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화 – 제60장. 모종의 움직임들 (1)
“드, 들어봐! 나도 마웅패가 시켜서 한 거라니까? 씨발! 나라고 족장을 죽이고 싶었겠냐고?”
손발이 꽁꽁 묶인 채로 무릎을 꿇고서는 절규하듯 토로하는 량견의 눈가에 눈물까지 맺혔다.
그 생존을 갈망하는 몸부림을 내려다보는 류단아의 얼굴에 경멸스럽다는 감정이 표정으로 드러났다.
분노가 치밀어 올라서는 화를 내기보단 되려 조소가 흘러나온다.
“크큭! 그래, 맞아. 시켜서 한 일이겠지. 적룡단이 되고 싶어 갔을 뿐이지 그런 요구를 할 줄은 몰랐을 거고. 그렇지?”
“그, 그래! 맞아! 생각해봐! 모극인 내가 명령을 듣지 않았다면 그때 적룡단에 들어간 아랑대원들 모두 다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어떻게 이들을 죽게 놔둘 수 있겠어?”
“그래서 아랑대도 아닌 부족원들을 그렇게 도륙했니?”
“이 씨팔! 거기엔 내 가족들도 있었다고!”
량견이 부들부들 떨다 못해 몸부림치면서 격정을 토해내었다.
아랑대가 세를 급격하게 불렸을 당시 가입했던 자들 상당수가 초닌소유 부족에서 가족까지 이루며 정착한 사람들이 많았다. 량견도 그중 하나였고, 그의 가족도 독고양사를 죽인 날 같이 희생된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과연 그 말이 지금 남아있는 혈랑대들에게 통할 수 있을까?
“너흰 희생을 선택했고, 우린 강요당했다. 족장을 죽이고 자기 가족까지 죽음으로 몰아넣으면서 배신하기로 했다면 너흰 우릴 단 한 명도 살려둬선 안 됐어! 네놈들은 그런 우릴 조롱하고 깔보기까지 했어! 설마 그것까지 잊지 않았겠지? 그 행동까지도 마웅패가 시켜서 한 거라고 할 셈이냐?”
류단아가 으르렁거리며 일침을 놓자 량견의 눈빛이 급격하게 흔들렸다.
눈알을 굴려 주변 눈치를 살피는데 그를 노려보는 혈랑대의 눈들이 류단아와 다르지 않았다.
슥!
류단아가 돌아서서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울분이 담긴 목소리로 크게 외치기 시작했다.
“하하하하! 이 배신자의 변명을 듣고 마음이 흔들린 자 있나? 족장을 잃고 가족을 잃은 우리의 슬픔과 분노를 위로받은 사람이 있나?”
“없습니다!”
“죽여버려!”
“개 같은 자식!”
분노에 차서 쏟아지는 호응들.
류단아의 두 눈이 희번덕거리도록 크게 뜨고 조소를 한껏 담도록 입을 활짝 벌려 웃으며 목청을 더욱 높였다.
“나는 량견을 살려줄 것이다. 대신 우리와 같은 하늘을 보지 못하도록 눈알을 파내어 독수리의 먹이로 던져줄 것이며, 우리를 조롱하고 모욕하던 혓바닥을 잘라 돼지먹이로 줄 것이다! 사지는 잘라내서 말똥에 파묻어 썩게 할 것이며 자른 부위는 불로 지져서 죽을 때까지 기어 다니게 할 것이다! 그렇게 살려줄 것이야! 이 형벌에 불만 있는 자는 당장 손들고 나오너라!”
“아, 안 돼! 씨팔! 류단아, 이 찢어 죽일 잔악한 년아!”
우와아아아아!
만 명이 외치듯 내지르는 혈랑대의 함성 아래로 량견의 절규가 파묻힌다.
류단아는 더 지체하지 않았다.
바로 돌아서서는 펄떡거리면서 도망치려는 량견의 위에 올라타 온몸으로 짓눌렀다.
떨쳐내고 싶어도 이미 안효철에게 점혈 당하여 기를 운기할 수 없는 처지였으니 그의 운명이 류단아의 손에 꼼짝없이 떨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형 집행이 시작되었다.
“끄아아악! 끄아아! 살려……. 읍, 읍읍! 으으으으읍!”
그 광경은 안효철, 이혁성이나 여희선, 황검당 대부분 고개를 돌릴 정도로 끔찍했다. 직전까지 그렇게 피를 뒤집어쓰며 적룡단과 싸우고 죽이던 사람들조차 보기 힘든 것이다.
시간을 들여서 직접 거론한 형벌을 실천에 옮기는 류단아는 이미 가장 격렬하게 싸웠던 진도건, 안효철, 이혁성 등보다 더 많은 피를 전면에 뒤집어쓰게 되었다. 그리고 죽음보다 더한 고통에 몸부림치는 량견을 부릅뜬 눈으로 모두 담아내고 있었다.
진도건의 시선에도 끔찍하긴 매한가지였지만, 다른 사람들보다는 더 오래 그 모습을 지켜보고 나서야 고개를 돌렸다.
호주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감정적 공감이 있었던 점도 그렇지만, 혈마 때문에 그런 심리적 자극에 내성이 생긴 이유도 있었다.
복수의 형이 집행되는 중, 혈랑대는 이를 지켜보면서 동시에 그들을 에워싼 군사들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시점부터 조금씩 서로 거리를 벌리기 시작하자 바깥쪽에서도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볼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웅성웅성!
이미 혈랑대 주위로 즐비한 적룡단의 피와 시체만으로도 접근을 불허할 정도였는데, 류단아가 량견에게 가하는 행위는 전면에 선 일부 군사들이 기겁하며 구토하기까지 했다.
치이익…….
“……읍! 으그그그그극!”
마지막에 사지를 잘라내고 남은 팔꿈치와 무릎들에 출혈을 멈추게 하려고 횃불로 지지는 장면은 그 잔인함의 끝이었다.
“우웩!”
여희선은 끝끝내 참지 못하고 구토했다. 그녀뿐만 아니라 황검당 몇몇도 비슷한 꼴이었다.
이혁성은 그런 그녀와 당원들을 데리고 혈랑대를 지나쳐 나갔다. 그러면서 군사들이 포위한 상황을 볼 수 있었다.
‘이것도 문제로군. 모래폭풍이 지나고 나서 보니 적룡단이 전멸했는데, 얼떨결에 자기들은 침입한 적을 포위하고 있는 모양새니 말이야.’
그나마 다행인 건 군사들에게서 공격할 낌새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미 적룡단 격멸에 기력을 상당히 소모한 탓에 눈앞의 군사들이 아무리 무공을 모르는 집단이라고 하더라도 일만오천의 숫자는 대단히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오늘은 검에 피를 더 묻히고 싶지는 않군.’
그는 계속 손으로 여희선의 등을 쓸어주고만 있었는데, 이만큼 괴로워하는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한편 과거 전장에서 은퇴해서 여생을 보내다가 적룡단에 의해 끌려 나와 청해군(靑海軍) 지휘관을 맡게 된 노건문(老建文)은 대단히 난감했다.
어떻게 할지 지휘관으로서 결정해달라고 백인장들이 재촉했기 때문이었다.
‘수적 우위는 분명한데……, 내 안위를 장담할 수 없는 게 문제지.’
자그마치 천 명의 적룡단을 전멸시킨 무림인들이었다. 비록 대다수가 그저 사막의 흉포한 마적단 수준인 혈랑대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노건문은 그들 사이에 말도 못 할 엄청난 절대 고수가 섞여 있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혈랑대주 류단아가 북정진 군사 총책임자이기도 했던 량견을 그렇게 만든 걸 군사들이 두 눈으로 봐버렸다.
이미 그 광경을 담은 이야기가 빠르게 후열까지 전파되면서 사기가 크게 떨어진 게 눈에 보였다.
“일단 대화를 해보자. 모래폭풍이 불 때 쳐들어온 것도 그렇고, 적룡단만 노린 것도 그렇고, 보통 인간들이 아니다.”
“하지만, 전투를 피하면 적룡단주가 그냥 넘어가겠습니까?”
“이미 여기 적룡단원이 모두 죽었는데 무사히 넘어갈 수 있겠느냐?”
“크흠…….”
노건문의 말이 하등 틀린 것이 없어서 백부장들이 침음성을 삼키며 입을 다물었다.
“……노 장군님의 결정을 따르겠습니다.”
아무리 청해라는 이름으로 묶여있다고 한들 청해 초원의 온갖 부족들을 수탈하듯 장정들을 징발해가 꾸린 군이기에 결속력이 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지휘관을 잃어버리면 오합지졸이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경험 많은 노건문이 이 군을 지휘하는 게 다행이라는 건 백부장이나 천부장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노건문이 말에 탄 채로 군사들 사이에서 나왔다. 그리고 멈춰서서 혈랑대쪽을 바라보며 입을 여니 그 방향이 이혁성 쪽이었다.
“본인은 이 청해군 총책임자인 장군 노건문이오. 그쪽 책임자와 대화를 나누고 싶소.”
이혁성이 고개를 뒤로 돌려 혈랑대 너머를 보았다. 안효철과 진도건의 모습이 바로 보였는데 역시 이 무리의 책임자는 안효철보단 진도건이란 생각이 들었다.
“진도건을 불러주게.”
혈랑대를 통해 그의 말이 전파되어 진도건에게 닿았다. 그리고 그가 안효철과 함께 노건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에선 류단아가 몸에 묻은 피를 닦아내면서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노건문은 류단아의 모습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로선 멀리 떨어져서 있었기에 눈으로 모두 본 건 아니었지만, 흘러들어오는 얘기로 류단아가 어떤 행각을 벌였는지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의 모습을 계속해서 눈에 담고 있기 어려울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서둘러 안효철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겉으로 보이는 연배를 생각하면 무림인들의 수장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본관은 청해군 지휘관 노건문이오. 침입자로서 당장 우리 군과 싸울 생각이 없다면 통성명부터 하는 게 좋겠소만.”
안효철이 노건문과 눈이 마주 치자 진도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진도건이 앞으로 나서자 노건문의 눈이 좀 더 크게 떠졌다.
“진도건입니다. 귀관이 정말 저 군사들의 지휘관입니까?”
“이 진영 전체 책임자는 방금 혈랑대주의 손에 당한 량견이었지만, 이만한 군사들이 적룡단처럼 싸울 수는 없을 테니 나 같은 은퇴한 노장을 데려다가 지휘를 맡긴 것이라오. 그런데 당신이 책임자요?”
“그렇습니다. 귀관은 어느 나라 장군이셨습니까?”
“대백고국이오. 금이나 송은 서하라고 부르는 그곳이오.”
진도건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왜 웃는 것이오?”
“아니오, 마침 서하에서 겪었던 일이 떠올라서 그랬소.”
진도건은 운이 좋다고 생각하면서도 굳이 얼마 전 흥경에서 있었던 사건을 들먹일 생각은 없었다. 노건문이 서하 출신이라고 해도 다른 장수들이나 군사들이 서하 출신이란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장군께선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먼저 말씀하십시오.”
노건문은 말을 꺼내기에 앞서서 먼저 심호흡했다.
‘처음엔 피를 뒤집어써서 그런 줄 알았는데 계속 보고 있으니 머리카락이나 눈동자가 원래 피 색깔을 띠고 있구나. 그야말로 귀신 같은 남자다…….’
진도건의 특징적인 모습이 이제야 눈에 들어오자 가슴이 쿵쿵거리며 몹시 뛰었기 때문이었다.
“후우……. 일단 이런 상황에 대해 몹시 유감이오. 보다시피 우리는 징집된 일반병들이오. 물론 다들 전쟁을 치를 용기 정도는 가진 초원의 장정들이지만, 어찌 하늘을 나는 무림인들을 상대할 수 있겠소. 다만 우린 일만오천의 대군세고 당신들은 오백도 되지 않아 보이오. 전투를 벌인다 한들 귀공들은 살아나가기 어려울 수 있겠지만, 우리도 분명 엄청나게 많이 죽을 것이오. 그렇다면 솔직히 본인으로서는 피하고 싶은 싸움이라오.”
“싸움을 피하고 싶다는 말입니까?”
“그렇소. 보아하니 적룡단을 전멸시키는 상황 속에서 우리 청해군은 건드리지 않았는데, 만약 우리 군까지 노리지 않았단 게 맞다면 본관으로선 차라리 그대들이 나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오.”
“그거 괜찮은 생각이군요.”
진도건이 미소를 띠며 대답하자 시종일관 긴장한 표정이었던 노건문의 얼굴이 조금 풀어지며 화색이 돌았다.
“그, 그럼 지금 바로 나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겠소.”
“거절하겠습니다.”
진도건은 고개를 저었다. 미소 띤 얼굴이 그대로이니 그 속셈을 알아차리기 어려운 노건문은 다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무, 무슨 뜻이오? 본관의 제안이 괜찮다고 하면서 거절하는 건…….”
“그보다 더 최선의 선택지를 장군께 드리고자 합니다.”
“최, 최선? ……선택지……?”
“그렇습니다. 최선의…… 선택지.”
진도건의 말이 잠깐 길어지면서 가만히 얘기들을 듣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뭔가 다른 낌새였기 때문이었다.
진도건의 시선이 노건문에게서 비스듬히 아래로 움직였다. 그렇게 군사들 사이 한 지점으로 잠깐 시선을 던져 뚫어지게 쳐다보는데 그 방향에 서 있던 군사들이 바짝 긴장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다 진도건이 피식 웃고는 다시 노건문을 쳐다보았다.
“왜 그러시오?”
“훗, 아닙니다. 그럼 제안하겠습니다.”
“얘기해보시오.”
“첫 번째 제안입니다. 저희에게 합류하여 적룡단의 후방을 공격하는 작전을 맡아주십시오.”
“뭐, 뭣……?”
뜻밖의 제안에 노건문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그 말을 들은 군사들 사이로 순식간에 동요가 이는 것은 물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