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356화 (356/432)

356화 - 제67장. 예속된 운명과 제안 (1)

영역의 경계에 들어선 이후로 시간이 얼마나 흘러갔는지 몰랐다.

나시드의 품에 이끌려 ‘별이 한가득한 밤의 밝은 땅’에 들어선 이후로는 더더욱 감이 잡히지 않았다.

햇빛도, 달빛도 들지 않는 이곳에서 나시드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과연 그녀가 진실로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다른 세상들.

신과 인간.

고대서부터 뻗어나가 무한히 확장하는 지식과 자연의 법칙을 거슬러 발현하는 마법.

이곳에선 이야기와 상상으로만 그려내던 사방신수(四方神獸) 같은 영물들이 생물로 존재하는 자연 체계.

달리 불멸자와 필멸자로 구분되는 지대한 격차를 품은 수직적 구조 속에 때때로 신, 불멸자 등에 근접하려는 선지자, 완전자 등의 등장, 발현된 악을 멸하는 영웅에 대한 구전설화 같은 이야기들.

거기에 깊은 흥미를 느끼는 혈마의 감정까지 공유되면서 진도건도 문득문득 그런 세상으로 넘어가서 살아보고 싶은 흥미를 자극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이 동할 정도로 나시드의 이야기들은 정말로 그의 흥미와 상상을 자극하여 세상을 넘어가 보고 싶지 않냐는 설득의 어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어찌 보면 이 세상보다는 좀 더 과격한 곳이지만, 그래도 그 세상들 모두 나름의 질서들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런 곳에서 다바스란 신의 탄생은 기존에 존재하던 자연적 규율을 흔드는 결과를 낳았으니 결과적으로 그가 벌였던 여러 혼란은 지금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보다 더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가진 신격의 근간은 이 세상이 아니라는 걸 생각해보았을 때, 여기에서의 일이 그쪽 세상에선 어떤 식으로 후과가 벌어질지 정말 두려운 일이지요.”

“나시드께선 결국 이 땅의 문제만이 아니라 양쪽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하시는 것 같군요.”

시간의 대부분을 차분히 들으며 곁을 지키던 조강선이 오래간만에 입을 열었다.

“부정할 수 없지요.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혼란은 그 안에서 자연적으로 치유되는 법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조치가 필요한 법이니까요. 저는 이 세상에서 다바스가 불러일으킨 혼란을 잠재우기 위하여 그가 벌려놓은 모든 마를 본래 있던 곳으로 몰아낼 생각이에요.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선 혈마, 당신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내가 뭘 할 수 있는데?”

“혈마 당신은 자신의 존재 이유, 존재에 대한 근원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지요?”

혈마가 진도건 안에 있기에 그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진도건의 표정엔 미미한 반응이 있었다.

진도건은 혈마가 정말로 그런 고민을 했던 걸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로 둘은 그 문제에 대해 추가적인 대화를 하진 않았지만, 비슷한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다.

비록 본능적으로는 천마신교를 계속 물리치면서 나아가다 보면 바라던 지점에 닿을 수 있을 거라고 느끼면서도 이성적으로는 그것이 단순히 자기 착각에 의한 잘못된 선택이면 어떡하나 하는 우려가 있었다.

그런데 그런 기존의 생각과는 조금 다른 위치에서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존재에게 정확히 지적당하는 이 상황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과연 나시드는 어디까지 멀리 내다보고, 또 얼마만큼 깊이 들여다볼 수 있을까?

“그래. 넌 스스로 대리자라고는 해도 내가 보기에 신이나 마찬가지이니 제대로 설명할 수 있겠군. 안 그러냐?”

“기질(氣質)이란 저마다 타고난 방향성이 있기 마련이나 가까운 다양한 요소들에 의해 변화하면서 그것으로 굳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런 영향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 선명하거나 극단적으로 변화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혈마 당신은 진도건의 몸에 머물면서 그의 영혼과 기질에 공명하면서도 본디 혼돈의 기질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요.

다른 어떤 영혼보다 기질이 변화하기 쉬운 환경임에도 자신의 근원적 상태를 유지하면서 바깥으론 진도건의 몸을 빌리기에 그의 기질(器質)이란 옷을 입고 있는 것과 같죠. 즉, 지금 혈마라는 이름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특성은 당신이 품은 혼돈이란 원초적 가능성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분명 다바스가 이 땅에 내린 혼란에 영향을 받아 탄생하였으나 그의 영향력 밖의 존재. 또한 이 세계에 흐르는 자연적 섭리를 거스르는 불가해한 존재.”

“어차피 존재해선 안 될 몸이니까 박 터지게 싸워서 함께 죽으라는 건가?”

나시드의 긴 이야기를 듣고 있던 혈마가 시큰둥해져서 반문을 던졌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반응이 나시드가 입가에 띤 미소를 더욱 짙어지게 한다.

그녀가 바라는 혈마의 모습은 그렇게 자신의 존재 이유, 존재가치에 대해 강한 물음을 던지는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혈마, 이 땅에서 당신의 역할과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어요.”

“뭐? 뭔 개소리야?”

“당신이 진도건을 공격해서 그 육신을 차지하려는 시도를 포기하고 공존하겠다고 결정한 순간, 당신의 역할과 운명은 진도건에게 예속되기 때문이에요.”

“……앞으로 벌어질 일의 결말을 알고 있다고? 내가, 이 녀석이 어떻게 할 거라는 것도?”

“모든 과정을 세세하게 볼 순 없어도 모든 원인이 모여 만들어낸 결과는 운명의 실타래 속에서도 강한 꼬임을 발생하기에 저처럼 ‘이름 없는 진리’의 대리자로서 영역의 경계를 넘나들 수 있는 소수의 신은 그 꼬임에 투영된 결말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렇게 당신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혈마 당신은 진도건이 가진 운명 속에서 지금 사태의 결말에 역할을 다한 후에 사라질 뿐만 아니라 허무 속을 맴돌다 소멸하게 된답니다.”

“……시발 기분 더럽군. 그럼 어쩌라는 거냐? 네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뭐? 소멸할 내 운명에 길을 놔주겠다, 뭐 그런 거냐?”

“선택은 당신의 몫이지만, 저는 분명히 최선의 선택을 제안해드릴 수 있습니다.”

“뜸 들이지 말고 말해.”

“당신은 ‘이름 없는 진리’가 절 이곳에 인도한 이유기에 당신의 가능성을 누구보다 크게 평가합니다. 가까운 미래에 이 땅 위에 새겨진 당신의 운명은 종착점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운명이 거기에서 끝나지 않도록 풀려버린 실을 ‘신’의 길로 이어드리겠습니다. 우리들의 집행자(執行者)가 되어주시길 바랍니다. 차원과 영역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우주를 혼란에 빠뜨리는 악신들에게 대적하여 꾸짖을 수 있는 신이 되어주십시오.”

정중한 어조로 이야기하는 나시드의 얼굴에 좀 더 따뜻한 미소가 그려졌다.

혈마의 무례함이나 거친 어투 따위 모두 포용할 수 있을 정도로 해량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하! 신이라. 진심인가? 진심이라 쳐도 네 아래로 들어가라는 건가?”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요. 저와 당신의 기질이 다르므로 맡을 수 있는 역할이 다른 것일 뿐, 만약 당신이 원한다면 다른 세상의 신으로 자신의 신성을 뻗칠 수도 있습니다. 제 이야기는 말 그대로 제안에 불과합니다. 신격이 갖춰져 ‘이름 없는 진리’에 감응하게 된다면 알아서 따라오실 것입니다.”

진도건은 혈마의 감정이 동요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혈마의 목소리가 들린다고 할지언정 정작 눈을 마주치는 건 나이니…….’

나시드는 분명히 혈마와 대화하고 있었고 진도건과 눈을 마주치더라도 진도건은 분명 그녀의 눈빛에서 그의 안을 들여다보는 듯한 심오한 눈빛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자연히 집중할 수밖에 없는 그녀의 눈빛과 목소리는 마치 그에게도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느끼기에 너무나 충분했다.

‘음?’

진도건은 속으로 움찔했다.

줄곧 그의 안을 들여다보는 듯하던 나시드의 초점이 어느새 그에게로 맞춰졌다고 생각할 정도로 은연중 미묘하게 변한 것을 눈치챈 것이다. 그 순간에는 왠지 모르게 쑥스럽다는 느낌이 들면서도 신을 대면한다는 게 이런 것인가 하는 약간의 섬찟함도 있었다.

“진도건, 당신께도 조금 다른 제안을 해볼까요?”

“예?”

“당신이 천마신교를 상대로 책임을 마치더라도 알리 라 다바스가 이 땅에 남긴 여파까지 모두 뒤집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이 세상은 역사에 남을 기록적인 대전쟁이 벌어지면서 엄청나게 많은 목숨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 끔찍한 미래는 분명 오늘날 이 상황의 여파이겠으나 결국 벌이는 것은 인간이니 이미 시작된 전쟁의 흐름은 막을 수 없지요. 게다가 그 전쟁을 당신은 살아서 지켜볼 것이니 고통을 피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대전쟁…….”

“진도건, 그대는 혈마와 공존하게 되면서 당신의 기질(器質)은 이 땅의 어느 인간보다 커져 있습니다. 다바스가 이 땅에서 사라지면 그 영향력도 없어지게 되니 강호무림의 일부 인간들이 보여주는 강대한 무력은 빠르게 꺾일 것입니다. 오직 당신을 비롯한 극소수만이 자신의 생애 동안에만 일정 수준을 유지할 뿐, 자손에게 물려주기도 어려워질 것입니다. 당연히 대전쟁 앞에서 그런 힘도 미약할 뿐입니다.

그대가 제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고 흥미를 느꼈다면 저는 한 가지 길을 제안할 수 있습니다. 다른 세상에서 새로운 삶을 이어가는 것을요. 그리하여 신이 된 혈마의 대리자가 되어 알리 라 다바스의 음모를 막는 역할을 맡아주세요. 신의 영역에선 혈마가, 인간의 영역에선 진도건 당신이. 그리하면 모든 세상이 다시 순리 위에 올라탈 수 있을 것입니다.”

진도건은 나시드의 제안이 정말 솔깃하게 들렸다.

잠깐씩이라도 눈앞을 지나갔던 수많은 풍경과 생명체 그리고 그와 다른 듯 비슷한 인간들의 모습을 보았을 때부터 이미 모험을 도전해보고 싶다는 욕구가 솟아올랐기 때문이었다. 그게 어느 정도인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실현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가슴 깊이 잠든 무언가를 연신 자극하고 있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마음에 걸리는 것도 있었다.

천마신교를 적으로 하여 그들을 절멸하지 않고선 끝나지 않을 이 싸움을 하는 이유는 혈마와 엮이면서 느꼈던 숙명 같은 것도 있었지만, 그 이후 찾아올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과 누리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서은.

계속 함께 여행하고 싶음에도 이렇게 따로 움직이는 것도 이 사태를 제대로 마무리 짓기 위한 확실한 방법을 찾고자 함이 더 컸던 것이 아니었나?

그녀를 그리는 마음에 비하면 다른 세상을 여행하고 경험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욕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시드가 그런 그의 마음을 읽은 것일까?

“이 땅의 여러 나라가 패망할 정도의 대전쟁으로 결코 평안할 날이 없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지낸다 한들 세상이 고단하기만 하다면 어찌 거기에 안식이 있고 행복이 있다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제 제안이 이 땅에 적을 둔 당신에게는 혈마가 느끼는 것보다 무거울 것이니 저도 보다 합당한 제안을 해야겠지요.”

“합당한 제안이요?”

“당신과 천서은, 두 사람이 함께 떠날 수 있도록 해드리겠습니다. 제 능력으로 조금 힘들지만, 분명히 가능한 일입니다. 어쩌면 그곳에 두 분이 함께 오실 때, 세상이 더 빠르게 안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녀도 몹시 뛰어난 능력과 잠재력을 가졌으니까요.”

진도건은 그녀의 합당한 제안이 꽤 마음에 들 정도로 솔깃하게 들려왔다.

천서은과 헤어지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곳이 어디든 갈 수 있었고 대전쟁으로 세상이 피폐해진다면 그것을 피해 다른 세상에서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인간 사는 세상에 전쟁이든 분쟁이든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리 멀지 않은 절망만 가득할 세상보다야 한결 낫지 않겠는가?

진도건의 마음은 알 수 없는 호기심과 기대감 등으로 조금씩 들썩거리고 있었다. 동시에 고민하는 얼굴을 나시드에게 보이고 있는 것도 잠시, 진도건의 의식이 문득 혈마에게 닿았다.

그보다 앞서 제안받기도 했었으니 진도건에게 이어진 제안과 대화들을 듣고는 뭔가 반응을 보일 법도 한데 조용히 침묵하는 게 의아했기 때문이었다.

“흐음…….”

진도건이 반응을 기다렸다는 걸 느꼈었는지 혈마가 호흡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보다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어가길,

“나시드, 네 제안을 받으마.”

혈마의 대답에 나시드의 얼굴에 흐르던 잔잔한 미소가 좀 더 환하게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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