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5화 - 제56장. 매복작전의 목적 (5)
매복작전에 동원된 조태상군과 고소덕군의 전투는 사실상 퇴각 나팔이 불렸을 때부터 멈춘 상황이었다. 그리고 원래는 곧장 퇴각하여 금방 천무경 등이 있는 자리까지 뒤덮었어야 할 군대를 그 자리에 대오를 갖추게 한 채 적룡단이 물러나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고소덕은 말에서 내려와 천무경의 앞에 마주 섰다.
“장군, 제 요청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천무경이 고소덕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그리고 그런 그를 향해 고서덕이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보시오, 천 맹주. 이 몸은 아직 황명이 도착하지 않았음에도 귀하의 말을 받아들이고 퇴각 신호에 따르지 않았소이다. 어찌 보면 기존의 황명을 거역한 장수를 자처한 것이란 말이오. 그러니 천 맹주는 지금 이 자리에서 내게 상세히 설명을 해줘야겠소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말에 어폐가 있다면 나는 군을 당장에라도 적룡단에게 돌릴 것이외다.”
사실 마웅패가 바로 떠올리지 못한 경우의 수는 천무경 등이 고소덕군의 종심을 가로질러 왔을 가능성이었다.
그가 세 사람의 존재를 적룡단과 충돌하기 직전에야 안 것도 그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아서였다.
천무경과 백두기, 장태환은 매복 작전이 실행되고 조금 뒤에 고소덕군 앞에 나타났다.
느닷없는 등장에 모두가 영문을 모르면서도 긴장하게 되는 가운데 세 사람은 아무런 저항 없이 군 사이를 지나갔다.
정확히는 그들의 패도적인 기세가 군사들의 기세를 짓누른 영향이 컸다.
마치 양 떼 속의 사자처럼 말이다.
거기에 고소덕은 그 세 사람이 적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하에 종국엔 자기 앞의 길까지 열었다.
강제된 만남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그와 군사들이 백기군으로서 적룡단을 도와야 하는 불쾌한 처지가 이런 이상한 현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도록 만든 것이다.
그 자리에서 천무경은 고소덕에게 한 가지를 요구하였다.
만약 적룡단 쪽에서 퇴각 신호가 떨어지면 군을 멈춰달라는 것.
당연히 고소덕은 말도 안 되는 요구라며 거절했다.
그때 천무경의 한 마디가 그의 심경을 흔들어 놓았었다.
“적룡단은 우리가 마교라고 부르는 천마신교의 주구. 그들의 전쟁을 위해 장군과 하국 군사들이 동원된 배경엔 황실이 겁박당한 데에 있다는 걸 아십니까?”
그런 뒷배경에는 무지했던 고소덕이 깜짝 놀라서 사실이냐고 되묻는 물음에 천무경은 군을 멈춰주면 대답해주겠다고 하였다.
그 대답을 지금 다시 요구하는 것이다.
갑작스럽게 지휘를 맡으면서 군 파병이 결정되었을 때, 고소덕은 출전의 목적이 불분명함에 불만이 있었다.
추밀원에선 신강의 무림세력이 대백고국의 영토 수복을 돕는 거라고 했지만, 전장에 도착하고 보니 깃발을 바꿔 달고 대리전을 치르는 형국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연스럽게 의문부호가 뒤따랐지만, 이를 해결해줄 본국으로부터의 소식이 끊겨버리면서 그의 답답함은 증폭된 상황이었다.
그런데 황실이 겁박당하고 있다는 얘기를 하고 있으니 어찌 반응하지 않을 수 있으랴.
“말씀드렸던 대로, 천마신교는 황제를 비롯하여 추밀원사를 겸임하고 있던 월왕 이인우 전하까지 살수를 배치해 겁박하고 있었습니다. 전쟁이 심화되길 원치 않았던 대금 황제는 저희 창천맹에 해결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저흰 흥경에서 보낸 급서 한 통을 받았습니다.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라고 말이지요.”
“큭!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쉬이 믿으란 말이오?”
“이 사람이 장군께 그 자리에서 모두 말씀드리지 않은 이유는 과연 장군이 작금의 전쟁에 어떤 태도로 임하고 있는지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나를 시험했다?”
“하나라는 금나라에 대해 문관부터 무관들까지 주전파(主戰派)와 주화파(主和派)가 항시 양립하고 있다 들었습니다. 조태상 장군이 조사한 고 장군께선 다름 아닌 주전파, 그러나 그동안 상대하면서 지휘에 신중한 성격이 보이니 충분히 황실이 처한 상황을 얘기하면 고민해줄 것이라고 했지요.”
고소덕의 미간이 가늘게 좁혀졌다.
‘조태상…….’
그가 참전하면서 적룡단을 보고 느낀 건 체계가 덜 잡힌 흑풍대라는 것이었다. 군으로서 무시무시한 전투력을 가졌지만, 마적단이라는 원초적인 한계를 벗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분명 무서운 부대라는 건 변함이 없었는데 그들을 애먹인 지휘력은 분명 그가 보기에도 빼어난 것이었다.
비록 그가 본격적으로 군 지휘를 담당하면서 그런 전세는 역전된 셈이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적룡단이라는 불공평한 전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계책을 부렸음을 실토하시는군. 적장인 날 상대로 한 이간책(離間策) 말이오.”
“이간책이 아닙니다, 장군. 전쟁이 길어지는 건 천마신교에게 병력을 공급하는 하나라의 군 증원과 보급 때문입니다. 전쟁의 종식을 위해 부저추신(釜低抽薪)의 계책으로서 천마신교에 대한 군 증원을 차단하기 위함인 것이며, 그 저간엔 하나라에 생긴 문제를 창천맹이라는 칼을 빌려 제거하는 대금 황제의 차도살인의 외교책이었지요.”
부저추신.
솥 밑의 장작을 뺀다는, 발본색원과 같이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한다는 의미였다.
천무경의 태도엔 여유와 침착함이 묻어나왔고 말하는 내용엔 이치가 녹아있었다.
고소덕의 표정이 굳어졌다.
거기에 천무경이 마지막 쐐기를 박는다.
“장군. 삼국이 사소한 시비마저 억누르며 전쟁을 억제한 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작금에 벌어진 이 전쟁의 원인은 온전히 무림에 있는 것입니다. 군역을 지는 이들도 두 나라의 백성들이고 그들은 죄가 없는데 명분도 없는 전쟁에 의미 없이 희생시킬 생각이십니까?”
무거운 표정이 된 고소덕이 돌아가 말에 다시 올라탔다. 그리고 천무경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내 군사들은 이곳 북쪽 숲에서 야영을 할 것이오, 그리고 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한 전령을 띄울 것이오.”
“전령은 고원성으로 보내십시오. 제국충무왕 전하께서 제가 보낸 칼을 쓰셨으니 그곳에 원하는 정보가 모일 것입니다.”
“알겠소이다.”
천무경이 고소덕을 향해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다.
고소덕은 군을 지휘하여 북쪽 산림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천무경 쪽으로는 창천단과 백무당이 모두 모였다.
“고생했네. 구 단주도 고생하셨소.”
천무경이 남궁평과 구치상을 반겼다.
“조 장군의 계책은 성공했습니까?”
구치상의 물음에 천무경이 씩 웃었다.
“그렇다고 봐야겠지.”
“그거 다행이군요.”
“두 사람이 큰일을 해낸 것 같습니다, 방주님.”
남궁평이 다가와 말했다.
두 사람이 누군지 깨달은 천무경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절로 고개를 끄덕거리니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뜻이다.
* * * *
전날 밤.
흥경의 사태가 마무리된 후, 하오문은 곧장 진창성으로 전서응(傳書鷹)을 날렸다.
소식이 최대한 빨리 전해야지 전장에서의 대응 전략도 달라질 것이기에 급서로 보낸 것이었다. 그리고 진도건과 안효철, 이혁성의 황검당은 흥경에서 나와 성 밖에 있는 하오문의 안가로 모였다.
이언종을 통해 황제 이인효의 치하를 기다리지 않겠다는 의사를 이미 밝힌 것도 있었지만, 이런 행동엔 더 깊은 이유가 있었다.
일단 살문의 살계를 억제하기 위해 하오문을 통해 통금령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조정대신들의 반발도 있었다. 이를 하오문과 엮여있던 일부 고관들이 황제 직인의 서신을 가지고 개별적인 접견으로 문제를 해결했는데 이에 대한 공개적인 진상 파악의 움직임을 억누를 필요가 있었다.
특히 추밀원을 비롯한 무관들과 군사들 사이에 만연해있는 출전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황실의 심력을 모두 쓸 필요가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황실을 겁박하던 살문을 처리하는 데 직접적인 역할을 한 진도건 등과 황검당이 흥경에 남아있다면 문제 해결에 집중되어야 할 시선이 이들에게 분산될 위험이 있는 것이었다.
그것이 동이 트기 전 이른 새벽에 그들이 흥경을 떠나야만 했던 근본적인 이유였다.
그 흥경을 떠나기 전 새벽 사이에 저마다 잠시 잠을 청하거나 운기조식을 취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진도건은 야심한 시각을 틈타 경공을 펼치며 성벽을 뛰어넘어가고 있었다.
그것을 부추긴 건 어째서인지 잠들지 않고 있는 혈마였다.
“도대체 왜 깨어 있는 거냐?”
“불만이냐?”
“당연히 불만이지. 다른 사람들처럼 조용히 쉬려고 했는데, 계속 재잘재잘…….”
“내일부터는 자는 척이라도 해줄 테니 닥치고 빨리 움직여라.”
진도건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혈마의 상태에 대해선 역시 추상적인 추론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는데, 아마도 환도종의 마기를 제법 흡수한 게 영향을 끼친 거 아닐까 하는 짐작을 하고 있었다.
그 추론은 거의 정확했다.
혈마의 의식이 갑자기 깨어나서 아직까지 유지하고 있는 건 그가 흡수한 환도종의 마기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음에 기인했다. 그것은 마성의 적응이라 할 수도 있었는데, 혼돈의 색채 그 자체를 유지하고 있는 혈마였기에 가능한 우연적 현상이었다.
혈마가 굳이 ‘자는 척’이란 말을 한 것은 그가 자신의 상태를 제대로 인지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골치 아프군.’
진도건이 골치 아프단 생각을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혈마에게서 바로 반응이 왔다.
“골치 아프다는 생각이라도 하나 보지? 큭큭!”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말들은 모두 혈마에게 전달되는 건 아니었다.
적을 상대하는 등 대개는 같은 목적의식을 공유할 때, 머릿속의 생각들이 온전히 소통되는 편이었다. 그리고 그렇지 않을 때 혈마는 일종의 영적인 경계에 거슬리는 파장을 느끼고 이런 식으로 어림짐작에 가까운 반응을 하는 것이었다.
반대로 혈마는 마성으로서 진도건과 한 몸 안에 공존하고 있으므로 내적인 말과 외적인 말에 구분이 없는 셈이었다. 대신 내면 안에선 자유롭기에 혈마 자신의 생각을 숨길 수도, 또는 일종의 의지처럼 자신의 생각을 진도건의 뇌리에 새길 수도 있었다.
천마 단지운을 상대할 때, 혈마가 외부로 체현될 정도로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 건 그런 의지의 자율성 때문이었다.
“세간엔 나를 혈마검귀라는 별호로 부르던데, 마교놈들이 마성과 합일된 상태인 걸 생각해보면 날 그냥 검귀라고만 칭하는 게 맞지 않나 싶어.”
“이 혈마의 마기를 제 것처럼 쓰는 녀석이 별 시답잖은 소리를 다 하는구나.”
“네가 청성산에서 혈마단에 축적한 마기를 제멋대로 다 갖다 쓴 덕분에 마지막에 참 위험했었는데, 이렇게 계속 깨어 있을 정도면 그런 일을 또 벌일지 누가 아냐? 그럼 혈마검귀란 별호도 따로 떼어서 보는 게 맞겠지.”
“내가 반응하지 않았으면 위험하기 이전에 시체가 되어 청성산에 묻히고 네 짝이 제삿술을 부어줬을지 몰랐다고 생각하는 게 맞지 않느냐? 아니, 어쩌면 둘 다 나란히 묻혔을지도. 킥킥킥!”
“쳇.”
혈마가 말 한마디도 지지 않자 심통 난 진도건이 혀를 찼다. 그러다 문득 우스운 생각이 들어 피식거렸다.
“쳇, 누가 보면 정신병 걸려서 주절주절 혼잣말하는 것처럼 보겠군.”
“큭큭큭! 그거 틀린 말은 아니구나. 아아! 그래도 이렇게 오래 깨어 있으니 참 좋구나. 바람도 시원하고 말이야. 이런 것도 자유인가?”
경공을 펼치며 달리는 진도건이 피부로 느끼는 맞바람의 서늘한 느낌을 혈마도 공유하고 있었다.
이제 곧 동절기로 접어들, 늦가을의 새벽 공기는 그만큼 차가웠다.
진도건은 무작정 달리고 있는 게 아니었다.
혈마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방향에 대한 의지를 보내면 그걸 자동적으로 인지하게 되면서 마치 귀소본능처럼 어디로 가는지 아는 듯 움직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슨 목적인지, 어떤 곳으로 가는지 스스로 해석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말이다.”
“응?”
“마성과 합일되지 않고 너와 나처럼 공존하는 거. 마교도 있어.”
“누구?”
“청성산의 그 자식.”
“마교주 단지운?”
“그래. 틀림없다.”
진도건은 잠깐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걸 느꼈다.
당시 혈마의 무의식에 들어가 그의 뒤에 숨어서 단지운과 혈마가 대화를 나누었던 기억이 떠올랐는데, 그로선 어떤 실마리가 있었는지 짚이는 게 없었다. 하지만, 곧 다른 기억이 머릿속을 스쳤다.
‘눈알이 온통 검은자위로만 뒤덮였던 순간들.’
찰나의 순간들이었지만, 몇 차례 본 탓에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그 모습.
그걸 떠올리며 입으로 꺼내려던 그때, 혈마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온다.
“다 와 간다. 이 구린 냄새, 너도 느껴지지?”
진도건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구린 냄새는 아니었지만, 바로 어제 마주쳤기에 기억할 수 있는 마인의 기척을 느낀 것이었다.
“이제 보니 성혈신마를 찾은 것이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