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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귀신-318화 (318/432)

318화 – 제59장. 그는 천재(天災)로 돌아왔다 (3)

“교주께선 창천맹주를 높게 평가하시는군요.”

“아아, 상대한 적이 없음에도 최상의 적수가 아닐까 생각한다. 파천무봉이라는 명성을 고려하면 분명하겠지. 난 부디 그가 내 기대만큼 강했으면 좋겠다네. 그 딸의 무공이 기대 이상이었니 그 아비도 아마 내 기대를 충족시켜줄 수 있을 것이야.”

“정파와 사파 간 이간의 틈은 없겠습니까?”

“글쎄, 천무경의 지도력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어서 정파의 수장들도 그를 신뢰하는 상황이라 어찌해 볼 여지가 없다는 게 권 각주의 보고니까 말이야.”

“크흐흐! 그 노인네는 그렇게 넘어갈 게 아니라 이간책의 방법을 어떻게든 찾아서 보고드렸어야 하는 게 맞는데 말입니다.”

권영서와 야마는 연배에 차이가 별로 없어서 젊었을 때는 본격적으로 티격태격하던 사이였다. 그때는 야마의 무공이 더 높음에도 권영서가 무영각주로서 더 중히 쓰이는 것에 대한 불만 때문이지만, 지금의 야마에겐 그런 마음은 별로 없는 듯했다.

“뭐, 그랬으면 더 좋았겠지만. 워낙 냉철한 인사니까.”

문득 종전에 권영서에게 화났던 일이 떠올랐다.

‘잠깐…….’

단지운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그가 권영서에게 화가 났던 것은 천마신교에 속한 부분들 가운데 교주에게 의도적으로 보고되지 않거나 모르게 진행된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 귀책이 부친에게 있으므로 화만 내고 말았는데 지금 그의 성정에 관한 평을 내놓고 보니까 그 냉철함이 어쩌면 다르게 쓰일 수도 있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것이다.

‘빌어먹을…….’

대내외 모든 정보를 총괄하는 무영각주를 의심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조금씩 마음 한구석에 불신의 싹이 트는 걸 빤히 보고만 있어야 하는 그의 심정이란…….

“교주님, 그가 왔습니다.”

그때 야마의 목소리에 단지운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산문을 통과해 걸어오는 구마진과 그 수하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혈마 구마진이 교주님께 인사 올립니다.”

구마진의 인사에 단지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괜찮아 보이는군. 그래, 흡성대법으로 또 몇 놈이나 삼켰느냐?”

“송구합니다.”

구마진이 민망하여 고개를 숙였다.

이미 오기 전에 천산 남쪽 한 오아시스 근처 마을에서 옥에 갇힌 죄인 넷을 받아다가 흡성대법으로 기를 흡수했고, 오로목제에 도착해서는 개방과 하오문의 간자로 파악되어 붙잡힌 무림인 셋을 인계받아 역시 정기를 바닥까지 흡수한 뒤였다.

그래서 마른 모습은 여전했어도 빙첨탑에서 풀렸을 때보단 더 근육에 탄력이, 적안에는 생기가 돌고 있었다.

단지운이 야마를 향해 힐끗 시선을 던지면서 입을 열었다.

“주지와도 인사를 나누지. 네가 마니사에서 출가한 이후로는 첫 만남 아닌가?”

“후후후! 그렇습니다. 혈마가 되었다고 하더니 정말 인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너만큼 야심이 노골적인 녀석은 여전히 없었는데 악착같이 버텨서 나가더니 기어이 출세했구나.”

“하하하, 별말씀을…….”

구마진이 쓴웃음을 지었다.

위타천 스칸다 대에 이르러서 유일하게 마니사의 승복을 벗은 인물이 바로 구마진이었다. 뒤의 흑각수도 본래는 마니사의 마구니였지만, 구마진이 하산할 때 그의 파벌이라는 이유로 함께 하산하게 된 무리였다.

그런 식으로 하산하는 것이 누군가의 시선에는 불공평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파벌을 형성하여 흡성대법을 사용하기 좋은 제물을 확보할 배경을 만든 것도 분명 구마진의 힘이라 할 수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천마신교 창교이래, 마니사 역사상 처음 있었던 일로써 구마진의 그런 야망과 능력은 인정받고 있는 부분이었다.

그와 관련하여 야마는 주지이자 호법으로서 흡성대법으로 사고치고 다니는 구마진을 가장 많이 억눌렀던 장본인이었다.

구마진이 혈마의 지위를 차지했음에도 야마를 부담스러워하는 건 어쩔 수 없이 습성처럼 남아있었다.

“징벌 자체는 별거 아니었겠지만, 지루한 시간을 버티느라 고생했다.”

“대마의도 와서 교주님께서 명하신 혈마 임명을 인정해주고 갔으니 의미가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나?”

“그때 태상교주님도 처음 뵙고 인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단원진의 존재가 자꾸 드러난다. 그리고 역시나 듣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단원진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유변도 대마의로서 나름 자율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권한의 범주가 넓었는데 그런 두 사람이 입을 다물었으니 어쩌면 몰랐던 게 자연스러운 일일 수는 있었다.

빙첨탑에 고립되어 있을 줄 알았더니 뜻밖의 정보를 꺼내놓는 구마진을 보면서 그 뒤에 있는 본래 무영이었어야 할 설매화와 흑각수들까지 함께 인지하게 된다. 그리고 단지운의 시선이 설매화에게 닿았다.

“천축(天竺)의 피를 이은 아이야.”

단지운이 미소를 지으며 부르는데 설매화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예, 교주님께 인사올립니다.”

“그래, 보아하니 네가 구마진의 어여쁜 흑오(黑烏)로구나.”

설매화는 교주의 지엄한 위엄을 감내할 지위가 아니었기에 몹시 떨렸지만, 그가 그녀의 용모를 칭찬하자 조금 안도했다.

하지만, 바로 이어진 물음에는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와 대마의가 얼마 전에 천산에 볼 일이 있다고 하여 궁에서 나가셨는데 잘 들어가셨느냐?”

그녀가 생각하기에 이상한 질문이었다.

그녀가 여전히 무영각의 무영이라면 당연한 질문일 수도 있었지만, 적어도 그녀가 알기로 단지운이 그녀가 현재 무영이 아니란 걸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그건 그녀의 생각일 뿐이었다.

단지운은 설매화가 무영각 출신이란 걸 알고 있었기에 그 같은 역할을 구마진을 위해서 지속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건 그리 어려운 추측이 아니었다.

“그게…….”

그녀로서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태상교주 단원진에 대한 이야기였다. 단지운이 묻는 의도가 완전한 선의에 의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당연히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뭐하느냐? 교주님께서 물으시는데 대답하지 않고.”

야마가 그녀를 재촉했다.

망설이는 그녀를 구한 것은 구마진이었다.

“맞습니다. 두 분께서 천산의 용암비동에 함께 들어가셨다가 후에 태상교주께서 혼자 나가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응?”

구마진의 이야기에 이상한 대목이 있음을 느낀 단지운이 의뭉스럽다는 반응을 내비치는 사이, 설매화는 고마워하기는커녕 동그래진 눈으로 구마진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녀와 눈이 마주쳤음에도 설명을 더하지 않는 구마진의 행동에 더 의아하게 느껴졌다.

“아버지께서 혼자 나가셨다? 그때가 언제더냐?”

“제 징벌이 끝났던 날입니다.”

여전히 용암비동에서 나오는 단원진과 마주쳤던 사실을 밝히지 않은 채로 이야기한다.

“그리고 마침 마정 구축을 위해 오라는 태상교주님의 명령이 있었기에 용암비동을 찾아갔는데 대마의는 보이지 않아서 저도 의아했던 참입니다. 저도 용암비동에 아무도 없어서 마정을 구성하지 못하고 나왔으니 아쉬운 마음이었습니다.”

같은 사실을 교묘하게 비트는 구마진의 얘기에 설매화는 내심 기겁했다.

그녀의 심리적인 변동 때문에 생긴 미세한 신체 반응을 단지운도, 야마도 느꼈다. 그리고 그녀의 반응으로 보아 구마진이 한 말이 거의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용암비동에 들어갔는데 대마의를 찾지 못했다?”

단지운은 구마진의 말속에서 거짓말을 바로 찾지 못했다.

그의 이야기는 맥락상 타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의 말에 거짓이 있음을 밝혀준 것은 뜻밖의 인물이었다.

“크하하하하핫-!”

갑작스럽게 탁한 목소리였지만, 카랑카랑한 웃음소리가 마니사 경내 전체에 쩌렁쩌렁 울렸다. 그에 모두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고 몸을 돌리면서 산문 쪽을 바라보았다.

거기서 단원진이 만면에 웃음 지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그 시선이 구마진에게 닿아있는 걸 본 순간에 거짓말을 한 구마진 뿐만 아니라 설매화나 흑각수 모두 온몸의 털이 곤두설 정도로 오싹한 기분을 느꼈다.

투기나 마기를 발산한 것도 아님에도 구마진 등은 엄청난 중압감이 온몸을 짓누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기분은 마치 대통현에서 혈마종을 상대로 난장을 피웠을 때 단지운이 나타났던 것보다 더한 느낌이었다.

단지운도 눈치가 있었다.

“이들이 아버지를 불편하게 했나 보군요.”

단원진이 아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아아, 그래. 마침 나와 마주쳤었기에 용암비동에 올 필요가 없다고 언질을 주었었는데 말이야, ……그런데 들어갔단 말이지?”

그리고 마지막엔 다시 고개를 돌려 구마진을 노려보았다.

“송구합니다. 다른 구주 신마들이 누린 영광에서 소외됐다고 생각하니 더욱 그 안이 궁금해져서 그랬습니다. 용서하십시오.”

“큭큭큭! 이 뻔뻔한 녀석. 간사하다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만, 주댕이를 잘도 뻔뻔하게 놀리는구나. 그래, 기대할만한 것들이 있었더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흥! 그럴 테지.”

그들의 대화를 듣고 단지운도 별 반응을 하지 않았다.

신마들이 구축해놓은 마정이라는 건 본래 술진을 발동해야 바깥으로 드러나는 법인데 그걸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단원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환도신마도 개입할 수 없는 것이며 단지운이 유일하게 이어받지 못한 능력이기도 했다.

“혈마의 마정은 필요치 않으셨습니까?”

단지운의 물음에 단원진의 시선이 다시 그에게로 향했다.

‘필요치 않았다?’

순간 단원진의 시선에서 벗어난 구마진의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다.

혈마비동에서 마정을 구축하는 작업은 신마들의 회복 또는 힘의 각성을 위한 것이라는 공식적인 정보였고 실제로 대부분 신마가 마정을 구축함으로써 그런 권리를 누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단원진과 단지운 사이의 알 수 없는 알력을 느낀 지금 그 말뜻은 그리 평범하게 들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단원진이 바로 대꾸하지 않고 단지운의 눈빛을 잠깐 뚫어지게 보는 모습은 그 의심에 신빙성을 조금 더 더하는 듯했다.

“……진도건이란 녀석을 잡으면 흡성대법으로 놈의 힘을 취할 수 있을 텐데. 굳이 혈마의 마정을 만들 필요는 또 있느냐? 기왕 교주령으로 혈마의 지위를 내려주었다면 네놈도 그 정도의 증명은 해야지.”

“……태상교주님의 큰 뜻을 헤아리지 못해 송구합니다. 반드시 그렇게 하겠습니다.”

마정을 구성하는 길이 물 건너갔다면 더 큰 힘을 얻기 위해선 그 방법밖에 없었으므로 구마진도 순순히 수긍했다.

‘대마의 유변의 공력을 흡수하는 게 대안일 수 있었는데…….’

그의 생각을 읽은 듯이 단지운도 본론을 꺼내들었다.

“대마의는 어찌하셨습니까?”

“무저갱에 떨어졌다.”

아들의 추궁에 단원진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설마 아버님이 그를 떨어뜨린 것입니까?”

“그래.”

단지운은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대마의 유변이라 하면 천마조사 단용후를 도와 천마신교 창교를 돕기도 하였으며 지금은 교내 흐름에서 이탈하였으나 그가 만든 명천단, 명현단 등의 영약은 안정적인 세력 확장에 크게 이바지했었다. 당연히 주류가 아니게 되었다 할 뿐이지 여전히 주화입마를 걱정하는 자들은 두 영약의 도움을 받는 부류들도 있었다.

공적 기여가 이와 같다면 사적으로도 천마조사와 같은 연배이니 단원진이나 단지운 모두 그만한 예우를 갖춰서 대하는 인물이었다. 작금에 이르러서 그의 역할이 줄어들었다고는 하나 그가 차지하는 교내의 상징성은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오죽하면 단지운도 유변의 혈마종을 움직이기 위해 유변을 직접 굴복시키는 대신 구마진을 이용한 계책을 낸 것이겠는가?

“어째서입니까?”

단지운이 이유를 요구하자 단원진이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글쎄, 그의 역할이 끝났으니 사라져 주었다고 하는 게 맞을지, 아니면 그가 변심했기에 처리했다고 하는 게 좋을지. 교주께서 뭐가 좋은지 하나 골라주는 게 어떠신가?”

“……대답해줄 생각이 없으시군요.”

“클클클! 좋을 대로 생각하려무나.”

“그럼 이제 용암비동은 기능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래. 그것과 관련해서 이 아비가 교주와 따로 할 얘기가 있어서 왔느니라.”

단지운이 야마와 구마진 등을 차례로 돌아보았다.

“지주는 이만 용무를 보러 가도 좋소. 구마진, 너는 나와 움직일 테니 다시 부를 때까지 대기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교주님.”

“명을 받들겠습니다.”

야마와 구마진이 고개 숙여 대답하는데 단원진이 구마진을 힐끗 보며 끌끌 웃음을 흘렸다.

“교주께서 충실한 종복을 얻으셨소. 태상교주를 골탕 먹일 정도로 간덩이가 부은 놈으로 말이오. 클클클!”

단원진이 그 말을 내뱉으며 돌아서고는 산문쪽으로 앞장서서 걸어갔다.

단지운도 부친의 뒤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면서 구마진을 다시 힐끔 보게 되었다.

‘종복이라, 과연.’

단원진이 비꼬는 말처럼 단지운이라고 구마진을 신뢰하는 건 아니었다. 그의 말마따나 태상교주를 골탕 먹을 정도라면 교주인 자신이라고 안 그럴 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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