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312화 (312/432)

312화 – 제58장. 류단아(劉丹牙) (2)

‘……응?’

그의 감각에 또 다른 기척들이 느껴졌다. 그건 안효철이나 이혁성 등 몇몇 고수들도 마찬가지였는데 사방을 어지러이 교란하는 마적들의 기척 너머로 또 일단의 무리가 접근하고 있었다.

특히 좀 더 예민한 감각을 지닌 세 사람만큼은 그 새로운 무리의 기세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진도건이나 이혁성은 뽑던 검을 다시 검집에 꽂았다. 그리고 변화는 곧 일어났다.

채채챙!

“으악!”

“끄아악!”

금속성과 비명들이 들려오고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까지 퍼져나갔다.

황검당 주위를 맴돌던 마적단이 갑작스러운 혼란을 겪는 듯하더니 말머리의 방향을 바깥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저것들 왜 저래?”

“다른 무리가 나타나 저 녀석들을 기습했다. 잠자코 기다려보자.”

염탄이 가진 의문을 이혁성이 풀어주었다.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지는 모양이었다.

사구 때문에 시야가 제한적이었지만, 주변을 맴돌던 마적들의 수가 점점 줄어들었고 그들의 신경도 대부분 바깥으로 쏠려 있는 게 보였다. 병장기가 부딪치다가 칼에 맞아 낙마하고, 그로 인해서 진형이 무너지는 모습들도 차츰 보이고 있었다.

황검당 쪽도 의식하는 눈치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럴 여유를 찾지 못할 정도가 되고 있었다.

이윽고 마적단이 뿔뿔이 흩어지듯 퇴각하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일어난 모래 먼지도 그들이 달려 나간 바깥 방향으로 천천히 쫓아가다 가라앉는 모양새였다.

진도건이 안효철과 이혁성 등을 돌아보며 웃음지었다.

“자, 어떤 사람들이 우릴 구해줬는지 확인해보시죠.”

“구해줬다라. 그거 재밌는 말이로군.”

진도건의 말에 안효철이 실소를 흘렸다.

그들은 말을 몰아 눈앞에 보이는 낮은 사구 위로 빠르게 올라갔다. 그리고 달라지는 풍경 속에서 달아나는 마적단을 보며 휘파람과 함께 환호를 지르는 또 다른 마적단을 볼 수 있었다.

‘겉모습은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붉은 늑대의 휘장(徽章)이라.’

직전에 그들을 포위했던 마적단은 별로 위협이 되지 않았기에 면밀하게 관찰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지금 보이는 마적단은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늑대 머리 문양이 붉게 수 놓인 흰 천을 왼팔에 두르고 있어서 눈에 쉽게 띄었다.

붉은 늑대 마적단은 진도건 일행을 포위하지 않았다. 그저 흩어지듯 퍼져나갔던 동료들을 모아가면서 진도건 쪽을 흘깃거리며 보고 있었다.

‘적의는 없으나 관심은 있는 건가? ……이런 내가 놓치고 있을 줄이야.’

“큭큭! 여유나 부리긴.”

혈마가 비아냥거린 건 다름이 아니라 붉은 늑대 마적단 안에서 마기의 흔적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숫자는 어림잡아 일백 기마 정도에 불과했으나 천 명의 마적단을 쫓아낼 정도로 개개인으로서도, 집단으로서도 전투력이 상당했다. 그런 수준이 무리를 이루어 군세가 일어나니 그리 짙지 않은 마기가 모래폭풍에 시야가 가려지듯 감각에서 놓쳐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마교도로 단정하기엔 그 기색이 짙다고 보기도 어려웠다.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그 당사자인 여인이 말에서 내려와 진도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목 부족의 여전사다운 느낌을 품은 선명한 인상을 가진 여인이었는데 얼굴 왼쪽엔 턱과 이마선을 따라서 팔의 휘장과 같이 늑대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듯한 문신이 특징적이었다. 그러나 흘러나오는 마기는 아주 미세한 것이어서 그녀가 마공을 익혔다고 단정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쩐지 진도건은 그녀를 보자마자 당문에서 헤어진 야율균은을 떠올렸다.

“그쪽이 진도건인가?”

“그렇다.”

“빌게포첸 라마께서 빨간 머리라 눈에 잘 뜨일 것이라고 설명했을 땐 웃어넘겼는데, 틀린 말이 아니었군.”

그녀가 진도건의 외견을 신기하다는 듯 훑어보았다. 그리고 익숙하게 시선을 받아넘기는 그를 보면서 자신을 소개했다.

“내 이름은 류단아(劉丹牙). 이 혈랑대(血狼隊)의 대장이다.”

“……혈랑대.”

휘장의 문양은 붉은 늑대가 아닌 피를 뒤집어쓴 늑대인 모양이었다.

적은 인원으로도 더 많은 숫자의 흉악한 마적단을 쫓아낼 정도의 전투력을 가진 데다가 그 대장이 여자인 것, 그리고 그 대장에게서 미약하게나마 마기의 기척이 느껴지는 건 이들의 이력이 궁금해지게 하는 대목이었다.

“빌게포첸. 그가 마교, 천마신교의 성혈신마라는 걸 알고 있나?”

“그분은 내가 의지하고 있는 성혈교의 라마이시지만, 그렇다고 우릴 천마신교와 같은 편으로 엮지는 않았으면 좋겠군.”

진도건은 잠깐 류단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여장부의 인상은 강한 편이지만, 확실히 야율균은처럼 마공을 제대로 익힌 몸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그렇다고 느껴지는 마기의 기색이 빌게포첸의 그것과 비슷하지 않았다.

빌게포첸은 일신에 유지하고 있는 불문의 무공과 합쳐져서 여태 다른 신마들에게서 느꼈던 극단적인 흉성(凶性)이 희석된 느낌이었다. 그러나 여단아에게서 묻어나오는 마기는 빌게포첸보단 다른 신마나 보통의 마교도와 같은 흉성을 품고 있었다.

“웬 놈이 이 여자에게 영향을 미친 모양이다.”

혈마의 이야기에 진도건도 속으로 수긍하며 입을 열었다.

“내게 볼 일은?”

“라마께서 당신이 ‘계시를 따라 걷는 자’라고 얘기하면서 사막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라고 하셨다.”

“계시를 따라 걷는 자?”

“무슨 의미인지는 몰라. 하지만, 성혈교는 대라마이신 아유타의 계시로 모인 교단이다. 적어도 그 말뜻은 당신이 그들에게 중요한 인물이라는 소리니까 우리도 도우려는 거다.”

아리송한 말에 진도건이 갸웃거리고 있을 때,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여희선이 웃으며 말했다.

“우린 잘 가고 있는 것 같은데요?”

류단아가 피식 웃었다.

“맞아. 잘 가고 있어. 그리고 아까처럼 가는 길에 또 마적단에게 방해받거나 천마신교에게 습격받겠지. 우리야 사막에서 나고 자란 몸이라 이곳에서 죽는 게 당연하지만, 당신들도 과연 그럴까?”

황검당원 중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우리가 그리 호락호락해 보이더냐?”

“그쪽이야말로 우리 실력을 얕보고 있는 모양인가 본데, 만약 아까 마적단이 우리가 아닌 그쪽이 쫓아냈다면 그들은 다음 수를 준비해서 다시 찾아올 거다. 사막의 마적단이 무서운 건 그 전투력이나 잔인함 같은 게 아닌 집요함이니까. 그리고 그게 당신들 목표는 아니잖아?”

그 황검당원이 다시 반박하려는데 이혁성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럼 네 도움을 받으면 그런 방해를 피할 수 있을 거란 말인가?”

“사막에 부족이나 마적단의 수는 정말 많지만, 적어도 여기 텡그리 사막과 서쪽의 바단지린 사막에서 우리 혈랑대를 건드릴 수 있는 마적단은 없다. 고비로 확장해도 그렇고. 또 우리만큼 사막 부족 대부분과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집단도 없다.”

“편하게 갈 수 있단 말인가?”

“그래. 하지만, 그 대신 어려운 부탁 하나를 들어줘야 한다.”

“……너무 막무가내로군.”

가만히 듣고 있던 서파파가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며 중얼거렸다.

갑자기 나타나 도와주겠다고 하면서 대신 어려운 부탁 하나를 들어달라는 요구는 모순되기 때문이었다.

“어렵지만, 달성하면 너희 전쟁에도 큰 도움이 될 일이다.”

류단아가 서파파를 힐끔 보면서 말했지만, 이미 황검당 사이에서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나왔다.

막무가내식으로 말을 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일개 마적단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상황에 대한 짜증이 더 많았다. 무림 고수인 그들에게 눈앞의 마적단은 당장에라도 쓸어버릴 수 있는 존재로밖에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만약 진도건이 그녀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다면 당장 검을 뽑고 혈랑대를 쫓아내려는 자들이 나왔을지도 몰랐다.

“무엇을 도와달라는 것이오?”

진도건이 그녀에게 물었다.

“……적룡단의 병참기지.”

류단아는 진도건과 대화 중에 다른 사람들도 끼어들어서 이런저런 말을 쏟아냈으므로 그들 모두에게 시선을 던지며 대답했다.

사막 어디 깊숙한 데로 가달라고 할 줄 알았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에 그 대답은 정말 뜻밖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무엇을 입 밖으로 꺼냈는지 깨달았을 때, 눈빛이 반짝일 정도로 당장 솔깃하게 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여희선은 비교적 냉정하게 그녀의 말을 곱씹어보고 있었다.

“적룡단의 병참기지면 방비가 허술하지 않을 텐데? 그쪽이 얕보는 우리의 이 숫자만으로도 할 수 있는 게 있단 말이야?”

“그건 그쪽들이 알아서 생각할 일이고.”

“호호호! 당신 꽤 발칙하네?”

류단아의 싸가지 없는 태도가 여희선의 심기를 건드렸다.

약하게나마 살기까지 흘러나오자 옆에 있던 이혁성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으며 침착함을 요구할 정도였다.

그때 진도건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좋다. 같이 가지. 병참기지에 관한 얘기는 가면서 듣도록 하고. 이 당주님, 괜찮겠지요?”

“……그러지.”

동의를 구하는 물음에 이혁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류단아는 무림인들의 기세가 두려울 법한데도 개의치 않고 오히려 조용히 코웃음을 치면서 몸을 휙 돌렸다. 그리고 북방 유목부족들의 언어로 부하들에게 뭔가를 지시하기 시작했다.

곧 혈랑대 사이에서 이십여 명이 다가오더니 팔에 묶어둔 휘장을 풀어 황검당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절반 정도는 그 휘장을 팔에 묶고 겉옷을 교환하시오. 복색이 우리와 어우러져야 바깥의 의심을 피하기 쉬울 테니까.”

류단아가 그 행동에 설명을 덧붙였다.

“……당신은 한족인가?”

가만히 흘러가는 걸 지켜보던 안효철이 류단아를 보며 물었다.

한어와 유목민족의 언어 양쪽을 자유롭게 구사하는 게 신기해하면서도 류씨라는 성이 한족식 성씨였기에 묻는 것이었다.

하지만, 류단아의 대답은 안효철의 예측에서 조금 빗나갔다.

“선비족(鮮卑族)이오.”

지금은 스스로 선비족이라고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수백 년 전에 그들이 동북방의 시라무렌강 유역에서 크게 부흥하여 중원을 침략한 역사가 있었으나 종국엔 화북지방에서부터 한족과 융화되어 살면서 그 혈통이 퇴색되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똑같이 시라무렌강 유역에서 발호한 유목부족의 다음 세대라 할 수 있는 요나라의 거란, 금나라의 여진족도 같은 갈래라고 볼 수 있겠지만, 선비족이라는 건 엄연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이름임엔 틀림없었다.

그때 류단아가 몸을 휙 돌리면서 혈랑대 쪽으로 돌아갔다.

그 잠깐 사이 그녀의 반응을 볼 수 있었던 안효철과 진도건이 서로를 쳐다보면서 눈빛을 맞췄다.

어째선지 조금 차갑게 느껴졌던 그녀의 반응에서부터 무언가 남모를 사연이 있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가서 부하 둘을 불러 뭐라 지시하였는데, 그 두 사람이 이내 진도건 쪽으로 다가왔다.

“전 호주골(虎主骨), 여긴 조위발(早委拔)입니다. 혈랑대를 구성하는 세 모극(謀克)의 둘이 바로 우리 두 사람입니다. 조위발 모극이 행군을 도울 것이고, 제가 병참기지에 관해 설명해드릴 것입니다.”

“그럼 혈랑대장이 맹안(猛安)인가?”

“오, 잘 아시는군요. 그런 셈이지요.”

호주골이 안효철의 식견을 칭찬했다.

금나라를 세운 초대황제 완안아골타는 여진족을 기존의 부족제에서 이원적 통치방식인 맹안모극제(猛安謀克制)로 개편 통치하였는데 행정과 군사제도가 결합된 이 체제를 기반으로 중원의 패자가 될 수 있었다.

비록 지금은 송나라의 제도를 들여와 나라의 제도를 재정비한 지 오래지만, 유목부족에게는 매우 효율적인 전시체제로서 역사가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진도건 등과 황검당은 혈랑대의 무리 사이에 끼듯 섞여 들어가서 함께 행군하기 시작했다.

류단아는 선두에서 행군의 방향을 통솔하였고 무리 중열에 위치한 진도건과 안효철, 이혁성 등의 옆에는 호주골이 함께 말을 타고 움직이면서 적룡단의 병참기지와 그 밖의 궁금증에 대한 대답을 해주고 있었다.

호주골의 설명에 따르면 적룡단 병참기지가 있는 곳은 아단대협곡(雅丹大峽谷)의 가장 깊은 곳이라고 했다.

감숙을 관통하는 비단길을 달리 하서주랑(河西走廊)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길의 중앙엔 장액(张掖)이라는 마을이 있었으며 바로 북쪽엔 용수산(龍首山)이 있었다. 이 하늘을 바라보며 우뚝 솟은 용수산의 서북쪽으로 가파른 산지가 겹겹이 장대하게 펼쳐진 대협곡이 존재하는데 그 중심부 어딘가에 적룡단의 병참기지가 있다는 것이었다.

아단(雅丹)이란 것은 메마른 사막에서 토암(土巖)이 풍화되어 기이한 형태가 된 걸 회골족이 부른 말이었는데 이 대협곡도 그 아단지대와 가까이 있어서 사막 부족들에게 아단대협곡이라고 불려왔다.

“언덕 꼭대기를 하나의 봉우리로 보면 일천봉(一千峰)이 펼쳐져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협곡 사이로 넓은 길도 있지만, 그 중심부로 가려면 정말 절벽에 둘러싸인 협소한 길목도 뚫고 가야 합니다. 그런 곳에서 한번 길을 잃으면 빠져나오기가 어렵고 전투라도 벌인다 치면 매복하기 좋은 곳이기도 하지요.”

“너흰 거길 지날 수 있고?”

“대부분 거길 드나든 경험이 있는 데다가 전문 길잡이도 있습니다. 조위발 모극이 그중 하나기도 하지요.”

“그런 험난한 지형에 드나든 경험이 있다고 얘기할 정도면 거기에 뭔가 있나 보지?”

“하하, 사연이 있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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