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화 - 제56장. 매복작전의 목적 (2)
늦은 밤, 황궁 정문 앞에서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던 자들이 모두 모였다.
진도건과 안효철을 비롯하여 이혁성이 이끄는 황검당 전원 그리고 월왕 이인우와 제국충무왕 이언종까지 모였다.
이인우가 안효철을 보며 포권을 취했다.
“이름을 알려주지 않아서 뭐라 불러야 할지……. 아무튼 내 부인과 아이를 구해줘서 고맙네.”
“모두 무탈하십니까?”
“그렇네. 전날 무례했던 걸 용서해주게.”
“아닙니다. 그래도 황제 폐하를 알현하고 오시는 길에도 표정이 그리 어둡지는 않아 보여서 다행입니다만…….”
이인우가 어색하게 웃으며 자기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렇게 보였나? ……지은 죄에 비하면 폐하께서 선처를 베푸셨지.”
“한 집에 머물렀다고 해도 어머님과 안전이가 놈들에게 억류당한 꼴 아니었습니까, 아버님. 폐하께서 충분히 참작해주실 사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폐하의 말씀이 맞다. 황실의 역사를 생각하면 이 아비는 실상 역린(逆鱗)을 건드린 거나 마찬가지이니. 선처해주신 게 맞느니라.”
이인우가 쓴웃음을 짓고는 고개를 떨구며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곤 다시 고개를 들어 앞에 있는 무림인들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모두를 향해 포권을 취하며 입을 열었다.
“다시 한번 여러분께 진심으로 고맙고 또 미안하오. 본국에서 파병된 군사들이 마교놈들의 지휘 아래 전쟁에 동원되고 있으니 이 또한 나의 잘못이고 큰 빚이 아닐 수가 없소. 감히 용서해달란 말은 하지 않겠소이다.”
일국의 친왕이 예의를 갖춰 사죄하고 있었다.
작금의 전쟁 흐름에 피해를 보았다면 그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어도 자연스러웠겠지만, 또 한편으론 이곳의 일에 관한 전말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에게 딱한 시선을 보내게 되는 것도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모두가 이인우에게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이니 자연스럽게 그의 사과를 받아주는 형국이었다.
이인우는 고개를 조금은 숙인 채로 그대로 월왕부로 돌아갔다.
이언종은 자리에 남아 진도건과 안효철을 반갑게 맞았다.
“두 사람에게 참 고맙고 미안하군.”
“이 당주님을 기다리지 않고 도호부를 떠난 일 때문에 그렇습니까?”
“…그렇지.”
“솔직히 좀 불안했습니다.”
“하하…… 이거 참 미안하군. 아무튼 두 대협을 비롯해서 이 당주와 황검당분들께도 황실에서 충분히 치하할 수 있도록 내 폐하께 주청을 드릴 생각이네. 아마 폐하도 같은 생각이실 테니 내일 잠시 기다렸다가 황실 연회에…….”
“전하.”
“응?”
“그 마음만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폐하의 치하를 거절하겠다는 건가?”
“흥경의 꼬인 매듭은 오늘로써 완전히 풀렸지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소인들은 아직 남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 참전하여 천마신교를 무너뜨려야 하는 가장 큰 과제가 남아있습니다. 아마도 내일은 현 상황을 점검하고 방침을 결정해서 바로 움직여야 할 것입니다. 연회를 즐길 시간도, 포상을 담을 자리도 없는 상황이니 마음만 감사히 받을 수밖에요. 폐하께도 그리 전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으흠…….”
이언종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일국의 황제가 치하하는 것을 다른 이유를 핑계로 거절하는 건 신하된 자로서도 불충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대백고국의 신하도 백성도 아니었다. 강호무림이라는 허상의 테두리 안에서 나라의 치정이 닿는 양지와 그렇지 않은 음지에 모두 한발씩 걸쳐 살아가는 존재들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일국의 황제로서는 이 건을 쉬이 받아들이긴 어려울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언종도 어쩔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크흠, 알겠네. 그건 내가 폐하께 말씀드려서 잘 설득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전하.”
진도건도 자신이 황제 이인효나 제국충무왕 이언종 등의 서하 황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거절을 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아마 황제가 치하를 받길 다시 요구한다면 그땐 거절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미리 의사를 전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이언종이 앞서서 수용하고 이인효를 설득해보겠다고 대답해준 건 고마운 일이었기에 진도건도 요청을 들어준 그에게 깊이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 * * *
위수협(渭水峽).
동서로 흐르는 위수를 중심으로 남으로는 진령산맥, 북으로는 육반산맥의 산림에 둘러싸인 곳이다.
협로의 입구부터 출구까지 위수가 구불구불 흐르고 있으며 그 강의 저지대를 따라서 길이 존재했다. 지도상으로 보면 위수는 동쪽으로 가다가 삼분지일 구간을 지날 때쯤엔 전체적인 방향이 남동쪽으로 기운다. 그리고 중간쯤 가서는 더 남쪽으로 크게 우회하여 육반산맥이 끝나는 지점을 찾아 빠져나간다.
강을 따라 형성된 비교적 완만한 구릉지대 형성되어 있었고, 중간 이후로 위수가 방향을 트는 구간부터는 육반산맥을 관통하여 지날 수 있는 샛길도 있어서 훈련된 서량(西涼)의 병마들이 넘기에 무리가 없었다.
그리고 지금, 때마침 이곳엔 일단의 군대가 진군하고 있었다.
군대는 하나의 깃발을 들고 있었지만, 그들을 가까이서 살핀다면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전후군은 모두가 적룡기(赤龍旗)로서 같은 지휘 아래에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후군인 기마대는 붉은 갑옷이나 붉게 물들인 가죽, 혹은 각종 장식들로 그 독특한 색채를 보여주고 있는 반면에 선봉에 선 보병대나 기병대 모두 정규군의 양식이 드러나는 군장을 착용하고 있었다.
그렇다.
그들은 바로 천마신교의 적룡단(赤龍團)과 군장에서 서하의 상징 흔적을 칼로 긁어 지워내고 깃발조차 아무런 표시도 없이 백기를 세웠던 서하의 증원군이었다.
천수성의 무혈입성.
그리고 이틀 후, 적룡단의 단주이자 적룡신마 마웅패(馬雄覇)는 바로 진창성 공략을 위하여 군단을 재편했다.
성을 지키기 위한 군사 1만을 남겨두고는 적룡단을 제외한 총 4만 군사로 위수를 따라 진군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서하 증원군의 장수인 고소덕(孤所德)은 매복의 위험을 제기하였으나 바로 묵살당했다.
군이 매복해도 적룡단이 나서서 처리하면 될 일이란 이유였다.
고소덕은 또 척후를 미리 보내서 감시망을 구축한 이후에 움직이는 게 낫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거기에 마웅패는 적군이 농성준비를 모두 마치기 전에 속전속결하는 것이 낫지 않겠냐는 의견을 피력하자 그 말은 또 일리가 있었기에 고소덕도 수긍했다.
그렇게 다시 이틀간 진군하여 위수협의 절반을 지나 적룡군은 육반산맥을 관통하는 샛길로 진입한 상황에서 그들은 장수 고소덕이 예상했던 대로 매복을 맞닥뜨렸다.
“적군은 얼마나 되느냐?”
“북쪽과 남쪽으로 각각 1만에 못 미치는 군세로 확인됩니다.”
마웅패의 물음에 전령이 대답했다.
“흥! 조태상이 무리한 선택을 하는군.”
마웅패가 콧방귀를 뀌며 중얼거렸다. 고소덕의 의견을 묵살하긴 했지만, 그의 염려를 기억하고 나름대로 매복을 맞이할 준비를 한 탓에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농성하기 전에 위수협에서 우리 군사 숫자들을 조금이라도 줄여놓으려고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부단주 이의종(李宜終)의 말에 마웅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전령을 보며 다시 묻는다.
“전령아, 고 장군의 지원요청은 없었느냐?”
“예, 없었습니다!”
“적장 중에 조태번은 없더냐?”
“예!”
“흐음.”
마웅패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 적룡단의 또 다른 부단주인 테시가 웃음을 흘렸다.
“후후! 위수협에서 나와 이쪽으로 들어설 때부터 병력을 기존 종진에서 횡진으로 최대한 펼쳤으니 대응에 무리가 없었을 겁니다. 더군다나 조태번이 없다면 고 장군 역량으로 매복을 방어하기 충분하겠습니다.”
“테시야, 속전속결이 우리의 작전인데 고 장군이 물리치길 기다리는 게 맞느냐? 단주, 제게 명령을 내려주시면 놈들을 아주 작살을 내고 오겠습니다.”
“쳇! 누가 기다린다고 했소? 제게도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저희가 남북으로 움직여 매복군의 측면을 치면 쉽게 무너질 것입니다.”
마웅패는 적룡단의 두 부단주가 의견을 일치시키며 서로 호응하는 모습을 보고 다시 한번 고소덕 장군의 얼굴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찝찝한데…….’
마웅패도 두 부단주처럼 돌격을 좋아했다.
부대의 악명은 적룡단보다 흑풍대가 높았다.
요나라 정규군 출신인 흑풍대와 달리 마적단으로 꾸려진 적룡단의 특성 때문에 서하나 금이 ‘나라의 위협’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서하가 점유하고 있는 감숙, 청해 일대의 영토서부터 신강의 사막지대에 이르기까지 적룡단의 활동 영역은 매우 넓어서 한창 왕성하게 활동했을 땐 심각한 골칫거리였다.
특히 지금의 마웅패가 단주 자리를 꿰찬 이후로는 점점 흑풍대에 비견될 악명을 얻게 될 정도로 적룡단의 전투력이 급상승했기 때문이었다.
새외의 유목민족들 사이에선 통칭 ‘서량의 붉은 용’ 마웅패하면 모르는 자가 없을 정도였다.
그런 위상을 가졌던 마웅패가 조태상 형제에게 크게 데이고 고소덕에 의해 군사 전술의 필요성에 대해 개안(開眼)한 뒤로는 조심성이 늘어버렸다.
물론 이 조심성 때문에 개인적인 답답함도 같이 늘었지만, 그래도 결정을 내리기 전에 한 번쯤 상황들을 짚고 넘어가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게 된 그였다.
“단주님, 결정을 내려주십시오!”
마웅패가 곧장 명령하지 않자 이의종이 재차 재촉했다.
그런 상황에서 단주와 부단주들의 얘기에 눈치를 보던 전령이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그 모습이 바로 눈에 들어오자 마웅패는 속으로 ‘옳커니!’ 외쳤다.
“또 전할 게 남았느냐?”
“아, 그게…… 적군 중에 기병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철기병이 혹시 여길 기습할 수도 있으니 대비를 같이 고려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기습을 해온단 말이냐?”
테시가 으르렁거리자 전령이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마웅패는 전령의 얘기에 눈이 번쩍 뜨였다.
“이 부단주, 즉시 전령을 보내 이 얘기가 맞는지 확인해보라.”
“예.”
이의종이 적룡단원 하나를 전방으로 보내는 사이 마웅패는 머릿속으로 전령의 말속에 숨겨진 의미가 무엇이 있는지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매복군 중에 기병대가 없다고 해도 우릴 노릴 리는 없지. 그건 조태상이 아니라 조태번이 선봉이라도 주제넘은 짓이라 시도하지 못할 거야. 하지만, 애초에 하나라 군사들을 노린 거라면…… 기병도 같이 동원해서 작전을 펴는 게 맞는 것 같은데. 확실히 기병만 없는 건 이상한 것 같아.’
마웅패가 생각하는 동안에는 이의종이나 테시가 모두 답답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마웅패의 의지는 그들에게 절대적이었고 또 두 번 재촉하는 행위는 오히려 화가 떨어질 수 있었기 때문에 모두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 사이 말을 타고 상황을 보러 나갔던 적룡단원이 돌아왔다.
“단주님! 맞습니다. 기병이 없습니다. 놈들은 궁병으로 계속 사격하면서 보병으로는 오히려 방진을 치는 모양새입니다.”
“흐음.”
마웅패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역시 그 이유에 대해 이렇다 할 생각이 선뜻 떠오르는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조태상군의 철기병이 적룡단을 직접 노릴 수 있으리라곤 생각이 들지 않으면서도 그들이 보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이 상황이 점점 불쾌해졌다.
그때 테시가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단주님도 참 이상하십니다.”
마웅패가 눈살을 찌푸린 표정 그대로 테시를 노려보았다.
“뭐가 말이냐?”
“야, 너 무슨 버릇이냐?”
단주가 화난 기색으로 되묻자 괜히 뜨끔했던 이의종이 테시를 말렸다. 하지만, 테시는 아랑곳하지 않고 불만 가득한 얼굴로 계속 말을 내뱉는다.
“단주께서 전략전술에 신경을 쓰는 건 저도 이해가 갑니다. 저라고 조태상에게 휘둘리고 고 장군의 합류로 역전하는 걸 보면서 아무런 반성도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단주는 너무 거기에만 신경을 쓰고 계십니다. 우린 근본이 마적단이고 또 무림인 아닙니까? 단주님이 조금만 능력을 발휘하면 저희를 노리고 매복하여 접근한 놈들이 있는지 금방 알 수 있는데 왜 안 하십니까?”
“뭐?”
“서량의 붉은 용. 걸리면 닥치고 돌격해서 때려죽이는 것이 단주님의 패도가 아니었습니까?”
이의종이 불안한 표정으로 마웅패와 테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위험해…, 저러다 단주한테 죽을지도…….’
특히 마웅패의 눈치를 살펴보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의 눈초리에 노기가 가득했다.
“……크하하하하!”
그때 마웅패가 갑자기 화난 표정을 풀고 웃음을 터뜨리자 이의종이 어안이 벙벙해진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테시도 그의 반응에 움찔 떨면서도 긴장하면서 그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래, 테시의 말이 맞다. 군사를 지휘하느라 그동안 해왔던 내 방식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좋아, 어디 죽으러 오는 놈들이 있나 찾아볼까?”
테시도 나름 꽤 각오하고 있었기에 마웅패가 의견을 받아들인 것 같아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부탁드립니다, 단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