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352화 (352/432)

352화 – 제66장. 신격(神格) (2)

* * * *

빛에 휩싸이면서 나시드의 목소리가 들린 직후, 눈부심에 감았던 눈을 다시 떴을 때 진도건은 낯선 땅에 발을 딛고 서 있었다.

혈마는 여전히 그의 안에 있었고 옆에는 나시드와 조강선이 함께 있었지만, 그들이 선 땅은 수초가 흐를 때마다 연속해서 풍경이 뒤바뀌었다.

똑같은 풍경은 하나도 없었다.

자연환경이라면 익숙한 풍경도, 낯선 풍경도 지나갔다.

우거진 밀림, 황폐화된 토지, 끈적한 늪지대, 붉은 사막, 하늘에 구름과 같이 떠 있는 섬, 얼어붙은 빙하와 설원 등…….

이 땅에 존재하지 않을 법한 가혹한 환경도 있었다.

가혹한 열기를 뿜어내는 불타는 대지나 그 수초라는 잠깐의 시간 동안 머문 것만으로도 폐부를 찌르는 듯한 탁한 공기의 땅, 잠깐 선 것만으로도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심하게 펄럭일 정도의 돌풍을 맞는데 폭염과 혹한이 동시에 뒤섞인 기류를 느낀 곳도 있었다. 또는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때로는 친숙하고 때로는 어색하며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 압도하는 문명의 풍경도 있었다.

시각적인 자극에 그치지 않고 그곳의 공기를, 온도를, 땅의 질감을, 잠깐이나마 지나친 인간부터 동물 등 생물들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엄청나게 많은 정보의 파도 속에서 차마 인지하기 두려운 만큼의 많은 시간이 흘러버렸다.

그 시간 속에서 나시드는 진도건의 머릿속에, 혈마의 머릿속에 많은 이야기를 흘려보냈다.

이미 현재 사는 세상에서의 지식으로 가득 찬 머릿속에서 다른 세상의 방식이나 가치관, 개념 등이 쉽게 자리할 수는 없었지만, 유사한 부분도 많았기에 이는 이후 나시드가 밝힌 그녀의 의도를 이해하는 데 적잖은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들은 ‘별이 한가득한 밤의 밝은 땅’에 이르러서야 무변(無變)의 고요를 오랜만에 느낄 수 있었다.

나시드의 말에 의하면 이 세상은 그녀가 알던 다른 세상과는 조금 다르다고 했다.

그녀가 아는 ‘신’이란 존재는 매우 이기적이고 허영심이 가득한, 물론 그렇지 않은 신도 있으나 어쨌든 그런 신들이 세상마다 주류를 이루고 있어서 인간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려 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좀 다릅니다. 만약 이곳도 제가 봤던 다른 세상과 같은 방식으로 돌아가고 있었다면 천마신교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바로 특정할 수 없었을 거예요. 다른 세상의 신이 그들 세상에서 발휘하는 영향력보다 얕은 수준이어도 제 눈에 바로 도드라져 보일 정도라면…… 제 말뜻을 이해할 수 있겠나요?”

“어느 정도는…… 그럼 어떤 신인지도 알고 계십니까?”

“그의 이름은 ‘알리 라 다바스’. 다른 세상에서 인간이었다가 신의 분노를 사서 불사의 저주와 함께 노예가 되었으나 끝내 신격을 얻은 자. ‘음모’와 ‘공작’을 상징하며 그 대상을 파멸로 몰아넣는 혼돈의 신입니다.”

“그 신의 신격은 당신보다 우위인가요?”

“아니요. 하지만,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알 것 같군요. 왜 직접 처리하지 않는지 그걸 물어보고 싶은 것이죠?”

“맞습니다. 어떤 신인지도, 음모인지 공작인지 행해지는 집단이나 대상이 누구인지도 특정할 정도로 명확하다면 왜 직접 처리하지 않는 것입니까?”

“신격을 갖춘 신들이라면 누구든 본능적으로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인간들의 세상에 직접 개입하는 일은 벌여선 안 된다고 말이죠. 그건 다바스도 ‘이름 없는 진리’의 대리자인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는 말입니까?”

“흐음! 물론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어떤 세상은 신이라 불리는 존재들이 인간이 다룰 수 없는 권능을 지니고 태어났기 때문에 신앙과 추종이 더해져 신격을 갖춘 곳도 있습니다. 그런 곳은 각자 영역을 구분하면서도 직접적인 개입을 통해 문제 해결을 도모하곤 하죠. 그러나 이런 곳은 인간이 물리력으로 신을 위협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몹시 어려운 일이지만요. 또 다른 예로는 한 신이 그런 규칙을 스스로 깨고 나와 다른 신의 개입의 명분을 만들어주는 경우입니다. 이렇게 되면 신들 간의 전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커지고 끝내는 신과 인간 모두의 파멸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죠.”

“자멸할 길을 택하는 꼴이니 직접 개입하려 들지는 않는다는 거군요. 그건 저쪽도, 당신도 매한가지니까.”

“맞아요. 그리고 이곳의 신들이 인간 세상의 일에 초연한 존재들이라 할지라도 파멸의 징조가 보인다면 그때까지도 잠자코 지켜볼 생각은 하지 않겠죠. 또 이 세상에서 그나 저의 힘은 제한적으로 발휘되기에 이곳 신들의 공격을 감당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운이나 천마신교를 통해 일을 벌이던 건 ‘개입’이 아닙니까?”

“마인들이 힘을 각성하면서 마성과 마주한다는 걸 잘 알 것입니다. 당신도 비슷하게 혈마를 마주했으니 말이죠. 그것이 바로 신의 대리자로 선택되는 과정입니다. 알리 라 다바스는 혼돈을 사랑하고 분쟁을 즐기는 여러 신들의 영향력까지 끌어들였습니다. 신성이란 굳이 신과 직접 접촉하지 않아도 힘을 부여하는 것이 가능한데 그는 이 땅에 음모를 획책하면서 자신이 잘 아는 그런 신들의 영향력도 스며들 수 있도록 물꼬를 내놓은 것이지요.”

“……단지운이 신 다바스의 대리자, ……그것이 천마인가.”

“뒤에 숨은 그 새끼 진짜 이름이 ‘알리 라 다바스’였군.”

혈마가 지난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면서 중얼거렸다.

진도건은 그 말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과거 혈마가 무의식의 공간에서 단지운과 직접 대면했을 때, 비슷한 말을 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내 머릿속엔 한 가지 의문이 바로 떠올랐다. 그래서 물어보려는 찰나에 나시드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그가 다바스의 대리자인지는 확신할 수 없어요.”

“……그게 무슨 말이죠? 일월신마 냉소평은 단지운이 현재 천마신교의 최강자라고 단언했습니다.”

“그건 단지운 개인의 역량 덕분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까 말했듯이 신성을, 저들의 개념으론 마성을 부여하는 건 굳이 신과 ‘직접’ 대면하지 않아도 영향력 아래 둘 환경만 만들어주면 비슷한 효과로 힘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다른 신마나 마인들이 그런 것처럼요. 알리 라 다바스와 직접 대면하여 대리자로서 권위를 부여받은 인간은 오직 그들이 천마조사라 부르는 단용후 뿐입니다. 그의 아들인 단원진이나 손자인 단지운에게선 그런 접촉의 흔적을 읽지 못했습니다.”

“……단용후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 남은 건 단원진과 단지운뿐입니다. 말씀하신 설명이 무슨 차이인 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데, 어쨌든 그들을 처치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표면적으론 그렇게 보일 수 있습니다만, 단순히 힘을 받은 것과 대리자의 권한을 직접 받은 건 분명 다릅니다. ‘대리자’란, 그 신의 의지를 정확히 이어 수행할 수 있는 자격이면서 동시에 때때로 신이 그 몸에 직접 깃들 수 있는 ‘화신(化神)’의 그릇이기도 합니다. 이는 앞으로의 일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지점입니다.”

“……그렇다면 묻고 싶습니다. 천마나 다른 마도가 접한 마성들이 그런 신성의 일맥이라고 한다면 제 안의 혈마는 무엇입니까? 이 녀석도 신입니까?”

“널 죽음으로부터 구원해준 적도 있었으니 신 아니겠느냐? 크하하하!”

혈마의 웃음소리는 하등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리고 혈마도 반사적으로 농담을 던진 것뿐이지 실상 나시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혈마에 대한 최초의 의심은 다른 마성과 동일하게 다바스가 끌고 들어온 신의 영향력이 아닐까라는 것에서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 깨달았습니다. 혈마는 ‘이름 없는 진리’가 이곳으로 절 인도한 이유이며, 동시에 이 땅의 혼돈 속에서 잉태된 새로운 ‘신’이라는 것을요.”

나시드가 진도건의 붉은 눈을 통해 혈마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나, 기뻐하면 되냐?”

“기뻐하긴. 고작 다바스의 영향력만 받았다는 단지운의 힘에도 밀리는 녀석이 무슨 신이냐?”

“뭐 이 자식아? 그게 네가 밀린 거지, 어찌 내가 밀린 것이더냐?”

“혈마가 천마를 꺾고, 진도건이 단지운을 꺾고. 이제 인정해라. 네가 약했기 때문이라고.”

“흥! 만약 네놈이 순순히 내게 먹혔으면 내가 졌겠느냐? 놈은 일심동체(一心同體), 우린 이심일체(二心一體).”

“단지운이 주체고 천마는 상징이다. 그러니 네가 내게 먹혔어야 맞는 거야.”

“이 자식이 감히 혈마신(血魔神)에게 말 한마디 안 지고 말대꾸를…….”

“허허허……!”

지금까지 묵묵히 대화들을 듣고 있었던 조강선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분명 귀로는 혈마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리긴 했으나 눈에는 진도건이 혼잣말로 연극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진도건도 피식 웃음을 흘리며 더 대꾸하지 않았다.

꽤 진지한 대화만 나누던 중에 실없이 흘리는 웃음이 평정을 찾도록 도와주었다.

“나시드, 혈마는 아직 신이 아니지요?”

“맞습니다. 지금은 당신이라는 인간의 그릇에 머무르며 오로지 진도건이란 사람의 영향을 온 영혼으로 받아내고 있는 영성일 뿐입니다.”

“그런 혈마에게 당신이 기대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름 없는 진리’가 기대하는 건 무엇인지요?”

“그래, 어디 진의가 무엇인지 제대로 들어보자.”

진도건과 혈마의 물음에 나시드가 잠시 고심하는 듯한 표정이 되며 바로 대답하지 않아서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잠깐의 숙고 끝에 나시드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본래 ‘이름 없는 진리’는 우주의 근원을 관통하는 유일무이한 신이자 동시에 섭리와도 같은데, 이런 존재를 아는 신은 모든 차원을 통틀어서도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런 신들은 모두 적격한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알리 라 다바스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부정한 방법으로 모든 신, 모든 존재들의 근원을 엿보았고 ‘이름 없는 진리’를 곤란하게 만들 결심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름 없는 진리’가 아끼는 세상 하나에 큰 혼란을 일으켜야겠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것이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 * * *

기괴하게 솟은 붉은 아단지모 바위산들.

언제부턴가 짙은 운무가 내려앉아 사시사철 어느 때든 사라지지 않아, 가뜩이나 바람이 불 때마다 귀곡성이 들려오던 현상과 맞물려 귀신들이 눌러앉았다는 소문이 유목부족들 사이에 돌던 곳.

그리하여 마귀성이라 부르게 된 그곳의 중심지에 한 노인이 있었다.

하늘에서 그를 비스듬히 내려다보면 비틀린 송곳니처럼 솟아오른 봉우리들을 사방에 두고 있는 모습이 마치 악마의 아가리에 몸을 던진 것 같은 인상을 남길 것이다.

그런 위태로운 풍경 속에서도 중심지의 노인, 천마신교의 태상교주이자 역천마제 단원진은 여유로운 얼굴로 눈을 감은 채 귀곡성을 품은 바람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그렇게 서 있던 것도 거의 한나절이 지나갔다.

입공으로 운기조식과 함께 긴 시간 마음을 다스려야 했던 데엔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으니,

키이이잉……!

아주 오래전에 어렴풋이 들었으나 기억 속엔 명확하게 남아있던 기괴한 공명음이 귀에 꽂히는 순간, 단원진의 감겼던 눈이 천천히 뜨여졌다.

짙은 안개 속에서 올려다보는 시선 끝에 어둠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기류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은 어둠 한가운데에 ‘눈’이 나타났다.

어둠 속에서도 황금빛으로 빛나는 삼중원(三重圓)의 눈동자와 피처럼 붉은 공막(鞏膜)을 가진 외눈이 단원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때가 다가오고 있다, 알리 라 다바스.”

적금(赤金)의 삼중안(三重眼).

일명 다바스의 눈.

그가 탄생하고 신이 되어 머물렀던 세상에서 그의 강림을 마주할 때 나타난다는 현상이 이 땅에 나타났다.

“마음의 준비 따윈 이미 충분하겠지.”

“아아! 물론이다. 크하하핫!”

“돌이킬 수 없다.”

“장장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지켜봤으니 잘 알 텐데. 내게 두려움 따윈 없다는 것.”

“이 차원의 인간들은 꼬였어. 버젓이 존재하는 자기 땅의 신들을 두고서 말과 글로는 의지하는 척하면서 자기들이 뭔가 해보려다가 결국 실패를 반복하고 있지. 믿음과 기도를 간절하게 모은다면 분명 힘을 빌려줄 텐데 말이야. 그걸로는 성에 안 찬다는 것이지.”

“본인 얘기를 마치 남 얘기처럼 얘기하는군. 신에게 복수하기 위하여 신이 되려 하고 그렇게 결국 신이 된 남자가 말이야.”

“쿠후후!”

다바스의 웃음소리가 소름 끼치게 울려 퍼졌다.

“그래, 마침내 무대 준비가 끝나서 광대들을 기다리고 있는 게 훤히 보이는구나. 어디 지켜보겠다. 너의 야망이 정녕 신격에 닿을 수 있을지 말이야. 후후후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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