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333화 (333/432)

333화 – 제62장. 죽음 위에 서서 죽다 (3)

장태환은 정말 필사적으로 싸웠었다.

당장 자기의 안위나 이해득실을 따지기 전에 이곳 오초령까지 군을 끌고 오게 만든 자신의 판단에 대한 책임을 피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남월당 무인들도 탈출을 시도하는 자들이 몇 있었으나 장태환의 결기는 전염성이 있어서 그들조차 땅에 두 발을 박게 만들었다.

그러나 필사적일수록 현실은 그를 더욱 벼랑 끝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그의 옆에서, 뒤에서 곁을 맡긴 채 싸웠던 남월당 무사들과 군사들 모두 점점 괴물이 되어갔다. 그 수가 점점 늘어나 종국엔 사방이 모두 괴물 천지가 되었을 때, 초식 하나하나 아군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해왔던 장태환은 마침내 격정이 폭발하면서 모든 것을 베어버렸다.

장태환도 많은 상처를 입었다.

상처 자체가 치명적이진 않았지만, 중독되기엔 충분했다. 일신의 기운을 폭발시켜 사위를 휩쓸었을 땐 그만큼 내부 저항력이 약해져 온몸으로 퍼지고 말았다.

어차피 자신도 괴물이 될 운명이라면 차라리 이곳에서 오는 적들을 하나라도 더 데려가겠다는 생각에 버티고 서 있었으나 이젠 피아를 구분할 수 있는 오감마저 무너지고 있었다.

오직 날카로움을 유지하고 있는 건 그의 쌍고검과 기감뿐.

“다 죽어가는 거 같은데, 치워버리겠습니다.”

흑각수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물끄러미 지켜보던 구마진은 앞으로 나선 흑각수가 더 나아가 장태환과 거리가 제법 가까워졌을 때,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스컥!

“멈춰……!”

구마진의 목소리보다 장태환의 검이 더 빨랐다.

눈부시게 뻗어나간 검기가 접근한 흑각수의 목을 가르며, 동시에 구마진의 목 앞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그 끝이 닿지 못하고 아슬아슬한 간격으로 스쳐 지나갔다.

구마진은 등골이 싸늘해지는 걸 느끼면서 무심코 자기 목을 쓰다듬었다. 그의 눈에 머리가 어깨에서 떨어지는 부하의 모습에 꽂혀있음은 물론이었다.

“이, 이런……!”

“감히!”

흑각수들 사이에서 소동이 번졌다. 금방이라도 장태환을 덮칠 기세였는데 구마진이 급히 팔을 들어 움직임을 막았다.

“그만! 아무리 서 있는 게 고작일지라도 죽음을 배수진으로 둔 노검객의 검은 세상 그 어떤 보검보다 날카로울 것이다. 너희들, 괜히 명을 재촉하지 마라.”

“……알겠습니다.”

구마진으로선 괜히 죽어가는 장태환을 상대로 자존심을 세울 필요가 없었다.

흑각수를 돌려세우고 설매화와 구마진도 뒤돌아 왔던 방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때 장태환이 작고 갈라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는데 그 말이 구마진의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진……도건?”

중원에 먼저 나타났다는 두 번째 혈마의 이름을 구마진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멈춰서서 장태환을 돌아보았는데 그의 고개가 좀 더 들려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산발이 되어 검게 굳은 피가 덕지덕지 낀 백발 사이, 흐려진 눈으로 그를 집중해서 바라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시력을 잃어 모든 게 흐리게 보였어도 구마진의 붉은 머리카락과 혈마기 특유의 기척은 구분할 수 있던 것이다.

혈마기 특유의 기척.

장태환은 미묘하게 다르다는 걸 느끼고 이성을 찾았다.

“……클클클! 아니, 그놈이 마교도를 끌고 다닐 리는 없지……. 그럼 네놈이 마교의 혈마란 녀석이겠구나. ……큭, 이 어찌 운명의 장난인가? 노지신이 죽고 난 이후로 그놈이 마뜩잖은 적이 단 하루도 없었거늘, 대신 데려가기 딱 좋은 녀석이로다.”

구마진의 얼굴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가 장태환의 무슨 의도를 얘기하는 것인지 아는 건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를 진도건보다 낮춰보는 듯한 문맥은 심기를 건드리기에 충분했다.

“다 죽어가는 영감탱이가…….”

구마진에게서 붉은 마기가 흘러나와 그 주변으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욕망에 충실하게 싸워온 삶이다. 부하를 돌려세웠던 구마진의 냉정한 심지는 그만큼 깨지기 쉬운 것이었다.

장태환도 따라 반응했다.

음양의 양면을 가득 채울 노검객의 귀기가 서슬 퍼렇게 타오르고 있었다. 기세가 허공에서 맞부딪치는데 오초령 진지를 가득 메운 사체들의 사기(死氣)마저 지하로 내리 짓눌릴 정도였다.

바깥쪽을 바라보며 계속 걸어가던 설매화가 두 사람이 기운부터 일으켜 맞부딪치자 미간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아니, 참! 우리보곤 물러나라 해놓고서 자기는 곧바로 싸우려 드는 건 뭐니?”

“그러게 말이다.”

흑각수 한 사람이 설매화에게 맞장구쳤다. 설매화가 손짓하며 그들에게 이야기했다.

“혹시 접근하는 놈들 없는지 확인해봐요. 우리가 여기에 있단 건 아직 알려선 좋을 게 없으니까.”

“그러지.”

흑각수가 산 아래를 살피기 위해 흩어지는 사이, 구마진은 직접 부딪치기에 앞서 일으킨 마기로 먼저 장태환을 견제하고 있었다.

쿠쿠쿠쿠……!

구마진은 장태환의 조금 전 말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싸움을 시작할 듯 태세도 갖추었으나 섣불리 움직이는 걸 피하고 있었다.

‘천무방의 이장로. 검기로는 천무방 최고라고 했던가? 눈과 귀가 멀어도 저런 대담한 기세라니……, 과연 죽음을 각오했다 이건가?’

구마진의 혈마기는 매우 무겁고 거대하며 또 끈덕지게 사위를 짓누르고 있었지만, 장태환의 근처로 가면 그가 내뿜는 귀기에 찢기면서 기운만으로 그를 꺾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또 장태환의 솜씨는 방금 흑각수 한 명의 목을 베었던 한 수가 구마진이 본 전부였으니 예상외의 무언가로 낭패를 볼 가능성이 우려되었다.

공중에서 기운이 얽히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이미 십수 합을 겨루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나 어차피 죽음을 각오한 장태환만이 어서 덤벼들길 바라는 마음이 더 컸다.

‘어서 오너라……. 노부에겐 이제 시간이 많지 않으니…….’

장태환은 기꺼이 마지막 진력을 쏟아부을 준비가 되었다.

마지막 길동무가 마교의 혈마라면 어찌 달갑지 않으리오.

각오가 된 장태환과 달리 머뭇거리는 구마진.

그때 그의 귀에 흑각수의 외침이 들려왔다.

“주군! 적군이 산 아래에서 몰려오고 있습니다!”

그 외침이 자존심에 밀려났던 현실 감각을 다시 일깨워주었다.

“늙은이, 운이 좋았군. 친구들 품에서 죽을 행운을 누리게 되는구나.”

구마진이 기운을 거두면서 뒤로 훌쩍 물러나 설매화 등의 곁에 섰다. 그 순간 장태환도 그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는 못했으나 그 의도가 무엇인지 깨닫고 분개했다.

“네 이노옴! 이 겁쟁이 같은 쥐새끼들! 어서 덤비거라! 어서 덤비란 말이다!”

그 목소리는 내공마저 가득 실려서 오초령 전체를 쩌렁쩌렁 울렸다. 또 구마진이 도망치려 함을 깨닫고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는지 먼저 기운을 폭발시키면서 무수히 많은 검기를 쏟아냈다.

일월쌍고검법 아수라살발타(阿修羅殺鉢陀).

일월은 어디에도 칼날을 피해 숨을 곳 없이 모두를 비춘다는 의미가 있고, 또 인간이 일양(日陽)이라면 귀기는 월음(月陰)이라 귀신과 등을 맞대고 싸운다는 의미도 있다. 옛 검법(古劍法)이라는 건 이런 불가해를 관통할 수 있는 먼 옛날 주술적 의미를 가리기 위한 명칭.

죽음이 가득한 이 땅 위에 아수라의 검기가 폭풍처럼 휘몰아치니 구마진이 더 다급하게 혈마기를 일으켜 몸을 보호하면서 뒤로 물러났다.

‘어디서 이런 기운이……!’

그가 놀랄 수밖에 없는 것이 장태환은 진심으로 그와 동귀어진하기 위하여 진원진기까지 끌어다 쓴 것이었다. 그 순간에 독기에 의한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지만, 장태환이 세워놓은 아수라의 심지를 꺾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구마진은 호신강기를 일으켜 스스로 보호하면서 자신을 덮쳐오는 기세를 이용하여 바깥으로 물러났다. 그럼에도 장태환의 검기는 괴이한 귀기를 품어 매우 날카롭고 집요하여 호신강기 일부를 찢고 그의 몸에 상처를 내었다.

‘이런 식이라면 정면으로 맞붙어도 위험했……. 헉!’

그 순간 구마진의 얼굴이 노기로 인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적의 접근을 살피기 위해 흩어졌던 흑각수와 달리 설매화는 진지 안에서 구마진을 기다렸다가 미처 장태환의 검기에 반응하지 못하고 휩쓸려버린 것이었다.

설매화는 무영의 지위를 버리게 하고 속정까지 깊이 섞은 오직 그만의 여자였다.

온몸이 갈가리 찢어져 사지든 목이든 성한 곳 없이 너덜거리는 상태로 쓰러지는 게 고스란히 구마진의 시야에 잡혔으니 그가 그렇게 분노하는 것은 당연했다.

“적 고수 하나가 접근합니다! 더 지체하면 안 됩니다!”

그때 흑각수 하나가 장태환의 기세 밖으로 벗어난 구마진에게 다가와 팔을 붙들며 말했다.

흑각수들은 구마진이 설매화를 제외하면 그 누구도 신체가 접촉되는 걸 싫어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팔을 붙들었다는 건 예기치 않게 상황이 긴급하게 흘러갈 수도 있음을 경계한 것이었다.

“빌어먹을!”

흑각수의 말에 구마진도 감각을 열었고 산 아래 멀리서부터 무서운 속도로 올라오고 있는 존재 하나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즉시 흑각수들과 함께 서쪽의 가파른 산등성이를 향해 경공을 펼쳐 떠났다.

“네 이놈! 어딜 가느냐!”

장태환이 분개하여 소리쳤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기운은 달아나는 구마진을 쫓을 정도는 아니었다.

검기의 폭사는 잠깐 더 지속되었지만, 그리 오래지 않아 사그라들었다.

죽음이 가득한 대지 위에서 진지의 구조물들은 완전히 파괴되어 폐허로 변해버렸다.

장태환은 그 한가운데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설매화가 그가 내뿜은 검기에 휩쓸려 사망했지만,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장태환은 마교의 혈마를 놓쳐 소득이 없는 걸 마치 패배한 것처럼 느껴졌기에 여기서 무릎만큼은 꿇기 싫다는 듯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독혈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으니 그 강력했던 의지력마저 힘이 다해 꺾이면서 극심한 통증이 온몸을 엄습했다. 내부 장기들부터 서서히 녹아내리기 시작할 정도였으니 이젠 정말 두 발로 버티기 힘들어진 것이었다.

서서히 꺾여가는 무릎.

그때 처음으로 장태환의 귀에 아주 명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장 형!”

피부로 바람이 느껴진다 싶더니 거대하면서도 듬직한 무언가가 쓰러지는 그의 몸을 받쳐서 붙들어준다.

“두기인가……?”

“그렇소, 장 형! 나 백두기요!”

장태환은 자신을 부축한 존재가 누구인지 단숨에 깨달았다.

삼형제.

장태환은 자신과 함께 천무방의 장로가 된 백두기와 노지신을 진심으로 형제처럼 아꼈다. 그래서 노지신의 죽음에 그렇게 분노했던 것이고 진도건을 쉬이 용서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자신의 검을 진도건에게 겨눌 수 없었으니 그만큼 혈마 구마진을 데려가고자 했던 욕심이 컸던 것도 모두 그 때문이었다.

“끌끌……! 아우의 얼굴을 볼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나마 귀는 들리는 게 다행인가? 자네 목소리가 잘 들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오……, 형님!”

백두기의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장태환이 다른 두 장로를 형제처럼 여겼듯 그것은 백두기도, 먼저 떠난 노지신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는 오초령에서 장태환의 공력을 담은 고함을 듣자마자 전력으로 질주했다. 위험에 처했다면 반드시 구해내겠다는 마음이었으니 이렇게 최후를 지켜야 하는 상황을 원한 건 결코 아니었다.

백두기는 장태환의 몸으로 진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혹시나 살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희망 때문이었으나 그것으로 인해 그는 오히려 더 가망이 없다는 현실을 깨닫게 되었다.

온몸 가득한 독혈이 그의 진기에 저항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진기를 불어넣는 일이 고통을 더는 것 이상의 목적은 남아있지 않았다.

“방금까지 여기 있던 놈이 대체 누구요? 내 반드시 원수를……!”

백두기가 분개하여 물었으나 장태환이 떨리는 손으로 그의 손을 꼭 잡았기에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장태환은 자신의 생명이 심지 끝 사그라드는 불씨에 불과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내 쌍검을…… 진도건, 그 녀석에게 주게. 지금의 녀석이라면…… 아수라의 힘을 취할 수 있겠지…….”

“좋은 스승도 없이 그게 되겠소?”

“클……. 법식(法式)보다 중요한 건 본질(本質)이니……, 고검법 따위 의미 없는 것일세…….”

장태환의 말은 잘 들렸지만, 그의 목소리가 점점 힘을 잃어가는 게 여실히 느껴진다. 장태환이 시력을 잃어 아우의 얼굴을 보지 못하듯, 백두기도 형님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느새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장태환의 고개가 조금 옆으로 움직였다.

어느새 두 사람 주위엔 천무경과 천서은을 비롯하여 백두기와 남궁평, 구치상까지 모여있었다. 천서은의 얼굴은 이미 눈물로 범벅이 되었을 정도로 슬픔을 토해내고 있었다.

회광반조(回光返照).

눈은 이미 독혈에 죽었으나 기감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타오른다.

“천 방주……, 나…… 먼저…… 가오.”

“……편히 가시오.”

천무경의 목맨 음성이 무겁게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말을 듣자마자 백두기의 손을 꼭 붙잡고 있던 장태환의 손이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천무방의 이장로이자 남월당 당주 일월쌍인 장태환.

오초령에서 자신의 부하들과 함께 전사.

백두기는 장태환의 유언에 따라 그의 일월쌍고검을 챙겨 나왔고 대신 시신은 폐허 위에 그대로 두었다. 그리고 진지 안에 바깥의 사체까지 모두 밀어 넣고 불을 지폈다. 진지 전체를 화장시켜서 감염을 막고자 한 것이었다.

그리고 장태환의 죽음을 지켜본 이들은 다음 싸움을 맞이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전삼군과 후군이 합류하여 오초령까지 전진하는 동안 후방 보급선이 끊어졌다는 보고를 받았는데 시체들이 일어나 군을 공격했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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