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323화 (323/432)

323화 – 제60장. 모종의 움직임들 (3)

* * * *

단원진이 아들에게 ‘마도대의’를 논한다.

“네 할아버지 그리고 이 아비의 마도대의란 그런 것이다. 천마 그 자체로서 ‘완전함’을 이루는 것. 하지만, 네 마도대의는 무엇이더냐? 천하를 마도라는 새로운 질서 하에 재편하고 천마의 지배 아래 두는 것이 아니더냐? 그러니 황실까지 건드리는 수를 둔 것이지.”

천마신교에게 적룡단은 본래 토벌 대상이었다. 도성에만 고립된 채 영토에 대한 영향력이 약화된 쿠초 왕국의 의뢰 때문이었다. 그들을 천마신교의 일익으로 만들어보자고 제안한 것은 단지운이었다.

적룡마종의 마공, 그 마도로의 발전은 단원진에게도 의외의 성과로써 남긴 했지만, 수천의 마적단이 주는 효용성에 대해 의심스러웠던 지점은 단지운이 군사 전쟁을 일으키는 것으로 인지할 수 있게 된 셈이었다.

“아들아, 너의 마도대의를 이루기 위한 힘이 부족하다면 이 아비의 모든 걸 기꺼이 주마. 원하느냐?”

단원진의 또렷한 눈빛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그가 묻는 내용 자체는 도발처럼 들리기도 했다.

천마신교의 교주, 당대 천마는 아버지가 아니라 아들의 것이었다.

당연히 하늘 아래 적수가 없다고 여길 정도였다.

힘이 부족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자존심을 긁는 얘기였다.

“아버지 앞에 있는 이 아들은 당대 천마이길 넘어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입니다.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단지운의 턱이 높이 서면서 드높은 자존심을 여실히 드러냈다.

역시나 예상대로의 반응이었다.

단원진이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무공도 모르는 인간이 황제라는 작위로 만인지상의 지위를 누리는 건 사람 사는 세상에선 힘만이 능사가 아님을 얘기해주고 있지. 그러나 석가모니가 그러했듯, 노자가 그러했듯, 서방의 예수란 자가 그러했듯 지고한 경지를 추구하는 자에겐 위상이라는 이름의 경계란 무의미한 법이다. 그런 초연마도(超然魔道)를 원한다면 언제든지 마귀성으로 오너라. 내 마지막 길을 닦아 놓고 너를 기다리고 있겠노라.”

단원진은 단지운을 지나쳐 걸었다. 자존심을 건드리자 미묘한 심적 떨림이 감지되니 역시 손바닥 안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단지운의 이어진 물음이 그의 발을 멈칫하게 했다.

“글쎄요. 과연 거기서 절 기다리고 있는 것이 어디 제게 좋은 일이라고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무슨 의미냐?”

“절 만드셨지 않습니까? 할아버지께서 아버지께 남겼던 것과 아버지가 제게 남겼던 게 달랐던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닙니까?”

“후후후, 무슨 뜻인지 모르겠구나.”

“제가 사랑의 결실로 낳은 자식은 아니지 않습니까?”

청소년기에 어머니를 잃어버리고 제대로 애도도 하지 못한 채 초원과 사막을 건너 여기까지 왔었다. 처음엔 스스로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편찮은 어머니를 괴롭혔다고 여겼지만, 나이를 먹고 머리가 커지면서 어머니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대략적으로 알게 되었다.

만들어진 자식.

그것이 단지운이 가진 ‘나’란 존재에 대해 갖고 있는 인식이었으며 단원진의 어떤 목적으로부터 기인한 존재라는 점 또한 깨달은 상태였다.

단원진이 혀를 끌끌 찼다.

“사춘기는 다 지나간 줄 알았는데, ……아직도 오해에 사로잡혀 있었더냐? 혈연에 더 큰 걸 남기고 싶은 건 모든 아버지의 공통된 마음이니라. 네가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내 일찍 자리를 넘겨주지 않았더냐?”

“보통의 아버지는 스스로 황혼기에 접어들었음을 인지하고 그렇게 합니다. 아버지처럼 더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 눈을 빛내면서 자리를 넘기는 일은 보통 없지요.”

“흥, 이 아비는 이미 네게 모든 걸 밝혔다. 받아들일지 말지는 좋을 대로. 아니면 이 아비를 꺾던가. 그 정도 자신은 있지 않으냐?”

“천상천하유아독존.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큭큭큭!”

단원진의 조소가 쏟아졌다. 비스듬히 돌아 아들을 노려보는 그 눈빛에는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고 얘기하는 듯했다.

그 눈빛을 마주하는 단지운도 내심 움찔했다. 그리고 자신이 찔릴 만한 일을 했는지 스스로 의심하는 사이, 단원진이 조소 그대로 입을 열었다.

“크큭……, 그래서 흡성대법을 익혔더냐? 이 아비가 네게 주지 않은 게 더 있을까 봐 말이냐? 정 의심되거든 지금 이 아비의 등을 치거라.”

단지운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 흔들리는 눈빛을 본 단원진은 승자의 미소를 지으면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제육천마라대전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정말로 뒤를 공격당할 일이 없다는 자기 확신의 몸짓이었다.

단지운의 주먹 쥔 두 손에도 눈빛의 떨림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아버지는 아들의 정곡을 찔렀다.

실제로 그가 흡성대법을 이용하여 다른 자의 내공을 갈취한 적은 없었지만, 흡성대법으로 자신의 내공을 키워 마니사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던 구마진을 보고선 영감을 얻어 손을 대었던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의도가 바로 제 아버지에 대한 의심 때문이라는 말도 맞았다.

심지어는 자신과 같은 천마성을 가진 단원진의 마성까지 온전히 흡수할 수 있도록 이론적인 연구까지 했을 정도였다.

오직 더 시도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의 무공 성취가 자기 걱정보다 훨씬 더 빨랐기 때문이었다.

특히 가장 큰 대목은 단원진이 환도종의 기문술로 공간을 장악하는 능력 대신 천마신공만으로 그 이상의 힘을 발휘하는 경지를 개척해낸 지점이었다.

그게 바로 천마신공 마천경이었다.

스스로 그 점을 인식했던 순간이 아마 제 아버지에 대한 의심이 가장 적었을 때나 다름없었다.

단지운은 문득 권영서가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걸 깨닫고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아버질 따라가지 않느냐?”

“전 무영각주입니다. 교주를 보필하는 것이 제 소임, 언제든 불러 하명하여 주십시오.”

권영서가 허리 굽혀 대답했다.

“……마귀성이 천산의 역할을 대체할 거라면 뭐라도 건설하시려는 것이냐?”

“허드렛일할 무영을 몇 명 붙여달라고 하셨으니 뭘 건설하거나 할 생각은 아니신 듯합니다. 그간 궁금하신 소식이나 알려드려 온 것이지 태상교주가 가지신 뜻은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알 수가 없군, 알 수가 없어…….”

단지운이 답답함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신뢰, 의심.

무엇을 선택하는 것이 옳은 답인지 누가 속 시원하게 알려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을 때, 그의 뇌리로 한 사람이 스쳐 지나갔다.

“무영각주는 그만 돌아가라.”

“예.”

권영서가 나가고 나서 단지운은 잠시 자리에 선 채로 시간을 두고 기다렸다가 뒤이어 대전을 나갔다. 그리고 그가 향한 곳은 바로 성혈궁이었다.

그가 지나가자 성혈궁 승려들이 그를 향해 합장하며 예를 갖추었다.

누군가는 평범하게 볼 법한 광경이겠으나 부처를 모시는 자들이 번뇌악인 천마를 자처하는 자에게 예의를 차리는 광경은 어떤 선악 이상의 사상적 경계의 모호함과 혼란스러움을 부추길 만할 것이었다.

그리고 단지운은 그런 모호한 기분을 아유타와 마주 보면서 오랜만에 느끼고 있었다.

“교주께서 어쩐 일로 귀한 걸음을 하셨습니까?”

“성혈궁도 천마신궁의 일체 안에 있는데 못 올 게 뭐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발길이 뜸했던 걸 대라마께서 섭섭해하지는 않으셨는지 걱정됩니다.”

아유타는 여유로운 미소로 단지운을 맞이했다.

차분히 타오르는 촛불에 관세음보살좌상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광영이 실내에 어른거렸다. 그것이 주는 차분한 분위기가 단지운에겐 편안한 기분도, 불편한 기분도 함께 건네주고 있었다.

“긴 얘기를 나누기 보다는 단도직입적으로 궁금한 걸 물어보고 싶어 왔습니다.”

“말씀해보십시오.”

“개인적으로는 여기에 믿음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만……, 첫 계시의 의미가 무엇인지가 궁금합니다. 아니, 정확히는 그때의 계시에 대한 해석이 지금도 유효한지를 묻고 싶습니다.”

“……믿음을 두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묻는 것은 왜인지요?”

“그렇군요. 제가 왜 물어보고 있을까요? 후후…….”

단지운이 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거기에 아유타가 대신 대답을 덧붙인다.

“단 태상이 가려는 길이 무엇인지 교주께선 아무것도 모르고 있기 때문이죠.”

단지운이 다시 고개를 들어 그녀의 눈을 쳐다보았다. 한없이 깊은 녹갈색의 현묘한 눈빛은 사람을 흠뻑 빠져들게 할 수 있는 마력이 있었다.

단지운은 그 눈빛을 마주할 때면 그것이 결코 세월의 깊이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선천적일 것으로 생각하곤 했다.

타고남이 깊이를 끌어들였다고 해야 할까.

“……후후, 후후후! 그렇군요. 난 천마신교의 교주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고 있군요. ……그렇다면 대라마께서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제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 말이죠. ……‘검은 태양’의 계시, 이 계시의 진의가 무엇입니까? 정녕 마도대의를 뜻하는 것이 맞습니까?”

아유타가 스무 살에 첫 계시를 읊조렸던 말.

검은 태양이 뜨는 날.

마침내 태고의 의지가 드러날 것이나 이미 모든 인과의 흐름이 그 아래 모여있어 생멸(生滅)이 공존하리라.

칠흑의 밤, 피 먹은 공기 속에 남게 될 것 또한 그와 마찬가지일지니,

아아! 억겁을 내달릴 번뇌의 마왕이여!

죽음 위에 우뚝 서리라!

그리고 오직 공허만이 그 전부를 평정하여 잠재우리라!

그리고 신 또한 함께 소멸하리라!

아유타는 단지운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잘 알지 못했지만, 그가 어째서 이제 와 이에 관하여 묻는 것인지는 오히려 명료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제가 교주님께 드릴 수 있는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조언을 딱 하나 해야 한다면 저는 깊이 고민할 것 같습니다. 지금 가시는 길을 계속 가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모든 걸 멈추고 또 모든 걸 무로 돌리라고 할지 말이지요.”

차분한 목소리로 얘기하나 단지운의 심기를 흔들어놓기엔 충분했다.

“지금…… 천마신교의 해체를 얘기한 것이오? 그리고 대체 무슨 말이오.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는 의미요?”

“하지만, 그 시점이 언제가 되었든 간에 그리고 어떤 조언을 하든 간에 바뀌는 건 없었을 듯합니다. 운명의 수레바퀴는 너무도 단단하게 굴러가고 있는 게 느껴지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처럼 교주께서도 의지가 확고하시니까요.”

“알 수 없는 말만 늘어놓으시는군. 내 고집으로 인해 바꿀 수 있는 게 없다는 말이오?”

“만약 오늘 당장에 모든 전쟁을 멈추고 천마신교를 해체하라고 하면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정녕 그 말을 입에 직접 담으시는구려. 그렇게 할 리가 있겠소?”

“당연히 그렇겠지요. 그리고 설령 제 조언을 받아들이신다고 한들 이미 전쟁의 불씨를 당기고 있는 자들은 멈추지 않을 거고 교주께선 다시 전쟁 한복판에 서실 것이겠지요. 제가 모두를 볼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계시도 그저 계시일 뿐, 그 결과가 누군가의 관점에선 좋은 일이 될 수도 있고 나쁜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그럼 천마조사께선 어째서 그 계시를 중하게 여긴 것이오?”

“천마조사 단용후는 계시에서 얘기하는 ‘번뇌의 마왕’이 되고자 했습니다. ‘천마’야말로, 마도의 절대적인 상징이니까요. 그는 그렇게 되려 한 남자였고, 그로써 자신의 존재를 드높이려 한 남자였습니다. 그래서 저를 곁에 둔 것이고 제가 계시가 실현되는 걸 보길 바랐습니다. 그는 번뇌의 마왕이 평정했다고 이해했으니까요.”

“대라마가 보길 바랐다고요?”

“그는 계시를 듣고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계시가 가리킨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강력한 능력은 당시 무공도 모르던 저를 홀릴 정도로 충분했지요. 하지만, 그의 권유로 저도 내공심법을 수련하면서 시간이 흘러 경지에 오르자 자연히 그의 해석에 의문을 가졌습니다. 초점을 잘못된 곳에 맞추었음을 말이죠.”

“당신께선 이미 오래전부터 계시의 토대 위에 세워진 천마신교와는 다른 방향을 보고 있었군요.”

“화가 나시나요?”

“성혈궁의 기조가 바뀐 때도 내가 취임하기 전이니 화가 날 일이겠습니까? 빌게포첸은 몇 번이나 제가 내린 임무를 잘 수행해왔습니다. 다만 이번 서하의 일엔 의문을 품고 있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얘기를 듣게 된 지금 성혈궁을 믿고 일을 맡길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대라마께선 너무 속을 드러내셨습니다.”

태연한 듯 보여도 결국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는 단지운을 보며 아유타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계시의 날이 오기 전까지 빌게포첸은 분명 교주령을 충실히 따를 것입니다. 그날이 언제일지는 모르나 이미 충분히 가까이 다가와 있습니다. 교주께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고 그날이 왔을 때, 결과적으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제가 이 자리에서 어느 쪽을 향해 몇 마디 던진다 한들 누구도 멈추지 않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단지운이 눈빛이 의지로 다시 타올랐다.

“당연합니다.”

그의 대답에 아유타는 두 손을 모으더니 그를 향하여 절을 했다. 그 뜻밖의 행동에 단지운이 잠깐 당황하는 사이, 그녀의 차분한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울림 있게 불당 안을 가득 채우듯 그의 심중에도 깊숙이 박혔다.

“저도, 성혈궁도 그날이 왔을 때, 아마 ‘올바른 선택’을 하려 하겠지요. 그러나 그전까지는 교주님께 최선을 다하여 보좌할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교주님의 마도대의를 위해, 천마신교의 종복 성혈교의 교주로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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