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7화 - 제57장. 합의안(合議案) (2)
“……으음!”
진도건이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마치 잠깐 꿈을 꾸다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의외로 무의식의 공간 속에 혼자 떠 있었던 그 기분은 쉽게 잊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눈앞의 빌게포첸이 서너 걸음 물러선 후, 합장하며 허리를 깊게 숙이자 조금 당황스러웠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 물어보기도 전에.
“소승은 이만 떠나겠습니다.”
“잠깐…….”
미처 말려보기도 전에 빌게포첸이 경공을 펼치며 서쪽으로 날아갔다.
쫓아갈 생각도 잠깐 해보았다. 그러나 그가 허리를 숙이기 직전에 포착했던 얼굴에 나타난 표정은 쫓아가는 것 대신 생각을, 그리고 혈마에게 상황을 물어볼 의지를 띄우게 했다.
“혈마, 대체 나 몰래 무슨 짓을 한 거야?”
“몰래가 아니다. 나도 너와 한 자리에 머물지 않을 줄은 몰랐거든. 뭔가 다른 기작이 작용한 것 같다.”
“정말이냐?”
“물론.”
“빌게포첸의 태도가 바뀐 거 같은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설명 좀 해줘.”
“나도 정리가 쉽게 안 돼서 설명해주기가 어렵군.”
“하아……. 이럴 거야?”
“내가 설명하기엔 저 녀석의 입장을 제대로 들은 게 아니라서 얘기해봤자야. 그것보다 저 녀석이 몸담은 성혈마종이자 성혈교……. 저 녀석이 우두머리가 아닌 모양이야.”
“성혈신마가 아니라고?”
“그는 대리자다. 아유타라는 이름의 성녀가 성혈교의, 말 그대로 교주나 다름없는 지위에 있고 빌게포첸은 천마신교가 부여하는 임무를 대신 수행해주는 역할로 성혈신마가 된 것이다. 그가 불문의 공력을 잃지 않고 마기와 공존시킬 수 있었던 것도 아유타란 년이 손을 쓴 덕분이라나.”
“흥미롭긴 한데, ……그래서 뭘 얻었지? 그래도 너와 난 어떻게 보면 동맹이나 마찬가지인데 숨길 건 없잖아?”
“동맹보단 혈맹(血盟)이 더 어울리는 단어 같다. 큭큭! 아무튼, 정리됐을 때 얘기해주마.”
“……좋아. 그럼 한 가지만.”
“뭔데?”
“넌 그동안 여러 신마를 만나면서 너만이 인지한 이름들로 불러왔는데, 그는 뭐라고 부르나?”
“불마(佛魔).”
“……전혀 어울리지 않을 두 글자가 공존하는 이름이로군.”
“킥킥킥!”
* * * *
다르파는 계속해서 흘끔거리듯 돌아보며 경계 섞인 시선을 보내고 있었는데 거기엔 양자성이 서 있었다.
양자성도 갑작스러운 상황으로 인해 어색한 심정이었다. 난간에 엉덩이를 걸친 채 다른 데를 보려고 노력하면서도 그늘에 눈을 감고 앉아 있는 아유타에게로 무심코 시선이 움직이다 다르파와 눈이 마주치곤 했다.
‘초대한 건 그쪽이면서…….’
그렇다고 대놓고 불평할 건 아니었는데, 그가 성혈궁 옥상에 들어와 인사를 하는 그때 갑자기 아유타의 눈이 뒤집히더니 그대로 쓰러졌기 때문이었다.
다르파도 처음에 움찔했었지만, 이후론 줄곧 침착했다.
얼마 전에 있었던 두 번째 계시와는 달랐다.
이는 분명 선몽(禪夢).
아유타는 성혈교의 라마로서 정신적인 수양의 깊이가 매우 깊었다. 짧은 미래의 일을 예지하기도 하고 또는 몇몇 인물들과 정신적 교감을 나누기도 했다고 하였다. 특히 후자의 설명을 납득하게 된 건 그렇게 정신적인 교감이 일어나서 제대로 소통하려고 찾아온 인물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일 자체가 물론 흔한 경우는 아니었으나 그녀를 보좌해온 그의 인생 속에서도 적어도 한 손가락을 충분히 상회할 횟수 정도는 되었기에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단지 그녀는 여러모로 매우 중요한 존재이므로 양자성처럼 검증되지 않은 자가 가까이 있는 걸 경계하는 것이었다.
“흐음…….”
그때 심호흡을 하면서 아유타가 깨어나자 다르파와 양자성 모두 자기 자리에서 움찔했다.
“깨셨습니까? 아유타.”
다르파는 그렇게 질문을 던지고는 아유타의 표정이 무척 흥미롭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항상 이런 일이 일어나고 나면 고통스러운 경험을 한 것처럼 다소 심각하거나 고충이 많아 보이는 듯한 얼굴로 깨곤 했는데 이번엔 입가에 작은 미소가 아주 은은하게 걸려있었다.
아유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잊지 않았다는 듯 양자성을 보며 다시 미소를 지었다.
“미안해요. 양 공자를 기다리게 했군요.”
“괜찮습니다. 저야말로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후후! 제 얼굴이 마음에 드셨나 보죠?”
“예?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아유타가 느닷없이 직접적인 말을 던지자 양자성의 얼굴이 붉어졌다.
놀리는 것처럼 들리긴 했지만, 그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대단히 깊고 오묘하여 단순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런 눈빛을 받다 보니 제멋대로 살아왔던 그리고 꽤나 호색했던 과거가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양 공자 같은 미남자의 관심은 백 년이나 살아온 할머니로서 부담스럽군요.”
“……음!”
양자성은 적잖이 놀랐다.
그녀의 지위가 있으니 나이가 많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백 년이란 시간은 강정학이나 단원진을 상회하는 연세가 아닌가?
하지만, 그녀의 용모는 이국적이면서도 대단히 성숙하고 아름다우니 가슴의 떨림을 이성이 완전히 억누르지는 못하는 느낌이다.
“……성혈궁의 성녀라고도 불리는 라마께 어찌 불경스러운 마음을 품겠습니까? 그저 신통력이 있다고 하니 가르침을 청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양자성은 최대한 침착한 티를 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그 모습도 아유타의 눈엔 다 들어오는 듯하다.
“아니에요. 제가 초대했는데, 실례되는 말을 한 것 같네요. 여기 앉으시겠어요?”
“예, 라마.”
아유타는 자기 맞은편의 나무 의자를 손에 가리켰다.
양자성이 가까이 와 의자에 앉자 미소를 품는다.
“양 공자는 본디 검림의 총수인 백령신검 강정학의 제자였다면서요?”
“예? 예……, 그렇습니다.”
“겪어보지 못한 미지의 힘에 대한, 마공에 대한 열망이 공자에게서 느껴져요. 어떤가요? 원하는 걸 얻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제 무공이 성장했냐고 묻는 거라면 분명 그렇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그 정도 확신은 가질 수 없었는데 말이죠.”
“으음!”
양자성은 정곡을 찌르는 말에 내심 움찔했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이 허리의 검에 닿아있음을 깨달았다.
“천마조사가 봉인한 검이 이 세상에 존재한 뒤로 처음 천산 밖으로 나와 햇볕을 쬐는 건 아마 전적으로 양 공자 덕일 거예요.”
“벼, 별말씀을…….”
“하지만, 마도 자체도 위험부담이 큰 데 양 공자께선 더 큰 위험부담을 짊어지셨어요.”
“……라마께선 이 마령검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마령검. 이름이 그렇게 붙여졌군요. 제가 아냐고 물으셨지요? 아니요. 전 그 검을 처음 보았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걸 볼 수 있는 하찮은 능력이 있지요. 그리고 양 공자께서 그 검을 쥔 순간, 공자의 생명력은 그리 멀지 않은 때에 꺼지게 될 것이에요.”
아유타가 차분한 표정으로 말을 풀어 놓는데 양자성은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적을 향해 도발하는 그런 목소리가 아니라 마치 그의 운명을 들여다보고 내놓은 예언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기분이 뒤따르는 건 그조차 마령검을 쥐었던 순간에 느낀, 지금은 힘을 취했다는 생각으로 덮어버린 일말의 불안감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하필 내 목숨이 얼마 가지 않을 거란 얘기를 여기서 들을 줄이야……, 하하하!’
“하하하하!”
머릿속의 웃음이 입 밖으로도 흘러나왔다.
아무리 성녀이자 성혈궁 라마의 말이라고 하더라도 할 말, 못 할 말이 있지 않은가?
조금 화가 났다.
하지만, 궁금한 것도 사실이다.
스스로 어떤 이상적인 상황을 기대하고 천마신교로 오긴 했지만, 그는 주백자까진 아니더라도 강정학이나 단원진 정도만큼 그 정도의 수명은 누리고 살다 죽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마령검을 모른다고 했으나 보이는 게 있다고 했으니…….’
무엇이 보이는지 알 필요가 있었다.
“라마께서 하신 말씀이라면…… 너무 허무하군요. 혹여나 제가 그런 운명을 피할 길이 없겠습니까?”
“검엔 짝이 되는 갑옷이 있지요?”
“……탈혼갑, 말씀입니까?”
“마령검과 탈혼갑, 그 둘은 본디 하나. 누구도 끊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혈연이상으로 강한 운명의 고리에 엮인 귀물입니다. 두 귀물이 만나지 않으면 양 공자는 영생을 살 수도 있겠지만……, 그 삶조차 종국엔 양 공자의 삶이 아니게 될 수도 있으며 그 만남은 필연(必然)일 터이니 어찌 피할 도리도 없을 거예요.”
“……영생을 살 수도 있다는 말입니까?”
이번엔 아유타의 눈빛이 은연중에 빛났다.
‘필연적 삶의 종말보다 무의미한 영생에 더 관심을 보이는 사람…….’
양자성은 그런 사람이라는 것이 더욱 명확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예, ……하지만, 저도 어디까지나 어렴풋이 보이는 것들로 추측하는 상황일 뿐. 크게 의미는 두지 마시길 바랍니다. 두 귀물 모두 사용자의 생명력과 영혼을 탐닉하여 과거의 하나로 돌아가려는 속성이 있으니…….”
“제가 그 생명과 혼이 되면 영생을 살겠군요.”
아유타는 입을 다물었다.
정말 그 반응만큼 무의미한 말이 없단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양자성은 다른 곳을 보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양 공자의 길이라면…… 저도 모두 볼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에 다른 운명이 열릴 수도 있겠지요.”
“고맙습니다, 라마.”
아유타는 고맙다는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어찌 한 사람의 의지만으로 거대한 운명의 파도를 감내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기분이 조금 침울해졌다. 그리고 양자성이 다른 얘기를 꺼낸다.
“저는 성혈교가 천마신교의 창교 초기와 함께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라마의 자리를 대를 이어 온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을 했었습니다.”
뒤의 이야기는 아유타의 용모가 서른 줄 나이 정도로 젊어 보였기에 한 말이었다.
“하지만, 정말 그런 무림의 대선배시라면 천마조사나 제 스승님이신 태상교주님을 잘 알고 계시겠군요. 대마의도 마찬가지고…….”
“그렇습니다. 함께 움직인 세월도 있었지요. 궁금하신 게 있으신지요?”
“으음……, 아닙니다. 궁금한 건 많은데 어떤 걸 물어봐야 할지 잘 모르겠군요. 감히 라마의 귀한 시간을 오래 뺏는 것 같기도 하고…….”
“후후! 그럼 생각이 정리되면 물어보세요. 아마 며칠 내로 양 공자는 임무를 받아 떠나실 텐데, 그전까지 언제든지 오셔도 괜찮습니다. 드릴 수 있는 얘기는 모두 해드리겠습니다.”
“제가 며칠 내로 떠난다고요?”
“예, 그렇게 될 것 같네요.”
아유타가 별 고민도 없이 대답하자 양자성은 그녀가 그런 것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내심 놀랐다. 그러면서도 막상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자 서둘러 머리를 굴려보았다.
“……대마의는 천마조사 때부터 함께 했던 분으로 알고 있는데, 태상교주와는 사이가 좋지 않은지요?”
단원진과 유변에 대해 묻는 말에 아유타의 표정이 조금 진지해졌다.
“유 숙부는 천마조사와 함께 했을 시점에 단 태상도 약관 전후의 시기였으니 활동 시간을 고려해보면 먼 사이라 할 수는 없지요. 하지만, 서로 오래 보지 못한 시기도 그에 못지않게 길었으니 소원해진 감도 없잖아 있을 것 같군요. 그건 왜 물으셨나요?”
“저도 그 정도의 관계라는 건 대강 인지하고 있는데, 천산에서 대마의가 찾아왔을 때부터 어제까지 함께 다니는 모습을 지켜본 바로는 뭔가 의뭉스러운 지점이 많이 느껴져서 말이지요. 섣부른 생각일 수도 있겠으나 그건…… 불신, 의심, 꾸며진 웃음처럼 보였습니다.”
양자성의 말에 아유타의 생각이 두 사람에게 미쳤다.
그녀는 기본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에게 닥쳐올 가까운 운명들을 볼 수 있었다.
다만 함부로 떠들고 다니는 법이 없기에 그녀가 가진 혜안의 수준을 정확하게 가늠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지난번 오랜만에 두 사람을 보았을 때, 아유타는 단원진의 운명을 들여다볼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음을 느꼈다.
마치 인위적인 어둠의 장막이 눈앞에 드리워진 느낌이었는데, 양자성의 말을 듣고 나서 생각해보니 가까운 운명 대신 그 장막을 명확하게 인지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리고 대마의 유변의 운명도 뭔가에 가려진 듯 희뿌옇게만 보였던 걸 깨달았다.
아유타는 불현듯 조금 전 양자성이 한 말 중에서 이상한 부분이 있었음을 눈치챘다.
“……어제까지 보았다고요?”
“예, 두 분은 오늘 이른 새벽에 천산으로 돌아갔습니다. 아, 그리고…….”
양자성이 또 떠오른 궁금한 지점을 묻기 위해 얘기하려는 데, 바로 그때 옥상문이 열리면서 젊은 중이 나와 아유타와 양자성을 향해 합장하며 인사했다.
“양 공자님, 천마께서 찾으시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