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341화 (341/432)

341화 – 제64장. 해제(解除), 해방(解放) (1)

사막지대를 다시 지나게 되면서 대부분은 발이 푹푹 빠지는 땅을 또 밟게 된 것에 대해 껄끄러운 심정을 다스리고 있었다.

이때는 진도건의 선인의 바람도 오히려 모래 먼지만 더 날리게 할 뿐이지 이동하는 데 있어 그리 효율적이라고 할 수 없었다.

겨울 사막의 냉엄하고 건조한 추위가 바람도 없이 다소 느려진 속도로 나아가는 일행의 몸을 조용히 옥죄어왔다.

다들 내공이 깊어서 추위를 버티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님에도 차가운 칼바람이 불지 않는 건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그게 마냥 편하지만 않다는 걸 차례차례 알게 되었다.

“콜록, 콜록……!”

“에취!”

곽비가 기침하고 덩치 큰 하후무마저 재채기하자 일월수라 주율(周律)이 두 사람을 바라보며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찬다.

“쯧쯧……. 어찌 그리 유약한 티를 내느냐?”

찬 바람은 불지 않아 피부가 얼어붙는 느낌은 덜했지만, 은근히 호흡을 통해 폐부로 스며들어서는 가장 깊은 곳부터 점점 얼어붙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의 추위라 두 사람도 방심했던 것이었다.

하후무는 뒤에서 핀잔을 놓는 주율의 말에 인상을 팍 찡그렸다.

일월교끼리만 모여있던 자리라면 그냥 웃으며 넘어갔겠지만, 이 행렬엔 그들만 있지 않았다.

성혈신마 빌게포첸이야 둘째치고 여전히 교단의 적이라 여겨지는 진도건이 같이 움직이고 있어 그의 비웃음을 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야, 진가야. 넌 어떠냐?”

하후무가 진도건 쪽으로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당장 들려온 기침 소리 같은 건 없었으나 표정에 티끌만큼이라도 추위를 힘들어하는 기색이 보인다면 바로 건드릴 생각이었다.

“…….”

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어?”

이상한 걸 느낀 건 비단 하후무뿐만이 아니었다. 곽비도 바로 반응을 보였고, 주율도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로 뭔갈 찾으려는 듯 시선을 움직이고 있었다.

“놈이 안 보입니다!”

하후무가 크게 소리쳤다.

그제야 제일 앞에서 말을 타고 가던 냉소평과 빌게포첸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들도 왜 세 명의 수라들이 당혹스러워하는지 깨달았다.

물론 그들도 당혹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진도건이 타던 말은 행렬에 함께 따라오고 있었는데 그의 모습만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함께 이동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서로 간의 거리가 조금 멀어져 행렬의 길이가 길어지긴 했지만, 분명 진도건은 냉소평과 빌게포첸 다음의 세 번째 위치에서 말을 타고 같이 가고 있었다.

그런데 마치 그 자리에서 증발이라도 한 것처럼 타던 말은 그대로 남긴 채 종적이 묘연한 것이다.

“교주님. 설마 환도마종의…….”

주율은 환도신마 선우도의 함정에 빠진 게 아닌가 하는 우려를 먼저 했다.

하지만, 냉소평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다른 쪽인 것 같다.”

“냉 시주는 알 수 있는 것이오?”

빌게포첸이 묻자 냉소평이 쓴웃음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냉소평은 선우도를 오래 봐온 만큼 환도마종의 환도술에 대한 경험도 많아서 만약 그들의 환술이 있었다면 낌새를 눈치채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환도술이 상대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런 기척의 감지 문제가 아니라 장내를 장악하는 영향력에 있었다. 일단 가까이서 펼쳐지면 필히 맞닥뜨리게 되고 어쩔 수 없이 돌파해야 한다는 제약을 강제로 거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벌어진 일은 그런 환도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아니. 그저 환도술이 아니라는 것에 확신할 뿐이다. 그리고 이 공기 중에 떠도는 별로 좋지 않은 냄새……. 흐읍!”

냉소평이 코로 숨을 들이켜면서 손짓으로 어떤 향취를 찾는 것처럼 행동하자 다른 이들도 그것을 따라 했다. 그러나 그들 코로 들어오는 건 폐부 깊숙이 찌르는 고비의 차가운 공기뿐이었다.

하지만, 냉소평은 달랐다.

그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후우, 틀림없군.”

“대체 무엇이오?”

냉소평처럼 뭔가 느꼈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빌게포첸이 더 궁금해져서 물어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냉소평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본좌도 명확하게 설명하긴 힘들어. 진도건, 그 녀석이 돌아오면 물어보게.”

냉소평이 장난하는 거라고 잠깐 생각했지만, 그의 표정에 그런 장난기가 찾을 수 없어서 빌게포첸은 더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삼대수라들은 뭔가 짚이는 게 있는지 무거운 표정으로 냉소평을 바라볼 뿐이었다.

“일단 움직인다.”

“그래도 괜찮겠소?”

“언제부터 사라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돌아온다면 우리가 어딜 가든 근처에 나타날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목적지에 먼저 도착해 있을지도 몰라.”

냉소평의 그 말을 듣고 빌게포첸은 뇌리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특정할 수는 없었으나 아주 작은 부분이나마 유추는 가능했으니, 빌게포첸도 절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시 묵묵히 같이 말을 몰기 시작했다.

진도건의 말은 여전히 빌게포첸의 말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가고 있었다.

* * * *

냉소평과 빌게포첸, 삼대수라가 진도건이 사라졌음을 깨닫기 얼마 전까지 진도건은 분명 말 안장 위에서 그들과 함께 고비의 찬 공기를 호흡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눈을 판 것인지, 혹은 잠시 멍하니 있었는지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아무도 없는 황금빛 사막 한가운데 홀로 서 있었다.

적막감이 맴돌았다.

냉엄한 추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지만, 후텁지근하면서도 무겁고 끈적한 공기가 사막 위에 가득했다. 그 알 수 없는 열기가 하늘에 떠 있는 저 태양 때문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을 때였다.

“뭐냐, 여긴? 환도종의 환술에라도 걸린 것이냐?”

“아니. 그건 아닌 것 같다.”

“……그래. 그건 아닌 것 같지만, 그래도 이건…….”

진도건도 혈마의 의중을 이해할 수 있었다.

스스스스…….

그때 알 수 없는 소음이 진도건의 고막을 간질였다.

뭔가 쓸리는 소리 같은 게 이어지면서 계속 들렸는데 곧 그의 시야에 사방 모래언덕들에서부터 유사(流沙)가 감지되었다. 모래언덕의 굴곡을 따라 텁텁하고 더운 바람에 떠밀려 모래 알갱이들이 흩날리고 또 흐르는데 때때로 시야에 들어오는 곳곳의 사구 지형이 시시각각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는 듯한 착각과 현실의 중첩이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그런 흘러가는 풍경으로 인해 시야에 어지러움을 느끼면서 진도건은 이곳이 결코 조금 전까지 지나던 고비의 사막이 아님을 깨달았다.

마치 그와 혈마의 무의식의 공간처럼 이곳도 그런 성질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곧장 들었는데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이곳 전체가 옅은 마기로 가득 차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저벅.

그때 뒤에서 발 딛는 소음과 함께 기척 하나가 느껴졌다.

마기 가득한 공간에서 갑자기 나타난 기척이니 당연히 적이라고 생각한 진도건이 반사적으로 뒤돌아 경계했다.

스스스…….

고요 속을 채운 건 유사의 흐름뿐이었지만, 그 속에서 조금씩 자신의 호흡 소리가 도드라져 들려왔다. 그리고 가빠지는 듯한 호흡이 감정의 격정 때문이라는 걸 혈마의 물음으로 자각하게 된다.

“……아는 늙은이냐?”

“아……, 아……!”

진도건은 떨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목소리도 떨려 나왔다. 목이 메고 눈가엔 눈물이 고였다. 더 크게 밀고 올라오는 감정의 격정을 깨닫고 정신 차리는 게 아니라 되려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걷잡을 수 없어진다.

그의 눈앞엔 한 노인이 서 있었다.

작지만은 않은 키에 추상같은 기상이 느껴지는 용모와 풍채를 가졌으나 은은한 미소는 온화함마저 품고 있다. 작은 빈틈 하나 허용하지 않을 것 같은 어릴 적 기억이 머릿속에 떠올랐으나 지금 그의 눈엔 무한한 여유와 자유로움으로 옷을 갈아입은 듯 느껴졌다.

“누구냐고?”

마치 알고 있는 사람처럼 반응하는 진도건에게 혈마가 되묻자 진도건도 비로소 대답 같지 않은 말을 꺼낼 수 있었다.

“정녕……, 사부님이십니까?”

“도건아.”

잊어버린 줄 알았던 목소리가 어릴 적 기억과 함께 되살아나면서 마지막까지 놓지 않고 있었던 감정의 물꼬가 마침내 터져버렸다.

“흐흑! 사부님!”

진도건이 달려가다가 끝내 다리에 힘이 풀리듯 무릎을 꿇으며 노인의 품으로 몸을 던지다시피 안겼다.

달갑지 않은 공기 속에서 오직 그 품 안만큼은 너무나 평온하다.

노인은 바로 조강선이었으니 품으로 뛰어든 제자를 따뜻하게 감싸 안아주었다. 그리고 흐느끼는 진도건 안에서 혈마가 놀랍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정말 조강선이라고……?”

혈마의 중얼거림에 진도건은 사부의 품 안에서 좀 더 울어도 좋았을 것 같다는 기분을 느끼면서 슬픔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천천히 떨어져서 사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조강선은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그걸 보고 진도건이 입을 열었다.

“역시 살아계신 건 아니로군요.”

조강선의 품 안에서 진도건은 그의 체격과 따듯한 체온마저 느꼈지만, 다시 정신을 차리고 바라보니 그의 몸은 아주 은은한 광망으로 휩싸여져 있어서 마치 다른 존재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냉소평이 조강선의 영성과 만났다고 했던가.

“그래. 이 사부는 확실히 지난겨울에 생을 마감했지. 떠날 때 미련이 조금 남아서인지는 몰라도 이렇게나마 존재해서 내 제자가 무사한 걸 보니까 정말 좋구나.”

“제자의 실력을 의심하셨습니까?”

“의심보단 네 상황이 정상적이지 않으니 하는 말이다.”

조강선이 그렇게 바라보면서 진도건의 눈을 쳐다보는데 진도건은 조강선의 눈빛으로부터 너머의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음을 느꼈다.

“네 노인네……, 영 기분 나쁘게 쳐다보네?”

혈마가 툴툴거리는 소리에 진도건은 기분이 살짝 나빠졌다.

전혀 예상치 못한 기회로 사부와 재회한 것인데 혈마가 무례하게 떠드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비록 사부의 귀에 들리지 않는 말이었다고 해도 그는 혈마를 질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먼저 입을 연 건 조강선이었다.

“허허, 뒤에 숨어서 구시렁대는 꼴이 확실히 군자가 될 가능성은 없어 보이는구나.”

“어?”

진도건이 미처 말하기도 전에 조강선이 마치 혈마의 말을 들었다는 것처럼 대꾸하자 놀란 표정이 되었다.

조강선은 그런 진도건을 향해 손을 내밀더니 손바닥으로 가슴을 툭 하고 살짝 밀었다.

그 순간 진도건은 자신의 안에 있던 커다란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게 혈마라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뭐, 뭐야? 이 늙은이,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혈마의 당황한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리는 게 아닌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왔다. 진도건이 뒤를 돌아보니 혈마가 피처럼 붉고 일렁거리는 기류에 감싸져 진도건을 빼닮은 모습을 한 채로 바로 거기에 있었다.

흡사 무의식의 공간에서 서로를 마주 보았던 것처럼.

“기왕이면 얼굴을 보고 얘기하는 게 좋지 않겠느냐?”

아무렇지 않게 얘기하는 조강선을 보며 진도건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얼떨떨한 기분으로 사부와 혈마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특히 혈마가 빠져나가면서 안으로부터 느껴지는 알 수 없는 공허감이 그의 기분을 이상하게 만드는 것이다.

“……설마 나 자유냐?”

혈마의 물음에 조강선은 그저 웃기만 했다.

혈마가 인상을 일그러뜨리더니 갑자기 달아날 것처럼 그 자리에서 경공을 펼치며 멀리 내달렸다. 그의 신형이 점점 작아지더니 사구 너머로 보이지 않게 되자 진도건은 잠시 이렇게 서로 자유의 몸이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헛된 기대였다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혈마가 다시 진도건의 옆에서 불쑥 솟아올랐기 때문이었다.

“……자유의 몸이 아니로군.”

“허허허!”

혈마가 기분 나쁘다는 듯 중얼거리자 조강선이 웃음을 흘렸다.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봐라.”

혈마의 물음에 조강선이 진도건을 보며 입을 열었다.

“시뻘겋긴 하나 내 제자의 얼굴로 하대하듯이 말을 걸어오니 영 적응이 안 되는구나.”

“……하하하!”

조강선의 농담에 진도건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다른 게 아니라 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더욱이 현실감 없는 상황 때문에 감정이 요동치느라 아직 평정을 찾지 못하고 있었는데 조강선의 우스갯소리에 그만 긴장감이 풀려버린 것이다.

물론 그런 반응들이 혈마로서는 기분 좋게 받아들여질 리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그도 느껴지는 게 있었다.

“이 상태로 있을 수 있는 건 이곳의 마기 때문인가보군. 성도에서 겪었던 것처럼 말이야.”

혈마는 자신이 의식 속에 잠들지 않고 가장 분명하게 현현(顯現)해있던 성도에서의 전투를 떠올렸다. 환도술에 의해 마기가 넘쳐흘렀던 성도에서 그는 바깥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더 분명하게 발휘할 수 있었으니 그의 목소리가 다른 이의 귀에 들릴 정도였었다.

“그때의 일과는 좀 다르지. 여긴 그보다 좀 더 근원적인 영향 아래 있는 곳이네. 자네가 바깥으로 나타나 있는 건 내가 그렇게 되게끔 한 것이고 말이야.”

“귀신이 곡할 노릇이로군. 내가 귀신이나 다를 바 없어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 건가?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거지?”

혈마는 아직도 제대로 이해되는 게 없자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조강선은 미소를 지으며 진도건과 혈마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갈 곳이 있네. 너희는 한 가지 일을 처리해줘야 하지. 그러니 가면서 얘기해주겠네.”

조강선이 손을 들어서 갈 방향을 가리키고는 앞으로 걸어 나가자 진도건이 그의 옆에 붙어 함께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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