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357화 (357/432)

357화 - 제67장. 예속된 운명과 제안 (2)

“진도건, 그대는 어떤가요?”

그녀가 이어서 눈의 초점을 진도건의 눈빛에 맞추며 물었다. 그러나 대답을 한 건 진도건이 아니라 혈마였다.

“나야 어차피 사라질 운명에 선택지가 없으니 받은 거지만, 네놈은 고민이라도 좀 해라. 먼저 결정을 내려버리고 네 여자에게 통보하면 잘도 좋아하겠다.”

“아……!”

진도건은 정곡을 찌르는 혈마의 말에 외마디 감탄사를 뱉었다. 그리고 찰나에 나시드의 얼굴 위로 아쉬운 기색이 스쳤다가 사라지는 걸 포착할 수 있었다.

“혈마가 오랜만에 옳은 소리를 하는군요. 그렇게 하는 게 좋겠어요.”

“예, 서은을 만나면 상의해보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나시드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하고는 조강선도 슬쩍 보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자, 이제 우리의 계약 내용이 서로 합의가 이뤄졌으니 이 세상에서 도래한 마의 씨앗을 제거하기 위해 모두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합시다. 그리고 그 일환으로 진도건과 혈마 당신을 천산에 이동시켜드리겠습니다. 조강선 당신도 그곳에 남겨둔 일을 마무리 지어야겠지요?”

“그렇습니다, 나시드.”

“후후, 조 선인도 이젠 여와의 대리자보다 제 호칭을 써주시는군요.”

“이 녀석들이 계속 부르는 걸 듣다 보니 제 입에도 붙은 모양입니다.”

“잘 됐습니다. 저도 때마침 다른 지점에 볼 일이 생겼으니 우리 이만 헤어지도록 하지요. 여러분의 노고가 이 땅에 도래한 마를 걷어낼 수 있도록 이 나시드 또한 ‘이름 없는 진리’의 대리자로서 지켜드리겠습니다. 자, 일어나 눈을 감으세요.”

나시드의 말에 따라 진도건, 조강선이 자리에서 일어나 눈을 감았다. 그리고 전에 느꼈던 따스한 품으로 안기는 느낌이 빛과 함께 온몸을 감쌌다.

“본좌의 말이 맞지 않느냐?”

“허허, 아미타불…….”

냉소평의 말에 빌게포첸이 합장을 하면서 불호를 외웠다. 잠깐 눈을 질끈 감은 것에서 눈앞에 벌어진 현실이 쉬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내적 고통이 느껴졌다.

천산 박격달봉의 중턱쯤에 이르러서 마침내 보이기 시작한 주인 없는 작은 오두막과 그 뒤로 보이는 눈 덮인 하얀 설산과 반쯤 얼어붙은 호수의 전경은 예고된 풍경이었으나 모닥불을 피우고 앉아 있는 진도건의 모습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그건 사막에서 사라진 진도건이 계속해서 이동한 자신들 앞에 나타날 거라 말했던 냉소평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감으로 때려 맞춘 결과에 한 번 으스댄 것일 뿐, 진도건에게 경위를 가장 먼저 묻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냐? 사막에서 사라진 네놈이 우리를 앞질러 이곳에 나타나다니.”

“답답해서 바람 좀 쐬다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말이 안 되는 상황인 걸 알면서도 농지거리는.”

냉소평이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진도건 맞은 편 통나무에 엉덩이를 걸쳐 앉았다. 빌게포첸과 일월교 수라 세 사람도 모닥불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듯 각자 자리를 찾아 앉았다.

“이놈아, 진짜로 무슨 일이냐?”

“돌아가신 사부님을 뵈었다. 신선이 되셨더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디를 바라봐야 하는지 한동안 함께 다니면서 조언을 들었다.”

“조강선을? 어디 있느냐? 아니, 잠깐. 아무렇지 않게 앉아 있는 네놈 때문에 나도 긴장이 풀렸군.”

“왜?”

“여긴 본래 무영 사가 용암비동의 문지기 노릇을 하던 곳이다. 그놈은 단 태상 직속의 수족이나 마찬가지지. 게다가 무영들 무공이 높진 않지만, 환상무형술은 나조차도 다섯 장 안에 녀석들이 접근해야 기척을 느낄 수 있어. 우리의 움직임이야 노출되는 건 상관없어도 대화 내용까지 감청하는 건 방지해야지.”

냉소평의 말에 함께 온 다른 네 명도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진도건이 그들을 다시 자리에 앉혔다.

“다섯 장이 아니라 오십 장 안에도 없으니까 호들갑 떨지 말고 앉아.”

“네놈이 혼자서 돌아다녀 살펴봐도 무영들이 거기에 맞춰서 움직였을 거란 걸 생각 안 하느냐?”

“널 따르는 두 무영 외엔 없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는 얘기다. 보통의 기척은 너나 성혈신마에 비해 조금 부족할지는 몰라도 하늘 아래 나보다 마기의 기척을 훨씬 잘 감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

“그 두 개가 왜 따로 노느냐?”

“혈마 때문에 그런 거니까. 그러니까 번잡스럽게 엉덩이 뗐다 붙였다 하지 말고 앉아. 먼 길 달려와서 꽤 피로할 텐데, 무림인도 사람이니 불도 좀 쐬면서 몸도 녹이고 해야지.”

진도건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두 손을 내밀면서 모닥불의 열기를 쬐는 행동을 취하자 냉소평이 심통 맞은 표정이 되어선 자리에 앉았다.

“사라졌다가 이제야 나타난 놈이라 그래도 다시 봐서 반가워질 줄 알았는데 더 꼴 보기 싫어졌구나.”

“동감합니다, 교주님.”

금강수라 하후무가 툴툴거리면서 통나무에 궁둥이를 붙이는 사이, 빌게포첸이 마음 편히 먼저 앉아서는 진도건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 진 시주는 답을 얻으셨소?”

“그렇다고 생각했었소. 그런데 마지막에 사부님과 혈마와 얘기를 나누다 보니 더 고민스러워졌소.”

“쯧, 무슨 고민인지는 몰라도 널 오래 기다린 우리의 발걸음을 헛되게 만들 생각이면 접어라.”

진도건은 냉소평의 얼굴을 잠시 빤히 쳐다보았다.

“왜? 본좌의 얼굴에 뭐라도 묻었느냐?”

“그냥 문득 궁금해져서 그런데, 일월교의 교리는 뭐지? 뭘 추구하는 건가?”

냉소평은 대답 대신 갑자기 생뚱맞은 소리를 듣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근본적으로는 천산산맥을 넘어 더 서쪽에서 발원한 마니교(摩尼敎) 그리고 지금 쿠초 왕국에 자리 잡은 후대의 백련교(白蓮敎)에서 흘러나온 교파다. 백련교는 타락한 현세를 구원하는 유일신 무생노모(無生老母)가 보낸 미륵에 의해 세상을 구원하여 이상향인 ‘진공가향(眞空家鄕)’을 세운다는 교리를 가졌으나 우리는 신을 믿는 대신 내재된 빛과 어둠, 양과 음의 조화와 대립을 탐구하여 스스로 미륵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는 차이점이 있다. 일월을 함께 품은 자, 신과 마를 함께 포용하는 자야말로 진정한 미륵, 진정한 광명. 그것이 우리가 교주를 일월신마라 호칭하는 이유다.”

일월수라 주율이 교주 대신 대답했다.

“그러면 당신 일월수라는 뭐지?”

“악과 번뇌, 부정함을 소탕하는 일월신마의 최일선 집행자.”

“하하하!”

주율의 설명을 듣고 진도건이 웃음을 터뜨렸다. 주율이 기분 나쁘다는 표정이 되자 진도건이 두 손을 모으며 사과의 뜻을 표했다.

“미안. 집행자란 말을 듣고 떠오르는 게 있어서 말이야. 당신을 비하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흐음.”

“그건 왜 물었느냐?”

주율이 침음성을 삼킬 때, 냉소평이 진도건에게 질문을 던졌다.

“네가 일월신마이니 일월교가 꿈꾸는 미륵, 혹은 거기에 근접한 자이겠군. 무공도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라는 화경 수준에 이르렀을 테니. 그래, 냉소평 당신은 교리가 원하는 일월신마가 진정으로 되었다고 느끼고 있나?”

“……본좌를 놀릴 생각은 아닌 것 같고.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일월교의 역사는 얼마나 되었나? 오래전부터 너나 여기 사대수라와 같은 고수들을 배출해온 것이냐?”

“……송 건국 시기 백련교가 탄생하면서 비슷한 시기에 같이 창교되었다. 무림 세력으로선 약소했으나 내 스승님 대에 큰 성취가 있었고 본좌가 역대 최강……. 본교가 천마신교의 구주마종에 속해있다고 본교의 힘, 일월혼극마공이 천마신교에서 나왔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래. 네 말처럼 천마신교완 상관이 없겠지만, 마성을 마주한 건 너나 네 스승 정도 시점부터겠지. 천마조사 단용후와 천마신교의 탄생시기와 비슷한 시점에서.”

“……공교롭다 이건가?”

“천마신교가 무너지는 순간이 오면 그들이 여긴 모든 ‘마’는 이 세상에서 사라질 거야. 정말로 철학적, 수사적인 의미로만 남을 정도로. 그 시점에서 너희가 마주하고 받아들인 마성을 일월교가 꿈꾸던 미륵으로 오인하고 있지 않길 바란다.”

“이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막말을……!”

“빌게포첸 당신도, 그리고 비슷한 의미로 나도…….”

앙검수라 곽비가 발끈하면서 금방이라도 진도건에게 덤벼들 듯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이어진 진도건의 말에 화내던 걸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일월신마 냉소평 뿐만 아니라 세 명의 수라들 그리고 빌게포첸 모두 무거운 표정으로 진도건을 바라보았다. 처음엔 일월교의 교리를 우습게 보는 것으로 생각했던 말들이 그들이 싸우고 있는 현실에 마주 놓고 생각해보자 그 말들의 무게가 심상치 않은 수준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공들여 쌓아 놓았다고 생각했던 탑이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겠군. 우리가 애써 이뤄놓았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허상이어서 진실은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이라고 말이야.”

“그래.”

“크흐흐흐!”

냉소평이 어깨까지 들썩이면서 웃음을 흘렸다.

심상치 않은 대화의 흐름에 세 수라들이 자신들의 교주를 무거운 시선을 바라보았다.

냉소평이 이내 웃음소리를 내던 걸 멈추었으나 입꼬리는 씨익 말려 올라간 채 거리낄 것 없다는 듯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두 팔은 가슴 앞에 팔짱꼈다.

“홀랑 사라져서는 무슨 얘길 듣고 왔는지 모르겠지만, 애초에 본좌와 본교가 이렇게 갈라져 나온 데에는 이미 많은 의구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자아를 탐구하여 미륵이 되려는 자들이지 절대자가 내려주는 과실을 한 번 따먹어보고자 허황된 교리에 맹종하는 자들이 아니다. 감춰진 진실을 마주할 각오가 없었다면 예까지 오지도 않았느니라.”

“광명각요(光明覺要).”

“광명각요.”

“광명각요.”

냉소평의 말에 세 명의 수라가 동시에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일월교의 진언. 과연…… 천마신교의 구주가 된 이후로는 왼 적이 없다는 진언이라.”

일월교의 진언을 외는 세 사람의 모습에 빌게포첸도 깨닫는 바가 있었는지 중얼거리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일월교가 천마신교의 산하로 들어가면서 어느새 그들은 내면이 품은 우주의 진리를 탐구하고 스스로 미륵이 되려는 노력을 포기한 채 절대자가 내려주는 탐스러운 과실만 바라보는 교단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냉소평은 그러한 자신들의 현실을 꽤 오래전부터 자각하고 있었기에 일월교 신자들이 본래의 교리를 잊지 않도록 강조하면서 중심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다가 근 몇 년 사이에 심정적으로 크게 영향을 받을 만한 일들을 마주하면서 마침내 다시 본래의 일월교로 돌아가기 위한 길을 걷고 있는 것이었다.

“더 떠들 게 있더냐? 네놈 얘기가 마치 천마의 속삭임처럼 들려 아주 쓰잘데기 없이 느껴지는구나. 다 떠들었으면 그만 가자. 노친네들 기다리겠구나.”

“후후!”

냉소평의 말에 진도건이 웃음을 흘리며 일어났다.

다른 네 사람도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친네가 노친네라고 하니 좀 이상하군.”

“이상하긴 뭐가 이상하느냐. 그들 나이대를 생각해봐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어림잡아도 본좌의 증조(曾祖), 고조(高祖)뻘이니라. 아직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이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는 증거다. 아무리 마도가 역천의 길이라 깎아내려져도 인륜의 측면에서 그런 소릴 듣는 거지 자연적인 법칙까지 거꾸로 돌아가야 하겠느냐? 다 사람 살자고 하는 짓거리들인데 그렇게 거꾸로 돌아가 버리면 인간도 인간이 아니게 돼버리는 게다.”

“오오, 방금 그 말은 상당히 그럴싸했어. 처음으로 당신이 어른처럼 느껴지는군.”

“이놈이…… 그럼 본좌가 네놈보다 어른이지. 대체 뭐라고 생각하고 있단 말이냐?”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수염이나 밀고 다니는 노친네? 근엄한 느낌이 없잖아.”

“그럼 본좌가 수염을 기르면 네 주둥이에서 존대를 기대할 수 있겠느냐?”

“길러보면 알 수 있겠지.”

“시건방진 새끼.”

“……아미타불!”

냉소평을 필두로 진도건과 삼대수라, 빌게포첸까지 차례로 호수에 몸을 던지기 시작했다.

풍덩!

그리고 그런 진도건의 머릿속으로 모든 대화를 듣고 있었던 혈마가 궁시렁거렸다.

“지랄들 하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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