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4화 – 제62장. 죽음 위에 서서 죽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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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라마께서 당신과 소통하는 걸 빈승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일월신마, 설마 당신은 처음부터 반기를 들 작정이었소?”
빌게포첸의 물음에 냉소평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클클클! 글쎄다. 아유타는 많은 걸 보지만, 또 보지 못하는 것도 있지.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열릴 것이라고 보는 것과 과실이 어떤 원리로 열리게 되는지 이해하는 건 다른 차원의 일이야. 접신하여 미래를 예견할 수는 있어도 그 과정에서 무슨 일어날지는 그녀도 알 수 없다는 것이지. 본좌도 이럴 줄은 몰랐거든. 클클클클!”
냉소평은 지금 상황이 재밌는지 연신 실소를 흘려댔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과 삼대수라, 그리고 성혈신마 빌게포첸과 진도건이라는 서로 어울리지 못할 사람들이 동행하여 사막을 횡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도건은 불타는 절벽에서 자신의 안위를 살피러 온 혁우를 보내 혈랑대를 돌려보냈다. 혁우도 지금 진도건과 냉소평 등의 무공 수준이 자신과 비교하면 천양지차라 여정에 방해될 것을 알았다. 거기다 진도건을 만나고 싶었던 소기의 목적도 이뤘기에 이젠 다시 목표를 바꿔서 혈마종으로 돌아가 가족, 친우들과 합류할 생각을 품었다.
냉소평도 순순히 혁우를 보내주었는데 그가 설령 그들과 반대되는 마음을 갖고 무슨 말을 떠든다 한들 어차피 큰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냉소평과 빌게포첸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진도건은 잠시 말을 멈추고 남쪽의 먼 어딘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누군가 그의 눈빛을 보았다면 시야에 잡히는 어떤 풍경에 시선의 초점을 맞추는 게 아닌 훨씬 더 먼 무언가를 건너다보고 있다고 느꼈을 것이었다.
‘뭐지? 이 먹먹한 느낌은…….’
안효철이 환도신마에 의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보다도 더 큰 알 수 없는 상실감이 가슴 언저리에 맴돌고 있었다. 언젠가 이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적이 있었던 것 같았는데 그게 무엇인지는 명확하게 떠오르진 않았다.
“뭐하냐? 갑자기 멍때리고.”
금강수라 하후무(夏候武)가 어느새 일행과 멀어진 진도건 쪽으로 시선을 던지며 물었다. 그 말을 듣고 냉소평도 뒤로 고개를 돌려 진도건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천하오절의 안위라도 걱정하는 게냐? 큭큭큭!”
냉소평은 안효철의 모습을 떠올렸다.
불타는 절벽에서 그의 신경은 오직 진도건에게만 집중되어 있었으나 빌게포첸과 잠깐이나마 충돌했을 때 보여준 안효철의 권력은 무척 인상 깊은 것이었다. 그리고 화산에서 그에게 두려움을 심어주었던 천무경도 연달아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천하오절의 위상을 공유하고 있는 자이니 그 실력이 궁금한 건 무인으로서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흥!”
진도건은 콧방귀를 뀌면서 다시 말을 몰았다.
냉소평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제대로 듣지도 못했다. 혈마가 머릿속에서 중얼거리는 말이 그의 신경이 쏠리게 했기 때문이었다.
“제법 큰 존재가 죽은 것 같다…….”
혈마가 분명하게 얘기할 정도로 뭔갈 느꼈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진도건에게도 전달되는 혈마의 감각이 쏠린 방향이라면 전선을 이루어 전쟁을 치르고 있는 감숙 방면이 분명했기에 대체 누가 죽은 것인지 궁금하고 또 불안했다.
‘혈마가 느낄 수 있을 정도라면…… 한 번이라도 마주친 적이 있는 사람일 거 같은데. 칫, 생각하기도 싫구나. 더 잃는 사람이 없도록 이 전쟁을 끝내야 해…….’
진도건은 선풍을 일으켜서 말들이 더 쉽게 달릴 수 있도록 했다.
“이랴!”
그가 말을 몰아 일행을 지나칠 정도로 달리자 냉소평 등도 일제히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냉소평이 진도건 옆까지 말을 달리도록 하면서 입을 열었다.
“마음이 급한가 보구나.”
“그동안 했던 네 설명으론 충분하지 않아. 천산의 용암비동이란 곳이 너희가 힘을 각성하고 또 잃어버린 힘을 회복하기 위해 구축한 곳이라면 그곳으로 날 인도하려는 이유가 무엇이냐?”
“신나게 달리면서 그 이유가 뭔지를 묻는 게냐? 큭큭큭!”
냉소평이 언행이 일치하지 않은 상황을 비꼬면서 실소를 흘렸다.
사실 불타는 절벽을 떠나 고비 중앙을 가로지르면서 냉소평이 줄곧 이야기해주었던 말은 정말 많은 정보와 의미를 담고 있었다. 혁우가 해주었던 이야기들과는 질적으로 비교가 안 되는 것이었고, 진도건이 다시 한번 전쟁을 끝맺으려는 의지를 불태울 수 있도록 하는 내용들이었다.
물론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판단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있었는데, 진도건은 바로 그 지점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었다.
일월신마 냉소평은 천마조사 단용후를 기억하는 세대였으며 현 태상교주 단원진과 친우 사이였다. 빌게포첸은 그 점을 확실하게 인정하면서 자신이 냉소평을 극도로 경계하는 이유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의 이야기를 신용할 수 있는 무언가가 더 필요하다고 느껴졌다.
냉소평은 진도건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그 이야기는 단용후의 ‘마도대의’에서부터 시작했다.
단용후는 강호무림을 새로운 질서로 개편하는 꿈을 꾸었고 그것이 바로 마도대의였다.
정파와 사파가 주고받는 정치적 이해득실에 의한 충돌이 아닌 정말 힘의 질서로 이야기할 수 있는, 대결과 비무로서 힘을 겨루고 성과를 차지하며 또다시 무한히 경쟁하여 진정으로 ‘무(武)’의 가치가 하늘에 닿는 세상을 바랐다.
하지만, 그도 정파와 사파가 아웅다웅하면서 서로 차지하려고 드는 정치적 권력의 속성과 그 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태고적부터 인간이 사회를 이루면서 구축한 근본적인 질서와 원칙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단용후는 진정으로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마도천하가 나름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모두를 아래로 내려다보면서 감히 침탈할 수 없는 ‘절대자’의 지위가 필요하다고 느꼈고 그 지위가 진정 ‘힘’으로서 영속해야만 ‘마도대의’로서 가치가 있다고 여겼다.
그것이 바로 ‘천마군림(天魔君臨)’의 꿈, 그 시작이었다.
냉소평은 단용후의 말년과 단원진, 단지운의 대에 이르기까지 천마신교의 확장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단씨 일가와 대마의 유변, 아유타 정도를 제외하면 천마신교에서 가장 핵심적인 전력과 인물을 꼽을 때 단연 첫 손가락에 꼽는 것이 바로 일월교와 냉소평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기조는 적어도 작년까지는 거의 변함이 없을 정도였다.
약 4년 전, 냉소평은 홍천환과 관련된 임무를 수행하기에 앞서서 아유타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당시 냉소평은 대마의가 대행으로 맡아오면서 줄곧 공석으로 유지되던 혈마라는 자리와 존재 가능성에 대해 큰 흥미를 갖던 중이었다.
“그 자리가 그리 오랫동안 공석이었다 보니 이번 작전을 기점으로 새롭게 탄생할 혈마가 어느 정도의 무공을 보여줄지 참으로 궁금하지 않겠소? 본좌는 그래서 이번 여행을 무척 기대하고 있다오.”
아유타가 그 말을 듣고 대답하길,
“혈마 원건이 최초의 혈마였지요? ……그가 죽은 지 꽤 오래되었지만, 그 이름은 정말 오랫동안 천마신교 안에서 이어져 왔군요. 후대 혈마가 아직 나타나지 않아서인지…… 제 눈에 비쳐지진 않고 있으나 이상하게 그 존재는 머릿속에 그리고 제 마음속에 계속해서 각인되어 사라지지 않고 있어요. 후후! 왜 그럴까요? ……그건 아마도 훗날 나타날 후대의 혈마가 천마의 진정한 대적(大敵)이며, 검은 태양을 저물게 할 자라는 것……. 단지 그뿐인 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냉소평은 그 말을 듣고 적잖이 놀랐다.
홍천환을 회수해오면 당연히 혈마는 천마신교 안에서 부활할 것이라 보는 게 당연한데도, 아유타의 말처럼 혈마가 천마의 대적이라 한다면 결국 그 존재는 천마신교가 아닌 외부에서 다시 현현될 것이라는 말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더 놀라운 건 그런 이야기는 그녀가 공개했던 그 어떤 계시에도 없는 내용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유타, 무얼 보고 있소이까? 설마 본교의 마도대의를 부정하는 것이오?”
“부정이라……. 이미 최초의 의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이 변질되었는데, 이 늙은 여인이 부정한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허허……. 떠나기 전에 편한 마음으로 대화나 하러 왔다가 뜻밖의 소리를 다 듣는군.”
“후후. 냉소평, 그대는 그대의 역할이 있어요. 자신을 믿고 뜻대로 가시길 바랍니다.”
“본좌가 그대를 불순한 의도가 있다고 교주에게 고발해도 말이오?”
“그리된다면 그것도 큰 흐름의 한 부분 아니겠습니까? 개의치 말고 뜻대로 하세요. 무엇에도 옥쇄(玉碎)되지 않는 것, 그것이 당신의 기질입니다.”
옥쇄란 명예나 충절을 위해 깨끗이 죽을 줄 아는 것.
그리되지 않는다는 건, 그의 행동을 결정하는 건 명예, 충절 또는 그것을 강요하는 그 어떤 권위도 아닌 오직 자신의 뜻으로 움직인다는 것.
냉소평은 아유타로부터 큰 짐을 짊어지게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그녀와 한 대화를 발설하는 일은 고려치 않은 채 중원으로 떠났었다.
그렇게 진도건을 만났고, 그에게 홍천환을 먹이고 일월의 혼돈을 심었다.
오직 당장 마주한 흥미로운 미래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여기서 진도건을 흥미롭게 만든 대목은 그를 혈마화하기 전후로 마주쳤던 두 인물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 대목까지 들은 결과가 지금 꽤 적극적으로 말을 달리게 만든 이유이기도 했다.
전(前)은 종남산 자락에서 마주친 조강선이요, 후(後) 천산 용암비동에서 마주친 주백자였다.
조강선의 무력은 일월신마 냉소평을 압도하였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감명이 깊었던 것은 조강선의 무공이 선경(仙境)에 닿아있었다는 점이었다.
대마의 유변이 환도마종의 사술을 빌려 생명력을 길게 연장하고, 아유타가 백 살이 가까워짐에도 신묘한 능력과 젊음의 활력을 유지하는 것도 가까운 불가사의였지만, 정말로 반선지경에 이르러 다른 차원의 위력을 보여주는 조강선의 검은 냉소평에게 그 이상의 인상을 남겼다.
그가 조강선의 권유에 따라 진도건을 죽이지 않고 일단 데려갔던 것은 그의 힘에 굴복해서라기보단 사제지간이란 흥미로운 정보로 인해 어떤 가능성을 열어줄지 기대감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먹은 순간, 냉소평은 혈마가 천마신교 내부가 아닌 바깥에서 천마의 대적으로 나타날 것이라는 아유타의 말을 떠올리고 그것이 현실이 될 것임을 깨달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마도대의에 의구심까지 갖진 않았었다.
그저 아유타의 말대로 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신기하다고 느꼈을 뿐이었다.
그 생각이 달라진 것은 3년 뒤 용암비동에서 주백자를 상대로 단원진과 함께 싸웠던 날부터였다.
주백자 또한 무공이 선경에 닿아있어서 다른 차원의 위력을 보여주었다. 적어도 단원진이 그가 아는 수준 이상의 것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패배를 직감했을 정도로 그 격차는 확연했다.
바로 그 지점이었다.
냉소평이 아는 친우 단원진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어떤 수준을 그는 완전히 다른 면모를 드러내어 끝내 주백자를 흔드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비록 그 과정에서 찰나에 그쳤다 하더라도 냉소평은 단원진이 품은 이면의 무엇을 눈치채고 말았다.
주백자는 무저갱으로 떨어졌고 마침내 천마신교의 마도대의를 방해할 잠재된 강적은 모두 사라진 것처럼 여겨졌지만, 냉소평은 이후에 홀로 떨어져나와 숙고의 시간을 가졌다.
이면의 무엇.
그것은 조강선이나 주백자처럼 선경에 닿은 듯한 그런 드러난 느낌이 아닌,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에 감춰져 있던 것이 불가피한 순간에 일시적으로 드러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정체에 대해 어렴풋이 윤곽을 잡은 이후 그는 아유타를 다시 만났다.
그가 찾아오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계시의 날이 다가오고 있는 듯합니다. 아무도 없는 천산에서 그대는 궁금한 답을 얻을 것입니다.”
고비의 사막을 달리는 냉소평과 진도건의 눈빛이 허공에서 강하게 얽혔다.
“본좌가 거기서 누구를 보았는 줄 아느냐?”
“누군데?”
“최초의 혈마. 그의 세 스승들.”
냉소평의 말에 진도건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놀라움으로 동그랗게 떠졌다. 그리고 눈시울마저 붉어졌다.
‘이럴 수가!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