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300화 (300/432)

300화 - 제55장. 음마(陰魔) 그리고 월하사신(月下死神) (5)

사금령은 알고 있었다.

음마는 본질적으로 그에게 두 가지 길을 보여주었다.

음한지경(陰寒之境) 그리고 음영지경(陰影之境).

한빙(寒氷)과 암영(暗影)은 한 몸이었으나 사금령은 자신이 여태껏 걸어온 길과는 다른 영역의 힘을 원하여 음한지경만을 취하려 들었다. 동시에 취할 수 있음에도 일부러 음영지경은 외면한 것이다.

결국, 이는 스스로 한계를 낮추는 일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음마의 마성이 온전한 각성을 이루는 걸 방해하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이미 늦었지만, 그때 취했던 길을 되돌린다.

아직 음마가 몸에 남긴 흔적은 다시금 한 가지 마도를 열 수 있는 여력을 제공한다. 그리고 사금령은 너무나 익숙해서 가지 않았던, 자신에게 더 맞고 잘 어울리는 길을 택하여 마지막으로 마도를 열었다.

월음포살문 암월야(暗月夜).

어둠에 삼켜져 빛을 잃은, 월식의 달처럼 사금령은 어둠에 자신을 지웠다.

격전의 여파로 주변을 밝히던 화로들도 다 무너지고 불씨는 한기에 삼켜져 죽어버렸으니 이미 충분한 어둠이 내려와 있어 그의 몸에 어둠의 옷을 덧댄다.

모습을 지우고, 기척을 지우며, 살기마저 지운다.

모든 감각이 인지하고 있던 사금령의 존재 그리고 존재감이, 끝내 모든 감각으로부터 사라지자 진도건도 처음엔 긴장감이 바짝 섰다.

하지만, 진도건은 곧 사금령의 존재를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음한지경을 버림으로써 홍련을 이루지 못하고 뚝뚝 떨어지고 흩어지는 선혈은 사금령이 걷는 지면에, 사금령이 움직이는 허공에 그 흔적을 새기고 있었다.

무엇보다 아직 잠들지 않은 혈마도 그에게 자신의 감각을 전하고 있었다.

“자신의 피라도 몸에서부터 떨어져 나가면 신외지물이나 마찬가지. 종전의 힘까지 가졌다면 홍련을 몸에 피워내어 완전히 자신을 감출 수 있었겠어.”

진도건은 혈마의 말을 깊게 듣지 않았다. 이미 어둠 속에서 찌르고 베어오는 흑도의 칼날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챙! 챙! 챙……!

폭풍과 같은 매섭고 격렬한 충돌은 아니었지만, 급소를 노리고 짓쳐 들어오는 매 일격이 섬뜩하리만치 무섭고 위협적이었다.

만약 진도건이 천하에서 첫손에 꼽힐 만한 쾌검과 신체능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여지없이 심장이 꿰뚫리고 목이 베였을지도 몰랐다.

또 만약 사금령이 지금의 길을 걸어 정상적인 몸 상태였다면 오직 통했을 전술이란 살을 주고 뼈를 취해보려는 동귀어진의 도박뿐이었을 지도 몰랐다.

그만큼 사금령의 장도는 빠른 것보다도 지척에서 불쑥 노리고 들어오게 만들 수 있도록 숨겨주는 이 어둠 자체가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어둠은 시한부였다.

‘마지막 일격을…….’

사금령은 어둠 속에서 자신의 장도에 생애의 모든 후회를 담았다.

월식무흔도 오의 삼도천차사도(三途川差使刀)

푹!

이혁성과 서파파는 진도건이 사금령의 목줄을 움켜쥐었던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느꼈다.

아주 찰나 간이었지만, 무언가 섬뜩한 단파가 두 사람을 진원으로 하여 사방에 퍼져나갔기 때문이었다. 최상의 몸 상태로, 정신을 제대로 집중하지 않고서야 느끼기 어려운 그런 파장이었다.

하지만, 잠깐의 위화감으로 치부해버린 채 다시금 거리를 벌리는 진도건과 사금령의 모습은 그들에게 재차 집중하길 요구했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파파가 사금령이 새로운 마공을 보여준 것에 놀랐다.

장내에 어둠이 안개처럼 흘렀고 그 속에서 사금령의 모습이나 기척이 완전히 지워졌다.

날카롭게 공기를 찢는 금속성이 들리지 않았다면 마치 진도건이 헛것에 홀려서 자기 혼자 춤을 추는 듯한 광경처럼 보였을지도 몰랐다.

그 모습을 본 서파파가 증오심 반, 허망함 반을 담아 한숨을 쉬었다.

“그나마 월하사신이란 이름에 조금 어울리게 됐구나.”

애초에 바깥으로 나와 일대일을 싸우는 건 무인들의 것이지 살수들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신살수가 그 정도의 무공을 갖춘 자들을 칭송하며 만든 지위이긴 했으나, 서파파는 남편과 대화할 때도 그런 건 살수답지 않은 거라며 전대 살문주였던 형망에게 신살수 폐지를 건의하기도 했었다.

드러남이 지나치면 그건 더 이상 살수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서파파가 사금령을 볼 때, 이혁성은 진도건을 보고 있었다.

‘검술은 역시…….’

삼도천차사도.

‘삼도천으로 안내하는 저승사자의 칼’이라는 그 이름처럼 그것은 정녕 사신다운 기예였다.

일거에 어둠이 걷힌 순간, 진도건은 팔방을 점유한 채 각기 다른 자세로 칼을 휘두르며 덮쳐오는 사금령의 모습을 보았다.

사신이 죽음을 점지한 자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팔방 모두에 나타난 그런 형국이었다.

신체 상하로 분산된 네 개의 급소와 사지를 동시에 노리는,

‘최후의 검기(劍技)답다.’

찰나 간 진도건의 신형이 아주 조금 앞으로 이동했다.

사금령이 펼쳐낸 팔방 공격의 중심점을 반보 거리만 이동한 것으로 시위는 충분히 당겨졌다.

사방 한 뼘의 좁은 여유 공간 속에서 뇌운과 같은 신체가 폭발적으로 움직인다.

뿜어내는 혈마의 마기도 없이 묵빛 검영이 회오리치며 어둠을 일그러뜨렸다.

오직 원류검결만으로,

채앵-!

선명하게 울려 퍼지는 검명.

바스러지듯 사라지는 일곱 개의 인형(人形) 사이로 사금령이 피를 흩뿌리며 쓰러졌다.

한 번 꺼내면 목숨을 훔쳐내지 않는 한 절대 칼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신의 장도가 손에서 빠져나와 땅에 떨어졌다.

“콜록-!”

사금령이 무릎을 꿇은 채 검은 피를 토해냈다.

마지막으로 모든 기력을 썼던 탓에 직전의 냉기와 부딪쳐 온몸에서부터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온몸은 이미 출혈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 잠깐 사이에 팔방의 검을 쳐내고 잔상을 모두 베면서도 그 진체에게 세 줄기 치명상을 남기는 건 사금령 생애 통틀어서도 처음 본 검속이었다.

‘무정도보다 빠른 쾌검이라니…….’

사금령은 온몸의 기력이 다하는 걸 느꼈다.

축적된 내공은 진원진기와 함께 마지막 초식으로 바닥을 드러냈고 끝없이 욕망을 부추겼던 마기는 달밤에 흩어졌다.

조금씩 흐릿해지는 시야 속에서 그의 앞으로 두 사람이 날아와 착지하고 섰다. 그리고 한 노파는 그가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크크크……! ……그런가? 살문 최후의 원인이 ……은봉 당신인가?”

“네놈의 헛된 야망 때문이겠지.”

천하오절을 향한 시기심.

“크흐흐…….”

실소를 흘리는 사금령에게 서파파가 다가갔다. 그의 머리가 힘없이 떨어지자 서파파가 머리채를 쥐고 다시 잡아당겼다. 그리고 그 목을 겨누며 은자검을 높이 세웠다.

“마지막 남길 말은 없느냐?”

“흐…….”

잠깐 기다렸으나 바람 빠지는 소리 빼면 아무런 대답도 없다.

삶의 의지가 완전히 사라진 넋 빠진 얼굴이 딱 이 꼴이다.

서파파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남편의 넋을 기리며,

푹!

쑤욱, 은자검이 뽑혀 나간 자리에서 핏물이 쪼르륵 흘러내렸다. 서파파가 머리채 쥔 손을 풀자 사금령의 머리는 육신과 함께 맥없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일말의 호흡도, 미동도 없이 살문의 수장, 월하사신 사금령은 서하 흥경 황궁 한복판에서 그대로 절명하였다.

“잘 봤다.”

“황검당주님.”

사금령의 최후를 확인하자 진도건과 이혁성도 인사를 나누었다.

오늘의 이 상황은 서로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면 만들어내지 못했을 결과였다.

“다른 살수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황검당이 놈들을 처리하고 있다.”

이혁성의 말에 안도한 진도건은 황제의 안위를 살피기 위해 광안전으로 걸어갔다.

이인효는 용상에 앉아서 두 손을 모은 채 안정을 기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활짝 열린 광안전 문 쪽으로 어스름하게 스며드는 밤빛 아래로 진도건의 그늘진 모습이 드러나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겼는가?”

“예, 폐하.”

“오오! 정녕 사금령이 죽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다른 쪽은?”

“살수들은 제국충무왕 이언종을 호위한 황검당에서 처리하는 중이니 곧 정리될 것입니다. 남은 건 월왕부입니다.”

“종을 울려 내관들과 근위병들을 불러야겠구나. 여긴 내가 알아서 할 터이니, 자네는 월왕부도 마저 정리를 해주겠나?”

“그렇게 하겠습니다.”

진도건과 대화를 나누면서 이인효는 안도의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아직 월왕부의 싸움이 남았긴 했으나 황실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살문이라는 세력 자체가 절멸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마침내 큰 근심을 덜게 된 셈이었다.

진도건은 이인효에게 인사를 하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이혁성과 서파파를 보며 말한다.

“아직 성혈신마와 안 대협이 싸우고 있습니다. 월왕부로 가시죠.”

“그러지.”

“노부는 살수들 정리가 잘 되고 있는지 살피러 가겠네. 그래도 신출귀몰한 놈들인데, 내 제자들로는 발품이 부족할지도 모를 게야.”

“알겠습니다.”

서파파의 이야기에 진도건과 이혁성이 고개를 끄덕이는 그때,

땡땡땡땡!

꽈앙!

이인효가 직접 광안전 문 앞의 경종을 흔드는 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북쪽의 월왕부가 있는 방향에서 분명하게 구별되는 굉음이 들려왔다.

“냄새가 아주 강렬해!”

머릿속을 울리는 혈마의 음성에 진도건이 잠시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리고 이내 이혁성과 눈빛을 주고받았다.

“가시죠.”

“가자.”

두 사람이 북쪽으로 신형을 날리는 사이 서파파는 황궁 외곽으로 이동해 종소리를 듣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내관과 병사들에게 황궁 내 상황이 정리되었음을 알리고 신속하게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나서는 살문의 마지막 남은 맥을 끊어내기 위하여 남쪽으로 구유무영보를 펼쳐 날아갔다.

* * * *

퍼퍼펑!

안효철과 빌게포첸이 지척까지 찰싹 붙은 채, 권각의 공방을 빠르게 주고 받았다.

두 사람 모두 바깥으로 드러내는 기공의 운영보다 신체 내부 위주로 중후하게 채워 넣는 운용 방식을 선호하면서 벌어진 무투의 격돌이었다.

성혈신마 빌게포첸의 무공은 정말 대단했다.

안효철은 그를 상대하면서 마치 소림의 고승을 마주한 듯한 인상을 받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빌게포첸이 마교의 주구보다 대승불교의 성지 포달랍궁에 뿌리를 둔 승려에 더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랍살에 있는 포달랍궁은 불교가 최초 발생한 인도와 거리가 가깝기에 그 원형을 대부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작금의 중원에 자리 잡은 불교도 기본적인 문화적 차이로 인해 발전된 방향은 다소간 차이는 있었으나 분명 그 뿌리는 포달랍궁과 같다고 할 수 있었다.

특히 중원의 소림, 아미 등과 같은 불교 문파들과 달리 포달랍궁은 밀법(密法), 밀교(密敎)와도 가까웠다.

그로 인해 발전된 무공의 방향도 결이 조금씩 달랐다.

대표적으로 소림사가 정립된 규율과 불문 제자로서의 부동심, 금강이란 말로 대변되는 강력한 외공 단련이 한 축이라면 포달랍궁은 비슷하면서도 다라니(陀羅尼), 진언(眞言)의 힘에 일부 의존하는 경우도 있었다.

밀법의 영향인 것이다.

“siṁhamukhāya svāhā(씽하무카-야, 사바하).”

낮은 음성으로 중얼거리는 뜻 모를 진언.

거대한 바위처럼 굳건함을 유지하던 빌게포첸의 기세가 갑자기 훨씬 더 포악스럽고 억센 사자처럼 변모하였다.

콰콰쾅!

“크윽…….”

경력이 탈혼갑을 지나쳐 신체를 두들겼다. 호체진기에 의한 보호도 있었지만, 경시할 만한 충격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탈혼갑의 방어력이 제 기능을 못 한다는 것도 놀라웠다.

‘그것은 이 자의 무공 특성 때문인가?’

진언에 따라 기세가 바뀌고 권각 운용의 방법이나 경력의 성질도 바뀌었지만, 그것은 변초와 허초 등으로 초식을 운영하는 걸로 이해하면 받아들이지 못할 건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빌게포첸이 뿜어낸 경력 속에 불문 특유의 광명(光明)한 기운과 마공의 사특한 기운이 혼재된 특성만큼 놀라운 건 아니었다.

그런 이유로 탈혼갑이 일부는 막아내고 일부는 통과시키는 모순점을 보이는 것인데 그나마 다행인 건 그렇게 통과하는 기운이 불문 성질의 경력이라는 점이었다.

충격은 줄지언정 탈혼갑의 저주로부터 버텨내야 할 내력의 보루를 뒤흔들지는 않고 있었다.

무쌍류 차륜추(車輪錐).

거친 공격의 파고에도 불구하고 더더욱 품으로 파고든 안효철이 두 손의 손날을 세우며 빌게포첸의 권각을 비껴 쳐냈다. 동시에 움직임의 그림자 속에서 빌게포첸의 안다리를 걸자 그의 중심이 흔들리면서 뒤로 기울였다. 그가 본능적으로 두 팔을 모아 앞을 막는 순간, 그 위로 손마디를 세운 날카로운 주먹이 꽂혔다.

쩌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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