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2화 – 제64장. 해제(解除), 해방(解放) (2)
“사람은 죽으면 육신은 거름이 되고 혼은 떨어져나와 대자연의 순리 속에 녹아든다네. 그러나 반선의 경지와 같은 수준에 이르게 되면 육신과 영혼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죽음이 속세에서 얘기하는 우화등선이나 성불과 같은 상태로 육신과 혼이 모두 대자연의 순리 속에 머물게 되네. 그리되면 세상의 이치가 순리대로 돌아갈 수 있도록 관장하는 지위에 자연스럽게 앉게 되는 것이니, 그 정도의 지위라면 자네를 이리 현현하게 하는 것 정도는 손쉬운 일이 아니겠는가?”
“칫, 대단한 인물 납셨군.”
“허허허.”
혈마가 고개를 다른 방향으로 돌리며 툴툴거리자 조강선이 웃음을 흘렸다.
“사부님, 그럼 성도에서 벌어졌던 싸움을 보신 것입니까?”
“이승을 떠났는데 어찌 볼 수 있겠느냐? 그러나 그렇게 기운이 모이고 또 세상에 있어선 안 될 마기가 그리 모여 싸우니 자연스레 알게 된 것이니라.”
조강선 스스로 죽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규정하자 진도건은 문득 현실감이 들면서 좀 더 이성의 기준으로 감정을 끌어내렸다.
“사부님, 우린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십시오.”
진도건은 이미 냉소평으로부터 여러 이야기를 들은 이후였기 때문에 조강선이 자신 앞에 이렇게 나타났다는 것 자체에 매우 무거운 의미가 실려있음을 인지했다. 그런 제자의 깨달음이 반가웠는지 조강선이 흐뭇하게 웃으며 진도건을 바라보고는 다시 앞쪽으로 멀리 시선을 던지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마도라는 것이 사상적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현재의 마도는 그런 의식적인 범주의 차원을 넘어 이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되는 것들과 결합되어 있단다. 그 악영향은 이미 천하에 폭넓게 퍼져버렸으니 그리 멀지 않은 해에 거대한 전쟁과 피바람이 몰아칠 것이야. 하지만, 언제나 최악이라는 걸 상정하더라도 그 이상이 존재하는 법이고 늦었다고 생각한 순간이 가장 적절한 시기일 수도 있는 법이니 이렇게 현세의 힘과 의식들이 모이고 있을 때 반드시 제거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세상은 그야말로 파탄에 이르게 될 것이다.”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되는 것들이라……. 흡사 내 얘기 같은데?”
“자네도…… 비슷하지.”
“비슷하다는 건 또 뭐야?”
“이 세상의 사념에서 태어난 혼돈의 존재이니 이 세상의 것임엔 틀림없지만, 그 방식은 자연의 섭리와는 동떨어져 있으니 있어선 안 될 존재이지.”
“킥! 거 섭섭하네. 면전에 대고 죽으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 뭐, 싸우자는 건가?”
“내가 제거해야 한다고 얘기하긴 했지만, 그것이 꼭 자네의 죽음을 뜻하는 건 아닐세.”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다 왔네.”
조강선의 말에 그에게 관심이 쏠려 있던 진도건과 혈마의 시선이 앞으로 향했다. 그러나 보이는 건 여전히 비슷해 보이는 모래언덕의 풍경뿐이었다.
‘달라진 건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던 진도건의 눈에 알 수 없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평범하게 흐르던 유사가 점점 가속하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꼬리를 물고 높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 수가 셀 수 없이 많았으니 전방에 보이는 모든 지점에서 변화가 일어났는데 그렇게 솟구친 모래들이 뭉치고 흩어지길 반복하며 뭔가를 이루기 시작했다.
“저게 뭐야……?”
혈마가 어이가 없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진도건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데 조강선이 옆에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
“내가 너희를 부른 여기는 영역의 경계라네. 이곳은 오직 자연적 기운과 영령(英靈)만이 흐르는 곳으로서 현세 속 일반의 존재는 이곳에 절대 발을 들일 수 없어. 오직 죽음만이 이곳을 지날 기회를 얻게 되니 속세의 사상으로 묘사하자면 황천(黃泉)과도 같은 곳이라네. 그런 곳에 다른 세상의 기운들이 스며들면서 부정역(不整域)이 만들어진 것이야.”
“영역의 경계란 무엇을 나눈 것이란 말입니까?”
“명부(冥府), 선향삼청(仙鄕三淸), 삼계육도(三界六道), 수미산(須彌山)……. 그런 물질적 한계를 벗어난 의식적 영속(永屬)과 정령(精靈)으로 발현(發現)된 세계.”
“그, 그런 것들이 실재한단 말입니까?”
“인간이 머무는 중간적 현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과 의식, 영혼들의 조화가 실재하게 만드는 것이다. 살아있는 육신을 가지고선 도달할 수 없는 곳이니 너도 오직 이 사부의 도움을 빌어 이 경계에 이르는 것이 한계일 뿐이다.”
“믿어지지 않는군요. 사부님께서도 그 정도의 존재라니…….”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존재다. 이승에 이 사부를 떠받드는 자가 누가 있겠느냐? 팔선이나 보살들에 비할 수 없으니 이 경계를 관리하는 수준, 그 정도가 이 사부의 격(格)이다. 그에 따라 천산의 ‘틈’에서 비롯되어 이곳에 발생한 저 ‘균열’을 이 사부가 봉인하게 된 것이니라.”
조강선의 이야기는 이 세상을 구성하는 우주적 차원의 일부 구조를 떠든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명백한 것은 그런 모든 추상적 차원이 실재하기 위해선 반드시 현세가 그 중심에서 근원적인 지위에 놓여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현세는 반드시 자연의 섭리에 따라 생몰이 이어지게끔 지켜져야 하며 섭리를 벗어난 무언가가 현세에 영향을 미친다면 각 차원에 속한 존재들은 이를 지킬 의무가 있었다.
물론 거기에 무관심한 존재들이 태반이었으니 현세로부터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조강선 같은 존재들이 직접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하나의 자연적인 관성과 같은 것이지만, 조강선은 현세의 기억과 그에 따른 연속된 의식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좀 더 적극적이라 할 수 있었다.
“천산의 틈은 일월신마가 주백자와 함께 보았다는 그것을 일컫는 것입니까?”
“그래. 그에 대한 설명은 일단 저 균열을 닫고 나서 얘기하자꾸나. 따로 만날 존재도 있으니 그녀가 혈마에게 관심이 지대한 것 같더구나.”
“응? 어떤 년인데?”
“허허허허!”
혈마의 반응에 조강선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그렇게 비하적인 표현으로 불려선 안 될 존재였다. 하지만, 어쩐지 혈마는 그 존재에 대해 인지하게 되더라도 계속 그런 표현을 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싸울 준비들은 되었느냐?”
조강선의 물음에 진도건은 조금 놀랐다.
“싸워야 합니까?”
“물론이다. 아마 잔뜩 튀어나올 테니 힘껏 싸우거라. 그녀도 너희의 힘을 보고 싶을 테니 말이야.”
“어떤 년인데 감히 나를 시험하려 드냐고?”
조강선의 알 수 없는 말에 진도건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혈마가 발끈했다. 그러나 곧 두 사람은 꽤 긴장한 채로 검을 뽑고 생성해야만 했다.
조강선이 손짓하자 제멋대로 궤적을 그리며 소용돌이치던 모래들이 일거에 무너졌다. 그리고 그 일대 중심지의 허공중에 말 그대로 갈라지는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균열이 점차 벌어지더니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명체들이 잔뜩 쏟아져서는 이쪽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저, 저게 뭐야? 아귀도 아니고 저따위로 생긴 축생(畜生)이 이 세상에 있을 리가?”
“허허허! 그러니까 내 말하지 않았느냐, 이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될 것들이라고. 도건아, 어디 실력을 보여보아라. 원류검결이 어디까지 성장했나 보고 싶구나.”
진도건은 무척 혼란스러웠지만, 조강선의 말대로 일단 싸울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건 누군지 모를 ‘그녀’의 시험이자, 사부의 시험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 쏟아지는 마물(魔物)들에게서 느껴지는 마기는 어째선지 익숙한 느낌이 들고 있었다.
‘이건……, 그래! 단지운, 그 녀석에게서 느꼈던 그것과 비슷해.’
생각이 거기에까지 미치자마자 그의 생각을 읽었는지 옆에서 내달리는 혈마가 실소를 흘리며 소리쳤다.
“크크크! 천마 새끼! 잘난 척은 아주 있는 대로 다 떨더니만, 역시 숨어서 눈치 보던 것만큼 뒤가 구린 새끼였구먼!”
“후훗!”
그의 생각이 전해진 것처럼 싸움을 향한 혈마의 투지가 진도건에게도 전해지며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무식하게 큰 이빨과 발톱을 드러낸 네발 달린 짐승 같은 것도 있었고 뿔과 날개가 돋아 흉측하게 생긴 마물도 있었다. 도마뱀이나 늪지의 악어 같이 생겼으나 더욱 크고 괴상한 몰골을 한 마물도 있었다. 종류도 다양한데 하나같이 흉포한 기운을 뿜어내며 쏟아지니 그 개체수만 족히 일이백은 되어 보였다.
하지만, 진도건과 혈마는 두려움 따위 품지 않았다.
그들이 느끼는 마물들이 가진 마기의 기척, 그 수준이란 기실 천마신교의 신마들이나 간부급 고수들에 비하면 많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진도건과 혈마는 거의 동시에 마물들을 향해 돌입하면서 각자의 무력을 펼쳤다.
혈마는 혈마기를 이용하여 파괴적인 위력을 펼쳐 보였고 진도건은 익숙한 듯 그 영향력 사이사이를 헤집고 다니면서 파천신공과 함께 검결을 펼쳤다.
그야말로 무쌍의 기세였으니 뒤에서 지켜보는 조강선도 걱정이 없을 정도였다.
“……어떻습니까? 여와(女媧)의 대리자여.”
조강선의 ‘부름’에 그의 옆으로 빛무리가 맴돌더니 한 여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복식은 이 땅의 여인들의 것과 같았으나 용모는 어딘가 이국적이고 조금 이질적이었는데 특히 눈동자가 없는 백안(白眼)에 조금 기다란 귀 그리고 조강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키가 눈길을 끄는 모습이었다.
“조 선인은 나를 여전히 그대들의 신의 이름을 빌려 부르시는군요.”
“당신께서 말씀하신 그런 존재라면 우리에겐 여와가 그러하니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당신의 모습 또한 여성이니 더더욱 그렇고요.”
“우리의 첫 만남 때도 그렇게 설명해주셨지요. 그땐 몰랐는데 지금은 알 것도 같습니다. 어째서 절 이곳으로 보내셨는지…….”
혈마와 진도건이 마물들을 상대로 소란스럽게 싸우고 있었지만, 그 소음이 조강선의 귀에는 잘 들리지 않았다. 온통 신경이 ‘여와의 대리자’에게 쏠려 있을 만큼 그녀가 내뿜는 존재감은 신비롭기 그지없었다.
* * * *
사부와 제자의 충돌.
그것은 어쩌면 상호보완적이지 않고 일방적인 방향으로 흘러가서 마음 놓고 마주 볼 수 없는 관계와 같은 양상처럼 보일 수 있었다.
“……큭큭! 쿨럭! ……애처롭구먼. 떠나간 제자에게 돌아와 달라 구애하는 사부의 몸부림이란.”
강정학과 양자성의 대결을 힘겨운 기색으로 바라보던 혁련제가 실소를 흘리며 중얼거렸다.
사부는 대단히 격노하고 있었고 그만한 기세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그러나 들끓는 애증은 결정적인 순간의 머뭇거림으로 반복되면서 마음 떠난 제자를 혼란스럽게만 하고 있었다.
그것은 사부의 자애로움일 수도 있었고, 동정일 수도 있었으며, 보잘것없는 성취에 대한 조롱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 녀석이 제자가 되는 걸 거부했던 게 천만다행이라 여겨질 줄이야……, 쿨럭쿨럭!”
“안정을 취하시오.”
혁련제는 푸념을 다시 늘어놓다가 기침했는데 입가로 핏물이 흘러나왔다. 그걸 본 스칸다가 염려 섞인 말을 했지만, 혁련제는 그런 스칸다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고는 실소를 흘렸다.
“클클클! 말에 참 영혼도 없다. 콜록! ……크흠! 그래, 날 구하러 왔는데 꼬락서니가 이러니 너도 난감하겠구나.”
“……업고 달리겠소.”
“됐네. 지금의 난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렸어. 하지만, 천마신교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 아무것도 돌려주지 않고 떠나지는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게나.”
“무슨 의미요?”
“나 혁련제, 천마신교 구주의 염황신마다. 나의 마정은 깨어졌지만, 아직 사라지지 않은 불의 의지는 후계자에게 넘길 수 있지. 후대선, 녀석이 다음 대 염황신마다.”
“내가 무엇을 전달하면 되는 것이오?”
“용은 언제나 여의주(如意珠)를 물고 있는 법. 염주(炎珠)를 만들어주마. 즉시 가서 후대선에게 넘겨줘. 화룡도도 같이. 그가 염주를 삼키면 힘을 얻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하겠소.”
스칸다가 대답하자 혁련제가 손을 내밀어 그의 멱살을 꽉 움켜쥐며 얼굴이 가까이 오도록 힘껏 끌어당겼다.
혁련제가 두 눈을 부릅뜬 채 스칸다의 눈을 쏘아보았다.
“스칸다여, 행여나 욕심부려 삼킬 생각 말아라. 염룡마공을 익히지 않은 자, 누구도 큰불을 제어할 수 없느니라.”
“……우려가 과하시군.”
“클클클! 그럼 잘 있거라. 하늘에서라도 지켜봐 주마, 나를 꾀었던 마도대의가 정말로 이뤄지는지 말이야. ……크하하하!”
혁련제는 말을 끝내자마자 멱살을 잡았던 오른손으로 스칸다를 힘껏 밀쳐냈다. 그리고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우며 마지막 웃음을 호탕하게 터뜨렸다.
화르르륵!
이윽고 혁련제의 온몸을 타고 불꽃이 일어나기 시작하더니 이내 온몸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러다 새까맣게 타들어 가던 육신의 가슴 부분이 쩍 갈라지더니 불길 속에서도 새빨갛게 빛나는 심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심장은 불길 속에서 녹아내리듯 물렁거리게 변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이내 작고 동그란 보주로 응축되더니 육신에 붙은 불길이 떠받들 듯 모이면서 점차 공중에 떠올랐다.
스칸다가 손을 내밀어 염주를 쥐었다.
치이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