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화 - 제57장. 합의안(合議案) (3)
단지운의 부름.
무슨 일일까 생각하면서도 사형의 호출에 늑장부릴 수는 없다는 생각에 양자성은 별수 없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주께서 찾으시니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아유타도 일어나서 인사를 받았다.
“후후! 그러세요.”
양자성은 성혈교 승려를 따라 곧장 나갔다. 그리고 그가 나간 옥상문 쪽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아유타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괜찮으십니까?”
다르파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본래 선몽을 꾸게 되면 기력의 허허함이 생겨서 항상 반 시진 정도는 명상을 하며 휴식을 취해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유타가 주저앉은 건 그 때문은 아니었다.
“다르파, 단 태상과 대마의가 천마신궁을 나갔는지 확인해보세요.”
“저도 지나가는 말로 듣긴 했습니다. 두 분이 천산으로 가기 위하여 말을 타고 나가셨다고……. 양자성의 말에 뭔가 이상한 것이 느껴지셨습니까?”
“뭔지는 모르겠지만, 불길한 예감이 드는군요. ……아, 그리고 빌게포첸이 돌아오고 있어요.”
“성혈신마께선 하나라 흥경에…….”
“살문주 사금령이 진도건이란 남자의 칼에 죽으면서 그곳의 일이 종결된 모양입니다.”
“처음 듣는…… 혹시 조금 전의 선몽은 성혈신마와 연결된 것이었습니까?”
다르파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예, 빌게포첸의 의식 세계……. 거기서 그를 만났어요.”
“그?”
“계시의 남자.”
아유타와 다르파의 눈이 마주쳤다. 그런 두 사람의 눈빛 사이로 복잡한 감정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두근, 두근, 두근…….
* * * *
“후우……!”
진도건은 운기를 마친 후, 깊은 날숨을 내뱉으며 눈을 떴다.
파천혈마공의 기운이 온몸에 충만하게 차올랐다가 단전과 혈마단으로 나누어져 돌아가는데 소용돌이치는 흥분감도 함께 제자리로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파천신공과 혈마진기의 결합.
그것은 뜻밖의 우연으로 벌어진 성취였다.
파천신공의 파괴적이면서도 정제된 기운과 혈마로 인해 만들어지는 들끓는 혼돈의 마기는 둘 모두 매우 공격적인 성질의 기운이기에 상충될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러나 역천의 경계에서 이뤄진 둘 간의 결합은 오히려 모순적인 균형을 이루는 결과를 낳았다.
그건 정신적인 부분에서도 영향을 주었는데 마기로 인해 끓어오르는 흥분도가 파천신공의 흐름을 쫓으면서 날카롭게 정제되었다. 그리고 강력한 육신의 그릇은 그런 정신과 기운의 팽창을 담아내기에 충분했다.
만약 평범한 육체였다면 정신과 기운의 팽창을 견디지 못해 터져버릴 것이고, 다른 무림인들 수준이었어도 불혹을 넘지 못했을 듯했다.
“대단한 녀석…….”
혈마가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혈마가 진도건의 육신에 욕심을 내지 않는 것도 그를 지켜보면 볼수록 자멸할 가능성이 점점 낮아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웬 칭찬이냐?”
혈마의 대답은 없었다.
안효철이 다가오고 있는 걸 느끼고 일부러 침묵해주는 것이었다.
“상태가 좋아 보이는군.”
“예, 전 괜찮습니다. 안 대협은 괜찮으십니까?”
“이미 겪었던 고통이라 금방 적응이 되는군.”
두 사람은 스스럼없이 아침 인사를 나누었다.
큰일을 공유하여 해결했으니 서로 간에 신뢰가 좀 더 쌓인 것이다.
그들은 전날 새벽 흥경에서 빠져나와선 하오문에서 성밖에 마련해준 안가에서 조금 더 쉬고 나온 후였다. 해가 꽤 높이 떠오른 사시말(巳時末:오전 11시경)이었는데 마당에서 황검당과 하오문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며 점심 식사 준비를 위한 작업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진도건이 미소를 지었다.
“다행입니다. 그런데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그냥 걱정돼서 말일세. 앞으로 강적들이 즐비할 텐데, 전력을 다하는데 조심하라는 말이 타당한가 싶기도 하고, 꽤 신경도 쓰여서 말이야.”
“한낱 귀물에 먹혀선 안 되지 않겠습니까? 중천의 동료들도 생각하시면…….”
전날 새벽 진도건이 돌아왔을 때, 안효철은 그의 외출을 알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잠깐 나눴던 말이 빌게포첸이 했던 말들을 믿고 탈혼갑에 대해 조심하라는 말이었다.
탈혼갑의 마성에 물들지 않은 채 지금 상태 정도만 유지해도 훗날 큰 화를 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작은 가능성.
진도건이 덧붙여서 조언한 것인데 안효철은 일견 이해가 되면서도 가능한 일인가 싶었던 것이다.
“중천의 동료들이야 가족처럼 여기는 게 내 마음이지만, 어디 운명이라는 게 뜻대로 되겠는가? 어차피 나 같은 낭인들이야 결국 홀로 살아 홀로 가는 인생들이거늘. 별로 중요치 않지.”
“그래도 운이 좋아 해방될 길이 열린다면 그 또한 무림 전력에 이득 아니겠습니까?”
“흐음!”
진도건의 말도 틀리지 않아서 안효철도 굳이 반박할 이유를 찾지 않았다. 자신을 걱정하고 위하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진도건, 나왔으면 일해야지.”
나긋하면서도 콕 찌르는 듯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여희선이 허리에 두 손을 올린 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지.”
진도건이 피식 웃으면서 그들에게 다가갔다.
할 일이 없나 찾기 위해 여기저기 기웃거렸지만, 그 뿐에 그치자 여희선이 뒤로 슬그머니 다가왔다.
퍽!
엉덩이를 걷어차는 발길질.
살기도 없이 다가와 아프지도 않게 차서 피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일하라고 했더니 방해만 되고 말이야. 저리 가.”
“하하, 미안.”
진도건이 멋쩍어하며 물러나는데 여희선의 입가에 씩 미소가 걸렸다.
짧은 한마디였긴 했어도 어색하나마 자연스럽게 말을 놓고 웃음까지 보이는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뒤에 진도건을 부른 것은 이혁성이었다.
어디서 가져왔는지 목검 두 자루를 챙겨왔는데 오랜만에 검이나 한번 섞자면서 한 자루를 건네주었다.
따다닥-! 따닥!
한구석에서 비무를 벌이는 두 사람에 의해 식사를 준비하던 공터 중앙까지 목검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황검당주이자 비뢰검이라 불리는 쾌검의 달인 이혁성과 작금 강호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로 이름이 오르내리는 혈마검귀 진도건의 쾌검 가운데 어느 쪽이 우위에 있는지 관심이 쏠렸다.
황검당 내에서 이혁성에 대한 존중과 존경은 상당했다.
황검당은 강호에서 내로라하는 검객들과 또 다른 방식으로 검을 쥐는 실력자들까지 모으고 선별하여 조직된 집단이었다. 이혁성의 연배는 50인 가운데서도 젊은 축에 속했기 때문에 여러 명의 도전을 받아야만 했다.
그리고 이혁성은 그 도전들을 모두 물리친 남자였다.
하나같이 극찬하는 건 비뢰검이란 명성에 걸맞는 대단한 쾌검을 구사하여 은봉 서파파의 허깨비 같은 구유무영보마저 압도할 정도라는 것.
“미쳤다, 시팔…….”
사파 무림에서 쾌검식으로 유명한 낭인 오도율(吳度慄)이 중얼거렸다.
귀가 따가울 정도로 따다닥! 거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 만큼 춤을 추는 두 남자 사이로 무수히 많은 검영이 교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자신이라도 저 사이에 들어가면 빼도 박도 못하고 얻어터질 게 분명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따악-!
두 사람의 검무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삼십여 합 정도 주고받았음에도 진짜 속도만 신경 썼었기에 흐른 시간은 매우 짧을 수밖에 없었다.
“봐줘서 고맙네.”
이혁성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한순간이라도 방심하면 온몸에 멍이 들 게 분명한데 말이죠.”
“겸손 떨기는.”
그러면서 이혁성은 옆을 보았다.
한 여인의 눈빛이 똘망똘망 빛나고 있었으니 바로 앵화검 에마였다.
“저 친구랑도 검을 섞어보게나. 중원의 검객들과 느낌이 또 다를 거야. 에마, 괜찮겠지?”
“……예.”
에마는 주저하지 않고 걸음을 옮겨 다가와 이혁성으로부터 목검을 넘겨받았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도 잘 부탁합니다.”
곧 두 사람이 검을 섞기 시작했다.
따다닥-!
진도건은 이내 깜짝 놀랐다. 에마의 검속이 결코 이혁성 못지않았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검을 다루는 동작들의 섬세한 부분에서 상당히 오묘하고도 과장된 허실이 없어서 무척 날카롭게 느껴졌다.
문득 검세에서 어디선가 경험해본 듯한 느낌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십여 합쯤 지났을 때, 진도건은 어렵지 않게 한 노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순간 진도건의 목검이 뱀처럼 휘면서 에마의 검을 감았다.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에서도 아주 섬세하게 에마의 검을 쥔 손가락 사이로 목검을 밀어 넣는 순간, 그녀의 목검이 하늘로 붕 떠올랐다.
“우와!”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온다.
에마는 이혁성에게 패배했을 때도 자신의 왜도를 놓친 적이 없었으므로 깜짝 놀랐다.
‘이게 중원무림의 이화접목……!’
그녀는 단번에 수법의 종류가 무엇인지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검술에서도 상대가 검을 놓치도록 하는 수법이 있긴 했지만, 그것은 허실을 이용한 것으로 진도건처럼 자신의 검력이 무로 돌아가게 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수법은 아니었다.
“고맙습니다.”
다소 어색하게 느껴지는 발음으로 고마움을 표하는 에마를 향해 진도건도 포권을 취했다.
“어땠나?”
“대단한 솜씨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잠깐 만났던 어떤 사람과 기세 같은 게 많이 닮긴 했군요. 물론 세세한 부분은 차이가 있지만요.”
“그런 사람이 있나?”
“해남파의 사상쾌도 위정오가 비슷한 느낌이었습니다. 창천맹에서 만났었죠.”
그 말을 들은 에마가 조심스럽게 한 손을 들면서 입을 열었다.
“제가 해남도를 통해 들어왔습니다. 2년 정도 살았었습니다. 그쪽 검객들,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섬 출신이라서 그러나, 비슷한 기상이 만들어지는 모양이군.”
이혁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곧 여희선이 세 사람을 부르면서 다 같이 모이도록 했다.
간단한 고기 탕수 요리와 볶음국수 그리고 하오문이 가져온 작은 술병과 술잔이 각자 앉은 자리에 배당되었다. 그리고 모두 식사를 시작하기 전에 이혁성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잠시 기다리고 있었다.
진도건과 안효철도 분위기를 읽고 젓가락 대신 술잔에 술병을 기울였다. 죽엽청의 맑은 술이 찰랑거리면서 잔을 거의 채웠다.
이혁성이 술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모두가 그를 따라 했다.
그런 좌중을 돌아보며 이혁성이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황검당원 여러분, 우리는 천무방을 떠나던 날에 천마신교가 무너지는 날, 51명이 꼭 살아 돌아오자고 약속한 걸 기억하실 것이오. 하지만, 어제 장번(張番)이 목숨을 잃었소. 그의 스승이었던 서파파께서 더 슬픔이 크시겠지만, 우리의 슬픔도 서파파에 부족하진 않을 것이오. 오늘 이 술잔은 여정을 함께 하지 못하게 된 장번의 넋을 위로함과 동시에 우리 모두에게 돌리는 생환축원(生還祝願)의 잔(盞)이 될 것이오. ……남은 모두의 검이 마교를 단죄하는 심판의 칼이 되기를, 그리하여 다시 우리의 땅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이혁성이 잔을 높이 들자 황검당원들도 잔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진도건과 안효철, 여희선 등과 십여 명의 하오문도들도 함께 잔을 올리면서 장번의 넋을 위로하고 생환을 축원하였다.
꿀꺽!
모두가 동시에 시원스럽게 잔을 기울여 맑은 술을 넘긴다. 그리고 각자 자리에 앉아서 식사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반 시진 정도 잠시 휴식 시간을 가진 상황에서 하오문 녕하분타주 강소동이 진도건과 이혁성, 여희선이 모인 자리로 다가왔다.
“당주님, 소협, 소저, ……진창성에서 전서구를 통해 소식을 보냈습니다.”
“좋아, 회의하러 가지. 도건, 자네도 오게나. 안 대협도 함께 하시지요.”
이혁성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진도건도 그를 좇아 일어나면서 자그맣게 한마디 던졌다.
“당주님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예전엔 그런 연설 같은 거 못하실 것 같았는데.”
“……놀리는군.”
진도건과 이혁성 둘 사이에서 작은 웃음이 흘렀다.
어찌 보면 다른 듯 비슷한 느낌을 자아냈던 두 사람이, 한 사람은 혈마에 의해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달라진 위치와 위상에 따라 서로 변화된 면모를 느끼게 한 현 상황이 웃음을 절로 자아내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