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335화 (335/432)

335화 – 제62장. 죽음 위에 서서 죽다 (5)

* * * *

천하오절의 명성을 얻을 정도로 화경이라는 지고한 경지를 구축하고 또 반백 년 이상의 경륜을 쌓았음에도 이것은 평생 다시 겪어볼 수 없는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안효철이 진도건을 노리는 빌게포첸을 보자마자 그를 가로막아 맞붙었을 때만 해도 그는 자신들을 속인 빌게포첸에 대해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특히 청선산에서 이미 짧게나마 마주친 적이 있는 환도신마 선우도까지 장내에 나타났을 때는 역시 마교도를 믿어선 안 된다는 생각마저 들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당시의 상황이 의심했던 흐름은 아니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앞서서 걷고 있는 노인 환도신마 선우도는 이것이 환도마종의 비술, ‘천도환위의 술’에 의한 풍경이라고 했다.

두 사람은 ‘흐르는 길’ 위를 걷고 있었다.

예전에 뱃길로 다녀보았던 황하 위를 걷는 것도 같았으며, 혹은 어떤 동굴을 지나는 느낌도 들었다. 때로는 알 수 없는 존재에 삼켜져서 어떤 융기된 조직들이 만드는 물결에 휩쓸린 채 나아가는 것도 같았다.

때로는 어색하고, 친숙하면서도 매우 껄끄럽기도 한 그런 기분들은 단순한 감각으로 시작하여 환영과 환청 혹은 실체하는 무언가처럼 다가와 실감(實感)하도록 만들었다.

그 가운데서도 변하지 않는 것은 먼 바깥의 시야로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는 세상의 풍경이었다.

믿을 수 없는 광경 때문에 안효철은 착란 증세를 심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가진 내공으로 심지를 세우는 데 집중할 뿐, 선우도를 공격할 생각 따윈 쉽게 하지 못하고 있었다.

“……짧은 시간에 상상할 수도 없는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다고 했지? 그럼 대체 나만 데리고 어디로 가려는 것이냐? 천마신교 본진이냐?”

안효철과는 달리 등을 보인 채 꽤 여유로운 기색으로 등을 보이며 걷고 있던 선우도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과연 천하오절이군. 환도술에 보호받지 못한 자는 밀려 들어오는 감각의 교란에 정신을 잃기에 십상인데. 잘 버티고 있어.”

절정고수 수준의 내가고수라도 심지가 정갈하지 않은 자는 미쳐버릴 수도 있는 감각의 혼란이었다.

“요사스러운 술법으로 기세등등하구나. 네놈이 그리 여유롭다면 이 몸을 제압해가지 않고 무엇하느냐?”

“크크크! 노부도 네놈을 데려가기 위해 긴 시간을 이동하면서 많은 준비를 해야 했느니라. 그저 감각적으로 네놈보다 평온할 뿐이지, 널 여기서 제압하는 건 내 집중력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다. 여기서 더 시비 걸 일이 없으니 안심해라.”

선우도는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걸음의 방향은 오직 천도환위의 술이 인도하는 길 위로만 향하고 있었다.

“천마신교 본산도 아니니 염려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어쩌면 죽을 수도 있으니 적당한 각오 정도는 하는 게 좋을 것이야.”

선우도의 확신에 찬 목소리에 안효철은 바짝 긴장했다.

천하오절이라고 한 만큼 그가 철갑권왕 안효철이란 사실을 알고서 지금의 상황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면, 대체 무엇이 그를 죽음에 이를 수도 있게 만들 것인지 궁금해지는 건 당연했다.

그 속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혹은 미리 알아두어도 바뀔 것은 없다고 여기는 것인지 선우도가 거리낌 없이 다음 말을 이어갔다.

“네가 입고 있는 그 갑주를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으라는 태상교주님의 령이 있었다. 네가 그 귀물에 의존해서 명성을 얻었으니 벗기는 싫겠지만, 그래도 벗을 수밖에 없을 것이야.”

선우도는 계속해서 시선을 앞에 두고 있어서 보지 못했지만, 안효철의 얼굴엔 묘한 표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기대감 반, 걱정 반.

빌게포첸이 주의를 주었던 말들을 상기하면서 걱정보다 기대감이 더 크게 부풀어 오른다.

설령 그 끝이 죽음뿐이라도 이 탈혼갑의 저주에서 벗어나 단 한시라도 살 수 있다면 이 얼마나 큰 축복이겠는가?

“이제 다 왔다.”

선우도의 했던 말 때문에 기대감과 걱정이 혼재된 심정으로 잠시 멍해진 기분으로 있던 안효철이 정신을 차렸다. 그러자마자 일순간 눈부신 빛무리가 덮쳐와 온몸을 감싸 안았다.

화악!

끝없이 밀고 들어오던 교란된 감각에서 해방된 기분이 순간적으로 들면서 사위를 가득 매웠던 빛무리가 사라지고 세상의 풍경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곧 중력에 당겨져 떨어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짓누르던 감각의 교란에서 해방되었으니 근처에서 떨어지고 있는 선우도를 공격할 수도 있었지만, 안효철은 먼저 당장의 위치가 어디인지 알고자 했다.

발아래로 가까워지는 건 눈 덮인 설산 봉우리 정상이었고 좌우와 뒤쪽으론 첩첩이 늘어선 산맥들이 보였다. 발아래 좀 더 먼 앞쪽으론 얼어붙은 거대한 호수가 보였는데 주변은 평평한 설원이었으나 그가 떨어지는 봉우리 가까운 지점엔 협곡들이 얽혀 있는 모양새였다.

뽀득!

사방의 지형지물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면서 산봉우리에 쌓인 눈 속에 마침내 발목이 파묻힐 때, 선우도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청해 하라호(哈拉湖)인가?”

안효철에겐 생소한 호수명(湖水名)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듣자마자 그의 기감에 잡히는 먼 곳의 기척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환도작안술로 상황을 감지한 선우도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다시 들었다.

“벌써 그들까지 조우하여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지체하면 안 되겠군.”

안효철의 시선이 선우도에게 꽂혔다. 그의 시선을 느낀 선우도가 그를 돌아보며 실소를 머금었다.

“도망칠 테냐? 아니면 따라올 테냐? 뭘 선택해도 네 운명은 달라질 것이 없느니라.”

“기대했던바. 앞장서거라.”

뜻밖의 대답이었기에 선우도가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콧방귀를 뀌면서 산 아래로 경공을 펼쳐 내려갔다.

“흥! 따라와라!”

안효철은 망설이지 않고 곧장 선우도의 뒤를 따라 몸을 날렸다.

두근두근두근……!

심장이 격하게 두근거렸다.

안효철도 느끼고 있었다.

전엔 느껴본 적이 없는 운명적 실타래가 선명하게 보이는 듯하여 두 손에 잡힐 듯한 기분을 말이다.

* * * *

안효철과 선우도가 어느 설산 봉우리의 정상에 나타나기, 한 시진쯤 전.

염황신마 혁련제는 협곡을 돌아 빠져나가자마자 매우 낭패스러운 기색으로 잠시 멈칫했다.

눈 앞에 펼쳐진 건 꽤 광활한 설원과 얼어붙은 거대한 호수였다. 아무리 급하다고 해도 저 한가운데로 달려서는 기세가 살아난 적들의 추격을 피할 수도 없었을뿐더러 그들의 무공 특성상 싸우기에도 무척 좋지 않은 환경이었다.

“가자!”

혁련제는 다시 경공을 펼쳐 앞서 달리면서 부하들을 이끌었다.

혁련제로서는 당장 마주한 풍경이 달가운 환경을 갖고 있진 않았으나 지리적으로 어떤 위치이고 어떤 방향으로 가야 활로가 열릴 수 있는지는 계산을 끝낼 수 있었다.

협곡을 빠져나온 그들의 오른쪽으로는 시야를 가로막은 설산의 산줄기가 가파르게 늘어서 있었다.

당장 숨어들 곳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호수를 지나칠 정도의 거리만 내달리면 우측의 산자락 끝으로 다시 숨어들 수 있는 협곡들을 만날 수 있다는 걸 떠올릴 수 있었다.

혁련제가 앞서 내달리자 그 뒤를 염황종의 마인들이 뒤따랐다.

혁련제를 포함하여 휘하의 삼화룡 중 두 인물인 창윤과 무량 그리고 다른 염황종의 마인들 모두 행색이 멀쩡한 자가 한 명도 없었다. 특히 본래 염황마종의 복식은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평민 복장을 한 자들도 있었는데 그마저도 찬바람이 파고들 정도로 계절에 맞지 않게 헐거워서 다들 피부가 퍼렇게 질려 있을 정도였다.

장강의 백제성에서 광혈마종과 연합하여 천하오절 흑사왕 금태하와 구룡문을 대파했을 때만해도 그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지만, 지금은 전쟁에서 패퇴하여 퇴각하는 군대의 꼴과 다를 바 없었다.

“다들 힘을 내라! 어물쩍 뒤처지다가 검림의 칼밥 맞고 뒤지기 싫으면!”

창윤이 지친 기색을 드러내는 부하들을 돌아보면서 다그쳤다.

그들이 도망치듯 내달리는 이유, 바로 검림의 추격 때문이었다.

민산산맥(岷山山脈)은 사천의 서북부부터 서남쪽에 이르기까지 첩첩산중을 이루면서 무수히 많은 명산과 폭포, 강을 끼고 있었다. 백제성을 떠난 염황마종은 사천분지 북부와 한중 아래 산림지대를 지나서 이 민산산맥이 이루는 서북부의 심산유곡을 넘어 청해를 지날 계획이었다.

그렇게 경로를 잡은 이유는 사천 전쟁의 결과에 따라서 유기적으로 전선의 교차점을 설정하기에 용이했고, 청해 시달목분지에 구축될 환도마종의 천도환위진과 연계하여 퇴각이나 전력 지원을 받기에도 적절했기 때문이었다.

추후 접촉한 무영각의 무영으로부터 사천전쟁의 결말을 들었을 때는 전쟁에 합류하지 못한 상황이 못내 아쉬워했었다. 하지만, 미래 계획에 대비하여 천마신교 전력의 분배가 중요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던 혁련제는 꾸준한 속도로 산림을 헤쳐 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나아가다가 민산산맥 북서부의 진주탄폭포(珍珠灘瀑布)에 이르러서 염황마종은 오랜만에 폭포물에 목욕도 하면서 여독을 잠시 내려놓고 있을 때였다.

그때 강정학과 검림의 검객들이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수십 명이 순식간에 그들의 검에 쓰러졌다.

일부 폭포수에 몸을 씻던 자들은 옷가지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허겁지겁 도망쳤다. 넓은 면적으로 물길을 쏟아내는 진주탄폭포와 투명하고 아름답게 흐르는 민강 유역에선 힘을 발휘하기 어려웠던 혁련제는 일단 달아나는 것이 최선이라고 여겼다. 또 산을 타는 능력은 검림의 검객보다 뛰어났기에 쉽게 떼어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마냥 도망만치는 건 자존심상 계속 허락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강줄기에서 멀리 벗어난 숲 지대에 이르러서 혁련제는 오히려 싸울 준비를 마치고 강정학과 검림을 기다렸다.

수적으로도 네다섯 배는 우위에 있는 데다가 염룡마공의 불길에 힘을 더할 수 있는 환경은 비록 습한 기후에도 불구하고 싸우기에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판단은 결국 화가 되어 돌아오고야 말았다.

복수를 위해 절치부심한 검림의 검객들의 실력은 염황마종이 상대했던 구룡문도들보다 질적으로 훨씬 뛰어났을뿐더러 강정학, 강도혁 부자의 검공은 소름끼칠 정도로 무서웠다.

특히 백령검왕 강도혁은 삼화룡 중 두 사람의 합공을 넉넉히 받아낼 정도로 일신의 무공이 대단했는데 그 이상의 경지를 백령신검 강정학이 보여주었으니 결과적으로 염황마종이 검림에게 크게 패퇴하여 줄행랑을 치는 건 자명한 수순이었다.

혁련제는 이미 옆구리에 강정학의 검으로부터 큰 상처를 입고 자신의 화염으로 지져서 버틸 정도로 기력을 꽤 잃은 상황이었다.

그 뒤로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줄곧 도망만 쳐왔는데도 쉽게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으니 자존심에 금이 제대로 가버린 상황이었다.

‘강정학, ……찰거머리 노괴 같으니라고……!’

진주탄폭포와 그 이후 숲 지대에서의 일전 이후로 검림과 제대로 충돌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도망치는 과정에서 낙오자가 생기면 잠깐 기다려줘도 돌아오는 법이 없었으니 필시 사냥당한 게 틀림없었다.

게다가 낙오자들의 존재가 길 안내를 해주는 꼴임을 깨달은 이후론 전황에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이상, 이 꼬리잡기는 절대 끝나지 않을 것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혁련제나 삼화룡들은 더 쉬지 않고 부하들을 독촉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수일 전, 무영각에서 염황마종의 상황을 인지하였다는 걸 확인하였으니 만약 천마신교에서 그들을 구원하려 한다면 결국 열린 활로는 시달목분지 방면밖에 없는 것이다.

우측면으로 가파른 산맥을 끼고 좌측면으로는 얼어붙은 호수에서 반사된 햇볕의 광망을 받으면서 염황마종은 쉴새 없이 내달렸다.

마침내 호수가 점점 행렬의 뒤편으로 멀어져가고 행렬의 꼬리도 기다렸던 협곡 안으로 진입할 정도가 되어서 사위가 산자락에 가려지자 혁련제는 불안감의 아주 극히 일부나마 덜어냈다는 생각에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때는 정오라 태양이 정수리 위를 지나면서 협곡에 그림자가 없도록 구석구석 내리쬐고 있을 때였다.

‘……응?’

달리던 혁련제는 자신의 시야 위로 뭔가 아주 잠깐 깜박이듯 그림자가 드리워짐을 느꼈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쳐드는 순간, 그는 눈부신 태양 아래로 장포를 펄럭이면서 하늘에서부터 떨어져 내려오는 인영(人影)을 보았다. 그리고 그 그림자 속의 서슬 퍼런 눈빛을 마주친 순간, 바로 직전까지 극도로 기를 갈무리했었는지 섬뜩한 기운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면서 혁련제와 염황마종 마인들을 덮쳐오는 것이었다.

“끝이다, 염황신마!”

노기에 가득 차 외치는 그 목소리의 주인을 잊을 수가 없었다.

“강정학, 네 이놈!”

재앙처럼 떨어져 내리는 인영은 다름 아닌 백령신검 강정학이었으니,

그대로 덮쳐지면 끝이기에 혁련제는 지체하지 않고 염룡의 불길을 전신에 휘감은 채 승천하듯 태양 속 강정학을 향하여 도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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