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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324화 (324/432)

324화 – 제60장. 모종의 움직임들 (4)

* * * *

이틀이 흘렀다.

적룡단에 보급되었어야 할 물자들은 해산되는 청해군들이 먼저 각각 나누었다. 그러고도 상당량이 남아있었는데 진도건은 서하 출신들에게 부탁하여 영토가 수복되면 이를 서하군에 전달될 수 있도록 조치했다.

그리하여 초기 계획과는 다르게 2천여 명 정도의 임시 주둔군이 북정진에 남게 되었다.

군사들은 이미 부족 및 지역 단위로 쪼개지면서 조금씩 하산이 진행되고 있었다. 가볍게 출발할 자들부터 차례로 북정진을 떠나갔으니 오후가 되었을 때쯤에 북정진에 남은 군사 규모는 서하 출신 군사들을 제외하면 약 오천여 명에 불과했다.

꽤 한산해진 진영 안에서 청해군 해산도 막바지에 이르면서 진도건도 자신이 했던 제안의 실현이 거의 완료되어가자 그와 안효철도 출발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앞에 뜻하지 않은 손님이 찾아와 있었다.

“일월교의 앙검수라 곽비(郭匕)라 한다.”

이 진영에 있을 진도건을 만나고 싶다고 하여 군사들의 안내를 받고 찾아온 사람.

검은 장포를 두른 앙검수라 곽비가 머리를 덮은 장포를 내리면서 홀로 그들 앞에 나타났을 때, 진도건은 오랜만에 작은 격앙감을 느꼈다.

곽비를 마주친 적은 없었지만, 그들의 수괴가 지금의 진도건을 만든 장본인이 아니던가?

반면 곽비는 기절한 진도건을 직접 화산까지 운반한 장본인이었기에 남다른 감회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또 한 사람을 바라보면서 진도건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바로 이혁성 때문이었는데, 그가 곽비의 동료이자 일월교 사대수라 중 한 명이었던 금궁수라 신평(愼平)을 화산에서 죽인 장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올해 초에 만났다면 아마 당장에라도 검을 뽑았을 터였지만, 혈마와 공존 관계에 이른 지금 진도건은 예의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놀랍군. 이곳에 날 찾아온 것도, 그게 일월교라는 것도 말이야.”

“용건만 말하지. 교주께서 당신을 찾으신다.”

“교주? 누구?”

“우리 일월교의 교주, 일월신마 냉소평.”

냉소평.

일월신마의 본명도 처음 들어본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진도건에게 있어서 일월신마란 이름은 천마 단지운이란 존재 이상으로 무겁게 느껴지는 이름이었다.

곽비는 바로 자기 할 말을 더했다.

“고비의 ‘불타는 절벽(炎壁)’에서 보자.”

진도건 등으로서는 당연히 처음 들어보는 곳이었다.

이혁성이 살기를 흘리면서 입을 열었다.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겠다는 꼴이로군.”

“후후! 기다리는 사람은 일월신마님과 네가 금궁수라 신평을 죽인 덕에 셋으로 줄어든 사대수라들뿐. 겁나면 오지 않아도 된다.”

곽비도 반응하여 잠깐이나마 이혁성에게 살의를 드러내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진도건을 보며 입을 열었다.

“얼마를 데려오든 상관없다. 일월신마께선 오직 널 만나고 싶은 것뿐이니. 난 바로 돌아갈 것이니 찾아올 능력이 없다면 지금 날 따라와도 좋다.”

그의 말에 진도건이 류단아를 쳐다보았다.

“갈 수 있어요.”

류단아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진도건은 더 고민하지 않았다.

“돌아가 내가 곧 가겠다고 전해라.”

곽비가 씩 웃으면서 장포를 다시 머리까지 덮으며 말했다.

“파멸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 그러니 너무 지체하지 않도록 해라.”

어쩐지 섬뜩한 말을 남긴 채, 곽비는 자신을 경계하는 황검당 사이를 뚫고 군영을 지나도록 경공을 펼치면서 사라졌다.

그가 떠나자마자 이혁성이 진도건을 보며 입을 열었다.

“함정일지도 모른다.”

“괜찮습니다.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을 상황일 겁니다. 그자가 저를 찾았다는 건…….”

진도건은 일월신마와 마주쳤던 그날의 전투, 그와의 대화, 그리고 화산에서의 시간 모두 지금도 생경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처음 마주했던 마도의 기괴함을 맛보았던 것도 예측 불가였지만, 천마신교로 회수했어야 할 홍천환을 진도건에게 먹이는 행위도 그의 상황에 대입해 생각해보면 절대 쉽게 할 수 없는 선택들이었다. 그것을 단순히 변덕으로 치부하기에는 진도건이 떠올린 일월신마의 얼굴과 그 눈빛에는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어 보였다.

그리하여 혈마와 공존하는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를 달라진 관점으로 마주 대하여 얘기를 나눠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도 그놈을 만나고 싶다. 내게 혈마란 정체성을 부여한 것도 결국 그놈 아니냐?”

지금의 혈마가 가진 목적의식도 마도의 본질을 향한 접근처럼 여겨졌기에 이런 말을 하는 의도를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예정대로 준비해서 가시죠. 당주님과는 여기서 헤어지는 게 좋겠습니다. 오늘 밤에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정말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나? 그 일월신마야.”

“하하, 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자네가 그리 말한다면.”

이혁성은 진도건의 결정을 수긍했다.

뜯어말린다 한들 듣지도 않겠지만, 진도건도 3년 전의 그 수준이 아니니 만약 곽비가 얘기한 것처럼 일월신마와 세 명의 수라가 전부라면 진도건과 안효철 두 사람만으로 충분히 대응할 수 있으리란 생각도 들었다.

어디까지나 곽비의 말을 전적으로 믿는다는 가정 아래의 판단이었지만.

진도건은 안효철, 류단아와 함께 다음 여정을 의논하기 시작했다.

“고비의 불타는 절벽이 어디에 있소?”

류단아는 막대기를 들어서 지면에 대고 큰 위치만 알 수 있도록 그림을 대충 그리기 시작했다.

“오로목제는 여기서 북서쪽으로 한참 가야 해요. 보통의 이동 속도면 보름? 아주 먼 여정이 될 테죠. 그런데 불타는 절벽은 이곳에서 북쪽으로 그리고 조금 더 동쪽으로 가야 해요. 이 거리만 해도 여기서 오로목제까지 가는 길 절반은 되는데 방향은 반대쪽이니 돌아가는 셈이에요.”

류단아가 땅에 그린 세 곳의 위치를 선으로 연결하면 오로목제로 길게 날이 선 삼각꼴의 화살촉처럼 보였다. 그녀 말대로 오로목제로 가는 방향 어딘가에 있는 곳이 아니었고 또 감숙 하서주랑으로 집중된 전선에서도 멀리 떨어진 곳이어서 왜 하필 이곳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안효철이 턱을 쓰다듬으면서 골몰히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확실히…… 사전에 준비해두지 않으면 함정을 꾸미기에 적절하지 않은 곳이군. 너무 동떨어진 위치야. 그렇다고 한다면 역시 의심되는 건 그자의 의도겠군.”

“흥미롭지 않습니까?”

진도건의 말에 안효철이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보았다.

“뭐가 말인가?”

“최초에 천마신교를 보면 구주마종이라는 이름으로 대변되는 조직의 규모부터 그 수장들인 아홉 명의 신마들까지 절대 무너뜨릴 수 없는 아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보여지는 상황들로 판단해본다면 구주마종은 저마다 충성심도 다른데 독립성까지 드러내는 마종도 있다는 겁니다. 아직 아홉 개의 세력 중에 실질적으로 무너진 건 둘뿐인데도 결속력에 균열을 드러낸 채 어쩐지 본진까지 길이 열리는 형국이에요. 이를 어찌 보십니까?”

“과연……,”

안효철은 그의 이런 말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천의 전투들은 정말 치열했지.’

사파 삼대세력 중 한 축이었던 구룡문이 지리멸렬하게 되어버린 백제성 전투.

성도에 펼쳐진 거대 환진과 환술.

아미산과 당문에 가해진 기습 그리고 성 밖에서 벌어진 전투.

청성파 학살.

마교주와 대결.

그때까지만 해도 천마신교는 정말 넘기 어려운 대적(大敵)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서하 흥경에서 성혈신마가 보여준 모호한 태도에 연이은 일월신마의 이런 접근은 그저 단순하게 넘길만한 징조는 아니었다.

정말 격렬하게 물고 뜯으며 사생결단을 벌여야 할 마도와 정사연합 사이에서 이런 모종의 일이 벌어지는 모양새는 결코 일반적이라고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진도건이 그렇게 느끼는 지점에 대해 안효철도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그도 성혈신마가 남기고 간 말로 인하여 탈혼갑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류단아가 입을 열었다.

“서쪽으로 가는 길은 비단길과도 인접해서 여정이 어렵진 않지만, 북쪽으로 가야 한다면 얘기가 조금 달라요.”

“……부족들이나 마적들을 마주칠 수 있겠군.”

류단아가 사막과 초원을 종단(縱斷)해야 하는 상황을 염려한 것이었다.

진도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혈랑대에 끼어서 가는 게 좋겠군.”

“네, 그게 좋아요.”

그날 밤, 진도건과 안효철을 포함한 류단아의 혈랑대는 이곳 북정진에 들어왔던 곳으로 다시 빠져나갔다. 그리고 서하인이 주축이 된 병력 일부가 병참 전달을 위하여 주둔하는 사이, 이혁성의 황검당도 예정대로 하산하여 장액을 노리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혁성은 서파파의 조언에 귀 기울여 빠르게 일을 처리해 나갔다.

감숙 하서주랑을 따라 장액, 주천과 가욕관을 차례로 지나면서 천마신교에 복종하는 자들이 파악되면 가차 없이 암살작업에 들어갔다. 그렇게 멈추지 않고 옥문(玉門), 안서(安西), 돈황 그리고 옥문관에 이르기까지 쉬지 않고 이동하면서 처리해 나갔다.

지휘관들의 사망은 당연히 다른 마을과 관문, 진지 등으로 전령을 보내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난주성은 포위전으로 인해 접근 자체가 불가능했고 후방지역은 황검당이 하루꼴로 처리하는 등 연쇄적인 작업이 이뤄지니 대응 자체가 불가능했다.

이 모든 암살 작업이 약 8일 만에 이뤄졌으니 만약 이 사실을 적룡단주 마웅패가 알아차린다면 기절초풍할 일이라고 황검당 모두는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모두 뜻대로 흘러가지는 않는 법.

조태상군은 난주성 삼면을 포위 공격하면서도 성곽에 가려진 후위까지 놓치고 싶지 않았다. 증원군이 오는 상황이든, 적룡단과 난주성의 군사들이 퇴각하는 상황이든 기민하게 대응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천무경으로서도 마교 고수들이 증원되는 상황을 위하여 감시할 필요가 있었기에 고수 오백여 명을 조직하여 난주성 후방의 구릉지와 황하변에 뿌려놓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바깥에서부터 난주성으로 들어간 사람이 하나 있었다는 사실을 파악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소인은 무영각의 위(葦)라고 합니다.”

자신을 위라고 소개한 남자는 겉보기에 평범한 나그네처럼 보였다.

하지만, 난주성 주위로 삼엄한 감시가 적으로부터도, 성내 군사와 적룡단으로부터도 이뤄지고 있는 상황을 뚫고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 신분을 의심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었다.

마웅패가 찝찝한 얼굴로 위를 노려보았다.

“무영각이 이 몸을 지켜보고 있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설마 진짜였을 줄은. ……어쩐 일로 모습을 보인 것이냐?”

마웅패 개인으로서는 걱정거리가 조금 있었다.

나름의 지시가 있었긴 해도 농성으로 버티는 건 적룡단의 성격과도 맞지 않았을뿐더러 이런 전장 상황은 종종 패전 분위기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무영각이 각 마종과 신마들의 감시자라는 성격을 고려하면 왠지 현 상황에 대하여 경고하러 온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위는 품에서 봉인된 작은 목함을 꺼내어 그의 앞에 내어놓는 등 걱정과 상반된 말을 꺼내었다.

“단주님의 고초를 격려하라는 말과 함께 천마령으로서 단주께서 유용하게 쓰실 만한 선물이 완성되어 가져왔습니다.”

“선물?”

마웅패가 자신의 앞에 놓인 봉인된 목함을 내려다보았다.

어쩐지 꺼림칙한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며 그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는 물건이었다.

“이게 뭔가?”

마웅패의 물음에 엽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사혈신마의 독혈을 가공하여 만든 ‘소마혈(甦魔血)’입니다.”

마웅패의 눈빛이 급격하게 흔들렸다.

사혈신마 서문질이 사망하였다는 건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피로 만들어진 물건이라면 어째서 이렇게 술식이 적힌 종이 끈으로 봉인되어있고 또 꺼림칙한 기운이 느껴지는지 모두 설명이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엽의 이야기가 의미하는 건 다름이 아니었다.

“이건…… 서문질의 마정인가?”

“그런 셈입니다.”

마웅패의 물음에 엽은 순순히 인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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