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310화 (310/432)

310화 - 제57장. 합의안(合議案) (5)

문중이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는데 누가 손가락으로 콕콕 찌르는 게 느껴졌다.

“응?”

“뭔데 저렇게 좋아해요?”

돌아보니 하소정이었다. 그녀도 구 천혼당의 실력자로서 적멸당에 들어온 것이었다.

“진도건이 서신을 보냈거든.”

“어머. 어휴, 좋을 때다.”

하소정이 짐짓 놀라는 척하며 웃음을 짓자 문중이 피식 웃었다.

“자네도 이젠 시집가야지?”

“전쟁하러 가는 마당에 무슨 시집이에요? 살아남는 것부터 생각해야지.”

“하긴, 이 중에서 살아 돌아갈 자들이 과연 몇이나 될지.”

문중이 주변의 적멸당원들을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백두기의 지휘 아래 정말 혹독하게 지도받아 집단적 대처 능력은 물론 개개인의 실력까지 일취월장했지만, ‘전쟁’이라는 두 글자는 다른 어떤 싸움보다 더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지점이 있었다.

“부당주님도 걱정이란 걸 할 줄 아시네요? 냉철하기만 하실 줄 알았는데.”

“나라고 이 정도의 전쟁을 겪어본 적이 있었겠느냐? 이건 선대가 치렀던 정사전쟁들보다 더 큰 전쟁이네.”

“하긴 그렇지요. 정사가 연맹을 맺어서 마도가 더는 발호하지 못하도록 뿌리를 뽑으려 드는 전쟁이니. ……성공할 수 있을까요?”

“글쎄? 중원에서 벌이던 음모들을 털어내는 데 성공했으니 예봉을 꺾은 셈이나 마찬가지지만, 놈들은 여전히 겪어보지 못한 미지의 적들이나 마찬가지니까…… 자네도 상시 긴장감을 유지하게. 당장 보이는 건 적룡마종이지만, 또 어떤 적들이 튀어나올지 모르니.”

“그래야죠. 저희 조는 특히 자룡이와 노 장로님 죽음 이후로 다들 각오는 단단하게 해둔 상태에요. 아마 이 각오는 마교가 무너지는 날이 오기 전까지는 절대 풀리지 않겠죠.”

하소정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지만, 눈빛에서는 결연함마저 느껴지자 문중은 자연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한편 천서은은 서신을 천천히 쓰다듬듯 만지면서 잠시 추억을 되새기고 있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개봉하여 그리 길지 않은 내용을 떨리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하오문에서 맹주님께 보고할 내용을 전서구로 보낸다는 얘기를 듣고 네가 생각나서 급하게 붓을 들었어.

어젯밤 여기에서의 싸움은 무사히 끝났어.

다만 앞으로는 혈마의 의식이 잠들지 않을 것 같아. 지금도 머릿속에서 날 놀리네. 서은이가 걱정하는 걸 잘 알고 있지만, 나와 혈마가 예전처럼 적대적인 관계는 아니야. 걱정할 필요 없다고 얘기하고 싶지만, 우린 이 녀석에 대해 안 좋은 과거가 있으니 그렇게 말하는 것도 부질없게 느껴지기도 해.

황검당과 이혁성 당주님을 만났어. 그리고 비무제 때 만났던 난약파의 여희선을 기억하지? 그녀도 황검당과 함께 움직이고 있어. 이 당주님에게 마음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두 사람이 언제부터 이 정도로 가까워졌는지.

당분간 나와 안 대협은 황검당과 같이 움직일 거 같지만, 혈마가 감지하는 것들이 있어서 다시 따로 움직이게 될지도 모르겠어. 그래도 서은과 내가 다시 만날 수 있는 자리가 다시 만들어지겠지.

사랑해, 보고 싶어.

다시 만날 날을 기다려.”

천서은의 말려 올라간 입꼬리는 쉽게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다지 중요한 대목이라고 할 건 없었지만, 그저 일상을 알려주면서 그녀의 마음을 신경 쓰는 듯한 이야기 자체가 기분이 좋았던 것이다.

“곧 출발한답니다!”

한 적멸당원이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천서은은 서신을 다시 고이 접어서 품속에 잘 갈무리하였다. 그리고 최근 들어 가장 가벼운 걸음으로 적멸당원들을 지나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를 위해 길을 내어주는 적멸당원 사이로 천무경과 백두기 두 사람의 거대한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천서은은 그 둘 사이로 쏙 들어가 팔짱을 끼었다.

두 사람의 두꺼운 팔을 모으면 천서은의 비교적 가는 두 팔 안에 한 아름 될 것 같았다.

“허허허! 어젠 수련이 힘들다고 불평하더니, 오늘은 또 웃음꽃이 만발하는구나. 뭐 좋은 일이라도 있느냐?”

“도건이 직접 쓴 서신을 받았지요.”

천서은이 흥얼거리듯 대답하자 백두기의 얼굴에 짓궂은 표정이 떠올랐다.

“그 숫기 없는 놈이 그럴듯한 시구라도 남겼나 보지?”

“아니요.”

“그럼 무슨 내용이길래 네가 그리 헤벌쭉한 게냐?”

“그냥 거기서 있었던 일들 알려주었죠.”

“어허! 그놈 참, 감도 없는 녀석이로고. 여자를 위해 붓을 들었으면 낭만적인 시구 하나는 일필휘지로 남겨줘야 감동하는 법이거늘.”

천서은은 진도건이 괜히 자기 때문에 욕먹는 거 같아 입술을 삐죽 내밀며 한마디 던졌다.

“할아버지, 꼰대.”

* * * *

양국의 장군이 거둔 합의에 의해 결성된 조고(趙孤) 연합군은 이틀에 걸쳐서 위수협의 팔 할이 되는 지점을 지나게 되었다. 그리고 창천맹과 천무방 무림인들에게 호위받으며 하룻밤 휴식을 취한 연합군은 이른 아침부터 천수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공격을 시작하고 반 시진 만에 천수성이 연합군의 손에 떨어졌다.

조태상이 이전에 그랬듯 적룡단도 천수성을 버리고 난주성까지 퇴각한 것이었다.

마웅패는 청해성부터 함께 했던 군사들은 대부분 난주성과 천수성 그리고 지나온 관문들에 분산된 상황이었다. 즉, 서하로부터 증원군을 받기 시작한 이래로 그들만 앞세워서 전쟁을 치러왔던 것이었다.

조고 연합군도 진군을 지체하지 않았다.

조태상은 5천의 군사를 천수성에 주둔시킨 후, 남은 전력을 모두 편성하여 난주성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난주성에 적군이 집결하고 있다는 첩보가 있었다.

창천단과 백무당이 적극적으로 전개하여 기습에 대비하면서도 군세를 확실하게 유지하여 진군하니 사흘 만에 난주성을 바라보는 낮은 언덕 쪽에 지휘소를 세우고 군사들을 재편하여 대형을 세울 수 있었다.

“첩보에 따르면 난주성의 주둔군이 약 사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조태상이 정찰병이 전달한 죽찰을 펼쳐 읽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에 적혀있는 글귀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적군 이만 명은 하나라 백기군이라고 합니다.”

“도호부의 전갈을 받지 못하고 마교의 손아귀에 붙잡힌 건가……!”

고소덕이 안타까운 마음에 침음성을 삼켰다.

그 옆에서 조태상이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마교의 증원군으로 백기군이 희생되지 않도록 도호부에서는 분명 출진해있던 각 군에 신속하게 파발마를 띄웠을 겁니다. 다만 고 장군이 칼을 반대로 돌렸다는 걸 안 적룡단주가 다른 성들에 이 사실을 전파하고 장수들을 직접 감시하는 태세로 돌아섰다면 도호부의 전갈을 받았다고 한들 감히 등을 돌리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 말도 일리가 있구려.”

“놈들은 아무래도 농성을 할 것으로 보입니다. 장군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고소덕이 침울한 표정이 되었다.

하나라 군사끼리 싸워야 하는 불가피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었다.

연합군의 결성을 잠깐 후회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이 또한 그의 선택으로 만들어진 큰 흐름이었다. 이제 와서 거스른다 한들 훗날에 더 큰 위험으로 돌아올 것이 분명했다.

천마신교를 상대로든, 금 제국을 상대로든 말이다.

“좌우군으로서 같은 대오로 공성전을 전개할 것이오. 조 장군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고맙습니다, 장군.”

두 장군은 중앙의 연합지휘부 막사에서 나와 각군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난주성을 점령을 목표로 공성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장장 14일간 벌어진 난주공성전.

적룡단조차 성벽 위에서 무림인들의 침입을 방지하는 행동만 취하는 등 야전이나 유격전은 배제한 채 철저하게 버티고 버텨는 농성전만 고집했다. 군사 전쟁 중에서도 특히나 공성, 농성전 등이 그들의 장기가 아님에도 가능했던 것은 억지로 최일선에서 싸우게 된 서하의 군사들 때문이었다.

그들도 같은 편과 싸운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자신들이 하루라도 더 살기 위해선 가진 힘을 모두 쥐어 짜내고 가진 기술들을 모두 펼쳐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전쟁의 지루한 시간 속에서도 드러나지 않는 곳곳에서 중요한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었다.

* * * *

난주공성전이 진행 중이던 어느 날.

천산 박격달봉 정상의 빙첨탑에 일단의 무리가 모여있었다.

차르륵!

쇳조각 같던 얼음 파편이 부서져 흩날리고 만년한철의 사슬들이 움직이면서 속박을 풀어내었다.

이를 행하는 거구의 남자는 ‘무영 사’였으며 해방되는 자는 다름 아닌 구마진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혈마 구마진님. 이젠 뜻을 펼칠 일만 남았습니다.”

구마진의 직속 부하 흑각수 11인가 일제히 외치는 목소리였다.

두꺼운 모피 외투를 두른 설매화는 그들의 옆에서 고혹적인 웃음과 함께 구마진을 위아래로 훑어보고 있었다.

“당분간은 식사 좀 든든히 드셔야겠어. 너무 메말라서 매력이 없어졌네.”

그녀의 말에 구마진은 자기 몸 여기저기 살피더니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녀 말마따나 비쩍 말라비틀어질 정도로 근육은 빠지고 살가죽은 들러붙어서 무척 앙상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천산의 칼바람에 휘날리는 붉은 머리카락처럼 그의 붉은 눈동자는 형형하게 타오를 정도로 눈빛이 살아있었다.

구마진은 두 손으로 천산의 눈을 듬뿍 펐다. 그리고 입에 가까이 가져다 대며 내공을 운기하자 눈이 녹아 물이 되어 입속으로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해서 눈 녹은 물을 들이킨 구마진이 한결 낫다는 표정과 함께 씩 웃어 보였다.

“크흐! 이제 입이 좀 떨어지는군. 설매화야, 어디 식사뿐이겠느냐? 몇 놈 잡아다가 흡성대법으로 기를 빨아내야겠다. 천산의 칼바람을 우습게 봤었는데 지난번 대마의와 태상교주가 다녀간 이후로 차분하게 버티던 흐름이 깨지는 바람에 그 이후로 진원진기가 손상될 뻔했느니라.”

구마진이 그 말을 끝내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꼬르륵!

말을 길게 내뱉느라 얼마 남지 않은 기력을 더 쓴 데 더해 위장에도 물이 한가득 들어가면서 즉각적으로 반응한 것이었다.

“호호호! 헛심 쓰지 말고 어서 내려가.”

설매화가 웃으면서 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옆구리에 묵직하게 붙들고 있던 다른 모피옷을 펼쳐서 구마진의 몸을 덮어주었다.

구마진이 설매화에게 마른 웃음을 보이고는 근처에서 막 경사로를 따라 내려가려던 사를 쳐다보았다.

“너도 여까지 오느라 고생했느니라.”

“……으음.”

사는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경공을 펼쳐서 아래로 내려갔다.

그가 그런 남자라는 걸 잘 알기에 구마진도 피식 웃을 뿐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 자유의 몸이 되었다는 기분에 더해 드디어 구주마종의 제일주 혈마종의 혈마로서 역할을 할 생각으로 없는 기력도 솟아오르는 기분이었다.

구마진을 비롯하여 설매화와 흑각수들은 천천히 산에서 내려가고 있었다. 그래도 보통의 걸음보다는 빨랐지만, 구마진의 기력이 크게 떨어진 상황을 고려한 보폭이었다. 그러면서 설매화가 미리 물에 불려온 벽곡단을 건네자 구마진은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순순히 손으로 집어 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개 집어먹던 중, 구마진은 엊그제 설매화가 산에 올라와 전해줬던 말이 떠올랐다.

“태상교주와 대마의는 아직 용암비동에서 안 나왔겠지?”

“응.”

주기적으로 빙첨탑에 올라와 구마진의 상태를 살펴주었던 그녀는 이틀 전에도 올라오던 중에 단원진과 유변을 발견했었다. 그들은 호숫가에서 뭔가 얘기를 나누던 중에 그녀의 접근을 눈치채었고 그녀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두 사람을 향해 예의를 갖추었다.

그런 후에 호숫가 오두막을 지나쳐서 산에 오르다가 잠깐 돌아서 내려다봤을 때 두 사람이 함께 용암비동으로 들어가기 위해 호수 속으로 몸을 던지는 걸 보고 나서 빙첨탑으로 향했다.

“저 빙첨탑에서 마주친 두 사람이 천마신궁에 갔다가 돌아와서는 용암비동에 갔다……. 왜 갔을까?”

“대마의는 천혼제정대진을 제일 먼저 안정화했던 장본인이니 태상교주께서 뭔가 조언을 구할 게 있지 않았을까?”

“흐음, 그런가?”

설매화의 생각을 들은 구마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변이 천마신교에 끼친 영향은 상당하다 볼 수 있었지만, 냉정하게 얘기하자면 사실상 태상교주 단원진과 대마의 유변은 서로 노선을 달리한 지 오래됐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단원진이 태상교주로서 독자적 권위를 구축하고 있는 용암비동에 유변이 함께 들어갈 만한 이유가 무엇이 있는지는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할 얘기가 있다면 천마신궁에 오가고 거기에 머무는 기간 동안 충분히 했을 거라는 게 구마진의 생각이었다.

‘용암비동에 다른 영약이라도 숨겨놨나…….’

그로서는 여전히 유변이 가진 홍천환의 내공을 탐내는 입장이니 그 사실이 묘하게 신경 쓰였다.

천산을 내려가는 걸음.

어느새 구마진 일행은 용암비동으로 통하는 호수와 오두막 그리고 그곳을 관리하는 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점점 거리가 가까워지는 동안 여전히 단원진, 유변 두 사람과 용암비동에 생각이 머물러 있던 구마진이 뭔가 떠오른 듯 입을 열었다.

“산 아래에서 기력을 좀 회복하면 용암비동에 들러서 태상교주께 인사를 드려야겠다. 그때 용암비동에 오라고도 했으니까.”

“훗! 그러다 잡아먹히는 거 아냐?”

구마진의 말에 설매화가 그를 보고 피식 웃으며 농을 던졌다.

그때 구마진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설매화도 무심코 움찔거리면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구마진의 얼굴을 다시 살피니 멍한 표정으로 한 곳을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설매화도 그가 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곧바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마침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마자 호숫가 한구석에서 물이 불쑥 솟아오르더니 단원진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태상교주님을 뵙습니다.”

구마진과 설매화, 흑각수가 일제히 단원진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응? 누구였더라……. 아, 그 흡성대법 애송이로군. 오늘이 풀려나는 날이었느냐?”

“그렇습니다.”

단원진이 뭔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손사래를 쳤다.

“아아! 생각났구나. 너보고 찾아오라고 했었지. 그럴 필요 없으니 네 할 일 하여라. 난 긴히 할 일이 없으니 당분간 자리를 비울 것이다.”

단원진은 그 말만 남기고는 경공을 펼쳐서 산 아래로 휘익 사라져버렸다.

구마진은 잠시 자리에서 멍하니 단원진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천천히 고개가 돌아가 단원진이 나타났던 호숫가를 보았다.

잠깐의 침묵, 그 끝에 무심코 떠오른 의문을 중얼거린다.

“왜 혼자 나왔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