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9화 - 제57장. 합의안(合議案)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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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서신이 각각 위수협에 주둔하고 있는 고소덕군과 진창성으로 같은 날 그리고 비슷한 시간에 도착했다. 그리고 얼마 뒤 고소덕군과 조태상군 사이에 사절이 오간 후, 진창성에서 조태상이 2만의 군사를 이끌고 위수협에 진입하여 고소덕군과 멀지 않은 곳에 임시 진지를 구축하였다.
양 주둔지 사이에 마련된 작은 막사로 두 장군이 최소한의 호위병만 이끌고 나타났다.
“우리가 이렇게 마주 보고 얘기를 나누게 될 줄은 몰랐소.”
“장군께서 큰 결단을 내려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요.”
고소덕이 빛나는 눈으로 조태상과 그 뒤에 기둥처럼 선 조태번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형제가 모두 능력이 뛰어나니 머지않아 금나라의 대장군은 조가가 차지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을지 모르겠소.”
고소덕은 전장에서 두 형제의 저력을 느껴봤었기 때문에 진심으로 칭찬하는 것이었지만, 그 말을 들은 조태상의 얼굴엔 쓴웃음이 스쳐 지나갔다.
“소장들은 황실로부터 가문의 여죄를 이해받은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있습니다. 대장군이라……, 그것보다는 그저 이렇게나마 실질적인 군사 지휘권을 위임해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지요.”
“흐음, 남모를 사연이 있나 보군. 뭐, 좋네. 이 회담을 요청하기 전, 보내준 서신은 잘 읽어보았네. 천수성을 제외한 감숙 지역의 다른 성과 진지들을 우리 하나라에 인도하겠다고?”
“그렇습니다.”
조태상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창성으로 서신을 가져온 사람은 다름 아닌 완안홍균이었다. 그는 제갈무문과 함께 진창성으로 오면서 서하의 수도 흥경의 상황에 대해 실시간으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의 상황이 정리됐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상황별로 미리 준비되었던 금나라 조정의 계획을 일선에 전달하기 위해 입성한 것이다.
그 내용의 핵심은 금나라의 감숙 영토 포기였다.
완안홍균이 전달한 황실 조정의 지침을 듣고 그 자리에 있던 조태상과 천무경은 각각 다른 이유로 반대했다.
첫 번째로 조태상은 지금이 감숙 지역의 영토 수복에 있어서 절호의 기회라는 입장이었다.
서하가 당장 추밀원사가 공석인 상황이고 황실의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시간이 필요한 관계로 남부 전선의 군사적 대응이 쉽지 않다는 게 핵심적인 이유였다. 만약 기련산맥과 하서주랑을 따라 난주성을 넘어 돈황과 옥문관을 차지한다면 과거 중원의 통일왕조였던 당나라의 비단길에 대한 영향력을 취할 분명한 기회라는 것이다.
두 번째로 천무경은 창천맹이 무림이라는 세계에서 천마신교라는 적대적인 큰 축을 끊어내는 것이 목표인 만큼 그 진출로를 금나라와 조태상군이 직접 관리해주길 원했다. 특히 창천맹의 행동 지침에 금 황실의 영향력이 일부 반영된 만큼 상호 간에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는 신뢰를 보이길 원한 것이었다.
하지만, 완안홍균의 태도는 완강했다.
그는 조태상과 천무경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상세히 설명하지는 않았으나 그가 한 이야기로부터 두 사람은 숨은 뜻을 읽을 수 있었다.
일단 우선시하여 고려된 사안은 최근 몽골 부족들 간의 분쟁 상황이었다.
흑풍대 사건 이후로는 금 영토를 침범하는 경우는 크게 줄었지만, 흑풍대라는 강력한 억제 장치가 소멸하면서 몽골 부족의 통일을 노리는 움직임이 조금씩 보인다는 것이었다.
몽골족의 전투력은 분명히 위협적이지만, 금나라의 국가적 문제로 연결되지 않는 건 그들이 여러 부족으로 사분오열되었기 때문인데 만약 부족 통일이 이뤄진다면 이건 국가적 위협으로 다가올 수도 있었다. 게다가 감숙 지역은 서하라는 국가가 세워진 이래로 상당기간은 그들의 지배를 받아온 지역이라 자칫 북으로는 몽골족을, 서로는 서하를, 남으로는 송나라를 상대로 하는 삼면전쟁(三面戰爭)으로의 확대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금 조정의 전반적인 뜻이었다.
그리고 사소하게 황실은 조씨 일가가 득세하여 권력을 쥘만한 명성을 얻길 원하질 않았다.
비록 과거 조강선의 군역 이탈로 인해 밉보여왔던 여죄는 공식적으로 풀어주긴 했으나 반대로 그들 가문이 여진족이 아닌 한족이라는 점에서 언젠가 화근이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보인 것이었다.
창천맹 대한 입장도 이런 견해와 비슷한 맥락이었다.
강호무림이 중원을 지배하는 나라에 얽매이지 않는다고는 해도 근본적으로 한족이 대다수 비중을 차지하는 만큼 여진족의 나라인 금나라에 대해 근본적인 반감이 있지 않냐는 것이었다.
조태상과 천무경이 강력하게 주장하였음에도 완안홍균은 기죽지 않고 입장을 고수했다. 그리고 두 시진에 가까운 토의 끝에 마침내 약간의 절충안을 찾아 그 안을 가지고 이 자리를 만든 것이었다.
“천수성을 제외한 나머지입니다. 대신 영토 수복을 위해 저희와 연합군을 이루어 천마신교 세력을 쫓아내는 데 협력해주셔야 하며 창천맹의 진출로 유지 및 보급 관리도 함께 맡아주셔야 합니다.”
조태상의 말이 끝나자 막사 구석에 있었던 천무경이 고소덕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그리고 이것이 조태상과 천무경이 완안홍균과 합의한 절충안이었다.
고소덕은 이미 서신을 통해 내용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추가적인 조건을 요구할지, 바로 결정을 내릴지 약간의 고민만이 필요했다.
그는 진지한 눈빛으로 조태상과 천무경을 쳐다보았다.
얼마 전 천무경이 단 두 명만 데리고 자신의 군을 뚫고 들어왔던 그때의 인상이 그에게 아주 깊게 각인되어 있었다.
“좋소. 전적으로 조 장군의 요구에 협조하겠소. 단 한 가지 조건만 받아준다면 말이오.”
“말씀하십시오.”
“우리 군에도 무림인들을 배치해 주시오. 적룡단이 우리 군사들을 노린다면 그에 대응할 만한 전력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하지 않겠소? 천 맹주, 괜찮겠소? 본군이 결코 홀대하는 일은 없을 것이오.”
조태상이 몸을 조금 돌려 천무경을 쳐다보았다.
천무경은 웃으면서 포권을 취했다.
“저희의 노력이 고 장군의 적극적인 협력을 받아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천무경의 의미심장한 말에 고소덕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이거 말 한번 잘못 꺼냈다가 외통수를 맞은 격이로군. 그러나 그렇다고 조건을 물릴 이 사람이 아니올시다. 제국충무왕 전하께서 보내신 친서에 따르면 마교는 금나라와 중원만의 문제가 아니니 어찌 창천맹과 조 장군의 염려를 돕지 않을 수 있겠소? 전하께서 대도호자격으로 전장에서의 판단을 일임하겠다고 하셨으니 그 점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소이다.”
고소덕의 말을 듣고 조태상이 일어나 천무경과 함께 그에게 포권을 취했다.
“고 장군과 제국충무왕 대도호 전하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감사드립니다.”
고소덕도 일어나 두 사람을 향해 포권으로 예의를 갖추니 이로써 양국양군(兩國兩軍)과 창천맹 간의 합의가 성사된 셈이었다.
* * * *
가을의 시기가 끝나갈 무렵, 조태상군과 고소덕군의 연합 군세가 마침내 위수협을 따라 천수성으로 향하여 진군을 시작했다.
천무경도 창천맹으로 조태상군을 보조하도록 하는 한편, 고소덕군으로는 남궁평의 백무당에 더해 이장로 장태환의 남월당까지 파견하여 능동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주문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적멸당과 함께 전세를 관찰하면서 자유롭게 움직이기로 하였다.
이 무리에 천서은이 함께 하고 있었다.
영은성과 최현걸이 창천단에 합류하게 되면서 천서은은 오랜만에 홀로 움직이면서 천무경으로부터 세심한 관리를 받고 있었다.
“개천.”
천무경의 주문에 천서은이 파천신공의 진기를 폭발하는 듯한 기세로, 순식간에 벽력이 내리꽂게 할 마음으로 단전에서부터 진기를 분출했다.
드드드드……!
그녀의 두 다리가 떨릴 정도로 지면에서부터 진동이 발생했다.
밖으로 거칠게 분출되어야 할 공력이 그녀의 피부를 경계로 강력하게 통제되고 있었는데 천무경이 그녀의 등에 손을 얹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 밀어붙이거라.”
천무경의 강한 요구에 천서은이 더더욱 집중하면서 진기를 분출시켰다. 그야말로 가진 기력을 밑바닥까지 끌어쓰면서 어떻게든 기운을 분출시키려고 했으나 천무경의 강력한 통제력은 그녀의 기가 절대 피부 바깥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억누르고 있었다.
‘큿……!’
“푹 쉬거라.”
천무경은 그렇게 한 마디를 남기고 쓰러질 듯 주저앉는 딸을 남기고 공터를 떠났다.
멀지 않은 곳에서부터 위수의 강물 소리가 들려오고 주변으로는 육반산의 우거진 산림이 병풍처럼 감싸 안은 공터 한가운데서 천서은은 대자로 뻗고는 하늘을 쳐다보며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하아…….”
천무경이 부여하는 수련은 매우 간단했다.
파천신공 개천을 전개하여 천무경이 가하는 억제력을 뚫어내라는 요구, 그것뿐이었다.
천서은은 처음 그 말을 듣고 나서 정말 그걸로 충분한지 의문이었다. 진도건과 동행하지 못하고 지루한 수련을 하러 온 만큼 자신의 시간을 크게 희생했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세 번째로 수련이 끝난 상황에서 그녀는 이 수련을 얕본 걸 매우 후회하고 있었다.
‘으으…….’
온몸이 파르르 떨리고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찌르르 울리는 느낌이 계속해서 남아있었다.
밖으로 거세게 분출되었어야 할 기운이 나가지 못해 화가 났는지 쉽게 단전 안으로 갈무리되지 않고 기혈 안으로 요동치듯 흐르고 있었다. 그래도 기혈이 뒤틀리지 않고 제 길을 따라 거세게 흐르고 있는 형태는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게 대체 어떤 의미의 수련일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목적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수련 과정을 이끄는 것은 다름 아닌 부친 천무경이었다.
화경 그 이상의 경지로 여겨지며 중원무림에서 단연 천하제일인에 가까운 인물, 파천신공이 기준이라면 그 자체라 할 수도 있는 사람이 조정하는 수련법이었다.
단순하지만, 그 후과가 격렬한 통증으로 남는 수련이어도 믿고 따르는 수밖에 없다.
‘지금은 어디에 있을까?’
상념을 방해하던 통증이 가라앉자 자연스레 진도건이 떠올랐다.
하가장에서 보았던 일도 있었기에 그의 내적 상태가 걱정되었는데 그가 직접 살문주 월하사신 사금령을 쓰러뜨렸다는 사실을 듣고 꽤 안도했었다.
‘그이에게 뒤처질 수 없지……!’
천서은은 천천히 일어나서는 등 뒤를 따라 묻은 풀잎들과 먼지들을 털어냈다. 그리고 머리카락에 묻은 것도 털어내기 위해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다가 잠깐 멈칫했다.
검림에서 잘라냈던 머리카락이 어느덧 어깨를 덮어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상당히 길게 자라 있었다. 가끔 머리카락을 만질 때마다 검림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르곤 했다. 그리고 그때 미안함 가득한 얼굴로 바라보던 진도건의 눈빛을 떠올릴 때면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렇게 상념에 젖은 채 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붉은 복식을 갖춘 적멸당원들이 눈에 들어왔다.
일부 영입된 외부 인사가 있었지만, 절반 이상은 과거 천혼당의 전력을 그대로 수용하여 백두기가 직접 지도한 소수정예의 전력이었다. 그리고 천혼당이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만큼 천서은에게도 그들의 면면은 꽤 익숙했다.
“아가씨,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천혼당 부당주였던, 지금은 적멸당의 부당주이기도 한 문중이 다가와 인사했다.
“부당주님, 오래 기다리셨나요?”
“위수협을 지나기 전까지는 행군 속도를 조절하고 있어서 서두르지 않아도 됩니다. 그것보다 전달해드릴 것이 있습니다.”
“뭔데요?”
문중은 품속에서 서신 한 장을 꺼내며 미소를 지었다.
“진 조장이 하오문을 통해 아가씨께 서신을 보냈습니다.”
“도건의……! 고마워요, 부당주님.”
천서은이 서신을 두 손으로 받아 들고 화색이 되었다.
문중은 그녀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도 장로들 못지않게 천무방에 오래 몸담았던 인물로서 천서은이 어렸을 때부터 커가는 모습을 지켜본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천서은이 뛸 듯이 기뻐하며 혼자 있을 만한 자리로 움직였다. 그리고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채 편지를 바로 펼치지 않고 손으로 만지작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