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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338화 (338/432)

338화 – 제63장. 사부라 부르지 못할까! (3)

* * * *

강정학의 판단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산줄기 뒤쪽의 평활한 협곡을 내달려서는 다소 낮은 산자락을 넘자 산 아래에서 도주하는 염황종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강도혁은 언덕의 경사진 내리막길로 인도하면서도 산등성이의 굴곡 뒤에 절묘하게 숨어 이동하는 찰나의 묘수를 부렸다. 그리하여 부리나케 내달리는 혈마종의 옆구리를 노리고 정확하게 돌입하여 난전을 야기할 수 있었다.

사방에 불길이 휘몰아치고 칼부림 소리가 난리법석을 떨어댔다.

염황마종이 모여 만드는 화염지대는 여전히 가공할 만했지만, 확실히 눈 덮여 차가워진 땅 위에서는 그 위력이 감소된 느낌이었다. 특히 그들의 화염이 눈들을 녹이면 그로 인해 땅이든 메마른 식물이든 물에 젖는 꼴이 되어버려 불길이 더 사그라드는 모양새였다.

그 안에서 검림의 검은 불꽃과 눈발을 번갈아 맞으며 더 날카롭게 다듬어지는 듯했다.

물론 그 기세의 근원엔 강렬한 적의가 깔린 덕분이었다.

적의와 적의의 충돌, 그러나 두려움은 염황종 마인들에게 더 크게 깔려 있었으니 쓰러지는 목숨들의 비중도 단연 더 높을 수밖에 없었다.

채챙!

불길 속에서 금속의 불꽃이 격렬하게 번쩍였다.

선염도룡 창윤이 절편도라는 기병(奇兵)을 이용해 익숙치 않음의 이점을 살리는 걸 선호한다면 나찰화승 무량은 두 자루 철단봉을 들고 대범하게 돌진하여 무자비하게 두들기려는 성향이었다.

두 사람이 연계하는 공세는 그들이 일으키는 화염 공세와 더불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듯한 인상을 줄 정도로 무척 절묘했다.

그 공세 속에서 강도혁은 자신만의 검세를 펼치면서 자유롭게 누비고 있었다.

“큭!”

뻗어나간 검기에 허벅지가 스치자 창윤이 침음성을 삼켰다. 질세라 절편도를 휘둘러 무량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강도혁의 측후방을 노렸다.

천요활사도법(天妖猾蛇刀法) 곡요장사(曲搖張蛇).

촤라락!

절편도가 화염을 두른 채 꿈틀거리는 뱀처럼 요동쳤다. 칼끝이 사각지대를 노리고 파고드니 여지없이 옆구리를 뜯어낼 수 있을 것처럼 보였지만, 강도혁은 마치 뒤통수에도 눈이 달린 듯 몸을 선회하면서 자신의 보검으로 절편도를 손쉽게 쳐냈다.

그때 강도혁은 이미 왼손으로 무량의 오른팔 손목을 낚아챈 채 자신을 중심으로 끌어당긴 상황이었다.

백령검법 백무풍호.

원형으로 뻗어나가는 새하얀 검기.

그래도 수족이 자유로운 창윤은 다급하게 물러나서 피해내 스치는 데 그쳤지만, 한 팔이 묶여있던 무량은 제대로 벗어나지 못했다.

츄악!

“크아악!”

강도혁의 손에 손목을 붙들린 채로 잘려 나간 무량의 한 팔이 공중에 피를 뿌렸다. 그래도 외공과 호체진기가 탄탄한 무량의 두꺼운 신체를 모두 관통하진 못했으나 가슴팍의 근골이 반쯤 갈라져 피를 철철 흐르고 있었다.

슬쩍 보아도 전투가 불가능한 상태.

무량은 이내 자신의 그런 상태를 깨닫고 결심했다.

어차피 이곳은 피할 데 없는 설산 협곡의 한가운데, 사방이 적인 상황에서 도주가 어려운 게 눈에 선할 정도로 단념을 강요하는 상황이었다. 어차피 앞길이 죽음뿐이라면 동귀어진으로 적도 같이 데려가는 게 의미가 있지 않은가?

하물며 그 적이 백령검왕 강도혁이라면 지금 이 전장에서 가장 가치 있는 행위일 터.

무량은 오히려 두 발로 지면을 밀어 강도혁의 품으로 자신을 던지고는 남은 왼팔로 들고 있던 단봉도 버리고 두 다리까지 합하여 콱 붙들고 매달렸다.

“같이 죽자 이 새끼야!”

무량의 별호가 나찰화승인 이유는 혁련제의 염룡마공으로 개선을 시도하기 이전, 염작공(焰灼功)이라는 마공으로 자신을 불 지른 채로 싸우는 광기가 마치 나찰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적정 수준을 유지하면 실제로 화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반 시진 정도 싸우고 나면 극심한 화상통이 밀려와 하루 이상 회복에 전념하지 않으면 안 되는 후유증을 동반한 마공이었다.

이는 다시 말하면 적정 수준을 초과할 때는 정말로 자신을 불태울 수 있는 그런 마공이란 소리였다.

염룡마공의 운용 구조는 그런 염작공의 한계치를 높여놨지만, 완전히 제거하진 못했다. 그리고 그 한계치 밑에서 싸우던 무량이 지금 강도혁에게 매달린 상황에서 기어코 자신을 불사르는 것이다.

화르르륵-!

“끄아아아아!”

맹렬한 기세로 한 사람의 목숨을 매개 삼아 지펴지는 불꽃.

그 사이로 어른거리는 강도혁의 그림자와 그에게 매달린 무량의 그림자 그리고 그의 비명을 들으면서 창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한 채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일시 멍하니 있던 그의 귀에 무량의 마지막 목소리가 꽂힌다.

“끄으윽! 야 이 새끼야!”

창윤은 무량의 그 목소리가 강도혁이 아닌 그에게 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허튼 정 때문에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것이었다.

천요활사도법 번사토화룡(燔蛇吐火龍).

절편도에 샛노랗게 타오르는 불꽃이 입혀지는 순간, 거대한 화룡이 늘어난 절편도의 칼날을 타고 거대하게 일어난다. 용신(龍身)을 따라 형성된 도편(刀片)의 강기가 화룡의 불길을 머금은 채 선회하더니 그대로 강도혁을 노리고 덮쳤다.

콰콰콰쾅!

창윤은 전력으로 펼쳐낸 천요활사도법의 절초가 얼마나 위력적인지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거대하게 피어난 저 불 구름은 무량의 것과 합쳐지면서 더 거대하게 일어나 주변에서 싸우던 검림 검객들뿐만 아니라 염황종 마인들까지 피할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그렇기에 창윤은 더 두렵고 소름이 끼쳤다.

폭발의 여진마저 끝난, 저 흩어지는 불 구름 사이로 비치는 새하얀 그림자만은 그 어느 때보다 더 활력을 가지고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양소혼신공 이극의 백염극원.

똑같이 백양소혼신공을 익히고 백령검법을 익혔다면 아버지가 아들에게 전수하지 않을 리 없었다. 비록 아들이 염황마종의 화상을 품지는 않았더라도 아버지가 자신에게 내재된 것을 전달하면 그만이었다.

더구나 백령검왕 강도혁이라면 중원무림에서 천하오절을 제외하면 십대고수 반열에서도 수위를 다툴만한 인물이었다.

그 깊이나 예기, 투지의 열기 등이 백령신검 강정학에 비할 바는 아니어도 충분히 완성된 형태를 구사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한 자인 것이다.

강도혁은 고개를 숙여 새까맣게 그슬린 채 절명한 무량을 내려다보았다.

적의마저 생명과 함께 불타버렸으니 그저 애절하게 안겨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강도혁은 그런 무량의 새까만 머리를 붙잡고 한쪽으로 꺾었다. 그리고 검을 들어 목을 통해 허리까지 박아넣는다.

푸욱!

움찔!

그 광경에 창윤이 어깨를 떨었다. 그리고 강도혁이 검을 휘두르듯 당겨 사체를 반토막 낼 때 다시 한번 어깨를 떨었다.

“오늘이 네놈들의 제삿날이다. 이놈처럼 순순히 스스로 불타 죽는 것만이 저승 가는 길이 괴롭지 않을 것이다.”

창윤이 당황하여 주변을 훑어보았다.

네다섯 배나 많던 염황종 마인들은 어느새 절반 이하로 줄어들어 몹시 위태로웠다. 검림 검객들의 시체도 일부 보여 적지 않은 피해를 본 듯하지만, 여전히 그들의 적의와 기세는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었다.

패배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 뒤에 숨은 죽음의 그림자도 엿보인다.

4년 전의 그 승기가 무색해질 만한 참패.

차라리 혁련제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 자리에 남았더라면 이런 참패의 구도는 달라졌을까?

저벅저벅…….

다가오는 강도혁의 발걸음 소리가 무겁게 들려왔다.

순순히 죽어줄 수 없었기에 창윤도 절편도를 꼬나쥐고 화염을 재차 일으켰다. 그리고 바짝 긴장한 채로 집중하는 그때, 강도혁이 멈칫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긴장감에 창윤도 움찔했는데 그 멈칫하는 반응 뒤로 강도혁이 시선을 뒤로 돌리자 의아했다. 그리고 지금 강도혁은 창윤의 그런 의아한 기분 따위 관심이 없을 정도로 신경이 온통 길이 꺾여져 보이지 않는 협곡 뒤편의 기척들에 쏠려 있었다.

‘대체 어떻게 알고……?’

갑자기 느껴지기 시작하는 무수히 많은 마기의 기척들.

어림잡아 수백 명은 되는 숫자의 적이라는 게 명백한 무리가 협곡을 돌아 이 전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거리가 벌써 꽤 가까워져 앞으로 열을 셀 정도면 모습을 드러낼 것 같았다.

강도혁이 다시 고개를 돌려 창윤을 쏘아보았다.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창윤의 얼굴은 지금 막 협곡 모퉁이를 돌아 모습을 드러내는 마교도들의 존재를 전혀 몰랐다고 얘기하고 있었다.

“크하핫! 모두 죽여라!”

“닥치는 대로 썰어버려!”

“다 죽여!”

갑자기 소란스럽게 나타나 달려오는 일단의 무리에 창윤도 일순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러나 곧 그들이 아군이란 사실을 깨닫자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는 나타난 무리가 천마신교 마니사의 승도(僧徒)임을 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본교의 지원이 도착했다!”

창윤의 외침으로 염황종과 검림 양측의 희비가 엇갈렸다.

염황종 마인들은 드디어 활로가 열렸다는 기분이 숨겨지지 않는 듯했으나 그렇다고 검림 검객들의 사기가 꺾인 건 아니었다. 어차피 다수를 상대로 한 싸움을 치르는 처지 자체는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만 어느 정도 기력이 소진되고 사상자도 있는 상황에서 직전까지 상대했던 네다섯 배 숫자의 적을 다시 상대해야 하는 피로감이 조금씩 고개를 들었을 뿐이었다.

“칫! 바뀐 건 없어! 모두 벤다!”

검림 사위검총 중 한 사람인 청송검 서저위가 새로운 적들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는 강도혁을 대신해서 외쳤다.

이미 팔공산을 떠날 때부터 검림의 모든 검객은 죽음을 각오한 상황이었다.

그들이 이 자리에서 달성해야 할 가장 큰 목적 두 가지는 눈앞의 적들, 특히 염황마종의 마인 모두를 처치하는 것과 염황신마와 싸우는 강정학 쪽으로 적들을 보내지 않는 것이었다.

“도혁!”

서저위가 강도혁의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용무가 있어서가 아닌 돌입해오는 적들을 바라보고 있는 행위에 시간을 쏟지 말라고 일깨우는 것이었다.

“동지가 여유 부리지 말라는군.”

강도혁이 창윤에게 다시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창윤이 오싹함을 느낄 때, 강도혁의 신형이 그에게로 무섭게 짓쳐 들었다.

창윤의 절편도가 춤을 추면서 격렬히 타오르는 화염의 방벽을 세웠다. 그러나 백염극원에 둘러싸여 하얗게 타오르는 강도혁의 검은 어렵지 않게 화염을 갈라내면서 절편도의 도편 마디를 파고들었다.

차앙!

검이 도편 마디 사이의 강사에 걸리는 순간, 검강이 형성되며 가볍게 끊어버렸다. 순식간에 반토막이 난 절편도를 쥐게 된 창윤이 넋을 잃은 표정으로 자신의 목숨을 끊기 위해 검을 찔러오는 강도혁을 쳐다보았다. 함께 싸우던 무량이 죽자 잇몸이 사라진 이빨 신세가 되었다는 걸 죽음을 목전에 두고 새삼 다시 깨닫는 순간이었다.

화르륵!

그 순간 강도혁의 바로 뒤에 거대한 불길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불길 속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듯하더니 도신에 용문(龍紋)이 새겨진 칼이 불쑥 튀어나와 강도혁의 등을 노리고 떨어졌다.

채채챙!

화염과 함께 나타난 적과 강도혁이 공중에서 도검을 수차례 부딪치고는 지면으로 내려왔다. 강도혁의 검술과 검기를 받아낼 정도로 상당한 실력자였는데 창윤으로선 가장 반길만한 인물의 등장이었다.

“후대선!”

“넌 누구냐?”

강도혁이 인상을 찌푸리면서 상대의 정체를 물었다. 그리고 그는 순순히 입을 열었다.

“염황마종의 삼화룡 수좌 화룡도절(火龍刀絶) 후대선이다. 과연 칼을 섞어보니 대단한 무력이야. 백령검왕이란 명성을 무시하지 말라는 말이 맞았어.”

“날 알아보는군?”

강도혁이 이렇게 되물은 이유는 자신의 명성에 자부심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적이 누군지 알고 여기에 온 것이라면 피아를 명확히 구분하고 목적도 명확한 계획된 움직임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점을 경계한 것인데 후대선의 대답은 그를 긴장케 할 만큼 더 뜻밖이었다.

“별 관심이 없었는데 당신 사제가 친히 알려주더군.”

“……지금 뭐라 했느냐?”

강도혁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의 사제는 두 명이 있었다. 이사제였던 천잔살검 마산호는 염황신마의 손에 죽음으로써 이들과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가 되어 지금 이 자리에서 싸우는 가장 큰 이유가 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남아있는 것은 단 한 사람뿐이다.

강도혁이 순간 뭔가를 느끼고 고개를 옆으로 돌려 어느 한 지점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막 새로운 적들이 돌입하여 난전이 확대되는 전장의 머리 위를 뛰어넘어가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중 한 사람은 그의 눈에 너무나 익숙한 바로 그 사람이었다.

행방불명되어서는 결국 천마신교에 몸담은 것 같다는 소식으로 모두를 비참한 기분에 들게 했던 그 사람.

강도혁이 노한 얼굴로 그 이름을 부르짖는다.

“양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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