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315화 (315/432)

315화 – 제58장. 류단아(劉丹牙) (5)

한편 단지운은 양자성과 스칸다가 떠나간 이후로 권영서와 단둘이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성을 가진 귀물을 처음 본 것도 어이가 없는데, 선우도는 내게 보고하지도 않고 아버지의 명령을 받아 사막으로 갔다?”

“송구합니다.”

권영서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하는데 단지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환도마종과 환도신마 선우도는 구주마종의 신마들 가운데서도 그의 최측근이나 다름없었다.

선우도의 상궤를 벗어나는 환마대능력은 유일하게 단지운으로서도 그 같은 힘을 발휘하기 힘든 종류의 것이었다. 또 깊은 연륜에서 흘러나오는 경험적 조언은 충분히 의지할 가치가 있었다. 그런 자가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는데 말 한마디조차 없었다는 건 충분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재밌군. 무영각주.”

“예, 교주님.”

“언제부터 이 천마신교에 천마가 둘이나 되었더냐?”

쿠쿠쿠쿠쿠-!

‘이런……!’

권영서가 당혹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엄청난 중압감에 얼굴이 하얗게 질릴 정도였는데 제육천마라대전이 아니라 흑궁 전체가 부르르 떨릴 정도로 그 여파가 무시무시했다.

“으음! 천마는 오직 교주님 한 분이시옵니다.”

권영서가 고통에 일그러진 표정으로 침음성을 삼키면서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

그제야 단지운이 기백을 거둬들였고 권영서도 비로소 숨을 제대로 고를 수 있었다. 그러나 단지운의 얼굴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 머무르고 있었다.

“두 명의 천마를 모시는 건 무영각주도 마찬가지 아니더냐?”

“태상교주가 일선에서 물러난 지 오래되었는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단지운은 거기에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이미 심기가 대단히 불편해졌기 때문이었다.

천마신교가 중원 무림 세력과 본격적인 전쟁을 벌인 건 올해라고 볼 수 있었지만, 3년도 더 전에는 ‘혈마 회수’라는 근본적인 목표가 내포되어 있었던, 홍천환을 이용한 ‘비아부화지계(飛蛾赴火之計)’를 펼쳤을 때만 해도 단지운은 자신감이 있었다.

물론 혈마의 탄생만을 유도하고서 회수하지 못했던 점과 불나방들을 모두 처리하지 못하고 중간에 막혔다는 점은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결과였다.

하지만, 중원 무림의 내부적 분란을 일으켜서 그들이 한데 뭉치도록 한 건 오히려 그가 의도한 바였다.

창천맹이라는 깃발 아래 뭉친 적을 일망타진함으로써 중원을 차지했을 때, 사방에 흩어진 잔적들을 쫓기 위한 수고로움을 줄이고자 한 것이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지리적인 특성상 중원 세력과 쉽게 뭉치기 어려운 사천 무림 세력을 따로 섬멸함으로써 힘의 균형을 무너뜨리고자 했었다. 비록 그 계획이 절반의 성공에 그쳐서 불만족스럽더라도 그것이 마도대의를 이루는 데 아무런 지장을 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양자성이 오기 전에 단지운은 서하 황실을 상대로 벌였던 살문 공작이 실패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럴 수 있었다.

창천맹의 대응이 생각보다 더 기민하여 끝내 실패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황제의 암살 정도는 해두었을 거로 생각했던 최소한의 기대치가 ‘진도건’이라는 이름 아래 수포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듣고 나서 견고하게 유지하던 심지에 균열이 생기는 걸 느꼈다.

그리고 양자성의 손에 쥐어진 ‘마성을 가진 검’을 보았을 때, 그는 자신에게 모든 권력을 이양하고 천산에 칩거했던 단원진의 권위가 여전히 천마신궁 안에서 살아있다는 감춰진 사실이 함께 떠오르는 걸 보고 있었다.

거기에 환도신마도 곁에 없는 상황이 더해지니 그동안 ‘작은 실패’, ‘절반의 성공’으로 여겨지던 것들이 모두 큰 실패로 느껴지는 것이다.

“……무영각주, 당장 부를 수 있는 신마가 누구 있느냐?”

“광혈신마가 교하토성에서 대기 중입니다. 그리고…….”

권영서는 단지운의 물음에 대답하다가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

흑풍신마와 사혈신마는 사망으로 공석.

적룡신마 마웅패는 대 무림 전선의 선봉을 지키고 있었고, 염황신마 혁련제(赫連啼)는 강정학에게 쫓기고 있어서 오히려 도움이 필요하여 양자성과 스칸다를 보냈다.

수일 전, 태상교주 단원진의 지시로 어디론가 가버린 환도신마는 무슨 목적인지조차 모르는데 단원진과 친구 사이이기도 한 일월신마의 행적 또한 묘연한 상태인 것으로 보아 환도신마와 비슷한 상황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할 수밖에 없다.

서하 흥경에서 살문과 있어야 할 성혈신마의 생존 여부는 무영들을 통해 확인되었으나 그는 ‘천마신교의 성혈신마’보다 ‘성혈교의 라마 빌게포첸’에 더 가까운 존재여서 직접적인 명령을 내리는 것조차 다소 까다로운 인물이었다.

“……큭큭큭! 이봐, 권 각주. 자네 눈엔 내가 무엇으로 보이는가? 천마신교의 교주, 천마라는 지존의 권위는 정녕 헛된 것이더냐?”

권영서는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흐르면서 그 서늘함을 느꼈다.

그에게마저 살기를 내비치는 것으로 단지운이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다는 걸 너무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상황.

그때 문득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고, 고정하십시오. 광혈신마 외에 한 사람이 더 있지 않습니까? 모두가 저마다의 처지로 궁을 비운 이 시기에 때마침 지존께서 직접 그 권위를 부여하고 오시지 않았습니까?”

“……누구 말이냐?”

“혈마 구마진입니다. 오늘이 그에게 내리신 징계가 풀리는 날입니다. 지금쯤이면 천산 빙첨탑에서 내려왔을 것입니다.”

심장을 찌릿찌릿 울리던 살기가 그제야 수그러든다.

단지운은 혈마위가 오랫동안 공석으로 비어있었던 탓에 그가 있었다는 걸 잊어버리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오늘이라고……?”

“그렇습니다.”

“흐음, ……구마진에게 전해라. 닷새 안으로 입궁하여 보고하라고. 회복할 시간은 주어야겠지.”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물러가라.”

권영서는 행여나 마지막 명령을 거둘까 하여 조금 서둘러서 제육천마라대전을 빠져나갔다.

단지운이 파순대좌에 몸을 깊이 묻은 채 두 손을 모으니 얼굴이 반쯤 가려졌다. 마치 누군가가 그의 노기가 서린 표정을 읽지 못하도록 가리는 듯한 행동이었다.

아직 화가 가신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천마신교의 혈마 구마진이 있음을 듣고 그가 이끌게 될 혈마종의 무인들에게까지 신경이 미치자 다시금 마도전쟁을 위해 어떻게 전선을 구성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분노의 수면 위로 올라옴을 느꼈다.

마도대의.

단용후와 단원진의 마도대의가 아닌,

하늘 아래 모든 것을 발아래 두려는 그만의 마도대의, 그 꿈을 위해서,

단지운은 자기 자신을 ‘천마’라는 절대적 존재가치의 정수리로 계속해서 끌어올리고 있었다.

* * * *

“정말 들어갈 거야?”

설매화가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

구마진이 씩 웃으면서 설매화의 흑옥같이 고운 볼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걱정돼?”

“들키면 살아나갈 길이 없으니까 그렇지!”

설매화가 전에 없이 목소리를 날카롭게 찢으며 소리쳤다.

그녀가 이토록 화를 내는 걸 뒤에서 바짝 긴장한 채 숨죽이고 지켜보는 흑각수들도 그녀의 말에 절실하게 공감하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제법 컸다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조차 차마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쉬잇! 아무리 사가 산에서 내려갔다고 해도 목소리가 너무 크다, 이년아.”

“차라리 들켜서 못 들어가는 게……, 읍읍!”

구마진이 설매화의 입을 틀어막았다.

설매화가 막 반항하려는데 구마진의 웃는 얼굴을 보고 그녀도 모르게 의지를 놓게 되었다.

긴장이라곤 조금도 하지 않은 채 오히려 흥미에 가득 찬 얼굴.

설매화의 눈빛이 가늘게 떨리는 순간, 구마진이 그녀의 입술을 우악스럽게 훔쳤다. 그리고 짧고 진하게 입술을 맞춘 그가 어안이 벙벙해진 설매화를 떼어놓으면서 말을 덧붙인다.

“……큭큭큭! 얌전히 내려가서 기다려. 너희도 마찬가지다. 금방 들어갔다 나올 테니까 말이야.”

덩달아 갑작스럽게 펼쳐진 낯 뜨거운 장면 때문에 잠깐 멍해졌던 흑각수들에게도 주의를 준 구마진은 그들을 모두 뒤에 두고 숲에서 걸어 나갔다.

“후우…….”

있는 여유는 한껏 드러내 보여줬지만, 내심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외로이 서 있는 작은 오두막 그리고 허락된 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용암비동으로 통하는 천산의 호수가 그의 눈앞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구마진은 잠시 심호흡하고는 그대로 호수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빙첨탑에 묶여있는 동안 느꼈던 차가운 칼바람과는 또 다르게 냉엄한 물속의 추위가 아직 살이 차오르지 않아 비쩍 마른 구마진의 살가죽을 파고들었다.

그로선 처음 들어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잠시 물속에서 방향을 헤매었다. 그러나 그의 흡성대법으로 쌓은 내공은 이전에도 신마들 못지않았던 데다가 지금은 혈마의 마성과 성질을 취하여 더 깊어진 상황이었다. 그리고 빙첨탑에 묶여있던 시간은 의외로 그의 난잡한 기운들이 좀 더 정갈하게 자리 잡을 수 있는 바탕이 되어주었다.

구마진은 이내 천산 호수의 어둡고 깊은 밑바닥에서도 체온을 유지하고 시야를 확보했다. 그리고 호수 속 동굴을 찾아 진입하여 마침내 용암비동으로 나올 수 있게 되었다.

“푸후우……!”

아무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구마진은 더 조심하고 긴장하며 걸음을 옮겼다. 인지하고 있는 정보가 틀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굴 길을 지나 용암비동의 중심에 들어섰다.

상당히 넓은 공터와 한쪽 면을 따라 층층이 늘어선 또 다른 동굴의 입구들 그리고 그 입구 앞에 횃불을 품은 상징적인 조각상들까지.

일부 부서진 흔적들이 보여서 의아했지만, 최근의 흔적이 아니어서 지나쳤다.

심연으로 바람이 빨려 들어가는 소리를 계속해서 흘려내는 무저갱의 바닥 입구를 발견하고 식겁한 것도 잠시 이내 관심을 두면 안 될 것 같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끼면서 다른 동굴들로 향한다.

염마동, 명마동, 광마동, 환마동, 혼마동, 소마동, 용마동(龍魔洞), 불마동(佛魔洞) 그리고 혈마동과 천마동까지.

구마진은 직접 발길을 옮겨 모두 들어가 보았다.

각 동굴은 서로 다른 깊이에 위치에 있었으나 그 동굴의 크기는 작은 수련동 정도로 대동소이했다. 다만 의아한 것은 지면과 벽면엔 음각된 술진의 흔적들은 보였으나 어디에도 마정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찾지 못했다.

하지만, 분명 상당한 존재감을 가진 자들이 왔다 간 흔적들은 있어서 소문으로만 듣던 마정 형성의 과정을 거치고 간 것은 틀림없어 보였다.

물론 그런 흔적 자체가 거의 없다시피 한 곳도 있었다.

불마동과 혈마동, 두 곳이었다.

‘……불마는 성혈신마인가? 불문 내공을 마공과 함께 갖고 있다고 들었는데 그 때문인가? 소마는 뭐지? ……소마동이 사혈신마의 자리인가? 독마동도 아니고…….’

혈마동에 이르러서는 왠지 정식으로 거쳤어야 할 절차를 배려받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쉬운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천마동에 이르러서는 다른 곳보다 훨씬 더 거대한 공동의 크기에 놀라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자연적으로 형성된 용암동굴 속에 또 다른 동굴들을 만들어낸 사실에 대해 전체적으로 다시 한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가만…… 검마동이 비는데?’

잠깐 양자성의 얼굴이 떠올라 의문을 품었다.

이곳이 궁금하여 천산에 다시 오르기 전에 흑각수들로부터 양자성이 구주마종의 신마위는 아니지만, 대신 검마라고 불린다는 정보를 전해 들어서 기억하고 있었다.

의문을 품었지만, 이내 더 생각하길 멈추었다.

양자성이 천마신교에 몸담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신마의 지위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새로운 동굴을 만들어낼 시간적 여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구마진으로선 천마동 뒤에 또 하나의 동굴이 있을 줄은 꿈에서조차 알 길이 없었다.

구마진은 천마동에서 나와 다시 용암비동 한가운데 서서 마지막으로 한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흐음, 마정이란 걸 제대로 보지 못한 걸 제외하면 별거 없는데?”

기대가 컸던 만큼 아쉬움도 작지 않았으니 용암비동을 나가기 위한 발걸음도 터덜터덜 힘이 없었다.

그때였다.

움찔!

구마진은 무언가 등골을 관통하는 섬찟한 느낌에 움찔거리더니 급히 몸을 낮추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행여나 단원진이 다시 돌아온 줄 알고 급히 조각상 뒤로 몸을 숨기면서 잠시 기다렸으나 모습을 드러내는 이도, 다른 기척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후우……! 뭐지? 시발, ……별것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기분 더러워지는군.”

구마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다시 호수로 통하는 통로로 이동했다. 그리고 물속으로 몸을 던져 용암비동을 떠났다.

…….

구마진이 떠나고 잠시 후.

휘이이이잉-!

용암비동 안으로 갑작스럽게 세찬 바람이 불었다.

꽉 막힌 동굴 속에 바람이라니.

용암비동은 사방이 꽉 막혀있는 밀폐된 공간처럼 보여도 암벽의 틈과 얼어붙은 식물 뿌리들, 벽면을 따라 졸졸 흘러내리는 물길 그리고 무저갱으로 공기가 얕게나마 공급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토록 세찬 바람이 통한 적은 이 동굴이 만들어지고 난 이후로 단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바람은 이내 멈춰 고요해졌다.

공기가 유입되는 곳들 대부분이 작은 틈이라는 걸 감안하면 이만한 공기를 뿜어낼 구멍은 단 한 곳밖에 없었다. 이 뜻밖의 변화를 만약 단원진이 아직까지 용암비동에 머무르고 있었다면 절대로 그냥 지나치지 않았을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