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313화 (313/432)

313화 – 제58장. 류단아(劉丹牙) (3)

안효철은 호주골이 말꼬리를 흐리자 그 사연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그러나 이내 이혁성이 다른 내용을 물어보면서 맥을 잘랐다.

“참 이상하군. 그 병참기지에 있는 적룡단을 박살 내고 싶다는 게 저 여대장과 당신들의 요구인데, 그런 천혜의 요새와 같은 지형 속에 병참기지가 있다면 아무리 길을 잘 안다고 한들 공격당할 가능성이 매우 커 보이는데? 그렇지 않소?”

“분명 우리가 대협곡에 진입하면 머지않아 그들이 알게 될 것이오. 하지만, 접근에 약간의 저항은 있을지언정 묻지도 않고 기습해오는 일은 없을 것이오.”

“비책이라도 있는 것이오? 아니면 비밀 통로라던가.”

“그것보단 그들이 우리를 알기 때문이오.”

“안다니?”

“정확히 말하면 거기 있는 적룡단 중 일부가 본래 우리 낭아부족(狼牙部族) 출신이기 때문이오.”

“……적룡단과 혈랑대가 본래 한 부족이었단 말인가?”

안효철이 조금 놀라서 되묻는데 그나마 다행인지 호주골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도 자기가 한 말들이 오해할 만한 지점이 있다는 걸 깨닫고 바로 사과를 하였다.

“오해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적룡단과 우린 엄연히 다른 마적단이오. 그들은 근본부터가 고비 사막까지 아우르던 마적단인 데 비해 우리는 낙오자들이 모여 만든 초라한 부족이 그 시발이었으니 말이오.”

“그럼 그 병참기지에 있다는 적룡단의 일부라는 말은?”

“배신자들입니다. 중원에선 철천지원수(徹天之怨讎)라고 말한다지요. 놈들은 우리의 선우(單于:추장의 흉노식 호칭)이자 아버지를 살해하고 가족과 같은 부족민들을 살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어찌 적룡단주와 적룡단만을 철천지원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세 사람은 호주골의 목소리에 깊이 박힌 증오를 읽을 수 있었다.

그 내밀한 속사정을 모두 알기엔 아직 부족하지만, 이런 생각이 류단아의 생각과 같다면 그녀가 어째서 그런 요구를 해왔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안효철은 턱을 쓰다듬으면서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들의 요구는 분명히 난제였기 때문이었다.

“흐음, 몇 사람을 처치해달라는 거면 바깥에서 소란을 일으켜줄 때 혼자 들어가서 처리하는 식으로 하면 충분해 보이는데, 자네들은 직접 쳐들어가서 무너뜨리고 싶다는 거 아닌가?”

“그렇습니다. 그들은 적룡단이 된 만큼 이미 마공의 고수가 되어 저희가 상대할 방법이 없지만, 당신들이라면 그들을 격파하고 제압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빌게포첸 라마께서 당신을 ‘계시를 따라 걷는 자’라고 칭했으니 무공도 그만큼 강할 거잖습니까?”

“아무리 무공이 강해도 일만여 군사를 뚫고 적룡단이라는 마공 고수 집단을 격파해달라는 건 어려운 일일세. 억지로 뚫고 간다고 한들 안전을 담보할 수도 없고 말이야. 자네 대장이 우리에게 자네들과 함께 가면 사막에서 개죽음을 피할 수 있다고 했는데, 대협곡에 있는 적진을 공격하려 든다면 자네들과 같이 갈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니 계책을 내달라는 것이지요.”

“허허허, 자네도 대단히 막무가내로군.”

안효철은 어이없어 실소를 흘렸다.

하지만, 그를 비롯하여 이혁성이나 서파파 같이 경륜이 깊거나 지도자적 자질을 가진 사람들 몇몇은 류단아가 요구할 때부터 호주골이 설명을 이어온 지금에 이르러서, 이들이 무엇에 기대어서 설령 헛된 목표일지라도 이토록 간절히 바라고 있는지 조금씩 알아채고 있었다.

빌게포첸이 남기고 간 말이라는 ‘계시를 따라 걷는 자’.

빌게포첸이 만약 이들의 정신적인 지주격의 위치에 있다면 그가 남긴 그 단문이 가리키는 상징은 대단히 신성한 의미가 담겨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리고 그 대상자로서 진도건을 지목하고 떠난 것이었으니 알게 모르게 생긴 맹목적인 믿음으로 인해 그를 향하여 기적을 갈구하는 것이었다.

‘이 시국 속에서 자네는 계속해서 역할을 요구받는군. 진도건, 자네는 무슨 기적을 보여주어 이 난제를 타개해 나갈 것인가?’

안효철의 시선이, 그밖에 이해가 깊은 몇몇 시선이 진도건에게 닿았다.

진도건은 호주골을 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들의 아버지에 관한 얘기도 들을 수 있나?”

“……물론입니다.”

호주골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희미한 쓴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사막과 초원을 돌아다니는 유목부족들은 정말 많았는데 그래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거대 부족들도 있기 마련이었다.

몽골초원에서 흑풍대가 착취하였던 타타르족이나 카마크 몽골의 한 부족인 예수게이의 키아트 가문, 케레이트 부족 등이 바로 그런 거대 부족들이었다.

반면 그들에 끼지 못하고 작게 무리를 형성하여 유목생활을 이어 나가는 부족들도 있었다. 이들은 대게 초원의 패권을 다투는 지역에서 벗어나고자 했는데, 그들 사이에 자칫 잘못 끼었다가는 약탈의 대상이 되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끊이지 않은 부족 간의 분쟁과 약탈, 노예로 삼는 행위들이 누적되면서 부족의 크기와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낙오자들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자신의 파오에서, 메마른 사막에서, 시라무렌강적은 의 유역의 산속에서 죽음을 맞이하곤 했지만, 일부는 큰 흐름의 대오에서 이탈하여 근근이 연명하면서 정처 없이 떠돌기도 했다.

부상자들, 기력이 쇠한 노인, 칼을 쥐지 못한 여자, 부모를 잃거나 버려진 고아 등등.

어느 순간 이런 낙오자들이 모여서는 서로를 의지하며 만든 작은 부족들이 다시 생겨났지만, 마적단의 먹잇감이 되어 벼랑 끝까지 내몰리게 되는 상황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그런 악순환의 고리 속에서 지금으로부터 약 40여 년 전에 스스로 낙오자들의 보금자리가 되겠다면서 나타난 한 남자가 있었다.

이름은 독고양사(獨孤洋沙).

그에 관한 과거의 자세한 행적은 제대로 알려진 건 없었다.

대금 군벌의 서자 출신이면서 임관하지 않고 중원을 시작으로 북방 초원을 두루 떠돌았던 여행자라는 것 외엔.

그는 낙오자들의 부족들을 규합하고 그들에게 다시 칼과 창, 도끼를 주었다. 또 가까이에 있는 거대 부족 중 하나인 나이만 부족으로부터 몇 년간 군마 관리의 잡무를 맡는 대신에 마적단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게 협상을 끌어내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을 벌어 적당한 군사적 역량까지 갖추게 되었을 때, 마침내 초닌소유(чонын соёо : 늑대 송곳니) 부족이 되어 자립하기에 이르렀다.

낙오자인 자신들을 빠진 이빨로 비유했을 때, 자기들끼리 다시 모여서 마침내 늑대가 되었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전투조직으로 백 기의 아랑대(餓狼隊)를 구축하여 자기들을 괴롭힌 부족들에게 복수하기도 하면서 사막과 초원에서 신생 마적단으로서의 명성을 얻기도 했다.

“대장이 우리 부족에 들어온 건 딱 아랑대가 창설된 그 해였습니다. 그때 그녀는 타타르족에 팔려나간 노예였었죠.”

호주골이 선두에 보이는 류단아의 뒷모습을 슬쩍 보았다. 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잠시 그녀의 등에 닿았다.

“듣기론 대장의 옛 조상이 선비족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족과 오랫동안 같이 살다 보니까 그 점을 잊고 살아왔는데 가까웠던 한족 이웃이 대장의 가족을 모함하여 그녀를 제외한 일가족 모두가 죽도록 만들었나 봅니다.”

“그래서 굳이 스스로 선비족이라고 한 모양이군.”

안효철이 류단아의 말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호주골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을 이었다.

“모계에 걸쳐서 선비족 시절의 말과 문화가 가문에 잊히지 않도록 후손에게 전해 온 것이 순수 한족 혈통의 이웃에겐 아니꼽게 보였던 모양입니다. 군사기밀을 취득해 송나라 첩자에게 전달해왔다고 모함했는데, 여진족과 같은 뿌리인 선비족 출신이란 점까지 부각되면서 그녀는 노예로 팔려나가고 가족과 가문이 몰살당했습니다. 그러니 자신에게 있는 한족의 피까지 부정하면서 선비족이라고 고집할 정도면 그 배신감이 오죽했겠습니까?”

“그렇게 한족에게 치를 떨면서 우리에게 부탁 아닌 요구를 해오는 건 조금 모순되지 않소?”

이혁성이 끼어들어 묻자 호주골이 다시 쓴웃음을 지었다.

“대장이 귀하들을 대하는 태도가 퉁명스러운 정도로 끝난 건 더 큰 배신감이 옛 배신감을 덮은 것 때문이 아니겠소이까?”

“으음, 계속해보시오.”

“타타르족은 금나라와 마찰이 잦았는데 때마침 그들의 야성을 다스릴 필요가 있다고 여겼던 그 화북지방 관리가 노예들과 물자들을 갖춰서 족장에게 보낸 것입니다. 그 정보를 케레이트 부족에게서 듣고 나서 족장은 그 행렬을 습격하여 물자와 노예들을 가로채기로 했죠. 그때 거기서 야음을 틈타 감시병을 죽이고 탈출하던 대장을 봤습니다. 족장은 열여섯 소녀의 그 강단을 인정했고 거기 노예들을 부족으로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십 년 이상 함께 살았습니다. 왜인지 대장은 족장을 아버지라고 불러서 우리도 가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의 성인 류씨는 순수 선비족이었던 모계의 조상들이 화북에 자리 잡을 때 고친 것이라고 합니다. 그 고치기 전의 성씨가 바로 독고라고…….”

다른 부족민들은 족장 독고양사를 아버지라 부르던 그녀를 좇아 장난처럼 아버지라고 따라 부른 것이었지만, 그녀가 부르는 ‘아버지’라는 호칭엔 그녀만의 절절한 이유가 있던 것이었다.

“정말 친아버지처럼 따랐겠소. 그래서 분노가 더 큰 것이야.”

“족장에게 선우라고 칭한 것도 그녀였소. 선비족 이전의 유목민족 대제국인 흉노의 풍습을 빌어 족장에게 보낸 찬사와 같은 것이었소. 여진과 금의 맹안모극제를 부족에 도입한 것도 그녀였고.”

한족의 정체성을 모두 부정하면서 스스로 선비족이라고 자칭했던 류단아는 말 그대로 유목민족의 정체성만을 고집한 것이다.

그런 나름의 이유들이 더해지면서 그녀를 비롯한 부족원들은 독고양사를 초원과 사막의 낙오자들을 위한 구세주와 같은 존재로 여기고 있었다.

옛 흉노에서 황제의 의미로 쓰이던, ‘하늘의 아들’이란 의미이기도 한 선우의 호칭만이 그에게 어울리는 찬사라는 그녀의 주장처럼 말이다.

“그 시기에 우리 부족과 아랑대는 규모가 거의 일천에 가까울 정도로 빠르게 성장했소. 그리고 그때는 적룡단의 활동이 무슨 연유에서인지 해체라 생각될 정도로 잠잠했던 시기였소. 자연스럽게 우리의 명성은 적어도 고비 사막 남쪽 지역에선 적룡단에 버금갈 정도가 되었는데, 결국 그게 바로 화근이었소.”

“적룡단이 잠잠했던 건 천마신교와 관련된 이유 때문이었나?”

진도건의 물음에 호주골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랬을 것이오. 우리 앞에 나타난 그들은 소문보다 훨씬 더 무시무시한 존재로 탈바꿈해 있었으니 말이오.”

그의 어깨가 일시 부르르 떨렸다.

적룡단에 대한 공포가 여전히 가슴 한구석에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단지린 사막의 한 오아시스 군을 중심으로 순회하면서 영역을 행사하고 있던 초닌소유 부족 앞에 적룡단이 붉은 물결처럼 나타났다. 수천의 군세라는 규모의 부담감보다 그들 자체로 풍기는 살기의 중압감이 초닌소유 부족을 더 강하게 짓눌렀다.

그 두려움대로 적룡단이 공격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적룡단주이자 적룡신마 마웅패가 단신으로 말을 타고 걸어 나와 초닌소유 부족 한가운데에 들어와서는 부족장인 독고양사를 찾았다.

“네가 아랑대의 대장 독고양사인가?”

이때 독고양사의 나이 여든.

“그렇습니다.”

“긴말하지 않겠다. 나 마웅패는 아랑대의 명성을 존중한다. 그래서 너희가 적룡단의 산하에 들어오길 바란다. 자발적으로 적룡단의 전력이 된다면 부족을 유지하는 데 그 어떤 위해도 가하지 않으리라.”

그때 초닌소유 부족민 모두는 독고양사가 마웅패의 제안을 받으리라 생각했다.

당장 마주한 적룡단의 기세가 대단히 무섭고 두려워서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었지만, 적룡단으로서 싸운다는 것도 전사들이라면 대부족의 장수로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구미가 당기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산하 부족으로서 보호해준다는 말이 아닌가?

이 부족의 탄생부터 지금까지 지켜온 독고양사라면 고령인 나이를 고려했을 때, 후대 걱정하지 않고 충분히 받아들일 만한 조건이라고 여겼다.

“거절하겠습니다.”

독고양사는 덥수룩한 수염 안으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 대답에 모두가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마웅패가 피식 웃으며 되묻는다.

“왜지?”

“이곳의 사람들은 사막과 초원의 패권을 두고 다투는 맹수들에게서 빠져버린 송곳니와 발톱들에 불과합니다. 모래에 파묻히거나 누군가의 장신구가 되어버릴 그들을 다시 묶어서 늑대로 만든 게 지금입니다. 늑대에 불과한 우리가 용의 발톱만 하겠습니까?”

“크크큭! 우리라고 시작이 하찮지 않았겠느냐? 늑대의 송곳니가 용의 피륙을 덮으면 그땐 용의 송곳니가 되고 발톱이 될 터.”

독고양사는 그를 향해 납작 엎드렸다.

“용의 송곳니와 발톱이 되고픈 자가 우리에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아이들이라면 얼마든지 데려가서 쓰십시오. 하지만, 우리는 다른 떨어진 이빨들을 위해 다시 굶주린 늑대로 남아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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