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6화 – 제59장. 그는 천재(天災)로 돌아왔다 (1)
혈랑대가 아단대협곡 동북쪽 초입부에 도착한 건, 출발하고 사흘 뒤 달이 서산에 기울던 새벽녘이었다.
그리 짧은 거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텡그리 사막은 발이 푹푹 빠지는 모래였기에 말들도 속도를 오래 내기에 힘들어했고 모래폭풍 수준은 아니어도 모래를 동반한 바람이 이따금 불어올 때면 속도를 줄여 가야만 했다.
그래도 텡그리 사막 서쪽에 연이어 등장하는 바단지린 사막을 지날 때는 좀 나아졌다.
그저 모래로만 이뤄진 사막보다 좀 더 사암에 가깝게 단단하게 다져진 사막으로 지형이 변모하였는데 이는 서남쪽 멀지 않은 곳에 기련산맥 등의 산지가 있고 그곳에서 내려온 강 지류 등이 사막지대까지 스며들어와 지면이 굳을 수 있게 해줬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기련산맥과 함께 하서주랑을 사이에 둔 용수산의 산줄기에서는 사막 쪽을 관측할 수 있었기에 원래의 직진 방향보다는 조금 더 북쪽으로 돌아서 가야만 했었다.
류단아는 망설임 없이 혈랑대와 진도건 일행을 데리고 아단대협곡으로 진입했다. 그리고 잠시 뒤에는 어째서 한번 깊이 들어가면 쉽게 빠져나올 수 없다고 하는지를 이곳에 처음 온 진도건 등과 황검당 모두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당히 높은 산들이 겹겹이 있으니 그 언덕의 경사로와 앞뒤의 협로 밖에 시야 확보가 되지 않았다.
나무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허리 높이 정도로 자란 무성한 들풀 정도만이 심심하게 있었다. 끝을 모르게 펼쳐진 언덕들과 그 속에서 들짐승 같은 생명체라곤 느껴지지 않은 척박함으로 일찌감치 답답함을 느끼는 자들이 나올 정도였다.
진도건은 어느새 선두에 서서 류단아와 함께 말을 몰고 있었다.
자신이 후열에서 기척을 감지할 테니 마기 감지 능력이 탁월한 진도건이 선두에서 방향을 결정하는 게 좋겠다는 안효철의 얘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들어왔을까.
“얼마나 더 이동할 것이오?”
진도건이 류단아를 보며 물었다.
“안 그래도 밤이 깊어졌으니 슬슬 야영 준비를 할 것이다. 아직은 불을 피워도 될 만한 지점이지만, 더 들어가면 대협곡에 들어왔다는 걸 알아차려서 기습받기 좋은 위치가 되어버려.”
아무리 밤이라도 모닥불을 피우면 자연히 발생하는 그을음 동반한 연기가 관측될 가능성을 거론한 것인데, 그만큼 아직 안전하다는 건 대협곡의 너비가 넓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진도건이 물어본 건 쉬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지금 속도로 가면 적진까지 얼마나 걸리오?”
“이틀?”
“장액군에서 가면 하루거리입니다만, 그쪽 방면으로 산이 가파른 반면에 사막 방면으로는 높이가 점점 낮아지면서 산지가 넓게 펼쳐진 형국인데 우린 그곳으로 진입하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십니까?”
옆에서 듣고 있던 호주골이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면서 되물었다.
“속도나 거리 같은 걸 미리 가늠해둬야 할 것 같아서 말이오.”
“무엇 때문에 말입니까?”
진도건이 대답 대신 다시 한번 묻는다.
“적진의 감시망이 닿는 위치까지는 얼마나 가면 도달할 것 같소?”
“으음……, 대충 내일 미시와 신시 사이(3시 경)쯤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호주골의 말을 듣고 진도건이 잠시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안효철이 다가왔다.
“먼저 정찰하려고?”
“협곡이 그렇게 넓고 지형도 거의 이런 식이라면 감시망 안에 들어서선 기다린다는 선택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진지를 에워싼 군세를 뚫고 적룡단을 치기 위해 종심돌파(縱深突破)를 하려면 감시망 안에 들어선 시점부터는 지체하는 일 없이 적룡단에 도달할 준비와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진도건의 대답에 류단아와 호주골 등 혈랑대원들의 눈빛이 빛났다.
직전의 질문들과 지금의 대답에서 진도건이 얼마나 선명한 목적을 가지고 말 한마디 한마디를 내뱉었는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우리 부족이나 초원의 전사들은 시력이 모두 좋은데 무림인들도 시력이 대단히 좋다지요?”
호주골의 물음에 안효철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말을 덧붙인다.
“그것도 그렇네만, 무공이 높은 경지에 이르면 보이지 않는 것도 감지할 수 있는 감각이 발달한다네. 쉽게 얘기하자면 내가 저 언덕 반대편에 있어도 집중력만 더한다면 여기 혈랑대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는지 알 수가 있지.”
“헉! 그런 일이 가능합니까?”
호주골이나 조위발을 비롯해 가까이서 그 말을 들은 혈랑대원들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서파파가 끼어들어 한마디 던졌다.
“푸흘흘! 곧이곧대로 믿지 마라. 그런 일이 가능한 건 강호에서도 아주 극소수야. 기껏해야 이 주변 안에서 감지할 수 있으면 그것도 대단한 경지이지. 어디 산 너머에서 감지한다니? 천하오절이 하는 말을 평범하게 들으면 안 되지!”
“허허허…….”
서파파의 말이 틀리지 않았으니 안효철이 민망하게 웃음을 흘렸다.
안효철이 천하오절로서 명성만으로는 이곳에서 따라올 자가 없었지만, 서파파는 그보다 연배가 높은 무림 선배였다. 그래서 그녀의 핀잔을 받는 모습을 어색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혈랑대는 바로 야영 준비에 들어갔다.
황검당은 모두 내공이 꽤 깊어서 추위에도 체온을 잘 유지할 수 있었지만, 혈랑대는 그렇지 않았다. 그저 태생이 사막과 초원이라 날씨에 적응력이 좋은 것뿐이기에 그들도 바람을 피할 파오나 온도를 높일 불이 필요했다.
이혁성은 이곳에 난 들풀과 얄팍한 나뭇가지들로는 모닥불을 붙여도 금방 꺼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황검당이 번을 교대로 서면서 불이 꺼지지 않도록 지키기로 얘기를 모았다. 대신 혈랑대가 가진 마유주나 낙타 고기를 말린 건량 등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사이 진도건은 안효철과 함께 류단아, 호주골, 조위발로부터 적 진지와 대협곡 지형에 관한 얘기를 듣고 있었다.
“……만약 우리가 장액에서 만났다면 적룡단 병참기지는 정말 코앞이었겠구먼.”
대협곡은 사실상 장액군 북쪽 용수산에서부터 시작된 산줄기라 볼 수 있었다.
병참기지가 있는 적진이 용수산의 북정(北頂)이란 분지 형태의 봉우리에 구축되었고 그 앞이 가파른 경사나 절벽으로 이뤄져서 장액군을 바로 내려다볼 수 있는 반면에 사막 방면으론 첩첩산중의 난맥이 펼쳐져 있으니 한 말이었다.
“북정은 꼭대기가 분지처럼 넓고 완만합니다. 메마른 협곡 사이를 두고 맞은편의 남정은 뾰족한 편인데 말이죠. 그래서 북정이 진지를 구축하기에 좋은 곳이죠. 위치를 들킬 염려도 없고 말이죠.”
“하지만, 거기도 여기처럼 식생(植生)이 별로 없는 메마른 산지면 진지를 오래 유지하기엔 좋은 곳이 아닐세. 전쟁이 길어질 것 같으면 둔전도 병법이 되는데 그리 적합해 보이지는 않는군. 물자 수송도 어려워 보이고 말이야.”
“맞습니다. 그래서 진지 공사나 물자 비축이 은밀하고 긴 시간 동안 이뤄진 모양입니다. 대신 하서주랑의 기다란 지형을 고려하면 미리 이 위치를 점유했을 때, 적군의 허리를 끊든 후방을 치든 선택할 수 있는 조건이 되니까 천혜의 매복지가 될 수도 있지요. 어느 누가 그런 산꼭대기에 군을 둘 생각을 쉽게 하겠습니까? 가뜩이나 제법 큰 마을을 코앞에서 볼 수 있는 곳인데 말이죠.”
“쉽지 않은 선택이지. 적룡단이 마적단이라면서 이런 전략적인 선택을 가져갔을 줄이야.”
안효철이 적잖이 감탄했다.
상황들이 시의적절하게 뒷받침되면서 절묘한 위치에 진지를 점유한 셈이었으니 운이 좋다고 치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진도건은 호주골이 바닥에 그린 그림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손가락으로 북정의 위치와 지금 이곳을 표시한 위치를 차례로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그럼 북정 쪽이 지대가 높고 이곳까지는 점점 낮아지는 형태를 이루고 있다고 보는 게 맞소?”
“그렇습니다.”
“북정의 바람은 어떻소?”
“사방이 탁 트여있으니까 무척 세지요.”
진도건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류단아와 호주골, 조위발에게 차례로 시선을 던졌다.
“언덕 위에 올라가서 보면서 얘기하고 싶은데 괜찮겠소?”
세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섯 사람이 가까운 남쪽의 언덕에 올라가기 시작했는데 여희선도 그 모습을 보고는 같이 올라가서 무슨 얘길 하는지 들으라며 이혁성의 등을 떠밀었다.
그렇게 언덕 정상에 여섯 명이 올라가 몸을 낮추고 앉았다.
호주골이 남쪽 방향을 손으로 가리켰다.
“대충 저 끝자락 쯤에 희미하게나마 보이지 않습니까?”
“횃불 같은 게 흔들거리는 걸 보니 그런 것 같군.”
안효철이 중얼거리는 얘기에 진도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혁성도 흐릿하게 불빛들이 보였으므로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런 불빛은 혈랑대 세 사람에겐 보이지 않는 시각 정보였다.
‘에이, 설마……. 장난이겠지?’
호주골은 괜히 장난치지 말라고 한마디 던지고 싶었지만, 북정 쪽을 바라보고 있는 진도건의 진지한 표정은 멍청하게 보일 수 있는 질문을 사전에 차단하고 있었다.
“혈랑대장.”
“응?”
“내일부터는 저 북정을 향하여 최대한 가장 빠른 길로 인솔해주시오.”
“잠깐. 북쪽으로 우회할 수 있는 길이 있어. 당신들 황검당 검객들 일부가 다른 쪽에서 소란을 피워주면 틈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진도건이 류단아를 보고 피식 웃었다. 그러자 류단아가 비웃음처럼 느꼈는지 인상을 찌푸렸다.
“왜 웃어?”
“무작정 요구해왔었으니 그런 제안은 사실 별로 기대하지 않아서 말이오.”
“네가 정면으로 들이박을 듯이 얘기하니까 그렇지.”
류단아가 조금 불안한 기색을 내비치며 대꾸했다. 그런 그녀의 말은 자리에 있는 모두가 공감하고 있었다.
다른 사전 설명이나 내놓은 계책도 없이 최대한 빠른 길로 인솔해달라는 건 정면으로 돌파하겠다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후후! 맞소, 정면 돌파.”
진도건은 순순히 인정했다.
바로 옆에 있던 안효철이 진도건의 팔을 붙잡았다.
“자네 무슨 생각인 건가?”
“정면 돌파할 생각입니다. 혈랑대와 황검당 모두 적진의 종심을 뚫고 북정에 올라서 적룡단에 도달할 것입니다. 적 숫자가 많으니 최대한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 눌러서 기를 꺾어야 할 테고요. 완전히 방심하고 있을 테니까 속전속결로 전개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진도건이 당연하다는 듯이 청산유수처럼 말을 늘어놓자 혈랑대의 맹안 류단아와 두 모극들 모두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그, 그건 말도 안 되지 않습니까?”
“오백도 안 되는 인원으로 어떻게 일만을 뚫습니까? 적룡단도 천 기에 가까운데.”
“아무리 방심하고 있다고 한들 그 인해장막을 무슨 수로…….”
이혁성이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진짜 무슨 생각인가? 자네가 농담하는 건 아닐 테고.”
“정말입니다. 그리고 만약 제가 의도한 대로 상황이 만들어진다면 아마 우리는 거의 저항 없이 적진지의 중심부로 치고 들어갈 수 있게 될 겁니다.”
“상황?”
“네. 그날 북쪽에서부터 저 산 쪽으로 모래폭풍이 불 겁니다.”
“허허허……!”
진도건의 그 말에 모두가 어안이 벙벙해진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오직 안효철만이 그보단 조금 덜한 표정으로나마 허허로운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그때 생각한 것인가……?’
안효철은 그들이 처음 모래폭풍을 맞닥뜨렸던 날, 진도건이 그 폭풍 속에서 기류를 제어하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었다. 비록 그때의 일을 묻지는 않았지만, 단지 뭔가 무공 증진에 대한 방법론적인 시각으로 연구하는 것이겠거니 싶었었다.
“허참……, 모래폭풍을 일으켜보겠다는 말인가?”
“예.”
안효철이 묻자 진도건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류단아나 호주걸, 조위발로서는 정말 기상천외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최근 심해지는 추위로 인해 제법 큰 모래바람이 빈번하게 일기도 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런 기상의 변화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건 초원 대부족들이 거느린 주술사들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모래폭풍을 예측하는 것도 아닌 직접 일으키겠단다.
류단아 등의 입장에서 이쯤 되면 혼란스럽고 의심스럽다.
‘계시를 따라 걷는 자’이기에 가능한 일인지 혹은 미쳐버린 허풍쟁이인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