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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340화 (340/432)

340화 – 제63장. 사부라 부르지 못할까! (5)

과거 중년의 혁련제는 염룡마공을 연성하면서 딱 한 차례 주화입마에 들었었으나 운이 좋게 극복해내어 마공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때 그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를 들었으니,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불꽃을 피우고 싶다면 스스로 장작이 되는 길밖에 없느니라……!”

내기(內氣)도, 정혼(精魂)도, 신(神)도 혹은 그 무엇을 조합하려 해도 온전히 자기 자신, 모든 것을 불태우는 것만 못하느니…….

주화입마는 그에게 완성된 염마도(炎魔道)를 열게 하였으며 최후의 한 수를 남겼다.

혁련제의 신형이 강정학을 놓칠세라 꽉 끌어안은 채 공중에서부터 지면을 향하여 수직으로 내리꽂혔다.

염룡마공 파극(破極) 천지염(天地炎).

염마의 극의를 쟁취한 자가 다시 자신을 깨뜨릴 때, 하늘과 땅 사이에 사람이 아닌 불길만이 존재한다.

쿠웅!

엄청난 충격이 혁련제의 두 발에서부터 시작으로 그 충격은 지축을 뒤흔들며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동시에 그를 중심으로 샛노란 불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화르르르르……!

진정으로 큰 불이었다.

불기둥은 땅과 하늘을 연결할 것처럼 솟구쳐 올라가 구름을 흩어놓을 정도였으며 충격파에 떠밀린 불길은 시야에 둔 협곡과 설산의 경사면 전체를 뒤덮을 정도였다.

바람에 먼저 휘날리던 눈발은 공중에서 녹아 비처럼 떨어졌고 산면(山面)을 덮었던 하얀 눈의 소복은 모두 녹아내려 흙과 풀의 칙칙한 나신을 축축하게 적시다가 열기에 다시 떠밀려 수증기로 증발해버렸다.

치솟는 불길만큼이나 강력한 열기는 지면 아래 겨울잠을 자고 있던 작은 동물들의 생명마저 살라버렸다.

그만큼 거대했던 대화염도 결국엔 흩어져가면서 하늘로는 새하얀 재와 불똥들 흩날리고 땅으론 검게 그을린 흙과 바위, 잔불만 품은 채 숯이 되어가는 나무들의 풍경을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이전에 날아와 부딪쳤던 바위 근처에서 혁련제가 신음을 흘리며 지면으로부터 상체를 일으키고 있었다.

“큭, 크큭, …크크크크……!”

혁련제가 어깨를 들썩이면서 숯처럼 갈라진 목소리로 실소를 흘렸다.

그의 고개가 천천히 들리면서 흐트러진 백발 사이로 생기 잃은 눈빛을 던졌다. 그리고 기다렸던 것이 눈에 들어오자 작은 허탈감이 섞인 채로 치를 떨었다.

“……괴물 같은 늙은이…….”

혁련제의 시선 끝에는 강정학이 서 있었다.

강정학은 샌 머리카락과 수염을 산발한 채 여전히 백령검을 오른손에 쥐고 부러진 왼팔은 축 늘어뜨린 채, 새하얀 영혼의 불꽃을 건재하게 태우고 있었다. 그러나 백염극원의 기와 다르게 그의 온몸은 화상의 흔적으로 검게 그을려 있었다. 하의도 대부분 불타 고간 주변만 간신히 가릴 정도였는데 그렇게 뒤늦게 드러난 다리마저도 새까맣게 탄 채 군데군데 붉게 달아오른 살갗이 힘겹게 엿보이고 있었다.

백염극원이 그의 신체를 완벽히 보호하지 못하고 천지염의 대화염을 온몸으로 맞아버린 것이었다.

혁련제가 괴물 같다고 말한 것은 그런 극심한 화상에도 불구하고 새하얀 기염(氣焰)을 유지하면서 입김마저 규칙적으로 내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비명을 꿱꿱 질러도 모자랄 판인데 흔들림 없이 두 다리로 꼿꼿이 선다는 건 정말 미친 일이 틀림없었다.

그런 강정학이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오른발을 천천히 한 발자국 내밀며 오른손은 뒤쪽의 하늘을 향해 높이 들었다.

혁련제의 시선에선 강정학의 머리 뒤로 솟은 백령검 너머로 둥근 태양이 눈부시게 빛났는데, 잠깐 사이에 태양 중심에 새하얗게 빛나는 검기가 머물러 있어서 마치 검 끝에 걸려있는 것처럼 보이고 있었다.

“……큭큭큭!”

혁련제가 상체를 세우다 말고 풀썩 주저앉듯이 반쯤 누워버리면서 실소를 흘리자 강정학도 멈칫했다.

휘이잉-!

찬 바람이 세차게 불면서 칼날처럼 강정학의 몸을 쓸고 지나갔다. 백염극원의 기 때문에 피부에 닿지 않을 것 같았어도 왜인지 거뭇한 잿가루 같은 것들이 피부에서 일부 떨어져 나와 바람에 떠나가면서 새빨갛게 익은 피부도 조금씩 드러났다.

“왜…… 웃느냐?”

원래도 늙수그레한 음성이 혁련제와 같이 숯처럼 갈라져 흘러나왔다.

“내가 졌다. 두 발도 이러니 더는 네게 도전할 수도 없어.”

그 말에 강정학은 희뿌연 시야에 힘을 준 채 그의 얼굴로부터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비로소 그의 다리 상태가 눈에 들어왔다.

혁련제의 두 다리는 정강이 중간 아래부터 해서 두 발이 완전히 터져나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곤죽이 되어 있었다. 지면에 두 발을 내리꽂는 걸 기작으로 천지염을 시전하면서 희생해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이 희생은 단순히 두 발을 잃어버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염황마종은 본디 여러 갈래로 극양공을 연성하던 작은 종파였다. 진정 불을 다루고 불과 하나가 된다는 망상에 올라타 부나방처럼 스스로 불태우는 마경에 모두가 홀려있었지…….”

무언가 회상하는 듯 어쩐지 아련해지는 혁련제의 눈빛에 강정학의 검끝이 태양에서부터 아래로 점점 멀어졌다.

“죽음의 불길로 걸어 들어가는 꼴이었지만, 그래도 좀 더 멋있게 죽고들 싶어 했어. 기왕이면 허무하게 소멸하는 부나방이 아니라 아름답게 불꽃을 피우다 끝내 잔불을 품은 채 숯이 되는 장작처럼 말이야. 네가 생각해도 좀 낫지 않느냐?”

“……확실히.”

강정학이 대답해주자 기분이 좋았는지 혁련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신강 토로번 지역에 가면 화염산이 있네. 불만큼 뜨거운 산인데 우린 해마다 순례하듯 그곳에 가서는 맨발로 정상에 서서 수양하는 관습이 있네. 화염산이라는 상징 때문도 있지만, 불이라는 것이 생명을 갖기 위해선 땅 위의 것을 태워야 하기에 그와 같은 기의 흐름을 몸에 심기 위함이야. 네놈도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우리 염황마종의 아이들은 모두 발이 새까맣고 딱딱하다네.”

강정학도 그 사항에 대해선 겉핥기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일전에는 녹림총채가 있는 정강산 대산채에서 안효철과 주태소가 염황마종 마인들의 그런 신체적 특징을 밝혀 총표파자 녹건왕 오경방의 배반행위를 드러낸 적이 있었다. 이 또한 신체 구조 변화로 형성되는 일종의 마정으로 흑풍신마의 척추, 환도종 마교도의 명치에 맺히는 결정, 사혈신마의 독혈, 진도건과 구마진의 적발적안도 유사한 맥락이었다.

물론 이런 신체 내외견의 구조적 변화로 나타나는 마정화(魔精化) 현상이 나타나지 않는 마종도 있었다.

혁련제의 넋두리같은 중얼거림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구주의 마도 중에 이런 식의 신체 변화가 단지 변화로 그치는 경우도 있다네. 그러나 우리 같이 몇몇 마도는 마정화가 마공의 그릇 역할을 하기도 하며 또는 마공의 정수나 마성이 깃들기도 하지.”

“……염황종은 마정화가 나타난 두 발에 마공의 그릇이 담긴다는 뜻인가?”

“클클! 그래, 역시 이해가 빠르군. 물론 두 발이 하단전 같은 역할을 하는 건 아니지만, ……뭐랄까, 불꽃을 주술적인 속박처럼 영혼에 깃들 수 있도록 길을 터준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이 몸조차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운 심오한 무언가가 있네. 난 그걸 희생해버렸으니 내가 공들여 쌓아온 마공도 천천히 흩어질 거야. 화염은 떠나가고 혼탁한 마기만 남은 채 존재 이유가 사라지는 것이지.”

“존재 이유가 사라졌으니 이제 생을 마감할 차례로군.”

“……큭큭큭!”

혁련제가 그를 올려다보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자 강정학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일순간 생기 잃은 눈빛에 잠깐 불꽃이 튀는 걸 느꼈기 때문이었다.

“……순순히 목숨까지 내놓을 생각은 없군.”

“끅끅! 물론이다. 끝까지 저항할 참이거든!”

혁련제가 조금 힘주어 대답했다.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강정학도 깨달을 수 있었다.

멀리서부터 두 개의 기척이 다가오고 있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 속도는 꽤 빨라서 곧 이곳에 당도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혁련제가 그동안 줄줄이 떠들어대고 마지막에 이런 조소까지 흘린 것은 이미 이 같은 상황을 먼저 감지했음이 틀림없었다.

“내가 얘기하지 않았나? 불꽃이 주술적으로 영혼에 깃들고 어쩌고저쩌고……, 클클클! 염황종 마인들은 나처럼 불을 품고 있어서 서로를 느낄 수가 있어……. 가진 힘이 강할수록 더 멀리서도 느껴지지. 안타깝게도 나의 마인들은 내 감각을 벗어날 만큼 멀리 도망치지 못했어. 그나마 다행인 건 전멸은 면할 시점에 원군이 도착했다는 것과 화염산으로 순례를 떠났던 내 조카뻘 동생도 함께 도착했다는 것을 느꼈다는 것이야. ……녀석이 여기로 오지 않은 건 아쉽지만…….”

전투의 불길이 사그러졌다고 해서 혁련제를 향한 강정학의 적의도 사라진 건 아니었다. 그러나 당장 목숨을 거둘 필요까진 느끼지 않고 있었는데 그가 여태껏 늘어놓은 말들이 들을 만도 했거니와 말한 내용들이 진실이었는지 혁련제의 기력도 확실하게 느낄 정도로 줄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불길의 기색도 말이다.

대신 강정학은 이참에 다가오는 두 존재를 모두 쓰러뜨려서 혁련제에게 남은 일말의 희망마저 제거한 후, 아들과 검림을 도우러 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강정학은 곧 여태까지 머릿속으로 했던 이런저런 생각들 따위 전부 부질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장내에 나타난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그토록 찾고 싶은 마음과 안타까움으로 잠 못 이룰 정도로 잊지 못하던 삼제자 양자성이기 때문이었다.

“너……, 네 이 녀석……!”

강정학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그런 강정학을 양자성과 스칸다 모두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언제나 고귀한 학처럼 선 모습으로만 기억되던 강정학이 일생 전체에 걸쳐 첫손가락에 꼽을 만한 사투를 이 자리에서 벌였다는 꼴로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새까맣게 타고 그을린 살가죽, 빨갛게 익은 피부와 출혈 등은 양자성조차 생전 상상해보지 못한 그런 몰골이었다.

강정학은 양자성을 발견하고 대단히 놀라서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제자와 재회하는 일조차 가능한 일이긴 한지 의심스러운 현실 속에서 이런 장소에서 나타날 줄은 더더욱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어색하게 마주 보는 두 사람 사이에서 스칸다는 양자성에게서 떨어져서는 강정학을 빙 둘러서 혁련제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정학의 기백이 여전히 대단하니 움직임에 긴장감이 가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스칸다는 관심조차 없는지 강정학의 온 신경은 오직 양자성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먼저 입을 뗀 사람은 양자성이었다.

“천마령을 받아 염황신마를 구출하기 위해 왔는데 …노선배의 모습을 보아하니 어쩐지 늦은 것 같기도 하군요. 스칸다, 그는 괜찮소?”

양자성은 강정학의 시선을 마주하기 부담스러웠는지 말끄트머리에 스칸다를 찾으면서 강정학에게 머물던 시선을 비스듬히 틀었다.

“살아는 있소.”

어느새 혁련제의 곁에 도달한 스칸다가 양자성을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대답과는 반대되는 신호였으니 무슨 말인지 이해되었다.

“……방금 뭐라 했느냐?”

나지막이 바닥에 깔리는 강정학의 목소리가 다시 양자성의 주의를 끌었다.

눈이 마주치자 강정학이 다시 입을 열었다.

“방금 나를 뭐라 불렀느냐?”

“……노선배라고 불렀습니다.”

원래 굳어있던 강정학의 얼굴이 더 험악한 눈빛을 담으며 냉기가 흘렀다.

“자성아, 너는 나 백령신검 강정학의 셋째 제자다. 그렇지 않으냐?”

“아니요. 제 사부님은 오직 천마신교 태상교주이신 역천마제 단원진 사부님 한 분뿐입니다. 그대는 그저 강호의 노선배일…….”

양자성은 말을 더 잇지 못했다.

“……어서 사부님이라 부르지 못할까!”

‘노선배’라는 호칭이 다시 귀에 꽂히는 순간, 강정학이 노기충천하여 호통을 쳤기 때문이었다.

심부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 나온 그 우렁찬 호통에 양자성은 물론이거니와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스칸다, 혁련제까지 깜짝 놀라 영혼이 멍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양자성은 진심으로 놀라고 있었다.

강정학이 그의 재능을 아꼈던 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염황신마가 보여줬던 화염을 지배하는 신위와 주백자를 상대로 싸우는 단원진과 일월신마의 마공 등은 그가 사부를 바꿀 수 있도록 확신으로 몰아세워서 결국 여기까지 온 것이었다.

하지만, 4년 가까운 공백의 시간 속에서 분명 그에 대한 소식이 전해졌을 텐데 아직도 사부라 부르라고 꾸짖는 강정학의 모습은 그에게 있어서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움찔하면서 정말 꾸짖음을 받아 깊이 반성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는 자신도 그리 낯설 수가 없었다.

‘나는…… 아직도 저 사람을 사부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문득 마령검에서부터 흘러나온 마기가 오른팔을 타고 흘러 들어오는 게 느껴지면서 다시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다시 돌아보았다.

‘사 년 전의 양자성과 나는 다른 사람……. 내가 선택할 길은 오직 이 마령검이 인도하는 길뿐이다.’

양자성은 마치 살아 있는 듯 끝없이 속삭이며 힘을 주는 마령검에 지금의 자신도 함께 깃들었다고 여기고 있었다.

이는 태상교주 단원진의 제자라는 사실보다 더 명확하게 다가오는 실체이자 진실이었다.

“나는 마령검의 주인이자 검마 양자성. 단지 그뿐입니다.”

양자성의 목소리가 싸늘한 비수가 되어 강정학의 가슴에 꽂혔다. 그 비수는 영혼에 상처를 남겼다.

“이놈…….”

강정학이 노기 가득한 얼굴로 으르렁거리며 백령검을 들었다. 그의 전신이 백염극원의 불꽃으로 타오르면서 혁련제를 상대로 보여주었던 기백을 다시 드러냈다.

“오냐! 제자가 끝내 엇나가고 말았다면 그걸 바로잡아주는 것이 사부로서 도리이다. 오늘 이 사부는 제자가 정신 차릴 수 있도록 단단히 훈계해야겠구나.”

그야말로 천하제일검 백령신검의 위엄에 양자성이 마령검을 강정학을 향해 겨누면서 입을 열었다.

“성치 않은 몸이라고 봐줄 거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전 검마 양자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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