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359화 (359/432)

359화 - 제67장. 예속된 운명과 제안 (4)

주백자가 진도건의 어깨에서 손을 떼고는 이번엔 빌게포첸에게 다가가 바라보았다.

‘어린아이의 얼굴마저 담고 있구나!’

내공이 깊으면 주름진 얼굴도 탄력이 붙어서 젊어 보이기 마련이었지만, 빌게포첸의 눈에 주백자의 주름진 얼굴에선 완전히 다른 수준의 젊음을 품고 있어서 흡사 아이를 마주하는 것 같은 착각도 들 정도였다.

그런 느낌 때문에 주백자를 가까이서 마주 보자 어색함이 잠깐 맴돌았다.

“이 서역의 승려께선 어떤 분이신가? 이 노인네 머릿속에 떠오르는 인물은 있네만…….”

“소승 빌게포첸이라고 합니다. 천마신교에선 성혈신마라는 이명으로 불리지요.”

“아아, 과연. 아유타 성녀의 대행자(代行者)시군.”

“본교의 성녀를 아십니까?”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존재를 인지할 정도는 되네. 원했던 대로 신의 목소리를 담도록 선택되었지만, 그건 어릴 적의 바람이었을 뿐. 그렇게 신에게 운명이 예속되어 버리면 자신만의 삶을 사는 건 불가능해지지. 안타까운 여인이야.”

빌게포첸은 정신이 멍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주백자가 말한 것은 빌게포첸이 성혈교의 외사(外事)를 책임지는 것과 같은 이유였다.

그녀를 한 번도 본 적 없다는 사람이 그 점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인데, 비단 그것만이 그를 놀라게 한 게 아니었다.

“자네, 두려워 말게.”

“……예?”

“아유타는 신을 통해 사태의 맥락을 엿볼 수 있었고 자네가 그저 소모되는 운명으로 그치지 않도록 자네의 영혼을 보호하였지. 그로부터 긴 세월이 흘러 지금에 이르러서는 자네 안에 남은 마기는 관성적 흐름에 불과하다네. 더는 두려워하지 말고 해방의 날을 기다리며 싸우시게나.”

“소승은…….”

빌게포첸은 주백자의 말을 듣고 알 수 없는 감정이 복받쳐 말문이 막혔다.

냉소평은 가까이서 지켜보다가 피식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엿볼 거 엿보면서 다 아는 듯이 굴면 사는 거 별 재미 없지 않나?”

“흘흘! 재미없긴. 이 지루할 만큼 끌어온 긴 인생, 접을 때가 다 됐는데 그런 것까지 시시콜콜 따질 필요가 무에 있겠느냐?”

주백자가 좌중을 쓱 한 번 훑어보고는 진도건에게 시선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시간이 많다면 이런저런 얘기 들려줄 수도 있겠지만, 그리 여유롭지만은 않네. 그동안 혼자서 이 균열을 제어하고는 있었지만, 단원진이 자리를 옮기면서 새롭게 균열을 열 준비를 하는 모양이야. 이젠 이 균열을 닫고 마지막 싸움을 준비할 때가 되었어.”

“혼자서 제어하는 게 고작이었으면서 여기 사람들이 모이면 뭐가 달라지나?”

“자네뿐만 아니라 여기 모인 사람들 모두가 앞으로 처리해야 할 일, 맞닥뜨릴 일에 대해서 마음의 준비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할 수 있도록 노부의 이야기를 제대로 들려주도록 하지. 자, 여기들 둘러서 모여주겠나?”

주백자가 동굴 한쪽에 솟은 작은 바위에 엉덩이를 걸쳐 앉자 다른 이들이 그를 바라보면서 빙 둘러 모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조강선이 입을 열었다.

“난 미리 가 있겠소. 내 제자와 인사는 충분히 했고, 현세에 오래 머무는 건 썩 좋은 일이 아니라서.”

“그러시게.”

주백자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부님, 어딜 가십니까?”

반면 진도건이 조금 당황하여 조강선을 붙잡았다.

“이미 이승을 떠난 나의 역할은 실상 너와 함께했던 그 시간으로 거의 끝났느니라.”

“사부님, 제자가 다시 뵐 수 있을까요?”

“우리가 이렇게 다시 보았으니 남았던 아쉬움을 털 수 있지 않았더냐? 이제 미련은 접을 때가 됐다. 너도, 이 사부도 마지막 싸움을 끝낼 때가 되었다.”

조강선은 제자를 향해 미소를 짓고는 주백자와 유변을 차례로 잠깐씩 눈을 맞추곤 균열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진도건은 앞으로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라는 슬픈 확신과 함께 은은한 광망을 뿌리는 사부의 영체, 그 뒷모습이 균열 속으로 사라지는 걸 지켜보았다. 그리곤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 주백자를 바라보았다.

주백자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입을 열었다.

“자, 이제 그럼 이 늙은이의 이야기를 시작하지.”

양자성에게 떠밀리고 다시 단원진이 터뜨린 강기의 파장에 떠밀려 끝내 무저갱의 바닥을 향해 하염없이 추락하던 주백자는 잠깐은 진심으로 생을 마감할 때임을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나긴 추락의 시간 속에서 빨려 내려가는 기분에서 벗어나 무중력 상태에 휩싸인다는 느낌을 받는 순간, 천산 깊은 곳 아래에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심상치 않은 비밀이 잠들어있음을 깨달았다.

무중력 상태에 놓였던 이유.

그것은 어떤 기운으로 만들어진 일종의 ‘관문’ 때문이었다.

정말로 용암이 흐르고 있는 바닥까지 도달하기 위하여 무저갱의 입구에서부터 절반 가까운 수직거리 동안에는 일직선으로 뚫려있다시피 했지만, 하단 구간은 지하 깊은 곳에서부터 다양한 갈래로 연결되거나 다시 분화되는 등 매우 복잡한 지형이었다.

그런 복잡한 지형 한가운데에 대공동(大空洞)이 있었다. 그리고 그 관문은 복잡한 지형과 장애를 이 대공동까지 건너뛰어 도달할 수 있게 만들어준 것이었다.

주백자는 무언가에 본능적으로 이끌려서 어둠 속에서도 아주 은은하게 빛이 흘러나오는 동굴을 찾아 들어갔고 거기서 균열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균열에서부터 천산과 세상 전체에까지 스며들 듯 퍼져나가는 거대한 양의 마기를 목도했다.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났을 때는 탈출을 고려하기도 했지만, 이 균열을 보고선 운명의 끝이 이곳에 있음을 깨달았다.

주백자는 잠시 회복을 위해 하루가량 운기조식을 취한 후, 즉시 균열에서 흘러나오는 마기를 제어하기 시작했다.

균열의 정체가 무엇인지 당시에는 알 길이 없었으니 감히 제거할 엄두는 내지 못했지만, 그가 가진 공력을 대공동부터 시작해서 천산 박격달봉에 집중하여 흩뿌리듯 스며들게 하였으니 한두 달이란 시간이 흐르면서 마기가 흘러나가는 걸 차츰 약화시킬 수 있었다.

그 시점에서 그는 뜻밖의 만남들을 경험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조강선과의 만남이었다. 그리고 오랜 인연의 동료이자 아우인 조강선과 재회하기 하루 전, 그는 또 다른 존재를 마주했다.

그 존재는 바로 알리 라 다바스였다.

* * * *

어째서 힘을 가지려고 하는가?

강해져서 얻으려는 것은 무엇인가?

그렇게 얻은 힘으로 무엇을 얻었는가?

강해지고 난 뒤의 그 끝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가?

전쟁과 죽음.

그뿐이다.

싸움에 뛰어들려는 본능에 이끌려 그렇게 서로를 공격하고 죽이고 죽음에 이른다.

다시 누군가에게 약탈될 재물, 바람에 먼지처럼 흩어질 명성, 흙으로 돌아갈 육신만큼이나 열 갑자의 내공도 죽음 뒤엔 허무 속에 흩어질 뿐이다.

너무나 자명한 사실임에도 인간은 눈앞의 욕망을 쫓아 싸움의 불길 속에 자기 몸을 던지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무림은 바로 그런 곳이다.

그 욕망의 불길에 몸을 던지길 주저하지 않는 자들이 모인 그런 곳이다. 그리고 그 불길은 끝없이 번져나가 탐욕스러운 인간들을 집어삼킬 때까지 꺼지지 않고 커진다.

불가의 정법, 도가의 도덕 등을 앞세우면서 정의의 주류를 주창하지만, 스스로 고립되기 쉬운 길로 빠져드는 정파. 규율이 가져오는 억압과 도덕적 관념의 강요로부터의 해방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본말이 전도되어 눈앞의 작은 실익에 취해 탐욕의 늪에 허우적거리는 사파.

두 이념 모두 허울에 지나지 않아 결국 어느 쪽이 지배적 권력이라는 달콤한 과실을 베어 물 수 있는지만 다투는 분쟁이란 너무나 뻔하디뻔하다.

거기에 마도가 제시하는 약육강식이라는 본성을 자극하는 힘의 논리에 올라탄 새로운 질서는 강호무림의 현실과 너무나 잘 어울릴 것처럼 보이지만, 허세에 쩌든 인간이란 원래 그렇듯 짐승들이나 취할 법한 그런 길이라며 질서로조차 취급하고 싶지 않아 하니 그렇게 섞이지 않을 두 집단이 공동의 적을 앞에 두고 힘을 합쳐 결사의 격전을 눈앞에 둔다.

무력이란 의미가 가져다주는 상한치를 훌쩍 뛰어넘어버려 어설프게 넘겨짚을 입신의 경지 운운 정도가 아닌 진정 입신에 이른 자들의 전쟁 수준이 되어 가히 역사에 기록될 만한, 그러나 그 전투가 너무 치열하고 혹독하기에 끝내 아무것도 남지 않아 역사에 한 줄 기록되지 못할 전쟁을 위한 전력들이 점차 한곳으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그 모든 바람의 방향이 한곳을 향해 불고 있었다.

단지운이 손을 들어 동쪽 절벽 쪽을 가리켰다.

“보이느냐? 저 절벽을 따라 만들어진 석굴들이.”

신사산(神沙山;현재 명사산)의 동쪽 절벽을 따라 많은 석굴이 눈에 들어왔다.

약 800여 년 전, 전진(前秦) 시대 승려 낙준(樂僔)이 암벽에 석굴을 파고 불상을 조각하여 사원으로 삼은 것을 시작으로 지금에 이른 것인데 겉으로 드러난 석굴만 백여 개에 각각 안으로 들어서면 또 다른 석굴들이 있어 수백 개가 넘었다.

단지운이 가리킨 곳은 석굴들 사이로 붉은색 기둥과 처마를 세우고 기와지붕을 얹은 채 일부 석굴들을 품고 있는 7층 누각 막고굴(莫高窟)은 단연 압권인 풍경이기에 시선을 바로 사로잡았다.

황금빛 사막 속 절벽에 지어진 석굴들도 신비로운데 절벽 속 누각의 존재는 어떤 감상을 내놓아야 적절할까?

“예, 보입니다.”

비작이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대답했다.

“저 안에 가본 적이 있느냐?”

“소인은 없습니다. 교주님께선 있으십니까?”

“있지. 지금 가봐도 저기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수행하는 승려들이 있을 텐데, 수백 년 동안 그들이 조각한 불상들과 불교의 역사와 신화를 담은 벽화들은 참 아름다워서 한번 감상하기 시작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게 되네. 저 누각도 송이 금과의 전쟁에 패배하여 장강 이남으로 쫓겨나기 전에 세워졌는데, 서하의 영토가 되면서 어쩐지 관심도가 떨어진 모양이야. 하지만, 예전 같지는 않다고 해도 여전히 고행으로써 열반에 들고자 하는 승려들은 선대 선사들의 행적을 따라서 여전히 석굴을 파고 불상을 조각하고 벽화를 그리고 있네. 비작, 본교의 교세가 얼마나 이어질 것 같으냐?”

“천마신교는 시대를 아울러 영속할 것입니다.”

“입바른 소리 하기는. ……천마조사로부터 시작하여 내 대에 이르렀으니 이로써 삼대(三代)다. 곧 마주할 전쟁을 생각한다면 당연히 올 고비를 맞이한 느낌이지 않느냐?”

“그리고 본교는 승리하여 그 위세가 마침내 천하에 두루 뻗어나가지 않겠습니까?”

“후후후! 그래봐야 저 머리 벗긴 땡중들의 역사에 비할 수 있겠느냐? 길어봐야 나의 대까지 백 년 그 뒤로 다시 삼대, 백 년이면 꽤 오래 명맥을 유지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두진 않을 것이다. 나의 제국을 세우고 저 중원을 비롯하여 북쪽의 얼어붙은 땅과 천산 너머 서요가 지배하는 땅과 색목인들의 왕국까지 정복하여 천마신교를 유일무이한 국교로 만들 것이다.”

“산만하게 뿌리 내린 질서가 천마의 기치 아래 소거되고 통합될 것입니다.”

“그것이 나 천마 단지운의 마도다. 동의하느냐?”

“이 비작은 오직 교주님의 뒤를 따르겠습니다.”

“하하하하!”

비작의 차분한 대답에 단지운이 기분 좋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비작의 눈 주변 문신에서 은은한 빛이 흘렀다.

작안지술의 감지능력에 의해 동쪽 멀리 사막 평원과 산지 등을 따라 모여드는 기척을 느끼고 보았다.

단지운도 비작의 그런 상태를 느끼고 흘끔 쳐다보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오고 있는가?”

“안서현(安西縣)에 들어선 모양입니다. 여기 돈황까진 하루, 옥문관까진 이틀거리입니다. 기습 작전은 어떻습니까?

“가치가 있다고 보느냐?”

“……무의미할 것입니다. 그리고……남쪽에서 올라오는 자들이 있습니다.”

“남쪽이라. 양자성과 스칸다, 염황종이 드디어 합류하겠는가?”

단지운은 묻자마자 아니라는 걸 바로 느꼈다. 비작이 입을 떼는 데 주저함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게…… 검림인 거 같습니다.”

“뭐? ……그거 놀랍군.”

비작의 대답에 단지운의 얼굴에 머물던 웃음이 가셨다.

단지운이 손을 들어 가볍게 흔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앞에서 한 사내가 솟아오르듯 모습을 드러냈다.

“무영 진(榛)이 교주님의 부름을 받습니다.”

“무영각은 양자성과 스칸다, 염황종 쪽 상황을 파악하고 있느냐? 이미 뭐가 됐든 결과가 나왔어야 할 텐데 생각해보니 보고가 없구나. 권 각주가 실성하지 않았다면 이 중요한 사안을 빠뜨릴 리가 없을 텐데 말이야.”

단지운이 노여움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목소리만으로도 엄청난 중압감에 진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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