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화 – 제61장. 다시 만나는 일월신마 냉소평 (5)
일행은 초지를 지나 모래사막을 건너기 시작한다.
황금빛 물결은 보기엔 좋지만, 텡그리나 바단지린 사막에서 만났던 모래언덕보다 더 쉽게 발이 푹푹 빠지는데 강추위를 동반한 칼바람이 불 때면 경사면이 무너지듯 쓸려내려 갔다. 그때마다 이상한 운율과 같은 소리가 들려오는데 호주골이 설명하기로 이런 자연현상으로 인해 ‘노래하는 사막’이라는 별명도 있으며 몽골족은 여길 홍고린엘스(Khongoryn Els)라고 부른다는 걸 알려주기도 했다.
그렇게 다시 고생스럽게 모래언덕 홍고린엘스를 지나 초지에 발을 디딘다. 푹푹 발이 빠졌던 모래사막의 고생스러움에서 해방되어서 기분이 좋아졌는지 투레질하는 말들을 다시 진정시키며 두 번째 산줄기를 따라가다가 봉우리가 끊긴 지점을 찾아 또 넘어간다.
그런 식으로 세 번째 산줄기까지 모두 넘어가자 다시금 평활지가 맞이한다.
굵은 모래와 자갈, 메마른 들풀들만 가득한 평활지를 지나 또다시 지겹게 언덕들이 반복되는 곳을 지나던 중 어느 시점부터 류단아는 일행들을 언덕 위로 안내함으로써 정상에 올라 탁 트인 시야 속에서 드디어 종착지를 가리킨다.
“드디어 도착했네요, 붉은 사막. 저 오른쪽의 절벽지대가 바로 불타는 절벽이에요.”
언덕 정상 아래로 드넓게 펼쳐진 광야는 그 자체로도 경탄을 자아낼 만하지만, 더 놀라운 건 그들이 있는 지점부터 북쪽으로 구불구불 이어진 절벽지대로 인해 좌우 토양의 색깔이 확연하게 갈라지는 풍경이었다.
특히 왼쪽 땅이 거무튀튀한 느낌이 강한 잿빛 토양이라면 절벽 오른쪽 땅은 말 그대로 붉었다. 지금이야 한겨울에 접어드는 시점이긴 했지만, 겨울이 지나고 다시 땡볕이 지글지글 타오르는 때가 되면 아지랑이와 붉은 지면으로 인해 절벽이 불타는 느낌을 받겠다는 상상을 해본다.
진도건은 잠시 지형을 살펴보았다. 지금 오른 언덕 정상에서 동쪽으로 능선을 따라 조금만 더 가면 손쉽게 절벽 아래의 붉은 사막 지대로 떨어질 것처럼 보였다.
진도건이 다시 류단아를 쳐다보았다.
“지금부터는 나와 안 대협만 이동하겠소. 너무 가까이 올 생각은 말고 이 언덕 지대에 숨어있는 게 안전할 거 같소.”
“그럴게요.”
류단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남아 기다립니까? 따라가면 안 됩니까?”
혁우가 자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물었다.
“일월신마와 싸울지도 모른다. 네게는 위험할 수도 있는 자리일 텐데?”
“혈마의 무위를 가까이서 볼 수 있다면 그걸로 영광 아니겠습니까?”
“후후! 네 혈마는 구마진이란 자가 아니냐?”
“……그건 제가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알아서 하게 두지.”
“알겠습니다.”
안효철의 말에 진도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 사흘 정도 시간 동안 제법 가깝게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편해지긴 했다. 지닌 무공의 수준으로 보아 거리만 적당히 유지한다면 크게 휩쓸리지 않고 자기 안위 정도는 지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물론 직접 노려진다면 얘기는 다르겠지만, 진도건으로서는 혈마종의 일원인 혁우가 어떤 심적 변화를 맞닥뜨릴지 궁금해졌으니 그도 안 말리는 게 낫다고 여겨졌다.
진도건과 안효철, 혁우는 아예 말에서 내리고는 경공을 펼쳐서 움직였다.
진도건이 혁우를 슬쩍 보며 입을 열었다.
“우린 먼저 가마.”
“예? 저는요?”
“정말 싸우게 된다면 어디쯤인지 충분히 알 수 있게 되지 않겠나? 훗.”
진도건이 피식 웃음을 흘리면서 안효철과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두 사람의 신형이 앞쪽으로 쏜살같이 날아갔다.
“쳇, 같이 가주지…….”
혁우가 툴툴거리면서 전력으로 경공을 펼쳤다.
드넓은 황무지들을 주로 보다가 절벽의 울퉁불퉁한 벽면이 어설프게 하늘을 가리며 시야를 지나치는 느낌은 오랜만에 신선한 기분을 가져왔다. 하지만, 그런 조금은 들뜬 기분이 비단 달리는 환경의 변화보다는 한 번쯤은 매듭을 풀고 갔어야 할 은원의 장본인을 곧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인 부분이 컸다.
구불구불한 절벽 벽면을 따라 얼마간 달렸을 때는 절벽 위로 올라가야 하나 잠깐 생각하기도 했지만, 언덕 위에서 보았던 절벽이 동북쪽으로 가다가 서북쪽으로 크게 꺾이는 지점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진도건의 감각에 마기의 기척이 잡혔다.
절벽을 따라 계속 서북쪽으로 가면 마주칠 수 있는 위치.
처음엔 기척이 희미해서 입을 다물었으나 점점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그의 몸에 남은 옛 상흔이 꿈틀거려 그 존재가 맞다는 걸 알려주기 시작한다.
“일월신마입니다.”
“그렇군.”
다시 한번 절벽 모퉁이를 돌았을 때, 진도건은 기억 속에 선명히 남은 얼굴의 노인을 발견했다.
그의 검에 당하여 얼굴에 비스듬히 자상이 새겨진, 수염 하나 기르지 않은 매끈한 얼굴은 점점 거리가 가까워져 이목구비부터 더 명확하게 눈에 들어올수록 심장을 더 격렬하게 뛰게 했다.
“크하하하!”
일월신마 냉소평의 웃음소리에 나는 듯 달려가던 진도건과 안효철도 그만 경공을 멈추고는 차분한 발걸음으로 좀 더 걸어갔다.
“정말 오랜만이구나, 진도건! 이제 삼 년…… 아니, 거의 사 년 만인가?”
“그렇군. 정말 오랜만이야.”
“본좌는 네가 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넌 어때?”
“아아, 나 역시 마찬가지다. ……본론으로 빨리 넘어갔으면 좋겠어. 사 년 전 그때, 잘라내지 못했던 너의 육신을 이번엔 꼭 두 동강 내고 싶거든.”
“크크크크! 그거 환영할 만한 소리로군.”
진도건이 검자루에 손을 올리고 냉소평이 장포에 감춰둔 두 팔을 꺼내어 활짝 열린 태세로 서자 일순간 두 사람 사이로 투기의 광풍이 휘몰아쳤다.
바로 지척에서 일월신마를 향해 드러내는 진도건의 투기와 살기 그 어디쯤인 그 기세는 여태껏 안효철로서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진도건의 감춰진 모습처럼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비단 일월신마의 존재에 반응하는 건 진도건뿐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크크크! 죽이고 싶다, 먹어 치워버리고 싶어! 그 정도로 농도짙은 마성과 힘! 하지만, 어째서인지 친근하고 반갑다는 기분이 드는 건 저놈의 기운도 날 만들어내는 데 일조했기 때문인가? 흡사 제 아버지를 죽여야 하는 그런 기분이라는 게 이런 걸까?”
혈마가 흥분하여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통에 골이 지끈거려 눈살을 살짝 찌푸렸지만, 그의 관점을 진도건도 십분 이해하고 있었다.
그 순간 진도건에게서 흘러나오던 투기가 씻은 듯이 사라지고 냉소평도 힘을 거둬들이면서 두 사람 사이에 남은 여파에 의해 돌개바람이 불다가 지나갔다.
“어째서 날 찾은 거지? 대협곡 북정진에 있다는 건 또 어떻게 알고?”
진도건은 물어보면서 냉소평과 함께 있는 면면을 살펴보았다. 화산에 나타났던 사대수라의 인상착의와 같은 세 명의 절정고수들 외에도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의 감각에 잡히는 또 다른 기척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스륵…….
숨은 기척은 냉소평의 곁에 도달해서야 제 모습을 드러내니 냉소평이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
“연이가 서하에서부터 네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굳이 눈으로 보지 않고도 여러 정보를 취합할 수 있을 만한 거리를 두고 말이야. 네가 마기로 형성된 기척은 기가 막히게 잡아낸다고 해서 내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라고 했지.”
냉소평은 설명이 끝나자 무영 연이 그에게 가까이 가 귓속말로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냉소평은 고개를 끄덕였고 연은 다시 그 자리에서 꺼지듯 모습을 감췄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는데 말이야. 아무래도 상황이 돕질 않는구나. 진도건, 이 일월신마의 손에 죽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 그 정도만 해도 넌 합격이다.”
“합격? 무슨 의미지?”
“계시를 따라 걷는 자로서 그만한 준비가 끝났느냐는 말이다. 본좌에게 빌빌대버리면 그저 집으로 돌아가 무너지는 세상을 지켜보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러니 전력을 다해 덤벼라, 이 녀석아.”
냉소평이 조금 전 투기를 다시 드러내면서 엄청난 중압감이 진도건과 안효철을 짓눌렀다.
안효철의 얼굴에 긴장감이 떠올랐다. 일월신마가 힘을 드러내면서 보여준 존재감이란 마교주 단지운을 제외하면 단연 독보적일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그 성혈신마도 미치지 못하는 원초적인 중압감이 일월신마에게 있었다.
안효철이 바짝 긴장한 얼굴로 진도건을 흘끔 보며 묻는다.
“같이 싸우자.”
진도건이 고개를 저었다.
“어째서?”
“어쩌면 저자도 성혈신마와 비슷한 목적이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계시 어쩌구 하는 것만 들어도 알 수 있지요. 지지 않습니다. 떨어져서 지켜봐 주십시오.”
안효철은 진도건을 신뢰하고 있었다.
“알겠네.”
안효철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멀찍이 떨어져 절벽 쪽에 붙자 삼대수라들도 그를 견제하고 있었는지 그제야 냉소평으로부터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 진도건에게서 붉은 마기가 전광(電光)을 뿜어내며 폭발했다.
꽈르릉! 콰쾅!
아주 멀리서 희미하게 굉음이 울려 퍼지는 게 느껴졌다.
진도건과 안효철이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앞서나가 마침내 일월신마와 격전을 치르고 있다는 걸 깨달으면서 혁우는 일생의 대전을 구경할 기회를 놓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젖 먹던 힘까지 쥐어 짜내며 경공을 펼쳤다.
점차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굉음도 메아리치는 소리보다 실질적인 발산음이 먼저 들렸다. 그의 심장도 기대감으로 점점 더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절벽과 가까운 곳에서 싸우고 있나 본데……. 으음, 어디서 지켜보는 게 좋지? ……어?’
적절한 관전 장소를 고민하던 혁우가 급히 멈춰서서 가까운 바위 쪽에 몸을 숨겼다.
더 가지 않는 이유는 탁 트인 개활지에서 나는 듯 경공을 펼치면서 격전지 쪽으로 향하는 두 사람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하나는 서쪽에서부터 달려와 금방 도착할 거 같았는데, 다른 한 사람도 서남쪽에서부터 날아와 한 박자 늦게 도착할 것처럼 보였다.
‘함정……!’
그 생각이 머릿속을 스칠 때, 서북쪽 신형이 마침내 불타는 절벽에 당도했고 그가 개입한 싸움마저 벌어지는 듯 굉음이 더욱 격렬하게 터져 나왔다.
‘그렇다는 건…… 신마급 인물이라는 소린데, 그럼 저자도……? 큰일이다!’
혁우는 진도건의 안위를 걱정하는 자신을 의아해하지 않았다. 진도건이 자기 자신을 ‘진도건’이라고 했지만, 그에겐 2대 혈마나 다름없었다. 절벽 위로 붉은 기운이 휘몰아치는 게 보이는 것만 봐도 그랬다.
‘가야 돼……!’
가서 뭘 할 수 있는지조차 의문이었으나 그래도 가야 함을 알았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바위에서부터 나와 다시 경공을 펼치려는 순간, 두 번째로 서쪽에서 나타난 자마저 불타는 절벽 쪽으로 몸을 던지는 게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순간,
번쩍!
엄청난 광휘가 절벽 쪽에서부터 솟구쳐 올랐다. 그 눈부심이 혁우가 있는 곳까지 닿아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눈을 가려야만 했다. 광휘는 나타나자마자 바로 사라졌고 격전도 끝났는지 갑자기 일대에 정적이 흘렀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혁우의 그 의문은 조금 전까지 일월신마와 격전을 벌였던 진도건도 같은 심정이었다.
“혈마! 아까 그 자식……!”
“아아! 환도신마다. 그놈……멀리서 강시를 조종하는 것도 그렇고, 놀라운 능력을 가졌군. 그를 데리고 사라져버렸어.”
진도건이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냉소평과 빌게포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일월신마…….”
“크크크! 본좌가 어찌 아느냐? 저 땡중도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빌게포첸의 얼굴엔 당황스러움이 쉬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빌게포첸은 성혈교로 복귀하던 중에 일월신마의 무영 국으로부터 일월신마가 진도건을 노리는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국이 왜 그를 찾아내 그런 얘기를 전달했는지 알 도리가 없었지만, 태상교주 단원진과 친우인 자가 노린다면 매우 위험하다고 여겨서 급히 싸움을 멈추기 위해 달려온 것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한 변명은 사태를 해결한 뒤에 궁리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격전지에 뛰어들었을 때, 그가 진도건을 노린다고 여겼던 안효철이 그에게 달려들면서 둘이 순식간에 엉켜버렸다. 거기에 당황하여 급히 방어하면서 오해를 풀고자 하는 와중에 갑자기 선우도가 나타나 안효철을 붙잡더니 환도술을 부려 어딘가로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이 갑작스러운 변동 때문에 진도건과 냉소평이 싸움을 멈추고 대화를 맞받아치고 있었으니 빌게포첸은 자신이 걱정했던 그런 상황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냉소평……. 대체 무영을 보내서 빈승을 이곳으로 끌어들인 연유가 무엇이오?”
“크하핫! 빌게포첸, 본좌가 기꺼이 그대를 칭찬하겠네. 적절한 순간에 적절한 개입이었어. 자, 이제 선우도가 사라졌으니 우리도 본격적인 얘기를 하자고. 더 겨뤄보고 싶으면 얼마든지 받아줄 생각이 있지만 말이야.”
냉소평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면서 빌게포첸의 물음에 대답했다. 그리고 혼란스러워하는 진도건을 보면서 씩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