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화 - 제57장. 합의안(合議案) (1)
하란산맥(賀蘭山脈)은 흥경 서문에서부터 20여 리 정도 떨어진 곳에서 그 산자락이 시작되어 북쪽으로 약 500리가량 이어진 산맥이었다. 산맥 너머 서쪽엔 사막이 있는데 때때로 부는 모래바람을 막아준다고 하여 혹자는 하란산맥을 흥경서벽(興京西壁)이라고도 불렀다.
진도건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이 산맥이 시작되는 지점의 산자락 어딘가로 사람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수림이었다.
서쪽 사막에서 부는 모래바람 때문에 수림이 울창하게 조성되기 어려운 환경이어서 드문드문 솟은 나무들 사이로 가까운 거리의 시계는 제법 트인 편이었지만, 구릉이 오르락내리락 제멋대로 솟아있어서 먼 곳의 시계는 답답한 편이었다.
그런 지형 속에서도 진도건의 기감은 빌게포첸의 존재감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있는 장소로 주저함 없이 이동할 수 있었다.
비록 이동에 주저함이 없었더라도 약간은 긴장하고 있었다.
흥경에서 그의 행보가 적대적이지만은 않았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그는 천마신교의 성혈신마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사소한 우려는 다시 서로 얼굴을 볼 수 있을 만큼 가까워지자 기우였음이 드러났다.
그곳은 나무가 적어 해가 뜨면 볕이 잘 들만한 곳이었다.
빌게포첸은 합장한 두 손 사이로 염주를 굴리면서 염불을 외는 듯 보였는데 그의 앞에는 이제 금방 흙을 덮은 듯한 작은 봉분이 있었다.
“아미타불……. 오셨소이까, 진 시주.”
진도건도 굳이 기척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그는 곧장 모습을 드러내어 조금 거리를 두고 섰다.
“혹시…… 살문주의 무덤이오?”
“그렇소. 그대는 무덤조차 사치스럽다고 여길지 모르겠으나 이쪽은 이쪽의 사정이 더 중하니 이해해주시오.”
“무엇을 얻으셨소?”
“……무슨 말씀인지.”
“속사정이야 모르겠지만, 살문주를 배반하여 월왕과 가족들의 구출을 도운 게 바로 당신이오. 그저 동정심으로만 이렇게 했을 리는 없을 것 같은데.”
“구출을 도왔을 뿐, 적에게 이런저런 일을 다 떠벌리기엔 천마신교에 대한 도리가 아니니 묻지 마시구려. 그대는 나와 싸우기 위해 여기까지 쫓아온 거 아니오?”
“흐음, 글쎄.”
이곳에 온 건 순전히 혈마의 요구 때문이었다.
그 속내를 모두 밝힌 건 아니었으니 진도건도 이유를 대답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대신 그는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맞춰보겠소.”
“……무얼 말이오?”
빌게포첸이 비로소 몸을 돌려 진도건을 보았다.
그의 눈빛이 의심스럽고 경계하는 시선보다 무엇을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는 뜻으로 읽혔다.
“사금령의 수준이 기대에 못 미치긴 했으나 그도 내가 겪어보지 못한 마공을 사용한 자. 아마 ‘무영’이란 존재들이 그가 품은 마정을 회수하기 위해 움직일 텐데, 서하 황실이 시신의 처분권을 쥐게 되면 접근이 용이하지 않게 되니까 당신이 시신을 가져가 이곳에 자리를 만들어준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렇지 않소?”
“생각보다 꽤 정확하게 파악하고 계시는구려.”
뭔가 감탄했다는 듯한 내용의 말이었으나 표정에 미동도 없는 빌게포첸의 모습은 무심함 그 자체처럼 느껴져서 오히려 진도건이 싱겁게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빌게포첸은 이미 생각이 복잡하게 흐르고 있었다.
안효철을 마주치고 그의 상태가 기대했던 것과 달라 놀랐던 것이 흥경에 오면서 겪었던 가장 큰 감정의 기복이었지만, 사실 그건 그저 흥미를 자극하는 일상의 지나가는 한 부분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이 남자는 그에게 묘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그 묘한 기분의 정체를 좇아갔을 때, 떠올리게 된 건 공교롭게도 단지운의 얼굴이었다.
“시주께서 무영을 알고 있다면 소승이 아는 것보다 더 많이 천마신교를 상대해왔겠구려.”
“음?”
“소승이 기억하는 건 3년 전에 당신이 일월신마에 의해 혈마로 폭주했었다는 것과 올해 초에 몽골초원에서 흑풍신마를 처치한 장본인이라는 것뿐이오. 그 외에 다른 마종과도 싸운 적이 있소이까?”
“……이곳에 오기 직전에 사천 땅에서 사혈신마를 상대로 싸웠었소. 환도신마가 조종했던 강시도 같은 자리에서 싸웠고…… 청성산에서 교주 단지운과도 싸웠소. 그리고 어젯밤 살문주 사금령에 지금 당신까지.”
“호오, 단 교주와도?”
진도건의 눈에 들어올 만큼 빌게포첸의 얼굴에 표정 변화가 조금 일었다.
“믿을 수가 없군. 단 교주는 소승이 아는 한, 고금제일(古今第一)로도 통할 수 있을 정도로 최강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거늘.”
“……강하다는 건 인정하겠소. 산 것도 운이 좋았으니까.”
“그런가……. 그럴 수도 있단 말인가……!”
빌게포첸이 눈이 동그래진 채 하늘을 바라보면서 마치 뭔가를 떠올리며 혼잣말처럼 읊조리는데 그것은 일반적인 감탄과는 다른 성질의 감정 표출이었다. 그는 그러다 다시 시선을 내려 진도건을 바라보는데 눈빛이 좀 더 분명하고 강렬했다.
“그와 싸워서 살아남는 길은 천마신교에 복종하겠다는 단 한 번의 기회뿐인데 시주가 그랬을 리는 만무하고…….”
“당연하오.”
“……어쩌면 시주야말로 그분께서 그토록 기다려왔던 분일지도 모르겠소이다.”
어쩐지 쳐다보는 빌게포첸의 시선이 조금 부담스럽게 바뀌었다고 느껴질 때.
“그만하면 됐다. 교대.”
혈마의 목소리가 그를 다시 일깨웠다.
“어떻게?”
진도건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되묻는데 빌게포첸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늘어놓은 감탄에 이어 내놓은 진도건의 되물음이 맥락상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저자와 장심을 맞대어라. 그렇게 안효철에게 썼던 ‘그 대수인’을 사용하라고 해라. 그건 마성과 불성이 공존하는 기이한 무공, 어쩌면 내가 저놈과 이야기할 수 있는 통로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 같다.”
“날 통해서 안 하고?”
“직접 하는 게 속 시원할 것 같다.”
“……좋아.”
빌게포첸이 듣기엔 진도건이 혼잣말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내용은 마치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처럼 들려 몹시 의아했다.
“진 시주, 괜찮으시오?”
“빌게포첸, 괜찮다면 나와 장심을 맞대고 안효철 대협을 시험한다면서 썼던 대수인을 펼쳐주겠소?”
“요구가 참 이상하오. 소승을 어찌 믿으며, 또 소승이 시주를 어찌 믿을 수 있겠소?”
“당신은 내면을 들여다본 적이 있소이까?”
“그건 왜 묻는지…….”
“아니, 마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본 적이 있습니까?”
진도건의 물음에 빌게포첸이 어깨를 흠칫 떨었다.
빌게포첸은 진도건이 말뜻이 무엇인지 알아챘다. 그리고 그건 진도건도 혈마라는 이명을 품고 있기에 그도 자신이나 다른 아홉신마들과 같은 과정을 겪었을 거라는 가정에 도달했다.
빌게포첸이 아주 잠깐 지난날을 떠올렸다.
마성의 목소리.
그것은 불교의 기준에선 아주 강력한 ‘번뇌’였다.
비록 결국 지금에는 성혈신마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었으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일은 대단히 두렵고 고통스러운 경험과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설명해주시오.”
“당신에게 내 속의 혈마를 보여주겠소.”
그렇게 얘기한 진도건은 조금 놀랐다.
빌게포첸의 얼굴에 두려운 빛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다른 신마들이나 마교주 단지운이 보였던 반응들은 대게는 혈마를 통해 얻은 힘과 우열을 가려보려 하거나 그 존재 근본에 대해 탐욕적인 성질을 보여주었다. 환도신마가 두려운 기색을 드러냈었으나 그건 천혈강시에 걸린 환도술이 혈마의 힘에 의해 깨진 원인이 큰 부분이었다.
그런데 빌게포첸의 반응은 그들과 또 다른 것이다.
천마신교라는 마도 본산의 핵심들이 본질적으로 자신들과 비슷하다 볼 수 있는 혈마에 대해 하나같이 다른 생각을 가졌다는 의미와도 같은 선상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진도건은 빌게포첸이 왜 두려운 기색을 드러내는 이유에 대해 제대로 공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도인들이 마성의 목소리를 마주하는 건 첫 수용의 단계, 딱 한 번뿐이었다.
누군가는 성정이 맞아서 맛있는 한 끼 뚝딱 해결하는 기분일 수 있었고, 또 누군가는 마약과 같은 강렬한 희열을 맛보는 자도 있었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구역질 나는 똥을 씹는 듯한 기분이거나 아주 청량한 산바람 같은 기분을 맞이한 자도 있었다.
거대한 번뇌를 받아들인 빌게포첸에게 있어서는 그 기분이 ‘두려움’이었던 것이다.
진도건이 혈마와 공존하는 시간은 적응할 시간을 번 것과도 같았지만, 빌게포첸에게 있어서 다른 마성을 마주 보는 일은 먼 과거에 있었던 아주 좋지 않은 기억을 끄집어내 다시 체험하는 일과도 같았다.
“……그렇게 하겠소.”
꽤 오랜 침묵 끝에 빌게포첸이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진도건이 가까이 다가와 오른손바닥을 앞으로 내밀자 빌게포첸도 오른손을 내밀어 장심을 맞대었다.
“후우……!”
깊은 심호흡으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장심에 공력을 불어넣는다.
바라밀법 대수인.
화아아악!
세상이 돌풍에 휘말려 한순간에 뒤바뀌어 버린 듯한 기분.
빌게포첸은 진도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앞의 남자가 진도건이 아님을 그의 눈빛만 보고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이, 이럴 수가…… 서, 설마 혈마……?”
“아아.”
멍하니 혈마를 바라보던 빌게포첸이 허둥지둥 주변 풍경을 바라보았다.
세상이 반으로 갈라져 있었다.
빌게포첸은 새하얀 구름을 밟고 있었는데 태양이 그 아래 떠 있는 듯 빛이 안개처럼 흩어져 올라오고 있었으나 위를 올려다보면 달도, 별도 없는 깊은 밤이 짙게 내려와 있었다. 그리고 그런 풍경이 그와 혈마 사이 딱 중간지점에서 끝난 채 너머로 완전히 다른 풍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혈마는 핏물이 그득한 웅덩이를 밟고 있었다.
붉은 기류가 안개처럼 혈마 주위 일대로 넘실거리는데 그것들이 점차 뚜렷한 무언가로 바뀌기 시작했다.
새순이 돋아나 나무가 되고 이파리와 꽃들이 피어난다. 그러다 바람이 불어서 그것들이 떨어지는데 그 떨어진 자리엔 다시 새로운 꽃과 잎이 돋아나 마치 식물의 생장(生長)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그리고 그렇게 생동감 넘치는 풍경이 왜인지 붉게 물들어 있었다.
혈마가 빌게포첸을 바라보는데 고개가 삐딱해진다.
“넌 단지운과 다르군. 그림자가 없어.”
“에?”
“그런데 불성과 마성이 공존하는 건 또 이상하군. 어둠이 침범하지 않도록 장막을 쳐서 불성이 보존하도록 하고 있어. 이건 마치…….”
혈마가 피식 웃었다.
“훗! 나와 진도건의 관계와 조금 비슷하군.”
비슷하지만, 같지는 않다.
“진도건은 어디 있습니까?”
“글쎄. 평소라면 같은 공간에 있었을 텐데 이번엔 분리되었군. 이건……너의 힘이 그렇게 만든 것 같은데. 나만을 허락한, ……뭐 그런 거?”
“그는……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아니, 대체 어떻게 공존하고 있는지……. 어떻게 계속해서 당신의 목소리를 견딜 수 있는지, 그 끔찍함을…….”
“야, 내가 떠들 수 있는 건 원래 이런 무의식 속뿐이었어. 3년 내내 괴롭혔다는 식으로 얘기하면 내가 억울하다고. 물론 첫 만남부터 한동안은 녀석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나 있었지만……. 큭큭! 지금은 아니야.”
빌게포첸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혈마를 보았다.
‘이건 말도 안 돼. 마성이 저렇게 따로이 영혼 상태를 유지하며 존재하는 법은 없을 텐데……. 한 사람이 여러 인격을 갖는 등의 경우를 생각해도 저런 식은 아닐 텐데……. 대체 천지간에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인가?’
불교의 철학적인 관점으로 볼 때 인간은 기본적으로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육근(六根)과 무의식으로 이뤄져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이를 다시 세부적으로 볼 때, 앞의 다섯 가지를 전오식(前五識)으로 부르며 이것들을 통괄하는 것이 여섯 번째 식(識)인 의식(意識)이라 보게 된다.
이 모두를 아교처럼 엮어 한 인격을 구성할 수 있도록 하는 ‘자아’라는 개념이 제칠식(第七識) 마나스식(manas識)이다.
그리고 바다와 같이 만물을 인식하는 근원을 품었으며, 다른 일곱 가지 식에 의하여 판단되는 모든 정보와 가능성을 훈습(薰習)하고, 선악마저 경계 없이 포용하는 근원적인 무의식을 제팔식(第八識) 아뢰야식(阿賴耶識;ālaya識)이라고 보았다.
오싹!
순간 빌게포첸은 소름이 끼쳤다.
어떻게 이런 공간이 펼쳐져 있는지, 또 보이는 것들은 일반적인 상식의 기준이나 상상의 범주를 아득히 뛰어넘고 있는지.
무엇을 더 품고 또 무엇을 더 보여줄 수 있는지조차 해량할 수 없는.
바다.
마나스식.
아니, 어쩌면 아뢰야식의 바다.
어쩐지 멍하니 서 있는 그를 보며 혈마가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데 갑자기 빌게포첸이 바닥에 엎드리자 움찔거렸다.
“아아?”
뭔 짓이냐는 반응.
“나무아미타불……!”
그러나 빌게포첸은 마치 성혈궁에서 관세음보살좌상을 향해 절하듯 그 몸짓과 염불에서 느껴지는 떨림에서 경외스러운 마음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