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화 – 제58장. 류단아(劉丹牙) (4)
독고양사의 진지한 태도와 무겁게 읊조리는 목소리에 마웅패는 꽤 감명받은 것처럼 보였다.
“……큭큭큭! 노인네가 제법 고상한 뜻이 있구나. 좋다, 내 부하 백 명을 남기고 가겠다. 적룡단에 가입할 자들을 추려서 내 부하 편으로 보내라. 허튼짓만 하지 않는다면 아랑대의 명성을 존중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감사합니다, 적룡단주.”
마웅패는 적룡단원 100명을 남겨두고 떠났다. 그리고 다음 날 독고양사는 적룡단 가입을 희망하는 자들을 가감없이 추려서 보냈다.
공개적인 절차였으며 아쉬움 같은 건 없었다.
세력의 유지보다 부족의 안위가 그에겐 더 중요했으니까.
천여 명에 가까웠던 아랑대는 절반 이상이 떠났다. 그들 중 대부분은 가장 최근에 초닌소유 부족에 들어와 아랑대가 된 자들이었다. 그들은 이 부족의 탄생에 밑바닥을 형성한 벼랑 끝까지 내몰렸던 낙오자들이기보다 일신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 아랑대가 가진 명성의 그늘 밑에 숨어든 자들이었기에 그같은 결정이 이상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대부분이 수년간 동고동락하면서 그 인연이 절대로 얕지 않고 모두 가족이라 여겨왔기에 거기에서 오는 부족원들의 아쉬움이 무척 컸다.
독고양사는 이따금 아쉬움과 섭섭함을 토로하는 부족원들이 있을 때마다 좋은 말로 타일렀다.
“영달이 중요했다고 한들 우리와 함께 한 시간이 녀석들에게도 어찌 소중하지 않겠느냐? 이 정도 남아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니라. 그동안 사람이 많이 모여 배가 많이 불렀는데, 녀석들이 떠나면서 다시 배가 주린 처지가 되었으니 이름대로 되었다.”
아랑대.
굶주린 늑대, 주린 전사들의 부대.
확실히 그 이름의 취지보다 더 큰 명성을 얻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규모가 감소하는 아쉬움보다 부족원을 떠나보내는 안타까운 심정이 더 크다.
폭풍 같던 하루는 그렇게 탈 없이 지나가는 듯했다.
“떠났던 녀석들은 적룡단이 되어서 한 달 뒤에 돌아왔습니다. 놈들이 돌아와서 한 말이 너무 급하게 떠난 것 같아서 적룡단주가 배려하여 회포를 풀고 오라고 했다는 겁니다. 술과 고기를 잔뜩 실은 짐낙타를 몰고 와서 말입니다. 그렇게 잔치가 열렸는데 그게 적을 불러들이는 수단이었을 줄은…….”
호주골의 목소리엔 깊은 회한이 담겨 있었다.
그가 이어서 토로한 이야기들은 꽤 충격적이었다.
오랜만의 전 부족원들과 해후는 반갑기 그지없는 일이었으니 그들이 가져온 술과 고기로 금방 잔치가 벌어졌다. 그리고 늦은 밤 모두가 술기운에 거나하게 취했을 때, 함께 비틀거리며 술 냄새를 풍기던 그들이 장내를 똑바로 걷기 시작하면서 칼을 뽑아 들었다.
제일 먼저 술을 마시지 않은 경비병들을 노리고 돌변한 표정으로 심장에 단검을 꽂아 넣었다. 그리고 전사가 아닌 부족원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기 시작했다. 모극들과 대원들이 변고를 깨닫고 맞서 싸우려고 했지만, 술에 잔뜩 취해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어서 너무나 쉽게 제압당해 버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리 멀지 않은 사방에 적룡단의 붉은 물결이 부족을 포위한 채 대기하고 있는 걸 발견했다.
그 경륜 깊은 독고양사도 허무하게 제압당하여 장내 한가운데에 무릎이 꿇렸다.
독고양사를 붙잡은 건 바로 적룡단으로 간 여섯 명의 모극들.
부족을 떠나 적룡단이 된 모극들과 이젠 포박당한 신세가 된 남았던 모극들이 격정에 가득 차 말싸움을 벌였지만, 당연히 그 자리에서 무엇 하나 해결될 리가 없었다.
여섯 명의 모극들은 초닌소유 부족원들이 보는 앞에서 독고양사의 목을 쳤고 아직 처리하지 않은 부족원들까지 장내에 끌고 와 모두 목을 치고 돌아갔다.
이 상황을 지켜보기 위해 주변을 포위했던 적룡단은 그 참혹한 풍경으로 만족했는지 그대로 돌아가 버렸다.
참극 위에 남은 것은 오직 삼백여 명의 아랑대원들 뿐이었다.
“……그런 충격적인 일로 인해 살아남은 대원들조차 절반가량은 떠나기도 했습니다. 정말 완전히 해체되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다른 모극들이 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한 사람이 류단아였죠. 아랑대는 죽지 않고 계속해서 활동했고 흩어졌던 대원들 일부도 돌아왔습니다. 돌아오지 않은 녀석들 대부분은 말라비틀어진 채 사막에 파묻힌 동료의 시신으로 발견되기도 하고, 다른 부족에게 시비를 걸다가 화살을 맞고 죽었다는 소식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거 참…… 유감이군. 그 뒤로 적룡단이 다시 찾아오지 않았나?”
“찾아왔습니다. 삼 년 정도 흐른 뒤였었나……. 그놈들이 직접 찾아왔지요. 마공을 익혀서 그런지 완전히 달라진 기세를 가진 채 말입니다. 놈들은 우리를 비웃으면서 자기들을 찾아오면 언제든지 적룡단으로 받아주겠다는군요. 조롱이지요. 명백하게 조롱입니다. 우리는 후일을 기약하기 위해 놈들 앞에 머리를 숙인 채 지나갔습니다. 그게 불과 몇 달 전 일입니다. 대장은 놈들을 반드시 쳐 죽이리라 대원들 앞에서 맹세했습니다.”
호주골이 자기 팔에 두른 휘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본래 이 늑대 문양은 붉은색이 아니었습니다만, 그때 놈들을 다시 만난 이후로 복수를 반드시 해야겠다고 다짐하고서 모두 자기 피로 이 늑대를 물들였습니다. 아랑대의 이름을 혈랑대로 바꾼 것도 그때였습니다.”
호주골은 손바닥을 보여주기도 했다. 거기엔 자상의 흉터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황검당원들은 그의 말을 듣고 팔에 묶었던 휘장의 늑대 문양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늑대의 붉은색은 색소로 염색한 것이 아닌 피가 물들어 남은 것이었다.
얼마나 복수에 목말랐으면 그 핏물마저 진득할 정도로 농도가 짙어서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매우 깊은 붉은색으로 남아있었다.
호주골이 진도건을 보았다.
“……무리한 부탁이고 요구라는 거 잘 압니다. 하지만, 꼭 우리가 복수할 수 있도록 도와줬으면 좋겠습니다. 놈들을 우리 손으로 죽여 한을 풀 수만 있다면 우린 당신들의 전쟁에 불쏘시개라도 될 것입니다. 이미 부족장이 죽었던 그날, 우린 사람이 아닌 복수에 주린 늑대가 되기로 맹세했었으니까요.”
호주골의 떨리는 눈빛이, 그의 장황한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 있던 다른 혈랑대원들 눈빛과 합쳐져 진도건의 붉은 눈동자로 빨려 들어갔다.
“아아, 피의 복수로구나! 혈마와 검귀에게 참 잘 어울리는 일이야. 그렇지 않으냐? 하하하핫!”
혈마의 웃음소리에 진도건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마도의 업보란…….’
사천 능운산 하씨 일족이 처했던 그 처지가 다시금 떠오르면서 혈육보다 가깝게 가족을 이루었던 사막 위 낙오자들의 처참한 처지까지 겹쳐서 느껴졌다.
“후우!”
진도건이 고개를 숙이고 폐부 깊숙한 곳에 머물던 무거운 숨을 토해내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살짝 올라간 입꼬리와 조금 가늘어진 눈이 다른 사람이 보기에 웃음 짓는 듯한 느낌이 들었으나 그것이 착각임을 곧 깨달을 수 있었다.
등골이 오싹할 정도의 살기 또는 귀기 같은 게 아주 잠깐 혈랑대와 황검당들에게 퍼졌기 때문이었다.
“갑시다. 대협곡으로.”
그의 목소리에 호주골은 모골이 송연해짐을 느꼈다.
진도건의 눈빛에서 혈랑대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의 불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하소연에 그칠 수 있는 그의 목소리에 공감한 게 틀림없었다.
호주골이 급히 말을 전파하기 위해 고개를 돌린 순간,
“간다! 대협곡으로!”
뒤에서 들려오는 대화소리에 집중하던 류단아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우와아아아아-!
사막의 하늘 높이 울려 퍼지는 그녀의 외침에 전 혈랑대가 일제히 고함을 질렀다.
무공을 익힌 자들이 아님에도 사막의 전사들이 내뿜는 함성의 열기는 거기에 둘러싸인 고수들의 심장을 저릿하게 만들 정도로 불을 지피는 면이 있었다.
“쳇, 사람 흥분시키는군.”
“이래선 돕지 않을 수 없잖아?”
“아니 근데 일만이 넘는 군진을 뚫어서 적룡단을 상대해야 한다며?”
“개죽음이 두렵냐? 쪽팔린 게 두렵냐?”
“둘 다 두렵지, 이 자식아.”
황검당 사이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를 이혁성이 받아 진도건에게 묻는다.
“방법은 있나? 적룡단의 병참기지를 친다는 사실만으로는 명분이 부족하진 않다만, 고작 이 정도로 감당할 규모는 아닌데 말이야.”
“……그 정도 규모가 돼야 할만하지 않겠습니까?”
“뭐?”
이혁성이 되묻는데 앞 열이 모래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기 시작했다. 선봉의 류단아가 대협곡으로 가기 위해 말을 달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진도건이 피식 웃으면서 이혁성과 안효철 그리고 그 뒤의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일단 달리시죠!”
진도건이 질문에 달아나듯 말에 박차를 가하니 이혁성이나 다른 사람들도 더 물어볼 생각은 접어두고 혈랑대와 한 몸인 것처럼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 * * *
제육천마라대전.
“소인 양자성, 천마의 부르심을 받아 인사를 올립니다.”
양자성은 포권지례로서 고개를 깊이 숙여 예를 갖춘 후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파순대좌에 앉은 단지운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으며 그의 양측으로 스칸다와 권영서가 서 있었다.
단지운은 한 손은 턱을 괴고 다른 한 손은 파순대좌의 팔걸이에 손가락을 굴리고 있었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그 상태로 양자성을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첫 만남에 그냥 넘어가긴 했다만, 재밌는 물건을 들고 있구나.”
양자성은 그의 시선이 자신의 허리춤에 닿아 있음을 깨달았다.
“태상교주께서 하사하신 마령검입니다.”
“……마성을 가진 귀물이라. 아버지께선 저런 걸 잘도 숨겨 오셨군.”
무슨 감정으로 얘기하는 것일까?
그의 흥미가 생각보다 강하게 느껴지자 양자성이 허리에 꽂힌 마령검을 왼손으로 쥐고 살짝 당겨 들어 보이면서 고개를 살짝 숙였다.
“……소인, 천마께서 원하신다면 이 검을 바치겠습니다.”
피식!
웃음소리에 양자성이 고개를 들어 단지운을 올려다보았다.
단지운이 얼굴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양자성이 자기 앞에서 처신을 낮추는 모습이 꽤 마음에 든 것이다.
“되었다. 천마로서 그런 귀물 따위에 의지한다면 구주의 신마들이 모두 비웃을 것이다. 더구나 아버지께서 사제에게 준 선물을 뺏는 것도 우스운 일이 아니겠느냐?”
“감사합니다.”
양자성은 대답하면서도 단지운이 사제라는 호칭을 쓴 것에 대해 적잖이 놀랐다. 천마신궁에 들어와 잠시 지내면서도 극히 행동을 조심했던 것이 주효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말이나 하려고 부른 건 아닐 텐데…….’
그가 그런 의문을 가질 때, 단지운도 기다렸다는 듯이 재차 말을 이어갔다.
“자, 그럼 사제의 검마로서 능력을 기대해보고 싶은데. 준비는 되었나?”
“무슨 일이든 맡겨주십시오. 천마신교의 마도대의를 위하여 모든 걸 바치겠습니다.”
“좋다. 너의 능력과 충성심을 시험할 적절한 임무다. 여기 스칸다와 함께 가라. 그와 그의 부하들이 널 뒷받침해 줄 것이다.”
양자성과 스칸다의 눈이 마주쳤다.
‘……감시인가?’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스칸다의 무공이 어떤지도 궁금해졌다. 태상교주 단원진의 신뢰를 받는 자라면 그만큼 일신의 무공도 강력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양자성은 자신이 엉뚱한 데 신경 쓰고 있었다는 걸 곧 깨달을 수 있었다.
‘……능력과 충성심…….’
그 말이 주는 의미가 수상했기 때문이었다.
“임무가 무엇입니까?”
“염황신마가 쫓기고 있으니 그들을 구해와라.”
“염황신마……!”
양자성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그렇다는 것은…….’
단지운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그에게서 흘러나온 목소리가 양자성에겐 그 어느 때보다 무겁게 들려온다.
“그래, 어쩌면 너의 전 스승과 조우할 수도 있겠구나. 백령신검 강정학과 말이야.”
양자성의 눈빛이 가늘게 떨렸다.
‘첫 임무가 하필 스승님에게서 염황신마를, 검림에게서 염황마종을 구해오라는 일이라니…….’
머릿속에 일말의 번뇌가 잠시 스칠 때, 양자성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직도 강정학을 스승으로 여기고 있는 자신의 다른 속내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부모와 자식의 인연, 군주와 신하의 관계만큼이나 강한 인연의 고리가 형성된 것이 바로 스승과 제자의 인연이라는 것을 새삼 실감하게 되었다.
“불편하다면 얘기하거라. 대신할 이를 찾을 테니.”
단지운의 말에 양자성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가 포권을 하며 깊이 머리를 숙였다.
“아닙니다, 교주님. 기꺼이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좋다. 가보라.”
“예.”
양자성이 뒤돌아 나갈 때, 스칸다는 단지운과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의 판단을 잘 지켜보라는 의미였다.
양자성은 흑궁 앞에서 나오는 스칸다를 기다렸다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로 가면 되오?”
“따라오시오.”
스칸다가 그를 지나쳐서 앞서 걷자 양자성이 그 뒤를 바짝 따라갔다.
‘며칠 내 떠나게 될 거라더니 그게 오늘일 줄이야.’
흑궁에 오기 전에 아유타에게 들었던 예견이 떠올랐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 볼 수 있는 예견에 그저 예측일 뿐이었나 라는 생각이 스쳤는데, 그의 이런 생각 또한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이었다.
아유타는 그가 떠나는 상황을 무겁게 보았기에 앞으로 편히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이 없다고 여긴 것이었다.
그것을 양자성이 온전히 이해할 순간은 앞으로도 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 예견과는 달리 그의 신상에 대해 했던 조언만큼은 뼈저리게 되새길 순간이 수면 아래 도사리고 있음을 그는 그 순간에 도달해서야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