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8화 - 제67장. 예속된 운명과 제안 (3)
그들 가운데 용암비동에 가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냉소평뿐이었다.
성혈신마의 경우 초기 아유타의 독자적인 지위, 빌게포첸은 정마(貞魔)의 기운이 공존하는 까닭에 발을 들일 기회가 없었다.
수중동굴의 통로를 빠져나와 마침내 용암비동에 들어선 빌게포첸도 그런 점 때문에 단원진이 떠나고 아무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조금 긴장하고 있었다. 그런 빌게포첸의 기색을 눈치챈 냉소평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왜 긴장하나?”
“흐음, 빈승이 여기까지 따라와도 되는지 모르겠소.”
“인제 와서 빠지고 싶은 건 아닐 테고.”
“왠지 모르게 두려운 마음이 들어서 그렇소이다.”
“몰랐던 진실이?”
“그것보단…….”
빌게포첸은 대답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명확하게 설명하기 힘들뿐더러 본능적으로 엄습해오는 느낌이라서 이성적인 판단이 어려웠다. 그러나 그만이 긴장하고 예민해졌던 건 아니었다.
진도건은 크게 내색하지는 않고 있었지만, 물속에서부터 그는 역한 기분과 함께 물밖으로 나오는 순간엔 구역질까지 할 뻔했다.
호숫가 오두막에서 잠시 쉬고 있을 때만 해도 괜찮았었다. 아주 희미한 마기가 호숫가 근처로 은근하게 가라앉아 있던 걸 느꼈는데, 그 수준이 미약해서 마치 사찰에 가면 근처만 돌아도 잔향이 느끼지는 정도였다.
하지만, 호수 아래로 잠수해 들어가면서 완전히 달라진 변화에 진도건도 깜짝 놀랐다.
바깥에선 잔향처럼 느껴지던 마기가 호수 최심부에 가까워질수록 수면층 아래 고여있는 것처럼 느껴졌고 그 고인 층을 통과할 때는 마치 늪 속을 허우적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수중동굴을 지나서 마침내 용암비동에 들어섰을 땐 천산의 지맥을 타고 마기가 흐르고 있어서 동굴 전체를 에워싸듯이 흐르고 있으니 어째서 이곳에 단원진이 머물렀는지 이해가 갈 만도 했다.
진도건은 그런 마기의 지맥에 정신이 팔린 탓에 마침내 목적지 입구 앞에 도착했다는 것도 냉소평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깨달았다.
“여기가 무저갱의 입구다.”
“아…….”
진도건이 작게 신음을 흘리며 빛조차 빨아들이는 듯한 무저갱 지하 입구를 내려다보았다.
“한 번 빨려 들어가면 절대로 놔주지 않을 것 같군.”
“정말 여기서 다시 나오셨단 말입니까?”
“드디어 내려가는군요.”
일월수라 주율이 무거운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하후무와 곽비도 각각 반응을 내놓았다.
이미 냉소평으로부터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든 설명을 들었기에 마음의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들 했으나 무저갱의 끝없는 어둠 속을 당장 눈앞에 마주하고 나니 떨림을 참을 수 없는 것이다.
“큭큭! 겁먹지 말거라. 그는 이미 우리가 도착했음을 알고 있을 테니. 너희도 준비됐느냐?”
냉소평이 진도건과 빌게포첸을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가자.”
빌게포첸이 대답하려는데 진도건이 먼저 무저갱으로 뛰어들었다.
“급하긴.”
냉소평도 덩달아 몸을 던지자 삼대수라와 빌게포첸도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면서 차례로 몸을 던졌다.
휘이이이익-!
엄청난 바람 소리가 거칠게 들리는 휘파람처럼 귀를 스쳤다.
두 눈에 아무것도 담을 수 없는 완전한 어둠 속에서 온몸이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을 안기는 강한 하강기류는 절대 헤어 나올 수 없는 심연에 빠지는 듯한 두려움을 증폭시킨다. 그저 이 상황이 자의적인 행동에 의한 것이란 사실만이 공포에 휩싸일 이성을 붙들게 해줄 유일한 밧줄이었다.
잠깐이라는 개념이 모호해질 정도로 순간순간이 길게만 느껴지는 공허의 시간.
용암이 관통한 통로라는 게 정말인지 발아래로 알 수 없는 열기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였다.
후웅!
그 순간 온몸을 끌어당기던 하강기류가 원래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무중력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허무 속에 붕 떠 있는 듯한 비현실적인 감각은 냉소평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겐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허무 속을 스며드는 빛에 적응하여 주변 풍광을 눈에 담는 건 냉소평도 아직 익숙해진 건 아니었다.
어렴풋이 보이는 지형.
진도건은 고개를 숙여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떠 있는 위치에서보다 훨씬 더 아래로 멀찍이 내려다보면 마침내 무저갱의 바닥으로 생각되는 지형이 보이는데 울퉁불퉁한 지면과 여기저기 조금씩 벌어진 틈새들로부터 붉은빛이 열기에 의한 아지랑이에 번지는 게 보였다. 그리고 좌우로 시선을 돌리자 함께 떨어진 일행들의 그림자가 차례로 시야에 들어오면서 그들 사이로 마침내 동굴을 하나 발견했다.
진도건은 그곳이 바로 냉소평이 말한 주백자 등이 있는 곳임을 확신했다.
사사사사…….
메아리처럼 반복해 울리는 목소리들 각각이 겹쳐서 귓가에 대고 소곤거리는 듯 들려왔다.
오싹오싹한 느낌의 환청에 더해 동굴로부터 흘러나와 공간 전체에 새겨진 마기의 파장, 그 잔상이 오감 속으로 물들 듯 밀려오고 있었다.
그 감각의 파도 속에 잠시 아찔해진 기분이 들기 시작할 무렵, 공중에 붙잡혔던 그들의 신형이 동굴 쪽으로 딸려가듯 움직였다. 그리고 냉소평이 동굴 입구 지면에 발을 딛으며 중얼거린다.
“그때도 그랬었지. 이 울렁거림은 도무지 적응이 안 되는군.”
하강기류에서 벗어나는 순간의 느낌을 말한 것이다.
개인차가 있었지만, 어둠에 시각을 완전히 잠식당한 상황에선 균형감각이든 내성이든 무용지물인 양 저마다 크고 작은 영향이 있었다.
그 영향을 가장 심하게 받은 사람은 빌게포첸이었다.
“크윽…….”
발을 딛자마자 크게 휘청거릴 정도였는데 상대적으로 무공이 낮은 삼대수라도 인상만 찌푸릴 뿐 멀쩡히 걷는 모습과 비교하면 과할 정도의 반응이었다.
‘절반은 마기가 아니라 그런 모양이군.’
진도건이 방대한 마기의 파도에 대해 순수하고 직접적인 인지를 하고 있다면 빌게포첸은 부정적인 영향 속에서 한껏 예민해진 채 심신을 관리하는 것이다.
“가자.”
빌게포첸이 후미에서 조금 뒤처진 채로 여섯 사람이 동굴 속을 걸어 들어갔다.
천산 속 워낙 깊은 곳까지 떨어져서 단 한 점의 자연광도 스며들지 못할 텐데도 동굴 안 지형은 은근히 시야 속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것은 진도건을 제외한 다른 다섯 명이 인지하고 있는 일반적인 시각 정보였다.
‘별이 한가득했던 밤의 밝은 땅……. 그것보다는 어둡지만, 분명 이 흐르듯 지나가는 별빛들은…….’
나시드에 의해 이끌리듯 진입했던 공간의 풍경이 다소 어두운 채로 동굴 속을 흐르고 있는 듯한 느낌.
그것은 동굴의 구부러진 길을 서너 차례 지나고 나면서 좀 더 밝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마침내 드러난 상당한 크기의 공동 속에서 진도건과 냉소평 등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두 사람과 그들 너머 맞은편 공동 벽면에 날카롭게 일렁이고 있는 어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누군가에겐 익숙하고 누군가에겐 미지의 두려움으로 느껴지는 거대 공동 속 풍광.
‘저건 대체…….’
진도건은 그 어둠이 영역의 경계에서 보았던 균열과 매우 흡사하면서도 동굴 한쪽 방면을 완전히 뒤덮을 정도로 뻥 뚫리듯 커서 금방이라도 그와 혈마가 물리쳤던 괴물들이 마구잡이로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어서 오거라, 도건아.”
“네가 바로 진도건이군.”
조강선이 가장 먼저 제자를 맞이하자 유변도 어둠 속에서도 은근하게 드러나는 적발적안의 용모를 흥미롭게 바라보며 말했다.
진도건은 그런 두 사람을 향해 차례대로 포권을 취하며 예를 갖추었다.
“사부님. 유 사숙께 인사올립니다.”
“사숙은 무슨. 자넬 가르친 건 오로지 조 형의 공이니 사숙이란 호칭은 내게 과분하지.”
“제가 삼킨 홍천환으로 혈마의 업을 짊어지게 되었으니 어찌 혈마 원건의 세 스승을 사부와 사숙, 사백으로 모시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아이도 이름에 하늘(건;乾)을 품었었는데, 이 또한 의미가 있을까? 혈마를 가슴에 품고도 건재한 자넬 이렇게 보고 있으니 이 늙은 육신을 벗지 못하던 한이 조금 위로가 되는구나.”
유변은 진도건을 보면서 구마진과 혈마종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진도건과 구마진이 대변하는 ‘혈마’라는 상징은 분명히 다르다.
유변은 그것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주화입마에 휩쓸려 완전히 혈마화가 되었던 원건과 가까운 것은 구마진일지는 몰라도 혈마의 태동을 거스를 수 없는 것이라면 세 스승이 원하던 결말은 진도건이지 않겠는가?
홍천환을 만든 유변과 혈마 원건의 추종자들이 마도에 귀의한 건 어쩔 수 없는 필연적인 선택이다. 그렇지만 당대에 혈마를 이은 두 사람의 행보를 보면 어느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질지는 불 보듯 뻔한 결과였다.
“대마의도 꽤 감회가 깊은가 보오. 하기야 천마신교의 관심은 그 힘에 있었지, 당신처럼 사람 자체에 관심을 둔 건 아니니까.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야. 그나저나 주백자는 어디 있소?”
“영역의 관문에 들어갔다네.”
유변이 대답하면서 조강선을 슬쩍 보았다.
그도 전반의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기엔 이곳에 떨어진지 그리 오래 지나진 않았기에 설명을 넘긴 것이었다.
먼저 반응한 건 당연히 진도건이었다.
“영역의 관문?”
영역의 경계가 떠오르는 명칭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거기에 있다가 돌아왔음을 상기한다면 이해가 필요한 또 다른 개념의 공간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조강선이 진도건을 보며 입을 열었다.
“네가 영역의 경계에서 혈마와 함께 물리친 마물들이 나왔던 균열을 기억하겠지만, 이것도 그와 비슷한 균열이라고 보면 된다. 우리가 파악하기로 이 균열은 말 그대로 현세에 만들어진 것이지. 반면 관문이라는 것은 다른 차원과 현세 사이에 관문 통로 역할을 하는 자연적인 기운으로 형성된 공간이다. 기능은 영역의 경계와 유사한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이 이 세상 전체를 아울러 존재하는 것이라면 저 관문이란 곳은 단 하나의 길만 연결하는 격리된 공간이나 다를 바 없는 것이야.”
“그런 곳에는 왜?”
“사흘 전인가? 그때쯤부터 갑자기 마물들이 조금씩 넘어오기 시작했네. 물론 주백자는 강하니까 별 위협이 되지 않았지만, 어제는 그의 말에 따르면 ‘전례없는 숫자의 기척이다.’라고 말하더니 안으로 들어가더군. 안으로 들어간 것도 그게 처음 아니오?”
“그렇네.”
유변의 물음에 조강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닫은 게 영향을 준 것이로군요?”
“나도 와서 들어보니 그렇게 여겨지더구나.”
“본좌만으론 부족하다고 하고, 또 데려와달란 놈까지 데려왔는데 정작 그걸 요청한 당사자가 자리에 없다니. 그럼 우리도 저기 들어가면 되지 않겠소이까?”
“일단 기다려 보시게.”
냉소평이 금방 균열 속으로 몸을 던질 듯 앞으로 걸어 나가며 묻자 조강선이 그를 말렸다.
그때 균열 속 어둠이 일렁거렸다.
“크흘흘! 거 녀석 성질머리하고는!”
다소 푸근하고 펑퍼짐한 체격의 노인 한 사람이 균열 속에서 걸어 나오는데 무슨 싸움을 벌였길래 붉고 푸른 핏물 같은 것들에 옷깃이 물들고 고기 조각들도 온몸 군데군데 달고 나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눈부시도록 새하얀 백발과 현기가 감도는 눈빛, 공동 안의 모든 고수를 아우를 듯한 기풍은 그를 처음 본 자들마저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매료시키기에 충분할 만큼 넉넉하다.
“그래, 아끼는 부하 셋이라더니 과연 쓸만해 보이는구나. 네 부족함을 메꾸기엔 충분하겠어.”
“뭣이?”
냉소평이 발끈했지만, 주율, 곽비, 하후무 그 누구도 거기에 따라 발끈한 자 없었다.
이미 일월신마 냉소평과 태상교주 단원진을 동시에 상대하면서 어떤 신위를 보여주었는지 들었기 때문이었다.
냉소평도 표정에서 드러나고 있었지만, 진심으로 화가 난 건 아니었다.
천하에 그를 낮잡아볼 수 있는 유일한 사람 하나를 꼽자면 당연히 이 주백자뿐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 조강선은 산 사람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치이이익…….
주백자가 바깥으로 기운을 돌리자 몸에 붙었던 것들이 소멸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 더 말끔해진 모습에 넉살 좋은 웃음을 품으며 진도건에게 다가갔다.
“진도건이 주 사백께 인사 올립니다.”
주백자가 두 손을 뻗어 진도건의 어깨를 붙잡았다.
흐뭇하게 웃는 표정에서 그 감정이 고스란히 진도건에게도 전해졌다.
“그래……, 네가 강선이 아우의 제자로구나. 어디 보자. ……가혹한 운명에 힘들었을 텐데, 잘 컸구나. 한 몸에 혈마와 공존해도 둘 사이에 의지의 경계가 잘 세워져 있으니 사람의 영혼은 타락함이 없고, 마성의 마는 치우침 없이 순수한 혼돈을 유지하고 있구나. 두 신이 관심을 두기에 합당한 그릇이야.”
주백자의 현묘한 눈빛은 순식간에 진도건의 모든 면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흡족해하는 그의 표정을 보면서 진도건의 머릿속 관심이 주백자의 말속에 담긴 짧은 한마디에 꽂혔다.
‘두 신의 관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