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화 – 제59장. 그는 천재(天災)로 돌아왔다 (2)
“일단 안 대협은 저와 함께 앞에 가서 살펴보시죠. 당주님께선 혈랑대와 같이 움직이면서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되 설령 적과 조우하더라도 최대한 혈랑대인 척해서 적룡단의 관심을 끌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진지의 중심에 모여있는 게 아무래도 제압하기 좋으니까요.”
“자네, 진심이군.”
“예.”
“하, 알겠네.”
“내려가 계십시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안 대협, 가시죠.”
“앞장서게.”
진도건과 안효철이 땅을 박차고 앞으로 쏘아질 듯 날아가니 혈랑대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림인들이 기라는 걸 다루고 그걸 이용해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저렇게 바람처럼 날아가는 모습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당주도 저런 게 가능합니까?”
호주골의 물음에 이혁성이 쓴웃음을 지었다.
“경공은 내 특기가 아니라서. 저 두 사람이 특별한 거지 무림인들이라고 모두 저 정도 할 거라는 생각은 버리게.”
“말보다 빠르지 않습니까?”
“말보다 빠른 사람도 많진 않지만, 말처럼 꾸준하고 오래 달리는 건 힘든 일이지. 저 두 사람 때문에 자네들 기준이 너무 높아지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는군.”
이혁성은 그렇게 걱정하면서도 오히려 그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세 사람의 눈빛을 보고는 헛웃음을 삼키면서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문득 강호무림의 역사 속에서 저만한 고수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떠올려보았다.
‘확실히 당대 고수들의 무공 수준이 과거 전설적인 인물들과 비교하면 지나치게 높긴 해.’
그가 생각하기엔 천하오절만으로도 중원이 가득 차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천무방의 삼장로도 좀 더 예전이라면 천하오절이라 칭해도 무방할 정도의 무공을 가지고 있었고 이전의 삼당을 이끌었던 남궁평이나 천준 그리고 자신만 해도 저마다 특별한 재능을 빛내고 있었다.
지금은 또 서른도 안 된 진도건이나 천서은 같은 후기지수들이 그들을 뛰어넘는 경지에 올라서 그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그런 대단한 인물들 사이에 끼어있으니 무림이 품은 무력의 수준이 엄청나게 높아졌음을 체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야영을 시작하고 혈랑대와 황검당 등이 모닥불 앞에서 잠들었다가 이른 새벽에 깨어 다시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북정 쪽으로 탐색을 나섰던 두 사람 가운데 안효철만이 돌아왔다.
“진도건은 같이 안 왔습니까?”
“허허……! 일대를 덮을 정도면 많은 모래가 필요할 거라고 바로 사막에 간다더군. 우리도 부지런히 움직여야 할 걸세. 그가 얼마나 큰 모래폭풍을 몰고 올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가 생각한 대로 움직이고 있어야 혹 실패했을 때, 우리도 할 말이 있지 않겠나?”
이혁성의 물음에 안효철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전날 밤 얘기를 전해 듣고도 의심이 가득했던 사람들인 황당한 나머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볼 뿐이었다.
안효철이 전했던 것처럼 진도건은 어느새 대협곡에서 빠져나와 사막으로 나와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보다 좀 더 먼 지점에서부터 ‘작업’을 시작하기 위하여 경공을 펼쳐서 더 날아갔다.
진도건과 안효철은 서로가 가진 마기와 기척을 감지하는 탁월한 감각을 이용하여 적들의 감시를 피해서 북정 위에 세워진 진지의 울타리가 보일 정도로 가까이 접근했었다. 그리고 대협곡의 지형적인 어려움 때문에 의외로 멀리까지 나와서 보초를 서는 병사들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쯤이면 충분하겠지.”
진도건이 멈춰서서 돌아온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아단대협곡의 산세가 꽤 작게 보일 정도로 멀리 떨어진 위치였다.
“하아, 진짜 하려는 거군.”
“왜, 의심돼?”
“솔직히. 궁금도 하고. 그때 만났던 모래폭풍 수준까지 일으키려면 상당히 공들여야 할 거야.”
“……폭풍 속에서 내 주변 기류를 내 뜻대로 조종하는 게 가능했을 때, 사실 계산은 어느 정도 끝났어.”
“뭐?”
“네 말처럼 그 수준에서 좀 더 공들인다면 그럴듯해질 것인데, 혹시 어설프게 만들어질 수도 있으니까 최소한 저녁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해야지. 시간은 내일 저녁까지니까 충분해.”
“……크크크큭! 좋아! 마음에 든다. 힘을 쓰는 네 그릇이 점점 커지는 것 같은 느낌이야. 어디 한번 해보자고.”
“응? 나 혼자 할 텐데 넌 뭘 한다고?”
“넌 바람에 집중해. 혈마단의 마기로 내가 모래를 파줄 테니까.”
“네가 따로 힘을 쓰려고 하면 기류가 어지러워져서 안 돼.”
“그래? ……쳇.”
피식.
진도건은 웃음을 흘리고는 차분한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의식을 집중하는 그를 의식해서인지 혈마도 더는 말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선인의 바람(仙風).
그것은 반선지경에 이른 조강선이 그에게 남긴 신력(神力) 또는 도력(道力)과도 같은 힘이었다. 단전이 거의 파괴되고 기혈도 기능을 못 할 정도로 망가져 버린 진도건을 살리기 위하여 조강선이 모든 힘을 쏟아부은 결과 의도치 않게 조강선의 신성(神性) 또는 도성(道性)의 씨앗이 진도건의 신에 심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상단전의 개방으로부터 발휘되는 힘이라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진도건의 몸을 빌린 염력을 혈마도 사용할 수 있는 것과 달리 선인의 바람을 사용할 수 없는 건 ‘인지’의 차이 때문이었다.
휘이이이…….
진도건의 주변으로 바람이 흐르기 시작했다.
바람은 그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빙 도는 듯하면서도 지면을 쓸어내면서 차츰 그 범위를 넓혀나갔다.
그 중심에서 진도건은 아주 신중한 태도로 의식을 집중하고 있었다.
* * * *
천마신궁 안에서 확실한 규모를 가진 건축물은 제육천마라대전이 있는 흑궁과 성혈궁 그리고 흑궁 뒤에 숨은 무영각 세 곳이었다. 그리고도 세 건물이 차지한 면적보다 조금 더 큰 산지 위로 여러 건축물이 사찰 터처럼 모여있었다.
당연히 불탑처럼 보이는 건 궁내에선 마탑(魔塔)이라 불렀고 사찰도 불상이 아닌 마라상(魔羅像)을 모시고 있었다.
입꼬리 한쪽이 살짝 말려 올라가 있는데 그것과 반대쪽 눈썹도 치켜 올라간 얼굴은 누군가를 비웃고 또 깔보는 듯한 감정을 조금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승복의 형식은 고루 갖춘 듯하면서도 전체적으로 늘어지게 걸치듯 입어 상체 대부분이 드러나는 모습이니 나태함을 마라상에 담아내려 한 것처럼 보였다.
경전도 없고 설법도 없지만, 이런 마라상에서 드러나는 신적 태도는 자연스럽게 마구니들에게 나름의 규율을 강요하면서도 일상에서는 속세의 육욕(六慾)을 자유롭게 허용한다.
따라서 마공이 주는 속성(速成)의 성취는 달콤하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운용하기 위한 수련 과정은 혹독하기 그지없어 마치 불자의 고행과도 같았다. 대신 자율적인 힘의 증명으로 자신만의 마도를 개척하도록 했으며 ‘적’이라 간주되는 자들에겐 무자비한 폭력을, 또 그 승리의 대가로서 재물의 탐욕과 음욕의 탐닉마저 방종적으로 허용한다.
마니사(魔尼寺)는 바로 그런 곳이었다.
단지운은 흑궁 서남쪽의 마니사 경내를 걸으면서 바닥에서 정점으로 가기 위해 분투했던 탐욕의 잔열을 느끼고 있었다.
구주마종은 천마신교를 지탱하는 그 무엇보다 화려하고 단단한 기둥들이지만, 이 마니사는 천마신교가 하나의 집단으로서 기능하게 해주는 토양과 거름의 역할을 해내는 곳이었다.
무엇보다 대외적으로 가려진 곳이라 하더라도 천마조사 단용후가 천마신교를 세울 때 첫 뿌리를 내리기 위해 세운 곳이 이 마니사라는 점을 고려하면 그 중요성은 교주로서 분명하게 인지할 수밖에 없었다.
“마니사가 언제 이렇게 한산한 적이 있었던가?”
“몇 년 전에 적룡단을 굴복시키러 전대 위타천인 루드라가 태상교주님과 교주님을 보필하여 마구니들을 끌고 나갔을 때 이후로는 처음이지요.”
단지운의 옆에서 대답한 사람은 마니사 주지이자 천마신교의 호법인 야마였다.
그는 60대의 나이로 깊게 주름진 얼굴 속에 강렬한 눈빛을 더한 선 굵은 이목구비를 가진 토번인으로 천마신교에 속해 2대째 단씨 일가를 모셔 온 나름 뿌리 깊은 인물이었다. 공식적으로 야마는 주지이자 호법으로서 마니사의 규율과 자율, 방종 사이의 균형을 지키는 일을 담당했다면 위타천은 그렇게 훈련된 마구니들의 최종적 도전 대상이자 교주 외 총지휘권자로서 대외적인 전투 임무를 담당하는 위치였다.
창교 이후로 위타천을 넘어선 사람은 매우 극소수였고, 현재 스칸다가 위타천이 된 이후로는 유일하게 단 한 사람만이 마니사를 벗어나 새로운 마도를 개척할 권한을 쟁취했다는 이력이 있었는데 그조차 불과 6년 전쯤 일이었다.
단지운은 마라전의 열린 문 바깥에서 마라상을 쳐다보았다.
마라상은 사실 천마조사 단용후의 젊었을 적 모습을 기준으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단지운으로선 가만히 보고 있으면 다른 듯 비슷한 생김새에 거울을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야마.”
“예, 교주님.”
“남아있는 마구니들도 싸울 채비를 잘 마쳐두게.”
“교주님께서 직접 나서실 텐데 마구니들 같이 아랫것들에게도 기회가 있겠습니까?”
피식.
되묻는 야마의 말에 단지운이 웃음을 흘렸다.
그는 중원무림을 목표로 한 전쟁을 직접 계획하고 실행하는 자로서 작금의 현황에 대해 나름의 타당한 고민들을 이어오고 있었다.
“실패로 돌아간 작전들이 많아. 물론 저마다 나름의 성과는 있었다고는 쳐도 결국 전선은 우리 쪽으로 당겨지고 있어. 야마여, 그거 아는가? 내가 현시점에서 가장 놀라는 지점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창천맹의 진격이야.”
“어째서 그렇습니까?”
“나는 과거에 정파가 주축이 돼서 세웠던 무림맹이나 혈마사태와 정사대전으로 이후 무림맹을 대체한 사패련으로 미루어 봤을 때, 그들의 대응이 똑같이 방어적으로 흘러갈 것으로 보았거든. 중원무림의 세력들은 이미 가진 것이 많기에 절대 안마당을 비워두고 진격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지.”
“하지만, 그들은 진격하고 있지요.”
“그래. 3년 전 홍천환 건으로 사패련을 혼란에 빠트렸을 때, 나는 좀 더 전격적으로 우리의 전력을 진출시켜서 궁지에 몰아넣을 생각이었네. 그런데 잠깐 다른 문제로 지체하는 사이에 새 사패련주가 된 천무경이 사패련을 해체시키고 봉문했던 정파와 규합하여 창천맹을 창설하고는 흩어지던 무림 세력을 다시 규합해냈지. 천무경은 마치 모든 계획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어. 그자는 우리가 중원에 침투시켰던 간자들을 솎아내는 데 집중하면서 힘을 키우고 전열도 재정비해냈지. 본교가 중원에서 대단히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본교도 할 수 있는 대응은 견제 수준으로 제한적이었으니 결국 놈의 뜻대로 삼 년의 시간을 버리게 된 것이야.”
단지운이 얘기한 다른 문제는 두 가지였는데 그중 하나는 소요자와 당혁수라는 천하오절에 버금가는 고수들의 등장이었다. 특히 큰 위협으로 여기지 않았던 사천무림이라는 죽어있던 세력권을 급부상시킨 당혁수의 존재는 천마신교로서도 전력을 분산시켜야 할 부담을 안겨주는 일이기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와 함께 대두된 두 번째 이유가 바로 주백자라는 천하오절 이상 가는 절대고수의 존재였다.
주백자, 조강선이란 이름은 대마의 유변을 통해 인지하고 있는 부분이 있었으나 정말 큰 위협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부분은 의구심이 있었다.
그건 천마신교가 품은 무력의 규모 때문에 얕보았다는 측면도 있었고 금분세수(金盆洗手)한 강호의 인사인 마냥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시간이 정말 길었기 때문이었다. 또 혈마 원건과 관련된 옛이야기는 그들 존재에 당위성을 부여하면서도 오랫동안 그들이 명성을 얻을 만한 전적(戰績)이 없었기에 그 실력에 의구심이 있었다.
그런데 일월신마가 조강선에게 혼쭐이 났다는 보고와 주백자가 당시 무림에 알려지지 않았던 천마신교의 본진을 찾고 있는 것 같다는 무영각의 보고에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운이 좋게도 조강선은 대마의 유변과 접촉했다가 돌아가서는 소식이 끊겼다가 흑풍신마 야율재와의 싸움 이후로 행방불명. 이후로 어느 숲속에서 그의 옷가지가 무영각에 발견되어 사망판단, 주백자는 기가 막히게도 천산의 용암비동을 찾아 들어갔으나 태상교주 단원진과 일월신마에게 패배하고 무저갱으로 추락하여 사망.
그렇게 가장 까다로운 문제요인의 두 존재가 사라짐으로써 단지운도 마침내 준비만 해두었던 사천무림 전쟁계획을 전개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마저도 여러 이유가 함께 작용하긴 했으나 결국 창천맹주로서 역할을 한 천무경에 의해 온전한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으니 그의 존재감을 단지운이 강하게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