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351화 (351/432)

351화 – 제66장. 신격(神格) (1)

전쟁은 그 자체만으로도 수많은 죽음을 부르지만, 역병 같은 감염성 높은 질병이 겹치면 사망자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하물며 직접적으로 사람을 공격하려 드는 움직이는 시체들이니 죽음이 퍼지는 속도는 더 빠를지도 몰랐다.

그런 의미에서 하서주랑 초입의 전선은 그야말로 지옥의 진원지가 될 수 있었기에 속히 통제해야만 했다.

조태상과 고소덕이 군을 편성하고 천무경이 무림인들을 편성했다.

오초령까지 진군했던 것과 유사하게 전사군이 재편되었다. 이번엔 천무경이 실질적으로 군을 지휘할 수 있도록 권한을 일부 위임받았는데 새로이 떠오른 적들인 움직이는 시체들에 대응하기 위해선 무림인들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천무경은 무림 전력 중 수가 가장 많은 집단인 창천단과 백무당의 수장인 구치상과 남궁평이 각각 좌우익을 책임지기로 했다. 그리고 좌우익의 양군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호응하기 편하도록 서로의 거리가 지나치게 멀어지는 걸 피하며 움직였다.

그 후 천무경과 두 장군은 후군이 아닌 중군이 되어 양익의 속도에 발맞춰 강을 따라 다시 남하했다.

오초령과 난주성 사이의 산지에서 다시금 전투가 벌어졌다.

움직이는 시체들의 공격성은 끔찍했지만, 각 군은 장창진(長槍陣)을 펼쳐서 접근을 막았고 이따금 적룡단 군사들이 무공을 펼치며 돌입해올 때 각 무림 전력이 적시에 대응했다.

이런 대응은 무척 효과적이어서 직접 접촉하는 걸 최소화했는데, 특히 중요했던 지침이 만약 직접적으로 물리거나 감염이 의심되는 상황이 발생하면 동료라도 가차 없이 목을 치라는 것이었다.

때때로 따르지 않은 자들도 있어서 피해가 커질 뻔하기도 했지만, 군 사이사이 배치된 무림인들이 이런 상황을 예의주시하면서 끼어든 결과 감염자 하나로 일군이 전멸할 수 있는 상황을 막을 수 있었다.

물론 그러면서 성과가 아예 없던 건 아니었다.

중간지대쯤 도착해서는 싸우던 시체들이 스스로 무너지는 걸 보았다. 그 직후 퍼져나가는 부패의 독성 때문에 군사들 사이에서도 미처 대응하지 못해 죽는 자들이 발생하긴 했지만, 어쨌든 스스로 일어난 시체들이 일정 시간 뒤에는 다시 썩고 부패하여 진정 죽음에 이른다는 걸 깨닫게 된 계기였다.

그렇게 지나온 길들을 샅샅이 뒤지고 다시 외곽으로 정찰자를 보내 새어나간 시체가 없는지 확인까지 한 끝에 그들은 마침내 난주성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양군의 사기는 이미 크게 떨어져 있었다.

“동료들의 목을 자기 손으로 직접 치는 경우도 더러 있었던 데다가 절대 정상적이라고 볼 수 없는 전투들이었으니 이런 싸움을 어디까지 지속할 수 있는지 우려하는 분위기가 점점 퍼지고 있습니다.”

조태번이 보고하면서도 염려 섞인 얼굴로 형의 표정을 살폈다.

조태상의 얼굴은 그가 보고하기 이전부터 이미 근심이 가득했었는데 보고 내용도 부정적이다 보니 좀처럼 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조 장군.”

조태상이 고개를 돌려 고소덕을 바라보았다.

조태상은 이미 고소덕이 불안한 눈빛으로 자신의 눈치를 살피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비록 양군이 연합으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모든 결정은 조태상이 바라보는 방향을 근간으로 하고 있었다.

금과 서하 양군의 군사가 무림의 전쟁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이 상황은 사실 서하 흥경의 상황이 정리되고 금 황제가 국경의 선을 그었을 때 이미 끝났어야 했다. 그런데도 여기까지 온 건 조태상의 의지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시 나아가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부시증(復屍症)의 확산은 잘 차단했고 앞으로는 전투에서 이길 때마다 시체들의 목을 자르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이런 내부 판단이 적절한 수준인지, 부족한지는 알 수 없다. 그리고 모든 전황이 뻔한 상황으로만 흘러가진 않을 거라는 것도 안다. 이미 예측 불가능한 상황 한가운데 있는 셈이니까. 그렇다면…….’

조태상의 길어지는 고심을 고소덕과 조태번 뿐만 아니라 지휘부 내 다른 부장들도 불안함을 삼키면서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그리고 대부분은 심중에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펄럭.

그때 지휘부로 천무경이 들어왔다.

그가 들어오고 나서야 부장들은 지휘부 안에 어떤 무림 인사도 배석하지 않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천 맹주님.”

조태상이 천무경을 부르며 맞이했다. 나름 옅게나마 미소를 지었다고 생각했으나 그마저도 이내 굳은 표정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조 장군님, 그동안 감사했소이다. 여기까지 나서주신 걸 잊지 않겠습니다. 부디 국경의 감시를 강화하여 부시증이 번지는 걸 경계하시기 바랍니다.”

“천 맹주님, 소장은 아직 결정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아닙니다. 마교의 의도는 명확합니다. 부시증으로 우리에게 큰 피해를 입히려는 목적도 있었겠지만, 기본적으로 일반군에 감당할 수 없는 공포를 안겨서 저들이 서하군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처럼 동등한 수준으로 무림의 처지도 끌어내리는 것입니다. 놈들은 보기 좋게 성공시켰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제장 여러분들?”

천무경이 지휘부 내 장수들을 돌아보며 묻자 모두 고개가 절로 떨어졌다.

무림의 고수들과 함께 싸우면서 끌어올렸던 전의가 부시증의 참극으로 확연히 꺾여버린 게 두 눈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러나 천무경도 그런 그들을 탓할 수는 없었다. 무림인들이라고 그런 두려움에 면역일 리는 없었다.

다만 현재 무림 전력의 주축인 천무방이 복수의 의지를 대단히 불태우고 있기에 두려움이 좌절로 확산되는 걸 막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시점에서 필요한 것은 더욱 적극적인 전투와 신마급 대마두의 머리였으니 지금 연합군의 땅에 떨어진 사기는 방해만 될 뿐이었다.

“천 맹주님, 다시 논의하여 계획을 짜보는 게 어떻습니까? 신중히 나아가 안정을 도모하며 싸운다면…….”

천무경은 조태상 형제를 두루 보며 미소를 지었다.

“두 장군께선 북부 초원 전쟁 때부터 본맹과 연이 있었지요. 젊은 장수들임에도 군을 지휘하는 능력에 감탄스럽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다루기 어려운 무림인들도 능숙하게 지휘한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그리고 옆에서 지켜보면서 조 장군을 본 맹주도 진정으로 인정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함께 싸우는 건 역시 여기까지가 좋겠습니다.”

“이미 결심하셨군요. 제가 무슨 얘길 해도 듣지 않으실 눈빛입니다.”

“허허허.”

천무경이 손으로 흰 수염을 쓸며 웃었다. 그리고 조태상의 눈을 보는데 다른 장수들과는 달리 눈빛이 살아있음을 느꼈다.

전장의 맹장인 조태번조차 모호한 느낌이었으니 저 눈빛에 숨겨진 뜻이 무엇인지 궁금해지면서도 그의 열의가 지나친 감이 있다고 여겼다.

“조 장군, 진심으로 조언하건데 군을 물리는 것이 좋습니다. 군을 움직이는 데 신중을 기할수록 놈들은 그만큼의 시간을 벌어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부시증을 확산시키려들 것입니다. 만약 어느 순간 시체들을 통제하는 데 실패한다면 결국 사태는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번지게 될 것이고 그 시점에 이르면 장군이 책임질 수준을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놈들은 반드시 그렇게 할 것이에요.”

“저도 맹주님께서 우려하시는 걸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저도 그런 상황은 피하고 싶고요. 하지만, 맹주님께 했던 약속도 지키고 싶습니다.”

“후후! 이 노맹주(老盟主)도 아쉬울 따름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무림에겐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번갯불처럼 적의 심장에 들이닥쳐서 이 모든 사태를 해결할 기회 말입니다. 그러려면 무림과 군은 다시 갈라지는 게 좋습니다. 장군께서도 충분히 이해하실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제가 이해하지 못한다면 맹주께서 어찌 소장의 말을 잘 따라주셨겠습니까? 그럼 소장은 후방에 남아서 다시 도울 방법을 고민해보겠습니다.”

조태상의 말에 여러 사람의 눈빛이 반짝였다.

누군가는 드디어 전쟁이 끝났다는 생각에, 누군가는 말속에 뼈가 있다는 생각에.

‘순순히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군.’

천무경은 조태상 형제가 부디 그러길 바라는 마음으로 찾아왔었으나 지금은 적어도 그 부분에선 더 설득하는 게 무의미하다고 여겨졌다.

“맹주님과 창천맹, 천무방의 무운을 빌겠습니다.”

“그럼.”

조태상 형제와 고소덕 장군 이하 제장들 모두의 포권을 받으면서 천무경은 지휘부를 나왔다. 그의 발걸음이 길게 옮겨져 도달한 곳은 난주성 내 공터였으니 그곳엔 창천단과 천무방 전력 모두가 모여있었다.

천무경이 구치상을 먼저 보았다.

“구 단주님, 창천단은 준비되었습니까?”

“모두 고대하고 있습니다.”

상당수가 사파였으나 전체적인 전력은 정사 연합조직이었던 창천단은 앞으로 벌어질 싸움에 있어서 주체적인 역할을 맡으리란 책임감에 저마다 마음의 준비를 다진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겐 언제나 선봉에 서서 싸워주는 칠성도존 구치상이 단주로서 함께 하고 있었다.

천무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엔 백두기와 남궁평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천무방은 준비가 되었나?”

“놈들은 반드시 대가를 치를 것이외다.”

“영광스러운 싸움이 될 것입니다.”

백두기와 남궁평이 차례로 대답했다.

오초령에서 전사한 장태환으로 인해 천혼당이 전신인 백두기의 적멸당은 그 어느 때보다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노지신에 이어 장태환까지 천무방의 큰 어른 두 사람을 앗아간 셈이니 말 그대로 적(敵)을 붉은(赤) 피로써 멸(滅)하여 이 고리를 끊어낼 태세였다.

인혼당을 주축으로 하여 방외 무림인들을 대거 영입해 구축한 백무당은 그간 남궁평이 보여준 놀랄 만한 무위에도 불구하고 이제야 천하제일인 파천무봉 천무경과 함께 싸운다는 생각에 흥분해 있는 상태였다.

“충분하군. 모두 앞으로 쉴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우리의 전진은 마교주의 머리통을 부수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을 테니 말이다. 뒤처짐 없이 따라오도록.”

“오오!”

함성과도 같은 탄성이 전체로부터 짧게 터져 나왔다.

그것으로 충분했으니 모두의 하늘 위를 가르며 천무경의 신형이 날아오르자 수천에 이르는 무림인들이 일제히 경공을 펼치며 그 뒤를 따랐다.

이를 제법 떨어진 곳 높은 지대 위 지휘부에서 지켜보던 조태번이 진정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그야말로 수천 마리의 수리 떼가 날아올라 하늘에 파도를 그리는 것 같습니다, 형님.”

“번아.”

“예.”

“부장들의 기강이 해이해지지 않도록 단속하거라. 그리고 고소덕 장군께는 예정대로 천수성을 지켜달라고 하거라.”

“역시 이대로 후퇴하진 않을 생각이군요.”

“마교가 무림과 군이 협력하지 않길 바란다면 그리 해주면 된다. 천 맹주가 패할 리는 없으니 그들이 지나간 길을 적당히 시간과 거리를 두고 따라간다면 공적은 속이 비어있어 의미가 없겠지만, 약속은 어찌어찌 지킬 수 있지 않겠느냐?”

“……그거 괜찮은 생각이군요. 즉시 가서 전달하겠습니다, 형님.”

조태번이 몸을 돌려 지휘부 안으로 돌아갔다.

조태상은 여전히 천무경 외 무림인들이 떠나간 방향으로 시선을 주고 있었다.

‘애초 창천맹과 협력하면서 공적을 쌓으리란 기대를 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그러나 완안홍균이 진군 목적에 선을 그은 이상, 설령 부시증 따위가 없어서 옥문관까지 수월하게 진격했다고 하더라도 헛심만 켠 채로 얻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것이야. 하지만, 무림이 뒤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는 마당에 내가 받은 도움은 지대하니 어찌 쉽게 외면할 수 있을까? 군 사기가 꺾였다 하여 그냥 회군한다면, 진도건 자네에게도 내가 너무 우습게 보이지 않겠나? 자네가 아니었으면 난 저 몽골초원의 한 줌 흙이 되었을 운명이었을 텐데 말이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