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3화 – 제64장. 해제(解除), 해방(解放) (3)
뜨거운 열기가 손바닥을 자극했다.
공력으로 억눌러보려 했으나 거센 열기의 저항이 일어 손바닥의 고통이 더 극심해졌다.
이내 혁련제의 경고가 떠올랐다.
탐욕에 대한 경고보다 이 정도로 통제하기 어려운 열기를 경고해주는 게 맞았다는 생각과 함께 허공섭물을 사용하여 손바닥에 간극을 두고 공중에 띄웠다. 그리고 화룡도까지 챙긴 후, 시선을 돌려 강정학과 양자성의 대결을 바라보았다.
카카카캉!
연신 울려 퍼지는 검명이 귀를 요란스럽게 자극했다.
염황신마 혁련제와 사투를 벌이고 그 폐해로 전신에 화상까지 입은 강정학이 보여주는 신위도 놀라웠지만, 그런 상대에게 연신 밀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양자성에게 더 기대하는 건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칸다는 먼저 혁련제의 화룡도를 왼손에 돌린 후, 품에서 자신의 병기를 꺼냈다.
이곳에 오기 직전 강도혁의 검격을 막아내는 데 썼던 한 척 길이의 금강저(金剛杵)였다. 손잡이 양쪽으로는 오고저(五鈷杵)로 다섯 개의 가지가 달려있는데 한쪽은 발톱처럼 오므린 형상이었고 다른 한쪽은 가지들이 서로를 휘감듯 모여 뾰족한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도검과 같은 중병기와 비교하면 효용성이 떨어지는 병기임에도 스칸다가 이것을 사용하는 이유는 이 금강저가 주술적인 병기로써 강기의 형질(形質)을 구성하는 매개(媒介)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었다.
위타증천검(韋陀增天劍).
금강저로 기운이 응집되면서 검강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보통의 검의 형상이 아닌 크고 무거운 중검(重劍)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무게감이 전혀 없으면서도 중검의 파괴력을 본뜬 그러한 검강을 뽑아낸 채 위타천이 발을 움직였다.
군신행(軍神行).
나아가는 데는 도약의 한 걸음이면 족하다.
두 다리의 동작이나 발디딤 따위도 필요 없이 몸이 길게 쭈욱 늘어나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신속하게 날아가 강정학의 뒤를 덮쳤다.
패앵!
중검강(重劍罡)이 허공을 가르며 무서운 소리를 냈다.
강정학은 스칸다를 놓친 적이 없었던 만큼 무서운 속도로 접근하자 적잖이 놀랐다. 그러나 무식하게 휘두르는 식의 공격을 허용하는 건 부끄러울 일이었으니 궁지에 몰려있던 양자성의 눈에도 당혹스럽게 비칠 정도의 단순한 공격이었다.
강정학은 화답하기 위해 스칸다의 머리 위 팔방에 새하얗게 불타는 스무 개의 검기를 형성하여 내리꽂았다.
그 순간 중검강의 길이가 늘어나면서 동시에 스칸다의 머리 위로 소용돌이치듯 뻗어나갔다.
카카카캉-!
검기들이 산산이 부서졌다. 그러나 백염극원의 검이 똬리처럼 튼 스칸다의 검강을 모두 갈라버렸다.
그때 스칸다는 이미 금강저로부터 검강을 분리시킨 후, 다음 일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파츠츠!
어느새 뇌정이 스칸다의 오른 주먹에, 금강저에 모여있었다. 그리고 금강저를 쥔 주먹을 내질러 떨어지는 검 앞을 절묘한 순간을 노려 간극을 두고 때렸다.
뇌공타(雷公打).
쩌정!
뇌정이 실린 기운이 금강저를 쥔 주먹과 강정학의 검 사이에서 터졌다. 강력한 반발력이 강정학을 공중으로 밀어냈으며 충돌점에 잔재한 백염극원의 검기가 쪼개지듯 흩어지는 뇌전을 따라 산산이 부서졌다.
“……감히!”
강정학은 의외의 위력에 조금 놀랐다가 이내 분노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양자성과 스칸다가 자신들이 이곳에 나타났던 방향으로 다시 달아났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움직임은 즉각적이었지만, 강정학은 뇌공타의 위력에 뒤로 떠밀린 상태였으므로 한순간에 거리가 크게 벌어져 버렸다. 그러나 강정학은 이대로 둘을 놔줄 생각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양자성을 반드시 검림에 되돌려 놓을 심산이었다.
퉁!
두 발이 지면에 닿는 즉시 공력을 실어 박찼다. 그러자 강정학의 신형이 두 사람이 도주한 길을 쫓아 빠르게 쏘아져 나갔다.
“게 서지 못할까!”
강정학의 호통이 산천에 올렸다.
양자성이 내달리면서 그 호통 소리를 듣고 어깨를 움찔 떨었음은 물론이었다.
‘……칫!’
양자성은 꽤 참담한 심정이었다.
천마신공을 익히고 마령검을 얻어 검마가 되면서 스스로 강해졌음을 자각하고 있던 그였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재가 되어 부서질 것처럼 보이는 전 스승 강정학의 검술은 그의 검을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내 검술은 모두 그에게서 나왔으니 나의 수들이 간파당한다는 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지칠 대로 지친 상대에게 내 마공이 이리도 맥을 못 출 줄이야. 더군다나 날 찌르고 벨 기회가 몇 번이나 있었으면서 위협에만 그쳤을 뿐 내 피를 보진 않았다. 정녕 내가 쟁취한 마공과 무력이 이토록 보잘것없는 수준이란 말인가?’
단순한 기력은 우위에 있었으나 강정학의 기세를 결코 누르지 못했고 결국 상대의 수에 놀아나는 꼴이던 것이다.
이것이 냉정하게 자신의 싸움을 돌아보고 내린 자평이었으니 후회, 분노, 수치심이 한꺼번에 뒤섞여 오고 있었다.
“정신 차리시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으니.”
“내가 밀리는 걸 보지 못했소? 그는 천하제일검, 백령신검이오. 어찌할 수 없는 존재란 것이오. 이대로 가서 후퇴해야만 하오.”
스칸다는 양자성이 강정학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거기서 양자성을 더 존중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아니, 오늘 여기서 강정학을 쓰러뜨린다.”
경어로 말하던 스칸다가 어투에서 경의를 제했음에도 양자성은 그걸 느끼지 못하고 황망히 따지기만 한다.
“염황신마도 죽었는데 대체 무슨 수로……!”
“염황신마는 후대선이 이을 것이다.”
스칸다가 손안에서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 염주를 보였다. 그리고 어느새 그들 앞에는 검림과 염황마종, 마니사가 다투는 전장의 풍경이 다시 펼쳐지고 있었다.
숱한 시체가 널려있는 전장의 한복판에서 양자성은 강도혁과 치열하게 다투는 후대선의 모습을 보았다.
‘후대선……!’
양자성은 스칸다와 그가 이끄는 마니사 마구니들과 함께 천도환위진으로 이동할 때만 해도 상상을 초월하는 풍경에 넋을 잃어서 일행에 후대선이 끼어있는지도 몰랐었다.
청해에서부터 화염산까지 동행했던 그때 당시의 후대선은 염황마종의 평범한 마교도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가 염황마종 내에서 꽤 높은 지위에 있다는 얘길 해준 사람은 선관자로 분했던 무영각주 권영서였다. 그리고 이곳에 이르러서 알게 된 그의 진짜 지위가 염황마종의 이인자이자 삼화룡의 수좌라는 사실은 충분히 놀라울 만한 일이었다.
그런 인식 속에서 눈앞에 보이는 염주가 그를 염황신마로 만든다는 사실은 마치 마령검을 얻어 검마가 된 자신과 대비되는 것처럼 보였다.
전장의 전세는 이미 천마신교 쪽으로 확연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검림의 검객들은 팔 할 넘게 죽어서 고작 열다섯이 남아있었고 염황마종이 40여 명, 마니사가 100여 명 남아서 검객들을 포위한 상황이었다. 천마신교로서는 확실한 승기를 잡은 것이고, 검림으로서는 정말 분투했음에도 불구하고 염황마종을 상대로 한 확실한 복수를 이루지 못한다는 현실감에 참담한 기분을 삼키고 있었다.
그나마 검림이 전의를 잃지 않은 건 강도혁을 포함한 사위검총의 서저위, 매연선, 이현탁 모두 생존하여 기세의 중심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서저위 등이 검객들 사이를 지키며 분투하는 동안, 강도혁도 넷을 상대로 밀리지 않으면서 끝내 기흉과 창윤의 숨통을 끊고 염파도 큰 부상을 가하여 물러나게 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그도 적잖은 부상과 기력의 상실로 인해 후대선과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치열하게 다투는 중이었다.
하지만, 검림의 전의는 다시 전장에 돌아온 스칸다와 양자성 때문에 흔들리고 말았다.
“양자성!”
강도혁이 양자성을 발견하고 놀라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그 너머 뒤로 백발을 휘날리며 쫓아오는 거무죽죽한 인형을 알아보고 깜짝 놀라 다시 한번 소리쳤다.
“사부님!”
그 순간, 양자성이 스칸다에게서 떨어져 강도혁에게 쇄도했다.
강도혁이 섬뜩한 살기를 느끼고 검을 휘둘렀다.
백염극원의 검기가 새하얀 궤적을 허공에 새겼으나 양자성에게 닿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일으킨 잿빛 검기가 강도혁의 검기를 살짝 빗겨 흘려보내면서 그의 신형을 훑고 지나갔다.
츄악!
“크억!”
강도혁이 비명과 함께 비틀거리며 무릎을 꿇었다. 가슴부터 옆구리까지 크게 베여 피가 흐르니 비록 깊이가 피륙에 그쳤다고는 하나 그동안의 싸움에서 가장 무거운 상처라고 할 수 있었다.
“양자성!”
“양자성!”
“양자성, 네 이놈!”
사위검총을 위시한 검림의 검객들부터 뒤쫓아오던 강정학까지 노기충천하여 동시에 양자성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그러자 양자성이 그 자리에 멈춰선 채로 다시 강정학을 바라보며 검끝을 겨눴다. 전보다 더 강한 마기의 기세가 폭발적으로 상승했음은 물론이었다.
“난 틀리지 않았어!”
양자성이 강정학을 똑바로 노려보며 소리쳤다.
그가 강도혁에게 달려들어 벤 것은 자기 시험과도 같았다. 강정학과 같은 검기를 구사하는 그를 벨 수 있다는 것으로 자신의 힘을 증명하려 한 것이었다. 강도혁으로서는 이미 지칠 대로 지쳐서 백염극원의 힘이 반감된 상태였으니 마른하늘에 날벼락 맞듯 여지없이 당한 것이었다.
그렇게 모두의 시선이 다시 충돌하려는 강정학과 강도혁, 양자성 쪽으로 쏠려 있었을 때, 스칸다는 이미 후대선에게 다가가 화룡도와 염주를 건네고 있었다.
“이것은……!”
“혁련제가 죽고 남긴 것이오. 이젠 당신이 새로운 염황신마요.”
후대선은 감정에 오래 매몰되지 않았다.
그는 망설임 없이 염주를 잡고 자신의 심장이 있을 왼쪽 가슴에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염주가 새빨간 광망을 뿌리면서 후대선의 가슴에 스며들었다.
“큭!”
순간 후대선이 신음을 토해내었고 그를 중심으로 엄청난 열기가 분출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스칸다조차 물러서게 만들 만한 열기였고 때마침 거리를 두자마자 거대한 화염이 그에게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전장에 갑자기 나타난 거대한 화염.
그 속에서 후대선이 왼손엔 자신의 용문도를, 오른손엔 혁련제의 화룡도를 들었다.
염룡마공 신위 화룡권.
활활 타오르던 불길이 일순간 뭉치더니 불기둥을 그리면서 양자성에게 쇄도하던 강정학에게로 뿜어져 나갔다. 그리고 후대선의 신형이 불기둥 속을 타고 어느새 강정학의 머리 위에 나타났다.
그와 동시에 합이라도 맞춘 것처럼 스칸다도 기다렸다는 듯이 검강을 일으키며 강정학의 측면으로 쇄도해 들어갔다.
그 순간에 강정학의 두 눈은 마치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듯 시야에 들어오는 상황의 흐름이 일목요연하게 들어왔다.
혁련제가 품었던 큰불을 이어받음으로써 비록 전대에 아직 미치진 못하더라도 그에 준하는 힘을 얻게 된 새로운 염황신마 후대선과 구주의 신마들에 준하는 실력을 가졌다는 천마신교의 위타천 스칸다였다.
두 명의 강적이 기습적으로 덤벼드는 과정에서 뿜어내는 기세는 이미 상당히 지쳐있던 강정학으로선 솜털이 쭈뼛 설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그래도 거기까지는 괜찮았으나 양자성마저 기회를 엿보고 자신을 향해 쇄도하며 검을 휘두르는 것을 본 순간, 그동안 강정학의 들끓는 심지를 억누르던 마지막 장벽이 무너져내렸다.
“성치 않은 몸이라고 봐줄 거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전 검마 양자성입니다.”
사부에게 도전할 그 당당한 패기마저 합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꼴사납게 되어버린 모습은 그가 기억하던 제자 양자성의 진면목이 아니었으니,
“흐아아아-!”
한 사람으로서 격노하고 사부로서 진노한다.
그에겐 더 이상 사정을 봐줄 한 줌의 여력조차 남지 않았으니 오로지 극기를 발휘하여 생존한 검림의 제자들을 지키기 위한 일념에 몰두한다.
백양소혼신공 이극의 백염극원.
백령검법 천망참살(天網慘殺).
새하얗게 불태우는 검기가 천지간에 그물처럼 펼쳐져 적들을 휘감으니 회피는 불가요, 나약한 자는 참극을 면치 못 하리라.
카카카칵-!
콰콰쾅!
세 종의 마기가 강정학이 펼쳐낸 검기 속에서 연달아 터져나갔다. 거대한 기운들이 일거에 폭발하면서 생긴 후폭풍이 일대를 휩쓸었다.
장내에 있던 자들의 눈엔 강정학의 검기가 세 고수들을 한꺼번에 삼켜버린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사정은 달랐다.
천망참살이 위력적인 검기임에는 분명했으나 이미 진기를 많이 소진한 강정학에게 스칸다, 후대선, 양자성 세 사람의 공격을 모두 담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특히나 스칸다와 양자성의 위력적인 공격에 검세가 흐트러지면서 후대선의 화염이 강정학을 직접 덮칠 정도였다.
하지만, 그 또한 강정학의 예측 범주 내였다.
백령검법 백령귀원(百靈歸元).
분산되었던 검기가 강정학의 백령검으로 회귀한다. 또한 그 기세의 경로에 있는 세 고수의 마기마저 휘말리게 하여 끌어모은다.
어느 순간 후대선의 심장을 정조준하는 혼탁한 색채의 거대한 검강.
상대의 힘마저 끌어들여 혼재된 기운의 덩어리는 그만큼 강력하면서도 기운 간 상충하는 성질이 많을수록 그 위력이 배가된다.
“막아!”
그 위험성을 알고 있는 양자성이 놀라 소리치며 후대선의 곁으로 몸을 날린다. 덩달아 스칸다도 후대선에게로 가까이 붙으니 세 사람이 친 강기의 방벽에 강정학의 검강이 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