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2화 – 제60장. 모종의 움직임들 (2)
청해군이 가진 정체성은 모호한 지점이 있었다. 광활한 초지와 산지 속에 사는 부족들이란 가까이엔 서하인도 있었고 먼 지점에서 징발된 경우엔 신강의 쿠초 왕국의 영향을 받았던 부족도 있었다. 또 여전히 연합과 분쟁을 반복하는 몽골초원의 부족들처럼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다른 부족들이 모여진 군대였다.
그래도 좋으나 싫으나 공통적으론 천마신교의 위세 아래에 있던 자들이기에 모인 것이나, 그들의 충성심이나 책임감 등이 천마신교로 기울기엔 분명 부족함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들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기엔 역부족이었다.
애초에 무림이란 세상에 관심이 별로 없는 데다가 단순히 지리적인 거리만을 놓고 비교한다면 전쟁의 향방은 아직 중간지대에 머문 채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았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므로 당장에 처한 상황만을 생각해서 어느 쪽의 편을 들지 결정하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답하기 어려우신 것 같습니다.”
진도건이 노건문의 심리를 눈치채고 먼저 입을 열었다.
“……당연하지 않소? 천마신교에 호의든 반의든 저마다 가진 생각도 다른 데다가…… 적룡단 본대조차 아직 건재한데 고향 땅, 자기 부족을 향한 보복이 두려운 상황 속에서 누가 그 말을 쉽게 따르겠소? 어차피 무림인들의 싸움, 그저 화살받이에 불과한 우리 존재로 전쟁의 최종 결과가 정해지는 것도 아니고 말이오.”
“그럼 다른 제안을 하겠습니다.”
진도건이 바로 입을 열었다.
노건문의 얼굴에 걱정의 빛이 떠올랐다.
첫 번째 제안도 이리 부담스러운데 두 번째 제단은 또 어떤 걸 내놓으려고 할지 염려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바로 진도건의 입에서 흘러나온 얘기는 그런 염려에만 치우친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군을 해산시켜주십시오.”
의외의 발상에 노건문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진도건이 말을 계속 이어갔다.
“여기서 기련산맥은 매우 가깝습니다. 각 부족끼리 또는 비슷한 출신지끼리 모인 다음에 기련산맥으로 흩어져서 넘어가면 바로 청해입니다. 당장 중원 무림과 전쟁 중인 적룡단이 쫓을 수도 없을뿐더러 천마신교도 전쟁 때문에 보복할 여건도 없을 것입니다. 부족을 위해 치르는 전쟁도 아닌 오지에서 탄생한 사교집단을 위해 치르는 전쟁으로부터 자유를 되찾아 가시기 바랍니다.”
그의 제안은 다시 청해군에게도 퍼져나갔으며 술렁이는 분위기가 곧장 감지되기 시작했다.
진도건의 제안은 그들의 빈약한 결속력을 선명하게 파고들어서 갈라놓았다.
청해군은 이미 옥문관 돈황 지역을 시작으로 주천(酒泉)과 이곳 장액에 이르기까지 서하 주둔군들과 전쟁을 치렀다.
그때는 적룡단이 강력한 힘을 발휘해서 쉬운 싸움을 해왔으나 적군에 새로운 총사령관이 부임한 이후로는 패전도 치르면서 큰 희생을 치르기도 했다. 그때 본 동료들의 죽음은 그들에게 많은 두려움을 안기면서 사기도 저하됐는데, 그 탓에 마웅패는 청해군을 이곳 북정진에 주둔시켜서 병참을 담당토록 하고 적룡단 본대는 서하 증원군으로 전쟁을 이어온 것이었다.
그래서 진도건의 제안이 꽤 솔깃하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건…… 당신들에게도 이득이 있는 일이오?”
“물론입니다. 무림과 상관없는 청해의 부족민들이 흘리는 피가 많다면 결국 지금 금과 송 두 나라뿐만 아니라 중원 땅에 사는 사람들에겐 기나긴 업보로 남을 것이고 이 또한 첨예한 반목으로 이어질 한 가지 원인이 될 것입니다. 금나라도 그런 확전은 경계하고 있고, 저희 창천맹도 무림끼리의 전쟁으로 그치길 바랄 뿐입니다. 게다가 저희가 파악하기로 지금 난주성에서 전쟁 중인 군대를 제외하면 이곳이 마지막 남은 일반군이라 여겨집니다만, ……의미 없는 희생은 되도록 줄이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이곳 침투도 그런 의도였으니까요.”
노건문은 진도건의 제안이 신뢰할 만하다고 여겼다.
그의 말마따나 의도성이 지금의 제안과 함께 분명 일관된 맥락 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장들과 의논할 시간을 주시오.”
“물론입니다. 합리적인 결론을 기대하겠습니다.”
노건문이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부대 사이로 돌아갔다. 그리고 곧 천인장, 백인장들을 불러 모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의 회의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천마신교에 대한 호의는 둘째치고 이곳에 얼마간 주둔하면서 사실상 사기는 떨어진 상황이라 전쟁을 원하는 자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지금 북정진엔 눈치를 볼 만한 적룡단도 모두 죽고 없다는 것이 그들이 의견을 자유롭게 분출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 된 상황이었다.
노건문이 다시 진도건 앞에 돌아왔다.
“얘기하기 전에 먼저…… 이곳의 보급물자들은 어쩔 셈이오?”
“산맥을 넘기에는 너무 짐이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도 욕심부릴 생각은 없소. 그러나 곧장 산맥을 넘어 부족으로 돌아가는 것도 좋지만, 차라리 산맥에 숨어서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이동하는 게 낫지 않겠냐는 의견도 있어서 말이오. 부족에게 가져다주고 싶어 하는 자들도 있고…….”
“이곳의 물자가 우리 아군에게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억지로 탐낼 생각은 없습니다. 필요한 만큼 가져가십시오.”
“좋소. 제안한 대로 군을 해산시키겠소. 이틀의 말미를 주면 해산 준비를 마치도록 하겠소.”
“좋은 결정을 내려주셨습니다.”
진도건이 미소로 화답했다.
노건문은 바로 포위를 풀고 각자 파오와 막사로 돌아가게끔 지시했다. 이미 군에도 그 같은 결정이 퍼져있어서 모두 순순히 물러나는 모습이었다. 오히려 전쟁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이 점차 전염되듯 퍼져나가는 형국이었다.
포위가 풀리면서 청해군이 해산 준비에 몰두하기 시작하자 혈랑대나 황검대 모두 비로소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도 청해군이 완전히 해산할 때까지는 감시할 필요가 있었기에 적룡단이 차지했던 막사 등을 수리하고 시체들을 치우는 등의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청해군도 일손을 보태면서 장내 정리에 속도가 붙고 있었다.
진도건 일행을 포함해 이혁성, 류단아 등 집단의 수장들은 모여서 이 작전에 대한 감상을 풀고 있었다.
“자네, 여기까지 예상하고 들어왔는가?”
“청해군의 해산 말입니까? 당연합니다. 어차피 조태상군에 합류할 걸 기대할 수는 없었습니다. 금나라가 여진이 세운 나라지만, 군사 대부분은 한족들이니 쉽게 섞일 리 없겠지요. 또 이 군을 별동대로 지휘하기엔 역량도 부족해 보이고요. 그럼 차라리 해산을 권유하는 게 맞습니다.”
“허허허, 자네는 참, 사람을 여러 번 놀라게 하는군. 그런 생각을 할 만한 여유가 없었을 것 같았는데 말이야.”
안효철만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니었다.
그저 50여 명의 무림인과 200여 기에 불과한 혈랑대라는 전력을 가지고 단 하나의 사망자도 내지 않은 채 천 명의 적룡단 전멸과 일만오천의 청해군 해산이라는 말도 안 되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천마신교와 창천맹, 서하군과 금군이 벌이는 작금의 전장에서 공적을 논한다면 무조건 1순위로 거론될 대첩(大捷)이었다.
하지만, 안효철처럼 작전 전반에 걸친 통찰력에 감탄하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북정진에 진입하기 직전부터 보았던 자기 주위로 펼쳐졌던 광경들은 생애 전체를 두고도 잊지 못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대체 그 모래폭풍은 뭔가? 그걸 불러오겠다고 한 말도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정말로 해낸 걸 보고는 말도 안 나오더군.”
“그 속에서 폭풍의 영향을 받지 않은 채로 싸울 수 있었던 상황도 말이 안 되죠. 너 정말 이 정도였니? 비무제에선 이 정도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대체 3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많은 일이 있었지. 제가 생각해도 일반적이진 않습니다. 지난 3년이 불운했던 걸까요, 아니면 운이 좋았던 걸까요? 그도 아니면 저주를 받은 걸까요?”
진도건이 쓴웃음을 지으며 여희선에게 대답하곤 다시 이혁성에게는 물음을 남겼다.
그것이 다른 사람이 듣기엔 진도건 자신에게 묻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혈마가 곧장 반응했다.
“이 혈마의 축복이요, 네 스승의 유산 아니겠느냐? 운이니, 저주니 살아있는 이 혈마와 선사(先師)가 모두 듣기에 섭섭할 말이다, 인간아.”
“그런가?”
그 반문은 아주 조용히 읊조렸다.
무공과 마공.
반선과 혈마.
그로 인한 외견과 성정의 변화.
지난 3, 4년간 그가 품어야만 했던 모든 것들은 풍파라고 말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사람은 모진 풍파를 겪으며 단련이 된다곤 하지만, 이미 상식의 기준을 한참 벗어난 걸 자신도 느낀다.
모든 기준을 강호 무림에 비추어 봐도 말이다.
“그동안 무례하게 굴었던 걸 용서하세요. 저는 정말 당신이 텡그리의 현신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반말로 대꾸하던 류단아가 그를 대하는 눈빛과 말투도 바뀌어버렸다. 그녀는 내뱉은 말과 다르게 정말로 진도건을 바라보면서 텡그리의 현신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건 호주골이나 조위발도 마찬가지였다.
빌게포첸이 얘기한 ‘계시를 따라 걷는 자’ 따위로는 형언할 수 없는 존재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이혁성과 여희선도 조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사람을 신적인 존재처럼 여기는 일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불교의 석가모니, 도교의 태상노군이 그러했고 촉한의 관운장도 관성제군(關聖帝君)으로 숭배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모두 그들의 사후(死後)에 추존자들에 의해 또는 종교적 배경 위에 놓고 구술하면서 신격화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사막 부족의 여인에겐 당장의 현신으로 느껴지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류단아가 방금 한 말로 인해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진도건이 정말 무언가의 현신처럼 또는 그 자체의 신적 존재처럼 여겨지는 어떠한 허상이 덧씌워지는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다.
허상에 불과한 견지(見地)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실체적인 존재로 인해 부정할 수도 없는 그런 현실에 처한 것이다.
“……그럼 다음 단계의 움직임은 어떻게 가져갈 것인지 의논해보세. 난주성 전투가 언제 어떤 결과로 끝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들의 경우는 그 이후의 상황들까지 고려해서 움직일 필요가 있어.”
“아직 적룡단 외에는 천마신교의 전력이 사실상 후퇴해 있기에 난주성 전투는 승전으로 끝맺을 것 같습니다만, 적군이 성내에서 농성하기로 했다면 가까운 시일 내로 끝나진 않을 겁니다.”
“시간을 번다는 느낌이로군. 왜지?”
“……전력이 분산되어 있겠지요. 만약 사천 삼정이 마교 손에 무너졌다면 우리가 서하의 상황에 개입할 일도, 전선이 감숙의 비단길 위로만 구축되지도 않았을 테니까 말이죠. 그날 성도에서 패했다면 삼면 합공으로 천수진창의 방어선은 뚫려서 관중이 함락되고 금나라도 군사를 일으키지 않을 수 없게 됐을 겁니다. 그럼 장강이남의 송도 군사를 일으킬 것이고……, 대전쟁이 되는 것이죠.”
“사천을 마교 전력의 거점, 서하를 군사 전력의 거점으로 삼으려는 계획이었던 셈이군.”
“대단한 발상이야. 특히 서하 황실을 볼모로 잡으려 했던 건 그 야심이 무림 정벌이 아니라 제국 건설에 있다고 봐도 될 정도로 말이야.”
안효철과 진도건의 문답을 가만히 듣고 있던 서파파가 툭 말을 던졌다. 그리고 그 말에 대해 이젠 놀라거나 부정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천마신교의 교주 단지운이 꿈꾸었던 건 마도라는 대의가 관통하는 통일제국의 황제가 되는 일이란 걸 말이다.
그 허망한 꿈처럼 들리는 이야기조차 천마신교와 구주마종이라는 강력한 힘을 등에 업은 만큼 위협적이라는 건 분명한 현실이었으니 창천맹이 반격의 공세를 펼치는 것도, 금 황실이 예민하게 반응하여 무림의 등을 떠미는 것도 다 그 때문이었다.
어찌 보면 창천맹으로선 전세 역전을 이룰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셈이었다.
금을 상대로 확전시키려는 의도를 서하 증원군을 차단함으로써 저지시켰으며 천마신교의 교두보 역할을 했을 사천 무림을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반격의 때가 다가왔음을 느끼고 진도건과 이혁성은 다시 나누어져 각자의 역할을 논하였다.
이혁성은 적룡단의 숨통을 끊을 숨은 비수가 될 것이며, 진도건은 안효철과 함께 적진의 심장부로 전진해나갈 것이다.
다시 그렇게 시작하기까지 청해군 해산이 진행될 이틀은 간만의 휴식이라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