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4화 – 제66장. 신격(神格) (4)
최현걸이 거의 직각으로 꺾여버린 철단봉을 휘둘러 날아드는 창의 목 부분을 휘감아 당겼다. 그러나 곧장 손에서 철단봉을 놓으며 황급히 땅바닥을 굴렀다.
푸푹!
그가 있던 자리로 두 자루 창대가 지면에 꽂혔다. 창 하나는 거의 얼굴을 스치듯이 지나치면서 간담이 서늘해졌지만, 동시에 자신이 적룡단원 기마의 몸통 아랫니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항룡십팔장 항룡유회.
퍼엉!
말의 육중한 거구가 공중에 뜰 정도로 최현걸의 장력은 강력했다.
푸르륵!
그 일격에 기마가 거친 호흡을 토해내면서 코와 입으로 피를 뿜어냈다. 내장이 박살난 것이었다. 거기다 고통 때문에 잠깐 펄쩍펄쩍 뛰어대다가 풀썩 쓰러지는데 최현걸은 이미 아래에서 빠져나간 뒤였다.
“놈을 죽여!”
바로 지척에서 들려오는 살의 어린 목소리들에 등골이 절로 오싹해졌다.
최현걸은 사선대형 후미를 담당한 고수들 가운데서도 두 번째 줄을 담당했었는데 첫째 줄이 아니었다는 게 천운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순간과 거리를 단숨에 좁혀온 적룡단의 돌격은 과연 마웅패의 지휘 아래서 완전히 다른 위력이 되었다.
강기의 방벽까지 펼쳤음에도 첫째 줄에 있던 대부분 고수가 사망했던 걸로 보였고 최현걸이 있던 줄이나 바로 뒷줄도 상당수가 죽거나 나가떨어져 흩어져버렸다. 그렇게 그 한 번의 돌격에 살아남은 자들 또한 순식간에 사방이 적군으로 들어차게 되면서 상당수는 또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게 분명했다.
그 두 번의 순간에서 살아남더라도 지금 최현걸처럼 사방을 적들에게 에워싸인 채 합공을 맞으며 고군분투하고 있으리라.
이 적군의 포위를 뚫고 동지들에게 닿을 수 있을까?
사방에서 창과 칼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최현걸의 기민한 움직임은 매우 위태로워 보이는 가운데서도 상처 없이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하고 있었다.
“이 쥐새끼 같은 놈이!”
적룡단원들도 약이 바짝 올랐다.
최현걸은 이 전장에서 그 누구보다도 땅바닥과 가장 친숙한 사람이었다.
개방도로서 지면을 구르는 것 또한 보법처럼 활용할 경지인 상황에서 숲처럼 둘러싼 말들은 좋은 방패막이가 되어주고 있었다.
펑! 펑! 펑!
최현걸도 꽤 영리하게 굴었다.
말 아래에서 복부를 때려서 죽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으나 머리를 가려줄 지붕 역할도 해줘야 했기에 불규칙하게 간격을 둔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은 자체로도 매우 어려운 일이어서 만약 이동의 흐름이 정체된 난전 상태가 아니었다면 감히 엄두도 못 냈을 시도였다.
“거리를 더 벌려!”
적룡단원들의 대응하려는 외침이 최현걸의 귀에 들려왔다.
‘놓치면 안 돼!’
최현걸의 눈에도 말들이 멀어지는 게 보이자 급히 땅을 구르며 좌측 말에 따라붙으려 들었다.
하지만, 그 말은 적룡단 부단주 테시의 말이었다.
최현걸은 그래도 함께 사선대형 후미를 맡은 창천단원들 중 생존자가 있을 거란 약간의 희망을 걸고 있었지만, 사실상 구 할 이상이 모두 죽었다고 봐도 될 정도로 상황은 극단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테시는 적룡단의 허리쪽 지원을 위해 움직여야 했지만, 부대 중심에서 최현걸이 버티면서 움직이는 데 지체되자 직접 노리기 위해 접근한 것이었다. 그리고 때마침 최현걸이 그의 말 밑으로 파고들려는 걸 포착하고선 즉시 안장 위에서 뛰어오르며 월도를 크게 휘둘렀다.
슈쾅!
도강이 수직으로 내려꽂혀 애마의 몸통을 반으로 가르고 지면에서 폭발했다.
“큭!”
먼지 속에서 최현걸이 튀어나오며 지면을 굴렀다.
말 사이를 구르던 것과 달리 정말 충격에 튕겨 나가 구른 것이었다.
다급히 몸을 일으켜서 사방을 살피던 최현걸은 어느새 그를 중심으로 작은 공터가 만들어졌음을 보았다. 그리고 그의 앞에 죽은 애마의 엉덩이를 밟고 넘어오는 테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잘못 걸렸구나!’
최현걸은 급히 땅에 떨어진 장검 한 자루를 줍는데, 바로 옆에 화산파 중년 도사의 시체가 눈에 들어왔다.
‘조해선(曺諧宣) 도사……!’
영은성의 사형이라고 해서 가깝게 지냈던 사람이 눈도 감지 못한 채 허리가 뒤틀려 죽은 모습을 보자 현실이 얼마나 최악인지 자각하게 되었다.
챙!
매화검과 월도가 거칠게 맞붙었다.
채채챙!
최현걸은 검이 어색했으나 타구봉법 초식의 절묘함은 테시가 느끼기에는 칼날의 날카로움 때문에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그로 인해 최현걸은 처음엔 호각지세라고 여겼으나 섣부른 판단이었음을 이내 깨달았다.
두 사람이 십여 합 겨뤘다가 일시 서로 거리가 벌어지는 순간, 최현걸의 등을 노리고 다른 적룡단원들이 창이 쏟아졌기 때문이었다.
타타탕! 카가각!
‘아차!’
테시의 강함 때문에 잠깐 그에게만 집중했었던 최현걸이 공중에서 다급히 몸을 비틀다시피 돌리면서 검을 휘둘렀다.
“큭!”
간신히 치명상을 피했지만, 몸 여기저기 꽤 깊이 스치면서 먼지로 뒤집어쓴 옷에 붉은 피를 더했다.
다급히 지면을 구르며 다시 공터의 중앙으로 들어오자 이번에는 테시의 월도가 날아들었다.
카캉!
불안정한 자세로 간신히 막아낸 최현걸의 눈빛이 무너지는 신체 중심과 함께 흔들렸다.
‘이것이 전장인가……!’
쓰러질 듯 뒷걸음질 치면서 시선이 하늘을 향해 있던 최현걸의 시야로 떨어지는 칼날들이 보였다.
정정당당한 대결을 기대하는 건 당연히 무리였다는 걸 깨달으면서 발로 힘껏 지면을 밀었다. 그에 따라 몸은 유연하게 옆으로 흐르듯 움직이니 떨어지는 칼날들은 잔상만 베고 오히려 최현걸의 매화검이 예리하게 번뜩였다.
타구봉법 궤슬훈구(撅膝訓狗).
촤촥!
매화검에서 검기가 뻗어나가며 두 마리 기마의 무릎을 절단해버렸다. 앞으로 고꾸라지는 두 적룡단원 사이로 과감히 몸을 거꾸로 날리면서 일검일퇴(一劍一腿)를 질렀다.
푹!
퍽!
검이 목을 꿰뚫고 넓적다리가 턱 아래로 목을 노리고 제대로 파고들었다. 동시에 공중제비를 도는 최현걸의 시야로 테시가 쫓아와 달려드는 모습이 잡혔다.
“흐앗!”
쉴 새 없이 움직여야 했다.
한 손으로 머리가 달아난 몸뚱이를 붙잡아 테시를 향해 던지면서 주인 잃은 말 엉덩이를 걷어차 옆으로 밀어 그 옆의 적룡단원과 부딪치게 했다. 동시에 그 반동으로 목을 차인 바람에 뒤로 눕다시피 하며 고통스러워하는 적룡단원을 덮쳐 검을 내리쳤다.
캉!
한 자루 강창이 노려지던 적룡단원 옆을 스치면서 최현걸의 매화검을 쳐올렸다.
검날이 목젖에 닿기 직전에 벌어진 것이었으니 적룡단 천호장 부신(夫迅)에게 그 찰나의 틈을 파고들 실력이 있었다.
“오래 버텼다!”
슈악!
텅!
부신이 강창의 아랫부분을 휘둘러 최현걸의 어깨를 때렸다. 반사적으로 공력을 집중해서 어깨가 부러지는 건 막았지만, 충격에 밀려난 최현걸은 어쩔 수 없이 다시 테시와 검을 맞대었으니 앞뒤로 진짜 고수들에게 둘러싸여 진퇴양난에 빠져버렸다.
‘제길, 여기까진가…….’
최현걸의 머릿속에 문득 사면초가에 빠진 초패왕 항우의 고사가 떠올랐다.
사방이 온통 적으로 붉은 갑주 일색.
먹잇감을 쳐다보는 듯한 눈빛으로 하나같이 비웃음을 짓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채채챙!
테시와 부신의 합공을 어떻게 받아내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매 합이 위태롭기 그지없었고 발은 몇 번이나 헛디디고 미끄러지는지 몸은 휘청거리기 일쑤였다.
표정과 눈빛이 흐리멍덩해지고 전의를 잃은 듯 힘 빠진 몸짓은 흐느적거려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아아……, 이젠 정말 죽을 거야……. 사방이 적, 적, 적……. 다 내 목숨을 노려…….’
테시와 부신은 당혹스러웠다.
흐느적거리는 움직임에 이상하게 월도와 강창이 닿질 않고 있었고, 정작 그 사이에서 사선의 외줄 타기를 하는 최현걸은 눈빛에 초점마저 잃은 채 들리지도 않을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게 아닌가?
테시와 부신도 그 이상한 움직임에 계속 놀아날 생각은 없었다.
어쭙잖은 공격이 피할 틈을 주었다면 그럴 틈을 어디에도 만들지 않으면 된다.
두 사람이 최현걸의 어깨 너머로 빠르게 눈을 맞추면서 동시에 움직였다.
두 사람이 원을 그리듯 움직이며 서로 맞부딪칠 것처럼 절초를 펼치니 그 사이에 있던 최현걸은 어디에도 탈출할 공간이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 속에서 순간 눈에 초점이 살아난 최현걸이 몸을 신속하게 돌리면서 검과 좌장으로 동시에 각기 다른 초식을 펼쳤다.
항룡십팔장 용전어야(龍戰於野).
좌우 허실을 뒤바꿔 공격하는 초식을 응용하여 우검으로 부신의 창을 쳐내는 척하다가 몸을 회전하는 기세 그대로 좌우를 전환한다.
타구봉법 조주구련(抓住狗鏈).
손을 비틀 듯 뒤집으니 우검이 기묘한 궤적을 그리면서 월도의 중간 궤적을 가로챈다.
항룡십팔장 신룡파미(神龍擺尾).
좌장은 자연스럽게 용전어야의 허초를 기점으로 뒤를 향해 장력의 연환을 가져가 창대를 쳐낸다. 그리고 절묘하게 얽히는 초식의 맞대결 속에서 폭발하는 공력의 압력을 견디기 위해 호신강기도 함께 집중한다.
콰콰콰쾅!
경력의 폭발과 함께 먼지를 뚫고 최현걸의 신형이 날아갔다.
검이 부러지고 온몸이 터져나가 피로 물들어 다른 적룡단원들 앞에 떨어진다.
그런 최현걸에게 테시와 부신은 치를 떨고 있었다.
그 짧은 순간에 연속으로 초식을 펼쳐서 대응하는 능력은 두 사람이 이룬 경지를 아득히 뛰어넘었다. 그 증거로 최현걸이 중간에서 일으킨 변화로 인해 두 사람 서로 몸을 거시게 부딪치면서 하마터면 테시의 월도가 부신의 다리를 자를 뻔했으니 최현걸로선 아쉬울 순간이었다.
반면 최현걸은 적룡단원 무리 앞에 떨어지는 와중에도 정신은 놓질 않고 있었는데, 할 만큼 했다는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빠르게 지나가는 창공의 풍경.
땅에 등을 부딪치는 순간, 눈에 들어오는 적룡단원들의 먹잇감을 노리는 눈빛들 그리고……,
‘무심한 하늘, 얄궂게도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죄다 적들, 저 창들에 찔려 죽는 건가? ……자주색 안개, ……꽃, ……마른하늘에 ……날벼락?’
고통조차 잊을 만큼 멍한 기분으로 하늘을 바라보던 최현걸의 시야에 들어오는 친숙한 존재들.
슈아아악-!
어느새 날아와 최현걸을 둘러싼 적룡단원들 한가운데 떨어진 영은성이 검을 휘두르자 사방에 치명적인 자색 꽃잎의 검기 수십 개가 피어나 휘몰아쳤다.
“끄아악!”
영은성의 검기는 창천단 합류 이전과 이후로 구분 지을 정도로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훨씬 날카롭고 직접적이며 주저함이 없었다.
선두에서 적극적으로 싸움에 임했으며 그 결과 사선대형에서도 구치상 바로 뒤에서 자신의 검기를 펼칠 정도가 되었다. 그런 그가 적룡단 허리를 뚫자마자 후미의 위험을, 최현걸의 위험을 느끼고는 곧장 적들을 돌파하여 날아온 것이었다.
물론 그렇게 성장한 영은성도 손쉽게 적룡단을 뚫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런데도 결국 여기까지 뚫고 온 것은 적멸당의 창천단 지원 명령에 움직이던 중에 영은성을 발견한 천서은 덕분이었다.
쿠르르르…….
쩌저저정!
천서은이 푸른 벽력을 몰고 테시와 부신을 한꺼번에 덮쳤다.
“크악!”
“컥!”
벽력의 굉음이 가히 하늘마저 부술 듯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와 좌중의 이목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그녀의 아름다운 용모마저 푸른 뇌전의 섬뜩함에 가려질 정도였다.
“어때? 아직 살아있어?”
그녀의 목소리가 카랑카랑 들려왔다.
최현걸은 자신에게 내민 영은성의 손을 붙잡고 일어나면서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과 그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괜찮나?”
“하, 씨……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진짜 죽는 줄 알았는데.”
최현걸이 눈가에 눈물까지 고이며 대답하자 영은성이 피식 웃으며 천서은 쪽으로 슬쩍 시선을 던졌다.
“훗. 여긴 괜찮습니다!”
“좋아, 네 단짝 옆에 두고 잘 지켜. 지금부터 여길 뚫고 나갈 테니까.”
영은성의 힘찬 대답에 천서은이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씨발! 아무도 못 빠져나가!”
테시가 투기를 발산하면서 소리치자 천서은의 얼굴에 띤 미소가 조소로 변하였다. 그리고 다시 두 눈에 노기가 차올랐다.
“이 전장은 움직이는 사체가 거의 없어서 불쾌한 건 없다고 생각했는데, 죽은 아군들이 너무 많이 보여서 열받아. 그래서 부탁하는데 열심히 저항해줘. 지금 힘이 주체가 안 돼서 기왕이면 오는 놈은 다 죽일 거거든. 아, 걱정 하지마. 시체가 돼서 일어나도 또 죽게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