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325화 (325/432)

325화 – 제60장. 모종의 움직임들 (5)

마정.

마성이 깃든 마공의 정수이며 이는 혼이 깃든 인간의 심장에 비교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이것을 어찌 내게 보이는 것이냐?”

마웅패의 목소리에 옅은 분노가 담겼다.

인간의 심장에 비교할만한 물건이라면 이는 마치 경고처럼 들리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위는 마웅패가 깊이 생각할 줄 모르는 자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공손한 자세로 고개를 숙이면서 입을 열었다.

“소마혈은 일종의 독입니다. 그것을 단주께 드리는 건 지금 기세등등해진 적군이나 창천맹의 기를 꺾어버리기 위한 교주님의 계책 때문이니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것을 잘 사용하면 대반격의 실마리가 되어줄 것입니다.”

“……대반격의 실마리라!”

“그렇습니다. 소인이 용법을 가르쳐드릴 것입니다.”

“크하하하하! 과연 천마께서 큰 뜻이 있으셨구나! 비록 명령 때문이었지만, 내 이 농성전을 끌고 가는 일에 얼마나 지루하기 짝이 없었는지 아느냐? 좋다. 그럼 앞으로 할 일을 얘기해보자꾸나.”

이날은 마웅패가 난주성에서 농성을 시작한 지 11일째 되던 밤이었다.

다음날.

적룡단과 군사들은 난주성에서 평소처럼 조태상군의 공격을 방어하면서 버텨내는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지루한 공방의 기일이 더 지나서 14일째가 되던 날 깊은 새벽, 적룡단은 난주성에 불을 지르고서 무위성으로 퇴각했다.

조태상군과 고소덕군, 천무경의 창천단과 천무방 삼당은 퇴각하는 적룡단을 바로 쫓지 못하고 일단 난주성에 입성할 수밖에 없었다.

적군이 워낙 기습적으로 성을 버리기도 했거니와 성내 마을을 태우고 있는 화마를 무시하고 지나가기엔 백성들의 피해가 염려되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군사들이 신속하게 조치함으로써 두 시진 만에 대부분의 불길을 진압하였고, 이미 동녘 하늘에 해가 떠오를 때가 되어서야 모두가 간신히 휴식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맹주님, 서쪽 구릉지에 감시망을 펼쳤던 인원들이 돌아왔습니다.”

남궁평이 천무경에게 다가와 보고했다.

“14일간 성에 접근하거나 입성한 움직임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 그럼 버티다 못해 퇴각한 것으로 봐야 하나…….”

천무경이 수염을 만지작거리면서 마웅패의 의도가 무엇인지 생각하고 있었다.

천무경은 난주성에 입성하자마자 천무방 삼당에는 화재 진압을 지시하는 한편, 구치상에게 지시하여 창천단이 성내에 수상한 흔적이 있는지 조사하도록 했다. 혹시 우물에 독을 풀었거나 수상한 물건들이 있어서 군과 맹방(盟幇)이 피해를 보는 상황을 우려한 것이다.

다행히 그런 흔적들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그것으로 마웅패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더더욱 불분명해진 감이 없잖아 있었다.

천무경은 조태상과 고소덕이 있는 지휘 막사를 찾았다.

그곳엔 두 장군뿐만 아니라 조태번을 비롯한 양군의 부장들, 천무방의 두 장로와 창천단주 구치상 등 주요 인사들이 모두 모여있었다.

“맹주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조태상이 웃으면서 천무경을 반겼다.

14일간 지속되었던 공성전 동안 많은 사상자를 감수할 걸 각오했음에도 예상보다 적은 피해로 병력을 보존하는 데 그를 위시한 무림 고수들의 활약이 지대했기 때문이었다. 예상된 피해보다 절반가량 줄여서 만여 명에 못 미치는 사상자에 그친 것도 그렇지만, 난주성 내에 있던 화포들이 불꽃을 뿜을 때, 절대고수라 평가할 만한 수준의 고수들이 나서서 일부 막아내는 광경은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그러니 경외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는데, 그건 고소덕도 마찬가지여서 남궁평과 백무당의 협력을 받을 수 있었단 사실에 대단히 감격해하고 있었다.

“일단은 승전을 자축하고 싶지만, 아직 전쟁이 끝난 게 아니니 무림 고수 여러분의 조력에 감사하다는 말로 대신하고 싶습니다.”

“최소한 마웅패의 목을 쳐야만이 천마신교의 군사적 침략 시도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오. 그전까진 긴장을 놓지 않는 게 좋소.”

천무경이 이른 해이를 경계하면서 긴장감을 고양시키자 조태상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혹시 고민하는 것이 있습니까?”

“마웅패에게 다른 노림수가 있는 게 아닐까 염려스럽소. 전쟁의 양상에 대해 아는 건 적으나 그놈의 성격상 이렇게까지 농성전을 고집하는 건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오.”

“확실히 일리가 있는 말씀이오. 계략과 어울리지 않는 놈이지만, 동기가 있으면 노력하는 자이니. ……어쩌면 무위로 가는 길목에 함정을 놓을 수도 있으니 깊이 경계해야 함이 마땅할 것으로 보오.”

마웅패와 같은 진영이기도 했던 고소덕이 천무경의 우려에 동의했다. 그러자 남궁평이 곧바로 호응했다.

“당원들을 파견하여 일대를 정찰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소.”

고소덕과 남궁평의 견해가 일치했지만, 천무경의 염려는 다른 쪽에 머물러 있었다. 고소덕이 얘기한 건 군사적 견해에 따른 것이었고, 그가 염려하는 건 무림인들의 관점에서 어떤 노림수를 갖고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천마신교였으니 더 기상천외한 방법을 들고나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전선에서의 전력은 우위를 점하고 있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못해. 흐음! 그러고 보니…….’

천무경이 구치상에게 시선을 돌렸다.

“맹에서는 추가 전력 파견에 대한 소식이 온 게 없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천무경이 맹주임에도 한 자리에 머물지 않고 군사들 사이를 누비고 다녔으므로 본진에도 창천단 인원이 있었던 걸 떠올려 구치상에게 물어본 것이었다.

“늦는군.”

그의 말에 구치상이나 천무방의 세 당주도 천무경의 눈치를 살폈다.

천무경은 창천맹의 두 부맹주에게 창천단을 제외한 정파 전력의 추가 규합 및 파견 임무를 맡기고 먼저 전선에 합류한 것이었다. 이미 시일이 꽤 지났으니 전력 규합에 얼마나 시간을 쏟았든 간에 진행 상황에 대한 보고가 들어올 법도 했는데 아직도 손에 쥘만한 서찰 하나 오지 않고 있었다.

장태환이 인상을 찌푸렸다.

“정파 새끼들……. 우리가 사지에서 싸우고 있는 상황을 이용해서 세력 키울 생각에 골몰해 있는 거 아냐? 어찌 생각하오, 천 방주.”

“사파는 이미 그런 빚을 한 번 졌소만……, 똑같은 짓을 저지를 요량이라면 그거참 유감이군.”

천무경이 대답하기 전에 백두기가 끼어들어 신중한 어투로 중얼거렸다.

“빚은 개뿔. 정말 그런 거라면 그야말로 좀스러운 배포가 아닌가?”

장태환이 거칠게 투덜거리는데 그의 콧수염이 입바람에 휘날릴 정도였다.

‘빚이라…….’

천무경은 백두기가 무엇을 지적한 것인지 대번에 이해했다.

과거 혈마 원건을 상대로 마침내 화산에서 결정지을 순간이 도래하였을 때, 사파가 협력을 외면함으로써 정파의 세력이 지리멸렬해질 지경에 이르렀던 상황을 상기한 말이었다.

천무경이 구치상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나 대신 맹으로 전갈을 부탁하오.”

“뭐라고 전하면 되겠습니까?”

천무경이 잠시 한 호흡 쉬고 대답했다.

“……흠, 상황이 급하지 않으니 모든 준비를 끝내고 달려와도 좋다고 말이오.”

조태상 형제나 고소덕은 큰 관계가 없었으니 별다른 반응도 없었지만, 세 당주들이나 창천단주 구치상의 표정은 모두 다른 반응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니, 방주! 당장 달려오라고 재촉해도 모자랄 판에…… 아니, 당장 돌아가 끌고 와도 모자랄 판인데 어찌 그리 약하게 구시오?”

“현재 상황에서 그들이 옛일을 떠올리는 건 인지상정이나 정말로 그렇다면 유감이지…….”

가장 길길이 날뛸 듯이 화를 내는 건 당연히 장태환의 몫이었지만, 백두기는 천무경의 판단에 일부 공감하면서도 맹주로서 내리는 결단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유감은 무슨! 정말로 그렇다면 모두 썰어버려야지!”

장태환은 쉽게 화가 가시지 않는지 으르렁거리길 멈추지 않았다.

“그것으로 되겠소이까?”

구치상은 다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천무경에게 되물었다.

천무경이 피식 웃었다.

“충분합니다.”

쓴웃음처럼 보이다가도 자신감 넘치는 웃음으로도 보인다.

정말로 정파가 협력에 대한 적극성이 꺾였다고 하더라도 천무경은 이대로 밀고 나갈 생각일 것이다. 천하제일 파천무봉 다운 패기이지만, 전쟁은 홀로 하는 게 아닌 만큼 구치상도 유감스럽게 여기는 건 백두기의 심정과 다르지 않았다.

한편 남궁평은 묘한 표정으로 천무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무경이 구치상에게 전한 말은 정말 뜻밖의 답이었는데, 그렇게 느끼는 이유는 그가 정파의 옛 명문세가 남궁가의 피를 이은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비록 대를 이어서 천무방에 몸담는 그의 처지가 전후 사정상 자연스러운 것일지라도 보다 근본적인 존재의의나 역사적 사실과 그 업보에 대해서 성숙한 판단을 자신에게 요구하고 있었다.

그런 차원에서 천무경이 정파에게 여지를 남기는 말이란 충분히 타인을 감화시킬 만한 것이었다.

‘이젠 어떡할 것이오? 정말 스스로 협력의 열의를 꺾었다면 너무 부끄럽지 않겠소?’

남궁평은 아직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창천맹의 두 부맹주를 떠올리며 속으로 물었다.

* * * *

숭산 소실봉 소림사 대웅보전.

범우는 소림사 방장이었지만, 무공을 멀리하는 대신에 경전을 탐구하고 수양에 힘쓰는 법승(法僧)이었다. 그래서 강호의 일은 그의 사제이자 창천맹의 부맹주이기도 한 범굉에게 오롯이 맡기면서 소림 제자들의 불법 공부에 힘쓰고 있었다.

그런 성향 탓에 강호와 관련된 소림사의 일은 대부분 창천맹으로 향하거나 소림사에 남아있는 사대금강이 대리하여 처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범굉 다음가는 소림 최고수들인 사대금강도 이 사람이 범우를 독대하고자 하는 걸 제지할 수 없었다.

“이 무슨 무례한 짓이오!”

료정이 대웅보전 법당의 문을 벌컥 열고 소리쳤다.

그의 굵고 무거운 저음이 법당 안에서 웅웅 울리자 범우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료정도 곧 실수를 깨닫고 급히 합장과 함께 허리를 숙여 사죄의 뜻을 표했다.

“방장사숙, 용서하십시오.”

방장실이나 대웅보전은 무공 사용이 금지된 곳 중 하나였는데 소림방장인 범우가 무공을 모르는 법승이었기 때문이었다.

범우는 찌푸렸던 눈살을 펴면서 손바닥을 펼쳐 괜찮다고 표시했다.

“빈도가 사과드립니다. 절차를 따랐으면 료정대사께서 이리 화내시진 않았을 텐데 말이지요.”

범우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노도사가 사과하는데 료정이 노기를 쉽게 가라앉히지 않고 입을 열었다.

“지금 하시는 행동이 사파 무뢰배들과 다를 바 없다는 걸 알고 계십니까?”

“료정! 무례하다!”

료정의 말에 범우대사가 호통을 쳤다.

무공을 모른다고는 하지만, 법력이라는 것이 쌓이는지 호통치는 기세가 무척 무겁고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료정은 사과 대신 입술을 꾹 다문 채 고개를 조금 숙이는 걸로 대신했다.

범우대사가 호통친 이유는 앞의 노도사가 바로 무당파의 소요자였기 때문이었다.

무당파의 검선이라는 상징적인 존재에 연배나 항렬상으로도 범우와 비슷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실상 원수지간이 아니라면 이런 험담을 들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범우도 료정의 저런 태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건 소요자도 굳이 별 반응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범우는 손짓으로 료정이 대웅전 밖으로 나가도록 했다. 그래서 료정이 물러나자 차분한 목소리로 먼저 말을 시작했다.

“소요자, 소림사가 뭔갈 해주길 바란다면 창천맹에 있는 내 사제를 찾으시길 바라오. 소림사가 강호에서 맡은 일은 모두 사제에게 맡겼으니 말이오.”

“방장대사, 소림이 겪은 치욕의 역사를 설마 잊으신 건 아니신지요?”

“으음……!”

범우가 침음성을 삼켰다.

소요자가 그의 앞에 불쑥 나타났을 때는 영문을 몰랐다. 료정이 화를 냈을 때는 단순히 무례한 일 때문만은 아닌 걸로 짐작했지만, 설마 무당파 검선의 입에서 소림의 아픈 과거를 찌르는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과거 정파의 구파일방오대세가의 큰 틀이 무너지면서 11개 문파와 세가들이 일제히 봉문을 선언하게 된 데는 소림사의 역할이 컸다. 종남화산이 천무방을 주축으로 한 황하이북의 사파들에게 완전히 무너지고 무당파는 구룡문의 견제에 못 이겨 무당산에만 틀어박혀 있던 시절에 다음 차례가 자신들일 것을 걱정한 소림사가 각 정파에 봉문을 제안했기 때문이었다.

무당파로선 받지 않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바로 봉문을 선언해버렸지만, 지리상 멀리 있는 다른 문파들은 격렬히 반대했었다. 특히 최전선에서 간신히 맥을 유지한 채 싸우던 화산의 반대가 제일 격렬했지만, 당시 소림 방장 원문선사(元門禪師)는 뜻을 굽히지 않았었다.

하지만, 곧 소림사를 향한 다른 문파들의 분노가 수그러들 사건이 일어났다.

본래 금분세수를 하거나 봉문을 선언한 문파는 공격하지 않는 것이 강호무림에 남아있는 불문율이었다. 구룡문은 무당파와 가장 격렬하게 다퉜기에 그들이 봉문을 선언하면서 공격할 대상을 잃어버리게 되자 크게 분노했었다.

그런 금기를 깨고자 하기도 했지만, 당시 사패련의 수장이었던 천무방이 제지했다. 천무방도 종남화산 두 문파와 격렬한 전쟁 이후로 잔당들의 지긋지긋한 괴롭힘에 지쳐있던 것이 컸었다.

이 당시 무림맹은 존재를 드러낼 거점도 없이 명맥만을 잇고 있었는데 당시 맹주가 바로 원문선사였다. 구룡문은 소림사에 찾아가 원문선사에게 무림맹주로서 전쟁을 끝내기 위한 책임 있는 역할을 요구했는데 바로 자결로써 무림맹 해체를 선언하라는 것이었다.

당연히 소림사 승려들은 극렬히 반대하면서 결사항전을 주장했지만, 원문선사는 기꺼이 죽음을 택하여 전쟁을 끝냈다. 구룡문은 소림사가 저항하면 바로 사찰 전부를 불태울 각오까지 했었는데 원문선사가 그런 희생을 받아들이자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천무방은 그런 돌발행동을 한 구룡문을 적극적으로 제지함으로써 더는 출혈을 막고자 했고 그렇게 한 세대 넘게 정파 봉문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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