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7화 – 제61장. 다시 만나는 일월신마 냉소평 (2)
표개가 서신을 홍두형에게 넘겨주었고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바로 펼쳐 함께 읽었다.
“……이걸 소요자께도 보여드리시오.”
범굉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자 표개는 의아하다고 여겼으나 펼쳐진 서신 내용을 곁눈질로 본 순간, 그의 눈빛도 흔들리고 말았다. 그리고 절로 무거워진 움직임으로 소요자에게 다가가 서신을 건네주었다.
마침내 소요자도 서신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한동안 우두커니 선 채로 서신 속 짧은 글귀로부터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범굉이 그를 지나치며 던지는 말이 무겁게 들려왔다.
“무엇이 옳은 길인가 다시 한번 생각해보시오. 이제는 그만 부끄러워져야 합니다, 소요자.”
범굉의 무거운 말에 서신을 쥔 소요자의 두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의 머릿속엔 서신 속 문구가 천무경의 목소리로 계속해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상황이 급하지 않으니 모든 준비를 마치거든 도우러 달려오시오.”
두 부맹주도 소요자가 이런 균열을 만들고 있었다는 걸 근 며칠 내에서야 알게 되었으니 지금의 상황을 천무경은 알 수 없다. 설령 정말로 전황이 급하지 않더라도 약속된 후발대의 출발은 기일이 이미 지났으니 더 명확한 기한을 요구하는 게 타당할 터였다.
하지만, 대규모 인원이 이동해야 할 시일을 고려한다면 그리고 시시각각 움직이는 전장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후발 집결단이 당장 오늘 움직여도 늦었다.
그렇다면 이 서신에 담긴 전언의 함의는 대체 무엇인가?
천무경은 오만한 소인배인가, 그게 아니면…….
‘……정녕 당신이 은원의 고리를 끊으려는 것인가?’
* * * *
진도건과 안효철은 류단아의 혈랑대와 함께 동북쪽 방면을 바라보고 이동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일반적인 속도일 경우 대략 닷새의 시일이, 꾸준히 말을 달려도 사흘은 걸린다고 하였다. 그리고 당장 통과해야 할 바단지린 사막은 갈수록 사구가 많아져서 오래도록 속도를 붙이긴 어려웠기에 어느 정도 조절하면서 갈 수밖에 없었다.
이틀째 되는 날이 되는 동안 그들은 세 곳의 오아시스를 지나가면서 그곳에 머물던 부족들을 마주칠 수 있었는데 확실히 혈랑대라는 걸 알아보고 경계를 누그러뜨리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이동에 필요한 물자 거래도 용이하게 이뤄졌고 마적단도 한 차례 마주쳤으나 혈랑대인 걸 보고 알아서 도망치니 그녀가 했던 말들이 거짓이 아님을 알게 된 셈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예상치 못한 이유로 한 번 이동을 멈춰야만 했다.
전날엔 그저 청해군 해산으로 인해 자기 부족을 찾아 이동하는 것인 줄로 생각했으나 이틀째인 오늘도 따라오는 것으로 다른 의도가 있다고 생각된 이상 무시하고 계속 갈 수 없었다.
사막 한가운데서 뒤늦게 기울인 관심으로 인해 혈랑대를 멀찍이 따라오는 사내가 제법 무공을 갖추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워어!”
혁우(赫尤)는 말을 멈춰 세웠다.
오아시스를 제외하면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던 혈랑대가 이동을 멈췄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쩐지 그들이 몸을 틀어서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쳇……, 지금 피해도 결국 따라왔음을 실토하는 거잖아?’
거리를 상당히 멀리 두고 따라가고 있었기 때문에 설마 눈치챌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오긴 했지만, 그렇다고 정말 끝까지 저들이 모를 거로 생각하진 않았기 때문에 혁우는 침착하게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그를 향해 다가오는 사람들을 기다렸다.
잠시 기다리자 혈랑대원 두 명이 말을 몰고 그에게 달려왔다.
“당신은 뭐요? 북정진에서부터 따라온 거 맞소?”
“아…… 뭐, 그런 셈입니다. 청해군 소속이었는데…….”
“왜 따라오는 것이오?”
자꾸 따라오냐는 물음이 붙자 혁우는 부족을 찾으러 이동 중이라고 답변할까도 생각했지만, 이내 생각을 고쳤다.
“……으음, 실은 진도건이란 사람을 만나보고 싶어서 쫓아왔습니다.”
“스읍, 수상한데? 그럼 북정진에서 찾아왔으면 될 일이지…….”
혈랑대원의 추궁에 혁우는 금방 자신이 한 말을 후회했다.
진도건을 찾은 건 맞았지만, 그를 가까이서 볼 용기가 아직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이씨, 지금이라도 달아날까? 아니……, 그래도 진도건이나 그 흑철갑 입은 사람 정도면 날 금방 쫓아와 붙잡을 거 같은데. 하아, 그냥 마을로 돌아갈 걸 괜히 쫓아와서…….’
혁우가 잠시 고민하는 사이, 다른 혈랑대원이 입을 열었다.
“만나보고 싶으면 만나면 되겠지. 갑시다.”
“예? 아, 예…….”
얼떨결에 대답한 혁우는 결국 혈랑대원을 따라 다시 바라보던 방향 그대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줄곧 손톱만한 크기로만 보고 따라갔던 혈랑대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그 행색들이 좀 더 명확하게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혁우는 심적 부담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하아, 떨린다……. 도망치고 싶다…….’
이젠 얼굴들도 어렴풋이 보이면서 무리 사이로 바람에 나부끼는 붉은 머리카락을 발견하고는 심장이 더 세게 두근거리는 게 느껴졌다.
지금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심적 갈등이 지속되는 사이, 어느새 혁우는 혈랑대에 둘러싸인 사실에 더해 정말로 진도건과 마주 보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두근두근…….
감각이 예민한 진도건과 안효철은 혁우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 젊은 사내가 얼마나 긴장한 채로 진도건을 바라보고 있는지 여실히 느껴졌는데 이상한 건 그 감정적 파동이 진도건에게 있어서 부정적인 느낌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신은 누구지? 날 만나보고 싶었다고 하던데.”
“으음…….”
혁우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주저하자 이번엔 안효철이 입을 열었다.
“어디 문파인가?”
“음…….”
혁우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자 안효철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훗, 만나보고 싶다고 쫓아와 놓고서 아무것도 얘기해주지 않을 참인가?”
“으……. 그게 약속…… 하나만 해주십시오.”
“무얼 말인가?”
“제가 무얼 밝히든 절 해치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하하하! 설령 자네가 마교도라고 해도 자네 하나로는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하니 가만히 얘기를 듣는 일 정도는 쉬운 일이네. 편히 말해보게.”
“아, 그게…… 제 이름은 혁우입니다. 그리고…… 마교도 맞습니다.”
“응?”
의외의 대답에 안효철이 조금 놀라 반응했다.
그 말에 격렬하게 반응한 건 오히려 가까이 있던 혈랑대원들이었다. 일제히 병장기를 뽑아 들면서 견제하자 오히려 혁우가 움찔 어깨를 떨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진도건이 류단아에게 괜찮다고 손바닥을 보였고 이내 혈랑대원들이 병장기를 거둬들였다.
“마교도라고? 마기는 느껴지지 않는데?”
“그게…… 당연합니다. 저는 본산 출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안효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속일 생각은 말게. 출신이 어디든 천마신교에 입교하게 되면 모두 마공을 수련하면서 속성으로 무공을 높인다는 것 정도는 상식이야. 그리고 여기 진도건의 감각으로부터 마기를 숨길 수 있는 사람은 여태껏 아무도 없었어. 심지어 성혈신마도 말이야.”
그 말에 혁우는 난감해졌다. 그리고 잠시 주저하다가 결국 결심하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본산이나 다른 여덟 마종은 말씀하신 게 맞습니다만, ……저흰 선택권이 있습니다. 마공을 익힐지, 가진 무공을 이을지 말입니다. 그게 어딘지 말씀은 못 드리지만요. 하하……, 제 이름으로 만족해주시면 안 됩니까?”
진도건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대답이 의아했으나 곧 그의 머릿속에 스치는 것들이 있었다.
“혹시…… 혈마종인가?”
“……그, 그렇습니다.”
설마 바로 맞출 줄 몰랐던 혁우가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허허허…….”
안효철이 헛웃음을 흘렸다.
정말 의외의 대답이면서도 이만큼 흥미로운 대답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조금 전 혁우로부터 느껴졌던 긴장과 떨림이 기대감과 비슷하다는 걸 깨달았다.
“혈마종의 모태가 혈마 원건을 숭배하던 집단이라더니…….”
“하하…….”
혁우가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안효철의 관심도 부담스러웠지만, 정말 흥미로운 눈빛을 붉은 눈에 품은 채 그를 바라보는 진도건이 더 부담스러웠다.
‘혈마종이라…….’
“아아……. 큰일났네.”
혁우가 말 위에서 난감해하면서 중얼거렸다. 진도건을 처음 대면했을 때보다 더 난감해하고 있었다.
진도건이 바로 옆에서 말을 타고 있었는데 혁우의 반응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혈마종의 신자가 혈마에게 얘기를 털어놓은 건 자연스러운 일일 텐데 자꾸 난감해하면 어떡해?”
꽤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혁우를 대하는 진도건의 태도도 한결 편해져 있었다. 이제 약관을 갓 넘긴 혁우였으니
“하아……, 정말 저는 이제 위험하다니까요?”
혁우는 미래가 막막해졌음을 느끼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만약 자신이 혈마종과 천마신교의 사정에 대해 털어놓았다는 걸 다른 마교도나 무영각에게 발각되면 여지없이 척살 대상이 될 게 뻔했다. 이런 상황은 그가 대통현을 몰래 나왔을 때 생각했던 미래가 결코 아니었다.
전쟁의 참전에 대한 욕심도 있었지만, 전쟁 일선에 서면 운 좋게 중원의 혈마를 볼 수도 있지 않을 거라는 작은 기대.
예상한 그림은 아니었지만, 마침내 여기에 이르게 된 것도 운이 좋다 할 수 있었다.
“근데 말일세. 자네는 앞으로 진도건을 향해 칼을 뽑을 수 있겠나? 그렇게 걱정하는 걸 보면 여전히 돌아갈 생각이 있는 것처럼 보여서 말이야. 그런데 혈마종의 근본이 있는데 가짜 혈마를 정말 따를 셈인가?”
안효철이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아아…… 대답하기 참 어렵네요. 그래도 돌아가긴 해야겠죠? 이제 모두 알았다고 절 죽이실 건 아니겠죠? 어차피 저 하나는 위협이 안 된다고 하셨잖습니까?”
“물론이네. 가겠다고 하면 보내줘야지. 몰래 떠나도 서운해하지 않을 테니 원하는 때에 언제든 떠나시게.”
“하하, 그 말은 또 섭섭하군요.”
안효철과 혁우의 대화를 들으면서 진도건도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혁우는 그들에게 정말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다.
천마신교에 관해선 불확실한 지점이 많아서 상당 부분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 많았다. 그래도 관심이 쏠린 내용이 있다면 태상교주 단원진의 존재였다. 거기에 연관되어 혈마종의 대리종주 지위로 자리를 지키고 있던 대마의 유변의 존재도 무척 흥미로웠다.
물론 예상치 못한 충격적인 소식도 있었다.
행적이 묘연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주백자가 단원진과 일월신마에 의해 천산의 숨겨진 비밀 동굴에서 살해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스승님, ……주백자, 유변 스승님의 친우들…….’
진도건으로서도 정말 오랜만에 조강선의 얼굴을 떠올려보았다.
평소엔 평정심을 잃지 않으면서도 자기 제자에게는 스승으로서의 냉철함과 인자한 면모를 모두 보여준 그 모습이 지금도 전혀 잊히지 않고 머릿속에 생경하게 잡혔다.
이제 세 사람 중 유변만이 남았다는 혁우의 설명은 처음 들었을 땐 슬픈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러나 진도건은 왠지 모르게 유변도 무사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유변이 지금까지 살아있을 수 있었던 건 그가 수련했다는 생명 연장의 사술이 아니라 주백자와 조강선의 존재가 가져오는 불확실성 때문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무림의 가장 큰 인물들이 생을 마감했기에 이런 폭풍이 몰아치는 것이겠지.’
그때 문득 유변이 관리했다는 혈마종에 생각이 미쳤다.
진도건을 대하는 혁우의 태도만 보더라도 그들이 혈마라는 존재를 진심으로 경외하는 것 정도는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그들이 또 다른 혈마 구마진의 등장으로 비로소 천마신교 전력의 한 축이 되어 큰 전쟁을 앞에 두고 준비 중이라고 했다. 그리고 구마진이 대통현에 나타났을 때, 유변이 진도건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던 걸 밝혔다는 대목은 더욱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다.
“……궁금하네.”
안효철과 혁우의 시선이 중얼거림을 듣고 진도건에게 닿았다. 그리고 진도건의 고개가 돌아가 적안이 혁우에게 닿았다.
“너희가 경외하는 건 뭐지?”
“저흰 혈마를…….”
“혈마인가, 아니면 원건의 무인가?”
“……으음!”
진도건의 질문에 혁우가 침음성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그는 대답할 수 없었다.
원건과 같은 시대에 산 세대가 아니었으니 당연히 직접 본 적도 없다. 혈마와 원건은 그들에게 언제나 하나였지 나눠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천마와 단지운이 하나이듯, 일월신마와 냉소평이 하나이듯 혈마와 원건을 각각의 존재로 구분 지어 생각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생각이 흐르자 이번엔 혁우가 의뭉스러운 눈빛으로 진도건을 다시 바라보았다.
“혈마와 원건은 하나가 아닙니까? 구마진도 자신을 혈마라고 했는데, ……그러고 보니 당신께선 스스로 혈마라고 하지 않군요.”
혁우의 그 의문 섞인 시선이 진도건의 입술이 열리길 기다렸다. 그리고 진도건은 답했다.
“난 진도건이다.”
“내가 혈마다.”
동시에 진도건의 머릿속에 혈마의 목소리도 울렸다.
그 때문이었을까?
혁우의 눈꺼풀이 깜박이면서 그 시선이 열린 입술로부터 무심코 아주 조금 위를 향했을 때, 진도건의 적안이 더욱 핏빛으로 일렁이는 듯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