잘하셨소이다. 그럼 남은 건 그들의 지원이 의미가 있도록 저 옥문관의 적들을 박살내는 일 뿐이겠군.”
두 부맹주가 끌고 올 정파의 증원 전력이 이곳에 당장 합류할 거라는 기대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전투를 이기더라도 마교와 싸움이 여기서 끝날 리는 없었으니 차후의 일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증원을 기대할 수 있다는 건 분명 좋은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