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326화 (326/432)

326화 – 제61장. 다시 만나는 일월신마 냉소평 (1)

“검선이 빈승을 찾아온 의도가 그런 것일 줄은 몰랐소.”

범우의 눈빛이 흔들리는 걸 보자마자 소요자가 바로 말을 덧붙였다.

“방장대사. 지금이 적기라는 걸 이해하셔야 합니다. 사파삼강의 한 축은 이미 무너졌고 나머지 두 개의 축은 마교와 격렬히 싸우고 있어서 다시 말머리를 되돌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돕는 건 올바른 일이라지만, 어찌 그것이 원수를 돕는 일이 되어야겠습니까?”

“그들과 같은 짓을 벌이자는 얘기로도 들리오, 검선.”

“그렇지 않습니다. 그저 몇 가지를 조금만 조정하는 것으로 정파와 사파 사이에 존재하는 힘의 균형을 맞출 수 있을뿐더러, 이는 그들이 과거에 혈마를 상대로 외면했던 역할을 하게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빈승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사제 되시는 부맹주 범굉대사에게 이런 뜻을 전달해주시면…….”

소요자는 말을 더 잇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는데 그의 신경이 대웅전 바깥쪽에 쏠렸다.

이때 바깥의 소란도 범우의 귀에 작게 감지되었는데 소요자의 침묵을 잠깐 기다리자 그 소란이 좀 더 가까워지면서 닫혔던 대웅보전의 문이 활짝 열렀다.

바로 범굉이었다.

사대금강이 뒤에 있었고 범굉과 같은 창천맹의 부맹주이자 개방 방주인 홍두형도 같이 와있었다. 개방 조직을 이용하여 소요자의 움직임을 파악한 홍두형이 범굉을 불러 같이 달려온 것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소요자를 똑바로 쏘아보되 입은 가볍게 열지 않았다.

무언의 시위였다.

소요자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잠시 머물렀다가 사라졌다. 그가 범우를 보며 입을 열었다.

“부맹주의 눈총이 따갑군요. 빈도의 뜻은 모두 말씀드린 것 같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소요자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범우도 일어나 서로 합장하면서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대웅전을 나서려는 소요자의 등 뒤로 범우의 목소리가 향했다.

“치욕은 그때 남았던 제자들의 몫임은 분명하나, 소림이 받들기로 한 것은 원문선사의 희생과 공덕(功德)의 초심이외다. 빈승의 역할은 덕이요, 공은 사제에게 오롯이 일임하였으니 그것을 깬다면 초심이 깨지는 일과 다르지 않겠지요. 살펴 가시오, 검선.”

범우의 말에 소요자는 잠깐 멈칫하기도 했지만, 그에게 대답하지 않고 대웅전을 나왔다. 그리고 범굉와 홍두형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목례를 갖추었다.

“빈도가 두 부맹주를 불편하게 했군요.”

“불편하지, 당연히! 무당파 검선이란 작자가 정파의 결속력을 깨고 다니니 말이오!”

홍두형이 버럭 화를 냈다. 그러나 소요자의 귀엔 그게 그리 달가울 수 없는 말이었다.

“사파가 질서인 세상에 정파를 무릎 꿇게 만든 건 그대들이 아니오?”

“뭣이!”

홍두형이 으르렁거리는데 범굉이 침착하게 심지를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그대는 처음부터 창천맹이란 정사결맹(正邪結盟)이 달갑지 않았던 것이로군.”

“사정굴종(邪正屈從)이 아니면 다행이겠지요. 범굉대사께선 저들의 위세에 힘을 실어줄 참입니까? 대마교전쟁이 끝나면 1등 공적은 당연히 천무경의 천무방일 터, 무림공적인 마교가 사라지고 나면 그들을 중심으로 무림의 질서가 재편되리란 걸 정파의 두 부맹주께선 간과해선 안 될 것이오.”

“이제는 우리를 모욕까지 하려는가!”

홍두형의 옷자락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분노와 함께 공력을 발산하는데 수염과 머리카락이 하늘을 향해 뻗치기까지 했다.

그 무시무시한 기세에 모두가 깜짝 놀라면서도 설마 싸우지는 않을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홍두형은 그들의 생각보다 더 화통한 인물이었으니 끝내 소요자에게 달려들고 말았다.

꽈앙!

항룡유회의 일장이 엄청난 경력의 파도를 몰아 소요자를 덮쳤으나 그의 일장에 가로막혔다.

그 굉음 속에도 순식간에 열 합의 공방이 오고 가는데 홍두형의 기세가 대단했음에도 소요자는 여전히 호수의 잔잔한 물결 같은 평온한 기색으로 공격을 흘리고 있었다.

“홍 방주, 멈추시오!”

범굉이 호통을 치고 나서도 홍두형은 쉽게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큰 기세를 일으키면서 장력을 쏟아내려 하는 순간, 소요자가 한 발 파고들면서 두 손바닥으로 원을 그리면서 홍두형을 부드럽게 밀어냈다.

“윽!”

홍두형은 뜻하지 않게 뒤로 주르륵 밀리면서도 큰 충격이 없음에 당황하여 신음을 흘렸다.

개방의 방주인 자신의 무공을 손쉽게 받아내면서도 이만한 여유를 부릴 정도로 소요자의 무공이 훨씬 뛰어나다는 생각이 그를 더욱 분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번엔 범굉이 그의 어깨를 꽉 붙잡고 말았으니 비로소 의지를 꺾을 수 있었다.

“이곳이 무공이 금지되는 곳임을 잊으셨소?”

“큭! 송구합니다, 대사.”

소림사에서 대웅전이나 장경각(藏經閣) 등 일부 지역에선 무공 사용이 금기되었다. 일반 참배자들의 출입, 경전의 보호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으니 적이라면 모를까 우방이라면 더더욱 존중되어야 할 규율이었다.

홍두형도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으니 범굉 앞에서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었다.

범굉도 노여운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는 최대한 침착할 수 있도록 마음을 다스리고 있었다.

“소요자, 중양진인도 그대와 같은 뜻이오?”

“글쎄요. 묻지를 않아서 잘 모르겠습니다만…….”

“허허……, 장문진인도 설득하지 않고서 여기에 와서 방장사형께 궤변을 늘어놓으시다니. 무당의 법도가 언제부터 이리 무너지셨소? 부끄럽지 않소이까?”

“……범굉대사께서 사파의 거두와 함께 지내시다 보니 사람을 편협하게 보게 되신 것 같습니다. 빈도가 어디 참전을 반대하더이까? 속도를 조절하는 것만으로도 강호의 질서를 다시 바로잡을 수 있다는 것인데. 두 분께선 정파의 어른이라는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소요자께서도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지 마시오.”

“제 행동의 어디가 제 위치를 망각한 행동입니까?”

“그대의 말처럼 빈승은 정파의 어른이기에 창천맹에서 부맹주란 책임있는 역할을 맡아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또 행동하는 것이오. 그러나 소요자 그대는 무당제일검, 태극검선이란 책임 없는 명성과 위상에 기대어 빈승의 책임을 훼방 놓는 것이오. 빈승은 빈승이 결정한 일에 책임을 질 것이지만, 그대는 의무 없는 책임을 질 생각은 있으시오?”

범굉의 말은 정말 소요자의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그가 뭐라고 비판하든 간에 범굉이나 홍두형은 선명한 책임과 권한 위에서 강호의 대의와 정파의 권익을 위하여 노력하는 인물들임엔 틀림없었다. 비록 그 권위가 사파의 인물에게 부여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지난 삼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정파는 정말 긍정적인 변화 아래 다시 성장할 수 있었다.

그 속에서 소요자가 한 역할은 사실상 광혈신마를 물리친 것으로 개인의 위상을 떨친 것 외엔 아무것도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심지어 창천맹과 창천단이 창설되었을 때, 무당파가 가장 소극적이었다.

지난 시간 소요자의 제자 청명만이 창천맹에서 봉사한 유일한 무당파 인물이었다. 다른 제자들의 지원은 소요자에 의해 차단되었으며 오직 청명만을 소요자의 제자라는 위상을 빌어 선심 쓰듯 내준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 또한 어찌 보면 범굉과 홍두형의 입장에서 얘기하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정곡을 찌르는 말이라도 소요자로선 그렇게 들을 수밖에 없었다.

“무림에서 전쟁이 벌어지면 결국 가장 먼저 희생되는 건 말단 제자들 뿐이지요. 대단한 책임이라도 지실 것처럼 얘기하셔 봐야 그들이 짊어져야 할 강제된 책임에 비할 건 아니겠지요. 원무선사처럼 하셔도 희생된 제자들의 넋을 위로할 수는 없습니다, 범굉대사.”

“아미타불……!”

범굉의 표정이 침통해졌다.

이런 식으로 말을 비틀어 대응하는 사람이라면 무슨 말을 해도 설득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정녕 창천맹의 일을 방해할 작정이시오?”

“빈도도 더 돌아다닐 생각은 없습니다. 오히려 부맹주께서 원하시면 빈도도 마교를 향해 이 무극검을 뽑아야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되려면 대사께선 제 정의가 틀렸다는 걸 다른 문파들에게 설명하셔야 할 것입니다.”

범굉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소요자의 말대로였다.

무당제일검 태극검선 소요자가 찾아와 창천맹의 방향이 잘못되지 않았느냐고 의문을 표시한 이상 그들을 다시 창천맹의 깃발 아래 집결시키기 위해선 더 큰 노력이 필요할 터였다.

이미 소요자의 의도는 실현된 셈이었다.

분해진 홍두형이 어금니를 꽉 물고 있다가 소요자의 마지막 말에 다시 한번 감정이 폭발했다. 그러나 그도 이번엔 어차피 상대가 되지 않는 무공보다 말의 힘을 대신 빌렸다.

“소요자, 제자 보기 부끄럽지 않으시오? 청명 도사는 일선에서 마교도들과 싸우고 있는데 당신은 어찌……!”

홍두형은 호통을 치려다 입을 다물었다.

소요자의 시선이 따갑게 쏟아졌기 때문이었다.

“백제성에서 행방불명된 제자라. 그래, 시신은 찾으시었소?”

“시신이라니. 어디에도 그가 죽었다는 보고는 없었거늘. 당신에게도 구 단주의 서신을 전달했으니 봤을 거 아니오?”

“구룡문을 구하였지만, 후방을 감시하던 청명이 복귀하지 않아 행방을 알 수가 없다.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라는 것입니까? 그것도 하필 다 무너진 구룡문을 구하다가?”

“창천단은 정사가 모두 모인 집단. 그 안에 속하여 최전선에서 싸우는 자들에게 그건 대단히 무례한 의심이 될 수 있소이다.”

범굉은 진심으로 소요자에게 충고했다. 그의 의심이 지나친 단계까지 나아가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들었다.

소요자도 한 발 물러섰다.

“좋습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저도 경고하겠습니다. 이런 흐름은 분명 정파를 사파의 불꽃이 더 세게 타오르게 할 불쏘시개로 제한하는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두 분도 보시지 않았습니까? 혈마의 탈까지 쓰고 돌아온 진도건이 제 제자의 무공마저 흡수한 걸 말입니다. 이 전쟁의 결과도 그리될까 심히 우려스럽습니다.”

홍두형은 최현걸을 통해서 진도건의 능력과 잠재력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 측면에서 창천맹에서 진도건이 청명과 비무했던 대목은 소요자가 과민했다고 여기고 있었다. 태극권이 이화접목의 극치라고는 하나 그 전체를 포괄할 수 없기에 진도건이 비슷한 수법을 썼다고 무공을 흡수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반론을 하고 싶었지만, 범굉이 그가 자제하도록 팔을 붙잡았기에 속으로 화를 삭였다.

‘저런 부분까지 일일이 반론할 수는 없다.’

범굉이 침착함을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소요자. 과거의 은원을 우리 모두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들과 똑같아져서는 정파가 강호의 질서를 지키는 날이 오더라도 또다시 같은 역사, 같은 과오를 되풀이할 것이오. 현명한 자라면 자기 대에서 그 고리를 끊을 필요가 있소이다.”

“빈도는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부맹주께서 요청하시면 마교를 향해 무극검을 뽑겠다고 말입니다.”

“이미 맹주가 오해 없이 넘어갈 시간은 지나가 버렸소이다. 더 적극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되오.”

“오해한다면 그도 그 정도의 필부(匹夫)라는 것이겠지요. 그 정도의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면 두 분께서 과분한 신뢰를 보내고 계신 겁니다. 종남파를 멸문시키고 화산파마저 그 직전까지 몰아갔던 게 천무방입니다. 우리는 그에게 그만한 책임을 요구할 자격이 있는 겁니다.”

양측의 입장은 끝없는 평행선을 달릴 것만 같았다.

“더 하실 말씀이 없다면 빈도는 무당산에서 대사의 서신을 기다리겠습니다.”

소요자도 더 오래 머물러봐야 감정만 상할 것을 알았기에 바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창천맹의 두 부맹주를 지나칠 때까지도 양측은 서로의 눈을 편안히 쳐다볼 수가 없어서 그저 정면만을 바라보며 서고 또 걸었다.

하지만, 소요자의 발걸음은 곧 멈췄다.

“방주님! 맹주에게 서신이 왔습니다.”

표개가 다급하게 경내 계단을 따라 달려서 올라오고 있었다. 그 목소리에 범굉과 홍두형 모두 뒤돌아서면서 소요자가 멈춰선 뒷모습까지 시야에 들어왔다. 그에게서 당황한 기색까지 읽었음은 물론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