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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332화 (332/432)

332화 – 제62장. 죽음 위에 서서 죽다 (2)

* * * *

“양막군이…… 전멸했다고 합니다!”

이른 아침 찾아온 뜻밖의 보고에 조태상과 고소덕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들이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가능성을 좁히려고 할 때, 전령이 바로 덧붙인 말은 고민의 여지를 줄여주었다.

“그리고…… 정황상 적룡단과 단주 마웅패가 전삼군 위치에 나타난 것으로 보입니다.”

오초령 진지나 무위성 같은 더 후방 쪽에 본대가 있을 것으로 예상했던 모두는 그 보고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적룡단의 본대라니!”

“붉은 용이 그려진 깃발이…… 부대에 가득한 걸 저의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장군!”

“다른 부대는?”

“양막군이 첫 교전 부대였고 조태번군과 순숙군은 이곳 후군보다 더 일찍 전갈이 도착하여 뭉치기 위해 움직이는 것으로 압니다.”

“주탄군은? 팔부지에서 후위로 군을 물린 것까지 어제 보고가 되었는데, 달리 소식이 없느냐?”

“아, 아직 다른 전령으로부터 보고되지 않았습니까? 그게…… 제가 파악하기로 주탄군은 이미 오초령 진지를 점거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뭣이?”

“그게 신호였군…….”

조태상이 깜짝 놀란 반응을 할 때, 천무경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고소덕이나 조태상도 이번만큼은 당황하여 빠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대응하면 좋겠습니까? 양막군엔 창천단 절반이 있었음에도……!”

“전멸했다고 보고했지만, 모두 죽었을 리는 없습니다. 아마 양막이 전사하자 부대가 깨진 것이겠지요. 그렇지 않느냐?”

“그, 그럴 것이옵니다.”

천무경이 전령을 쏘아보며 묻자 고개를 끄덕거린다.

천무경이 다시 조태상과 고소덕을 바라보았다.

“일단 후군을 빨리 전진시켜서 남은 두 부대와 합류해야겠습니다. 양막군에 배치된 창천단 전력은 아무래도 구치상 단주가 직접 이끄는 조태번군의 조직보다는 약하니 일부러 먼저 노린 것일 겁니다. 그렇더라도…… 적룡단이 직접 오초령 앞쪽에 나타날 줄은 몰랐는데, 이런 식이라면 오초령을 점령한 주탄 장군과 남태환 당주도 위험에 처했을지 모릅니다. 이렇게 된 거 빠르게 군을 전진시켜 모든 부대가 오초령을 돌파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크음……! 그렇게 합시다.”

조태상과 고소덕은 천무경의 제안대로 서둘러 후군을 전진시키기 시작했다.

이미 전삼군은 육, 칠부지까지 진군한 상태였으니 사부지 위치에 있는 후군을 밀어올려 군 전력이 분산된 현재 상황을 이용, 각개격파 당할 우려를 제거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만큼 마웅패가 직접 이끄는 적룡단이 전삼군 위치에 나타났다는 소식은 모두에게 경각심을 갖게 할 만한 일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두 장군들이나 천무경도, 자신들의 이 결정이 오초령에서 자기들을 구출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주탄군과 장태환의 남월당을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당장 무위난주 전선에서 주의할 만한 상대 전력은 적룡신마 마웅패 하나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전 사시경이 되어 후군은 이미 전멸한 양막군을 제외한 조태번군, 손숙군과 만나 다시 전열을 정비할 수 있었다.

두 장군은 조태번과 손숙으로부터 마웅패의 적룡단이 그들에게도 나타났으나 견제만 해올 뿐 양막군을 무너뜨릴 때처럼 직접 돌격해오지는 않았다고 하였다.

“적룡단이 전삼군 위치에 나타났다면 오초령은 아직 시간이 있겠지요.”

고소덕은 작금의 상황이 최악은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나직이 중얼거리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하지만, 천무경이나 같이 있었던 백두기는 장태환의 안위가 슬슬 걱정되고 있었다. 당장 주어진 정보로는 고소덕의 판단이 틀린 건 아니었으나 이렇게 급작스러운 상황이 눈앞에 벌어졌다면 다른 곳이라고 그에 준하는 위험에 처하지 않을 리 없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전삼군을 먼저 오초령에 보내는 것 또한 그들 모두를 위험에 빠뜨릴 판단이 될 수 있었으니 지금은 잠자코 시간의 흐름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계략에 휘말리거든 부디 싸움을 고집하지 말고 물러서시길 바라오, 장 형…….’

백두기는 내심 깊이 걱정하고 있었다. 장태환의 성정을 떠올려볼 때, 그의 안위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 * * *

소마혈.

마웅패는 그것을 술에 희석해서 이번 작전에 동원될 군사들과 적룡단원들이 마시도록 했다.

따라서 개개인이 복용한 양은 매우 미량이라고 할 수 있었고 그 독기가 퍼지는 것조차 보통 사람의 면역력에 눌려 잠복기를 갖다가 그대로 소멸될 수도 있었다. 내공을 잘 다루는 무인인 경우 운기조식만으로 손쉽게 체내에서 태워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마공을 다루는 마도인이라면 자신의 마기 안에서 잠복한 채 증식을 시도하는 걸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다만 마도인이라면 본래 자신의 것이 기세가 더 강하므로 증식의 속도를 제어하거나 무공이 높다면 제거하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죽음에 다다랐을 때 무용하게 된다.

생명이 끊어졌을 때 신진대사가 멈춤으로써 인간의 기본적인 면역력은 동작하지 않게 되고 의지가 끊어지니 더 큰 마기의 기세로 제어하는 것도 불가능해진다. 정순하고 단단한 내공으로 태워버리려는 시도조차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소마혈은 자기의 생명력으로 그 시체를 다시 채우기 위해 증식할 것이고 죽음에 이르게 한 신체의 손상을 다시 복구할 것이다. 심장이 다시 뛰고 멈췄던 피의 흐름은 독혈로써 다시 흐를 것이다. 사혈신마가 쌓아 올린 독혈 속 마성이 작은 씨앗으로 몸에 심어졌다가 발아하면서 다른 생명을 탐하는 살욕과 식욕의 경계 어디로 부활한 본성을 이끈다. 그 독은 피로, 또는 타액의 비말로 전염되고 이미 충분히 증식된 이후이기 때문에 다음 감염자는 더 빠르게 증상이 나타나 숙주 신세가 된다.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은 공격할 대상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계속된다.

단 두 시진만 기다리면 이런 상황을 유도할 수 있는 것이다.

이지를 상실한 채 살아있는 것이라면 뭐든 공격하고 물어뜯고 감염시키는 이 시체 괴물은 인간이 조종할 수도 없었다. 그런 측면에서 한 번 상황이 발동되면 이 사태가 천하 전체로 퍼져나갈 것처럼 보여도 꼭 그렇지는 않다.

사혈신마 서문질이 스스로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듯 제어하지 못한 독혈 자체적으로 가진 부패의 성질로 인해 일정 수준 이상 증식한 이후엔 되려 신체 기관을 다시 무너뜨리면서 두 번째 죽음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공격할 거리를 던져주지 않고 고립시키면 자연적으로 끝내 죽음으로 소멸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가만히 놔두면 시체괴물이 머물렀던 그 일대는 부패한 땅이 되겠지만, 다시 죽은 사체들을 불로 태우면 남는 건 한 줌 재일 뿐이다.

오초령 진지의 울타리는 그렇게 시체 괴물들이 자기 자리에서 다시 죽을 수 있도록 제한하는 울타리가 될 터였다.

해가 중천에 떠오른 정오.

겨울바람이 산자락을 타고 신나게 달려왔다가 끔찍한 죽음의 냄새를 맡고는 화들짝 놀라 와류가 되었다가 도망가길 반복했다.

끔찍한 괴성과 비명, 싸우는 소리로 가득 찼던 오초령 진지는 어느새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그곳으로 일단의 무리가 접근하고 있었다.

그들은 적룡단도 아니었고 조태상군도 아니었다. 창천단이나 천무방은 더더욱 아니었다.

제일 앞에서 무리를 이끄는 남자는 바람에 휘날리는 붉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가 눈에 띄는 남자였고 그 뒤로 흙빛의 피부를 가진 고혹적인 여인과 일단의 사내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바로 구마진과 설매화, 흑각수들이었다.

환도마종은 마침내 중요한 거점에 천도환위진을 구축 및 완성하였는데 본진인 요마산 천마신궁과 전진기지 역할을 하는 토로번의 교하토성 그리고 청해 서북부의 시달목분지(柴達木盆地)의 초라한 숲 지대, 마지막으로 유변이 떠나고 난 뒤 자리가 비게 된 청의향 마원당의 뒤뜰이 바로 그곳이었다.

엄청난 양의 마기를 대가로 요구하지만, 그 대가로 며칠 혹은 보름 가까이 걸릴 만한 거리를 단시간에 도약하게 해주므로 지금과 같은 전시상황에서 천마신교 전력의 중추를 이루는 인물이라면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마진은 자신의 내력을 대가로 바쳤고 청의향에 도착한 후에는 꼬박 이틀 동안 회복을 위해 운기조식만 해야만 했다. 청의향 의원들에게 흡성대법을 시전하고픈 욕구가 강하게 일었지만, 그 짓은 단지운이 허락하지 않았기에 그만한 시간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구마진은 닷새 동안 신강에서 청해까지 날아와서는 기련산맥을 넘어 오초령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오초령 진지에 가까워진 구마진의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울타리와 가까운 바깥에 이미 시체들이 무더기처럼 쌓여있었기 때문이었다.

더 가까이 가자 눈에 띄게 썩고 있는 시체들이 보였다.

서문질이 죽고 난 이후에 독혈 때문에 반 시진도 안 돼서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썩어 문드러졌다는 대목이 떠올랐다.

‘불쾌하기 짝이 없군…….’

진지의 초입부에 들어섰지만, 구마진은 곧 되돌아갈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흡성대법으로 끔찍한 짓을 많이 저지른 구마진이라도 사방에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썩어버린 사체들은 보기에도 불쾌했고 부패로 인해 발생한 독향은 조금만 맡아도 어지러울 정도인데 공력으로 기류를 만들어 접근할 수 없도록 해도 근처에 맴도는 자체만으로 불쾌감으로 자극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생존자가 있을 리 만무한데 그만 돌아가죠.”

설매화가 더 참기 어려워 불만을 표시했다.

구마진도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바로 몸을 돌리지는 못했는데 이곳의 상황을 꼼꼼하게 확인하여 다음 상황을 준비하라는 천마령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장 불태우지 못하는 게 아쉽군.’

불에는 부패독이 빠르게 소멸하기 때문에 익숙한 탄내만 견디면 오히려 불이 주는 열기가 이 추위를 막을 수 있어서 더 좋겠다는 생각이 진지 내를 걸으면서 계속해서 떠올랐다.

“이 정도면 됐으니까 그만 나가는 게…….”

설매화가 뒤에서 불평을 다시 늘어놓다가 구마진이 앞에서 손을 들자 입을 다물었다.

구마진이 걸음을 좀 더 빨리하여 앞서 걸었다. 그를 쫓아 따라가는데 흥이 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생존자가 있을 줄이야, 큭큭!”

구마진과 설매화, 흑각수는 자신들의 눈을 의심하지 못할 만큼 똑똑히 보고 있었다.

썩어가는 시체들의 한 가운데에 쌍검을 들고 피칠갑을 한 노인이 서 있었다.

구마진은 그 노인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오초령을 어느 부대가 점령했고 거기에 어떤 무림 조직이 가담해있었는지 이미 보고 받았기 때문이었다.

“천무방 이장로이자 남월당주 일월쌍인 장태환. 기어코 모두를 죽여 살아남은 것인가? 큭큭! 명성만큼 무공이 뛰어났다면 충분히 이 지옥을 빠져나갔을 거로 생각했는데 말이야.”

“……거기 누구냐?”

“천마신교의 혈마 구마진이다. 끝내 모두를 죽이고 지옥에서 홀로 살아남은 당신의 능력에 존중을 표하지.”

“……마기를 품은 자들……. 그런가? 마교의 주구들이 뒷정리라도 하러 온 게로군…….”

구마진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장태환의 목소리를 처음 들은 것이긴 하지만, 목소리에 힘이 없고 심하게 갈라져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발음을 제대로 알아듣기 힘들었다. 또 대답하는 순간이나 시야를 확보하려는 고개의 움직임 같은 게 어딘가 느리고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중독되었나……?’

그들은 장태환이 지닌 일신의 무공이라면 충분히 아비규환이 됐을 오초령 진지를 어렵지 않게 빠져나갔을 거로 짐작하고 온 것이었다. 그런데 벗어나지 않고 끝까지 남아서 모든 시체 괴물을 처리하다가 그 피를 저 정도로 뒤집어썼다면 제아무리 내가고수라도 버텨낼 수 없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새삼 두 발로 선 죽음 가득한 현장이 조금 두려워 지는 건 당연한 순서였다.

한편 장태환의 상태는 구마진의 짐작 이상으로 심각했다.

구마진은 자기 말에 반응하여 장태환이 대답했다고 생각했으나 장태환의 귀엔 이명만이 계속 웅웅거릴 뿐이었다. 시력도 잃어버려 눈앞이 뿌옇게만 보였는데 고개를 들어도 그저 무리의 그림자로밖에 판별되지 않을 정도였다. 머릿속으로는 아비규환의 참상이 아직도 어른거리고 있었으니 고통의 파도 속에 몸을 내맡긴 기분에 휩싸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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