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9화 – 제61장. 다시 만나는 일월신마 냉소평 (4)
“이보게, 주탄. 일어나게.”
“……으, 음! 헉! ……휴우!”
주탄은 깜빡 졸았는지 어깨를 흔드는 손길에 움찔 떨었다가 달빛 아래 장태환의 날카롭게 주름진 얼굴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 무슨 일입니까?”
“탐색을 보냈던 녀석들이 돌아왔네.”
“아, 그렇습니까?”
주탄이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리자 장태환의 뒤로 낮에 출발했던 무인들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걸 발견했다.
그는 주섬주섬 유실한 장구류가 없는지 확인하면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그를 향해 포권을 취하며 인사하는 무인들을 보고 그도 마주 두 손을 포갰다.
“문환(文環), 어서 얘기해보게.”
장문환이 탐색을 나갔던 무리의 수장이었다.
“예, 당주님. 일단 오초령에 적군의 진지가 세워져 있는 걸 확인했습니다. 울타리나 방책도 세워져 있었지만, 아주 철저히 준비된 느낌은 아니었습니다. 적군의 수는 정확하진 않지만, 대략 5천 정도였고요.”
“적룡단은?”
“야심한 시각이라 그것까지 분별하긴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적진의 유격군들 가운데 적룡단이 있어도 백 기(騎)를 넘는 경우가 두세 번 정도였으니까 진지 내 병력의 규모로 봐도 많게 쳐줘야 오백 기 이하로 생각됩니다.”
“그건 불확실하다는 건가……. 그럼 그 오천여 명이 전부 적룡단일 확률은?”
“대부분 보통의 병사들이었습니다. 느껴지는 기력도 없고, 꽤 가까이 접근해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고요.”
“어떤가?”
장태환이 고개를 돌려 이번엔 주탄에게 물었다.
“설마 공격하자는 말씀이십니까?”
“그건 자네 판단에 따르겠네. 하지만, 적룡단의 수가 정말 그 정도로 적다면 우리 남월당이 있는 이 오천 군이 질 수가 없지 않겠나?”
“흐음…….”
장태환의 말에 주탄이 깊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적룡단 본진도 아니라면 두려워할 이유는 없지. 하지만, 너무 우리 군만 더 돌출되는 형국이라 불안정해. 오초령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이긴 해도 무작정 점령했다가 적룡단이 바깥에서 반격이라도 한다면 그걸 막아내긴 어려워. 하지만, 점령에 성공한다면 뒤따라오는 나머지 삼군과 후군 모두 수월하게 전진할 수 있다. 하아, 어렵군…….’
잠시 고개를 숙인 채 고민을 거듭하던 주탄은 고개를 다시 들어 장태환을 흘끔 쳐다보았다. 무엇보다 어려운 건 장태환의 저 꺾이지 않는 의지였다.
일단 오늘 밤은 기다렸다가 내일 공격하자고 하면 그 말을 따라줄 것 같으면서도 대낮에 공격보다 야습이 더 효과적이라는 게 더 상식적인 판단이라는 걸 고려하면 오히려 꾸짖을 거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공격합시다.”
내심 별수 없다고 자신을 속이면서도 본능적으로는 공격하는 게 옳다는 호전성이 그의 가슴에 불을 지피고 있었다.
“크크! 그럴 줄 알았네. 자넨 훌륭한 장수야. 우리의 돌파 속도를 마웅패가 알아채더라도 설마 바로 오초령을 공격하리란 생각은 못 할 걸세. 그 자식은 아마 무위성에서 골머리를 앓고 있을 게야. 그러니 지나온 길목에서도, 오초령에서도 보이지 않았지.”
장태환도 주탄의 그런 면모를 일찍이 알아보고서는 진격을 촉구하면서 여기까지 돌파해온 것이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주탄이 대답하고 즉시 군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적군에게 위치를 들킬 것을 우려하여 모닥불조차 피우지 않았기에 밤 추위에 얼어붙은 군사들의 움직임은 굼뜰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장태환은 재촉하지 않고 오히려 남월당 무인들을 시켜서 그들의 준비가 문제없게끔 적극적으로 돕도록 지시했다. 내가고수들이 따뜻한 기운을 담은 손으로 가볍게 굳은 부위를 주물러주는 것만으로도 큰 힘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차분히 준비가 끝나자 주탄은 오천 병력을 야음 속에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장태환은 주탄이 특정 위치의 정찰을 부탁할 때마다 남월당에게 지시하여 뜻대로 움직일 수 있게 했다.
장태환이 생각하기에 주탄은 확실히 능력이 있는 장수였다.
싸울 때도 그렇지만, 이동할 때도 지형지물을 적절히 이용하면서 이후에 벌어질 상황들을 시시각각 대비하여 유리한 지점을 점유하는 일에 매우 능숙했다. 장태환이 오초령 공격에 욕심이 있으면서도 주탄의 뜻을 따르겠다고 한 것도 괜히 한 말이 아니었다.
주탄군은 장랑하를 따라가면 병력이 드러날 게 뻔했기에 숲이 형성되어있는 산등성이를 주로 이용했다. 그리고 오초령으로 오르는 넓은 분지를 마주했을 때는 달이 서쪽으로 기운 것을 이용하여 일부러 더 깊이 들어가서 서쪽 봉우리가 친 그늘에 숨어 거기서부터 경사로를 오르기도 했다.
그렇게 마주한 적군의 진지를 노리고 마침내 야습을 감행한다.
내달리는 보병들의 보폭에 맞춰 기병들도 조금만 속도를 내는 것으로 보조를 맞추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경비탑 위로 시야를 마주하는 병사들을 남월당 무인들이 비수를 날려서 처리한다. 그렇게 되도록 가까이 접근하여 서산이 형성한 그늘을 벗어나 마침내 선두의 군사들이 달빛을 받기 시작할 때, 주탄군이 전속력으로 돌격하기 시작했다.
두두두두두!
느닷없이 지축을 울리는 기마대의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지자 정문의 경계병들이 당황하여 뿔피리를 불려 할 때, 선두에서 쏜살같이 쏘아져 나간 장태환이 일월쌍고검을 번쩍 들어 검강을 뿌리면서 경계병들의 수고로움을 덜어 주었다.
콰콰쾅!
목책의 허약한 두 쪽 문짝들이 산산조각이 나며 공중에 떠오르고 그 앞에 있던 경계병들도 피떡이 되어 나가떨어졌다. 그리고 그 뒤로 남월당의 일천 무인들이 먼저 일제히 쏟아져 들어가면서 적진을 휩쓸기 시작했다.
“모두 쓸어버려라! 크하하할!”
장태환의 남월당과 주탄군의 야습은 성공적이었다.
오초령 진지는 금방 혼란에 빠졌으며 그곳에 있던 삼백 기의 적룡단원들은 말에 채 오르지도 못한 채 장태환과 남월당에게 위치가 발각되어 죽임을 당했다. 오천여 군사들도 주탄군에 의해 짓밟히고 창에 꿰뚫렸다. 격렬하게 부딪쳐야 할 병장기들의 소음 대신 비명들이 주가 되어 고막을 울릴 정도이니 이만큼 일방적일 수가 없었다.
전세가 완전히 기울었다고 판단되자 장태환도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남월당 무인들에게 사방 주변을 멀찍이 탐색하여 혹시 모를 적습에 대비하였다.
자기들이 세운 방책에 가둬져 버린 적군들이 모두 죽게 되었을 때쯤, 남월당이 돌아와서 특이사항이 없음을 알렸다.
“장 당주님, 대승입니다! 하하하하!”
주탄이 장태환을 부르며 기쁨에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이 모두 장군의 공이오!”
장태환도 주탄을 칭찬하면서 그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하지만, 장태환은 오히려 일방적인 승리에 찝찝함을 느끼고 있었다. 뜻대로 진격하여 요충지인 오초령까지 확보하였지만, 본질적으로 그의 목적은 군사적 실리를 취하는 게 아니라 마교도를 척살하는 데 있었다.
그렇기에 제대로 군세를 갖춘 적룡단이나 적룡신마 마웅패 혹은 다른 마종의 마교도라도 마주치길 바라는 마음이 없잖아 있었다.
물론 그렇게 되면 지금 이 주탄군의 군세로는 부족하겠지만, 장태환은 격전을 즐기며 기꺼이 자신의 노구를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아쉬운 감정이 찝찝한 기분으로까지 번지는 것이었다.
‘시시해……. 마웅패 이놈, 어디로 숨었느냐?’
* * * *
모래로만 이뤄진 사막도, 사암지대라 제법 땅이 단단했던 사막도 어느샌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흙을 만져보면 꽤 말라 있는 건 비슷했지만, 그것이 발로 밟으면 제법 푹신하게 느껴질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란 땅을 파내어봐야 느낄 수 있는 감각이라면 지대가 확연하게 바뀌었다고 할 만했다.
그런 모래사막도, 사암지대도 아닌 암석사막인 곳으로 황무지(荒蕪地)라는 표현이 아주 정확히 들어맞는 척박한 땅이었다.
그 땅 위에 들어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류단아는 바단지린 사막이 끝나고 마침내 고비에 들어섰다고 알려주었다.
고비에 들어서고 나서도 많은 유목민을 마주칠 수 있었다. 대부분 혈랑대의 명성을 아는지 우호적인 표시를 하는 자들은 거의 없었지만, 그렇다고 시비를 거는 무리는 없었다.
고비에 들어서선 아직 마주친 마적단은 없었는데 류단아의 얘기론 바단지린 사막이나 텡그리 사막처럼 남쪽 지역은 오아시스가 있고 비단길과도 가까워서 교역품들이 오고 가니 마적들이 노릴 것들이 많지만, 북쪽은 전통적인 풍습에 의존해서 생활하기에 부족 간 결속이 강하고 분쟁도 종종 있어서 일개 마적들이 쉽게 활개치기 어렵다고 했다.
물론 과거 적룡단이나 흑풍대는 예외의 존재들이었다는 첨언도 있었다.
“저 산줄기를 넘어가야 해요. 산맥 끝자락의 마지막 산줄기라 동서로 길게 늘어서 있지만, 봉우리가 단맥(單脈)으로 지나지 않고 첩첩이 그리고 무척 가파르게 솟아있어서 길을 잃으면 저 속에서 얼어 죽고 말죠. 그야말로 수염수리들의 먹이가 되는 거예요.”
류단아의 설명에 혁우가 턱을 들면서 실눈을 뜨듯 멀리 내다봤다. 끝없이 이어질 듯한 황무지 위로 꽤 먼 지점에 산줄기가 보였다.
“별로 안 높아 보이는데요. 금방 넘어가겠군요?”
혁우가 살던 혈마종의 대통현은 기련산맥을 등지고 있었기 때문에 때때로 구름을 뚫을 정도로 높게 솟은 봉우리들과 한여름까지도 쉽게 녹지 않는 만년설을 자주 봤었다.
또 여기까지 오면서 몇 개의 암석산 산줄기를 지나면서 봤기 때문에 이번에도 같은 관점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호호! 맞아, 별로 안 높지. 알타이 산맥의 본맥(本脈)에 비해선.”
류단아가 웃으며 대답하는데 그 억양이 비아냥거리는 듯하자 혁우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아무리 시력이 좋아도 혁우는 자기만 못하다고 생각했는데 기련산맥 등 어려서부터 여러 산을 봐왔기 때문에 자기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고 여겼다. 그때가 늦은 오후였는데 진도건 일행과 혈랑대는 저녁까지 좀 더 이동하다가 마침 발견한 유목민들의 파오 근처에 야영하고 다음 날 아침에 출발하기로 했다.
혈랑대원들은 익숙하게 유목민들에게서 음식들을 물물교환해왔다.
꾸릿꾸릿한 육향의 양고기와 부드럽고 목넘김이 좋은 마유주로 별이 가득 찬 사막의 밤을 보내는 건 공기가 얼어붙을 것만 같은 추위만 아니었다면 좋은 추억으로 남을 수도 있었다. 추위가 상당했기에 모닥불이 꺼지지 않게 번을 서야 했는데, 그마저도 충분치는 않아서 상당수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동이 트기 시작하자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서 몸을 움직였다. 추위에 얼어붙은 몸을 풀고 겸사겸사 수염과 눈썹, 머리카락, 겉옷 등에 밤새 얼어붙은 고드름이나 서리 등을 털어내는데 그걸로 얼굴을 가볍게 닦기도 했다. 그렇게 다시 준비를 마치고 북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갔을까?
해가 동쪽 하늘에 충분히 떠오르면서 추운 바람 속에 태양 볕의 온기가 은근하게 흐르던 시각, 혁우는 끝내 자신이 전날 내뱉었던 말을 다시 주워 담을 수밖에 없었다.
“산세가 마치 늑대이빨을 눕혀놓은 거 같네요…….”
그가 대통현에서 기련산맥을 바라볼 정도와 같이 시야에 산세를 오롯이 담게 될 정도로 산자락과 충분히 가까워지자 혁우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의 감상을 들은 류단아나 다른 혈랑대원들이 묘한 감정을 느끼면서 그에게 한 번씩 시선을 던졌다.
“저 산자락도 따로 이름이 있을 만한데.”
안효철이 혁우의 말에 공감하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류단아가 바로 알려주었다.
“구르반사이한(Gurvan saikhan). 세 개의 아름다운 산맥이라는 뜻으로 몽골족들이 저 산줄기를 가리켜 부르는 이름이에요.”
그들의 시야에는 하나의 산줄기가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세 줄기의 가파른 암석산맥이 나란히 달리듯 늘어서 있었다.
기련산이나 중원의 다른 명산처럼 엄청난 높이나 규모를 자랑하는 건 아니어도 좁고 날카로운 암석봉들이 겹겹이 이어져 있어서 산줄기 자체는 마치 심산유곡(深山幽谷)에 드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세 산줄기 사이로 평활지가 경계를 이루고 있어서 푸른 초지나 모래사막 등이 산맥과 함께 길게 펼쳐져 있었다.
각각의 산맥들은 하나로 길게만 이어져 있지 않고 중간중간 봉우리가 솟지 않아 지대가 완만한 지점이 있어서 조금씩 돌아가는 수고로움만 더한다면 충분히 가로질러 갈 수 있었다.
진도건 일행과 혈랑대는 그렇게 첫 번째 산맥에 나 있는 길을 따라 평활지로 나오면서 한 번 더 감탄했다.
“이거 참, 꽤 절경이로군……!”
늑대 이빨들처럼 길게 솟아있는 산줄기를 넘어가면서 오랜만에 녹음(綠陰)이 아직 가시지 않은 초지 위를 걸을 수 있어서 반가웠는데, 얼마 가지도 않아 바로 황금빛 모래사막을 다시 마주한 것이었다.
파도처럼 형성된 사구 너머로 구르반사이한의 다음 산줄기가 햇볕 아래 어름어름 보이고 있었으니 남쪽 중원에선 절대 찾아볼 수 없는 비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