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9화 – 제59장. 그는 천재(天災)로 돌아왔다 (4)
단원진의 뒤를 따라 산문을 넘어서던 단지운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권영서가 기다리고 있었는지 두 손을 모은 채 산문을 나오는 단씨 부자를 향해 허리를 숙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도 단지운의 뒤에 줄을 서며 앞장서는 단원진을 따라 흑궁의 제육천마라대전으로 들어갔다.
단원진과 단지운이 안으로 들어서자 뒤따르던 권영서는 잠시 멈춰서서 문을 지키고 있는 마군위들을 바라보았다.
“문을 닫거라.”
“예.”
권영서까지 안에 들어서자 마군위들은 흑궁의 문을 당기기 시작했다.
쿠구구궁……!
굳이 파순대좌까지 가지 않고 두 부자가 대전의 중간쯤에서 서로 마주 보고 섰다. 그리고 권영서는 그들이 있는 지점에서 옆으로 비스듬히 물러나 서서 두 손을 모으고 있었다.
“하실 말씀이 무엇입니까?”
“네가 이 아비에게 섭섭한 게 많겠구나.”
“아들 된 도리로서 아버지의 일을 모두 알 필요는 없겠지만, 적어도 본교의 전력을 움직이고 싶으시다면 교주인 절 거치는 게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이치에 맞는 방법 아니겠습니까?”
“허허허! 이 아비가 천산에만 처박혀 살다 보니 절차의 중요성을 망각한 모양이구나. 교주에겐 유감인 일이지만, 앞으로 그런 일은 더 없을 것이니 너무 섭섭지 말아라.”
단지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요새 주변에서 의심받을 짓을 하도 많이 하는 걸 보아서인지 방금 말씀도 이상하게 들리는군요. 앞으로 그런 일은 더 없을 것이라니……, 무슨 뜻입니까?”
단원진이 웃음을 흘렸다.
“후후후……! 아까 용암비동에 관해 물었었지, 기능하지 않는 것이냐고?”
“그렇습니다.”
“으음, 내가 거기에 다시 갈 일이 없을 테니 기능하지 않는다고 보는 게 맞겠지만, 지금부터 그곳을 대체하기 위해 움직일 테니 필요하다면 그곳으로 날 다시 찾으면 될 것이다.”
“거기가 어디입니까?”
“기억하느냐? 이곳에서 서북방으로 칠, 팔백여 리 분지 너머에 있는 ‘수무하크’를 말이다.”
단지운이 십대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서 그 장소의 이름과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마귀성(魔鬼城) 말입니까?”
‘수무하크’는 ‘마귀’를 뜻하는 몽골어로 단원진이 얘기하는 장소는 아단이라 불리는 풍화된 사암들이 광범위하게 펼쳐진 아단지모(雅丹地貌)가 있는 곳이었다. 바람이 거세게 부는 날이면 기괴하게 생긴 사암들 사이로 귀곡성이 울려 퍼지는데 그 근처를 지나던 몽골족이 그걸 듣고 마귀가 사는 성이라고 두려워하며 수무하크라 이름 붙인 곳이었다.
단지운이 열여덟 살일 때, 단원진은 그를 데리고 그곳에 간 적이 한 번 있었다. 그리고 문득 그때 단원진이 늘어놓았던 이야기 가운데 한 구절이 불현듯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왜 이곳을 수무하크, 마귀성이라고 부르는 줄 아느냐? ……클클클! 당연히 모르겠지. 북으로는 알타이산맥이, 남으로는 천산산맥이 장벽이 되어서 나갈 길을 막으니 천지간의 기운조차 분지를 맴돌 수밖에 없게 된단다. 그렇게 원혼들이 바람 따라 떠돌다가 산세에 막혀서는 다시 중간지대로 돌아가 결국 이곳에 이끌리는 것이다. 바람이 아무리 귀신 소리를 흉내 낸다 한들 사람의 접근을 막을 수 없는 법이다. 그런데 이곳엔 유독 발길이 닿지 않는 건 그렇게 모인 원혼이 다시 흩어지는 것보다 뭉쳐지는 경우가 많아 귀기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언젠가 마도대의를 위하여 중히 쓰일 곳이다. 이곳에 잠재된 기운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그런 곳이니까 말이야. 잘 기억해두도록 하여라.”
단지운의 미간이 좁혀졌다.
“언젠가 생각이 나서 홀로 한 번 가본 적이 있었지만, 그때도 제겐 평범한 아단지모에 불과했습니다. 정녕 거기에 뭔가가 있는 것입니까?”
“물론이다. 네가 느끼지 못한 것은 네게 환도의 힘이 없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께선 전해주셨던 그 환도의 힘을 아버지는 제게 전해주지 않으셨지요. 무엇을 그리 욕심내십니까? 영생의 비밀이라도 있는 겁니까?”
“뭐, 영생? ……크하하하하핫!”
듣기에 뚱딴지같은 소리에 단원진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고, 그 웃음소리에 단지운의 미간이 더 찌푸려졌다.
단원진은 이해하지 못해서 웃어버렸지만, 단지운으로서는 당연히 어떤 의문이던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천마신공과 천마성을 전수하고 급성장할 수 있도록 공력까지 전수했던 단원진이 왜 환도의 힘은 전수하지 않았는지,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면서 단독으로 관리해왔던 천산의 용암비동을 하필 지금 버리고서 새로운 곳을 만들겠다고 하는 건지.
사천 무림에서 싸움을 치르고 돌아온 뒤로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쉬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꽤 마주쳐왔기에 당연히 자신의 아버지가 하는 일에 대해 의문부호를 표시하는 것이었다.
그때 단원진이 희미한 미소와 더불어 그윽한 눈빛으로 단지운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무슨 감정을 담아낸 표정일까?
“아들아, 용암비동은 마귀성으로 대체될 것이다. 왜냐하면 여덟 개의 마정은 모두 나의 환도 안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단원진의 말이 끝나는 순간, 그의 발아래로 기하학 문양을 품은 원형진이 소환되었다. 그리고 그 황금빛 광휘 위로 여덟 개의 결정이 원형진의 새겨진 지면 위에서 솟아올라 둥둥 떠올랐다.
각기 다른 빛깔과 다른 성질을 나타낸 여덟 개의 결정은 오행팔괘와 같은 자연적인 법칙 위에 존재하는 속성 같은 것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기의 결정이었다.
그것은 잉태된 생명이었다.
인마(人魔)의 수정체(受精體)이며, 아주 강력한 유전인자(遺傳因子)였다.
두근두근두근……!
그 심장과 같은 고동과 혼의 맥동이 단지운의 영혼을 때리고 있었다.
“이제 알겠느냐? 중요한 건 ‘어디’가 아니라 어디에 ‘누가’ 있느냐다.”
“……그럼 왜 하필 용암비동이었습니까?”
“……천산 박격달봉 어딘가에 마의 본원(本原)이, 중핵(中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대답에 단지운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 또한 그가 천산에서 느끼지 못한 것, 단원진만이 느끼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라는 판단과 의심이 동시에 든다.
“지금은 없는 것입니까?”
“휘몰아치는 마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중핵을 찾기는 어려운 법. 그런데 지금 힘이 꺼져가고 있다. 좌우분간할 수 있는 수준이 되면 찾게 될 수도 있겠지만, 그때가 되면 또 무슨 소용이겠느냐? 이미 여덟 종류나 되는 마정이 확보된 데다가 전시상황까지 고려하면 이 아비로서도 유업(遺業)을 미룰 수 없었느니라.”
“유업……?”
“이 아비는 네 할아버지이신 천마조사로부터 천마신공과 천마성, 환도의 힘 모두를 물려받았지만, 그것은 모두 불완전했다. 내공의 완전한 이양은 불가능하다는 말처럼 천마의 힘 또한 그러했지. 그래서 천마조사께서는 아비에게 유업을 남기셨느니라. 천마의 마도가 영속할 수 있도록 만마본원이 아닌 만마일체(萬魔一體)가 되어야 한다고 말이야.”
단지운은 단원진의 이야기에 상당한 충격을 받고 있었다.
그가 의심했던 아버지는 상당히 호소력 있는 표정과 목울림으로 이야기하고 있었고 그 내용의 일맥은 분명히 그를 강력하게 설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그 말에 완전히 설득되지 않는 이유는 작금에 품은 의심의 근본적인 배경을 전부 설명해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그것이 할아버지께서 남기신 유업이었다면 어째서 처음부터 제게 얘기해주지 않았습니까?”
단지운이 조금은 침울해지고 또 조금은 분노하면서 조용한 목소리로 아버지를 바라보며 물었다.
* * * *
혈랑대와 황검당은 대협곡 사이사이를 조용하면서도 빠르게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해가 서산으로 기울어서 서서히 황혼에 하늘이 물들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어느새 용수산 북정을 향하여 바로 올라갈 수 있는 능선까지 그 사이로 두 개의 언덕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진도건이 대열에서 이탈한 지 이틀째 되던 날이었다.
적룡단의 병참기지 북정진(北頂鎭)의 대협곡을 향한 경계병 규모는 예전보다 훨씬 줄어들어 있었다.
당장 전선이 난주성에서의 농성으로 잠시 교착상태에 이른 상황에서 군사를 동반한 이동이라면 약 나흘에서 닷새 정도 걸릴 거리였기 때문이었다. 또 날씨가 추워지고 있는 마당에 보급물자를 절약하기 위해 겸사겸사 경계 인원을 줄인 상황이었다.
그렇게 안효철의 감각을 이용하여 줄어든 경계병들의 시야를 피해서 좁은 협곡들만 골라 통과해왔지만, 이제부터는 그럴 수 없는 지역이었기에 잠시 대기하고 있었다.
“이제 어찌합니까?”
류단아는 어느새 안효철에게 그리고 다른 연장자로 보이는 무림인들에게도 존칭하는 어투를 쓰고 있었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경계병들의 기척을 감지하고 그들의 시야를 피해 이곳까지 들어온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이라면 당장 적병의 눈에 들진 않을 테니 내가 잠시 후방에 갔다 오겠네.”
그들이 선 곳은 양쪽 가까이에 절벽이 높게 서 있어서 고작 다섯 명 정도 나란히 서면 꽉 찰 정도의 좁은 협로였다. 만약 바로 위에 매복병이 있어서 그들을 발견하고 절벽 끄트머리를 무너뜨렸다면 꼼짝없이 매몰되기 쉬운 그런 위험한 곳이었다.
당연히 지금 어떤 누구도 이곳이 위험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안효철이 위험이 없다는 걸 보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오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진도건을 잘 데려와 주십시오.”
이혁성이 바로 대답했다.
아무리 일직선으로 오고 싶어도 그 사이로 즐비한 언덕과 협곡 등으로 인해 이미 그 방향은 많이 틀어져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호언(豪言)했던 모래폭풍이 정말로 실현될지는 여전히 의문이었지만, 어쨌든 이 작전의 성사를 결정하는 건 진도건의 몫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안효철은 바로 발을 떼지 못하였다.
멀리 북정진에서부터 다수의 기척 사이에 혼란이 이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잠깐만.”
안효철은 그렇게 말하고는 양쪽 절벽을 번갈아 박차면서 솟아올라 꼭대기로 올라갔다.
앞을 가로막는 절벽이 사라지고 탁 트인 하늘이 드러나자 북정진의 혼란이 조금 더 명확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경계병들이 있는 위치에서도 그동안 정적이었던 기척에 요동이 발생하고 있었다.
‘설마……!’
안효철은 설마하는 심정으로 후방을 향해 몸을 틀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 허탈한 웃음이 실리면서 동시에 희열에 의한 소름으로 짓눌린 솜털이 탈혼갑을 뚫고 서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저 북쪽 하늘로 시커먼 어둠을 품은 폭풍의 모래 구름이 아단대협곡 전체를 아우르면서 서서히 접근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으허허허! 진도건, 자넨 정말 믿을 수 없는 인간일세!’
조금 더 기다리자 모래폭풍이 눈에 띄게 가까워졌음이 느껴졌다. 그리고 보통의 시력으로는 모래폭풍이 품은 혼돈에 사로잡혀서 찾을 수 없을, 모래폭풍을 등에 업고 능선들을 따라 나는 듯 달리는 진도건을 보자마자 그의 귀로 전음이 꽂혔다.
[“종심 돌격입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안효철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모두가 들릴 만큼 외쳤다.
“종심 돌격!”
그 한마디에 잠시 긴장이 풀어졌던 이들도 눈빛이 돌변했다. 안효철의 그 외침 한 마디에 담긴 의미가 너무도 명확했기 때문이었다.
“크하하핫! 너는 진짜 미친놈이야! 대단해! 아주 대단해! 씨팔, 아주 미쳤어!”
요란을 떨어대는 혈마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쉼 없이 울려댔다.
그 때문에 절로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입꼬리만큼은 말려 올라갈 정도로 만족감이 드러나 있었다.
진도건의 뒤를 바짝 쫓아오는 사막의 모래폭풍 크기는 초기에 구상하고 기대했던 적당한 수준의 규모를 훨씬 뛰어넘은 상태였다.
진도건은 선인의 바람으로 자기 주변을 채워나갔는데 두 눈으로 물건을 선명하게 식별할 정도의 넓은 시야범위 속에서도 바람에 부유하는 모래의 양이 생각보다 적다는 것을 느꼈다. 그건 일대가 단순한 모래사막이 아닌 산지와 가까운 사암지대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곧장 더 멀리 이동했다. 그리고 그가 처음 바람을 일으켰던 곳부터 지나온 길목 모두를 대상으로 공간지각력을 유지, 확장해나갔다. 그렇게 반나절 이상을 달린 순간, 그가 지나온 지역엔 거대한 모래 소용돌이가 일어나고 있었다.
진도건은 그 소용돌이를 이용하여 점차 권역을 넓혀갔다.
아단대협곡부터 꽤 멀리까지 이동한 상태에서 어느덧 모래폭풍은 한 도시를 휩쓸고 지나갈 수 있는 크기만큼 성장해 있었다.
그 뒤로는 전진할 방향만 만들어주면 되는 일이었다.
아니, 이미 대기 자체가 북쪽의 냉기가 남쪽의 열기를 밀어내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모래폭풍을 아단대협곡으로 이끄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모래폭풍은 재차 지나는 길의 모래까지 퍼 올리면서 일전에 진도건이 만났던 모래폭풍보다 더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게 되었다.
그렇게 마침내 서산 위 황혼까지 가릴 수 있는 어둠을 품을 정도로 거대한 규모의 모래폭풍이 되어 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