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칼의 귀신-299화 (299/432)

299화 - 제55장. 음마(陰魔) 그리고 월하사신(月下死神) (4)

이혁성은 진도건과 사금령 쪽을 힐끗 보았다가 다시 서파파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금령의 싸움?”

“천하의 살문주가, 천하의 월하사신이 천하오절의 싸움을 흉내 내는 게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서파파가 다시 한번 탄식이 담긴 말을 읊조리며 주름진 입술을 꾹 다물었다.

키아앙-!

진도건과 사금령이 거세게 충돌하면서 엄청난 기의 후폭풍이 밀려왔다. 거리가 좀 떨어져 있음에도 붉은 기류와 뇌전은 섬뜩하리만치 위험했고 바람마저 얼어붙게 만드는 냉기는 두 사람에게까지 닿아 오한이 들게 했다.

누가 보더라도 혀를 내두를 만한 위협적인 기공이었으나 서파파의 못마땅한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이혁성도 이번엔 사금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파파가 많은 말을 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는 그녀의 말뜻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확실히…….’

월음포살문 동토홍련화(凍土紅蓮花).

본래는 그렇게 명명되어 힘을 발휘했어야 할 음마의 마능력(魔能力).

푸르딩딩하게 얼어붙은 피부는, 동작에 의해서나 관절의 움직임에서나 자기들끼리 쓸리기만 해도 서리 부스럼이 일어 반짝였고, 이미 대부분 드러낸 상반신엔 피를 머금은 연꽃이 온갖 곳에 피어 기괴함을 불렀다.

겉보기엔 흡사 언 시체와 같았다.

그래서인지 마치 인체가 다른 구조로 변질된 것처럼 근육의 꿈틀거림이나 혈류를 밀어붙이는 대사(代謝)가 어딘가 비틀린 움직임과 맞물려 기괴하게 보였다.

낯선 움직임은 위험하게 느껴졌지만, 진도건에겐 단지 그런 느낌에 그칠 뿐이었다.

파천혈마공 혈주광뢰(血呪狂雷).

폭발적으로 쏟아내는 혈마의 기운들이 사금령의 냉기를 깨부수며 밀어내는 사이 진도건이 그를 향해 쇄도하여 검을 휘둘렀다.

채채챙!

정말 가공할 냉기였다.

진도건은 검을 휘두르면서도 혹한의 한파를 정면으로 맞는 느낌이 들었다. 쾌검은 여전히 빨랐지만, 평소 상태와 비교한다면 움직이는 속도나 반응 모두 크게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거기에 긴 장도를 다룸에도 대등한 속도로 도검을 섞는 사금령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바라보는 진도건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푸르딩딩한 피부 위로 드러나는 붉은 혈관은 곳곳에 연꽃을 피워내어 끔찍한 느낌을 자아냈지만, 그것 이상으로 하늘색의 그것처럼 푸르게 변한 눈동자가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마치 차갑게 얼어붙은 푸른 호수를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

그 한가운데서 어둠의 틈처럼 날카롭게 선 눈동자는 사금령이라는 인간 뒤에 숨은 존재의 것이 틀림없었다.

‘음마!’

지금의 사금령은 이미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나 마기와 마성이 폭주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마치 화산에서의 자신처럼.

구유무영보를 활용한 사금령의 귀신 같은 움직임이 서리 가득한 공기 중에 그 잔상을 남기면서 진도건의 주위를 에둘렀다. 한파에 위축된 움직임과 반응을 노리고 측후방으로 돌아가 공격하려는 듯한 움직임처럼 느껴졌다.

진도건이 신형을 돌리며 사금령에게 바로 따라붙었다.

쩌저저적!

그러나 사금령이 남긴 잔상에서부터 빙화(氷花)가 피어나며 그 칼날같은 꽃잎을 사방에 뻗쳐댔다.

채앵-!

수평으로 원을 그리며 뻗어나가는 붉은 검기에 얼음꽃들이 산산조각나며 부서졌다.

일순간 머리 위로 그늘이 드리워지더니 장도의 도기가 연달아 쇄도했다.

콰콰콰콱-!

사방이 얼어붙지 않은 곳이 없었고, 그렇게 만들어지고 부서지고를 반복하면서 제 주인의 칼날에도 부서진다. 그리고 어느새 사금령의 위로 몸을 띄운 진도건이 희미한 달빛 아래서 검을 휘둘렀다.

혈광참.

떨어지는 핏빛 참격에 사금령이 몸을 돌리며 맞선다.

카아앙-!

충격파가 터지며 떠오른 얼음조각들을 뚫고 사금령이 주르륵 밀려났다. 입가에 핏물이 흐르다 얼어붙었는데 두 눈은 이미 가늠할 수 없는 분노로 일렁였다.

“크아아아-!”

다시 한번 더 폭주한다.

월음포살문 동토대홍련화(凍土大紅蓮花).

쩌쩌쩌쩌쩌쩍-!

온몸을 활짝 열며 쏟아내는 혹한의 대한파.

이미 호흡을 극소로 조절하고 있던 진도건이 아예 숨을 참아버릴 정도였지만,

‘자멸(自滅).’

사금령이 온몸을 연 상태로 얼어붙다 못해 피부 가죽이 다 터져나가며 푸르딩딩한 온몸을 점점 피로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 낭자한 출혈 위 붉은 연꽃은 조금의 미학(美學)도 느껴지지 않는 처참함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 속에서 진도건은 사신이 강림하여 사금령의 목에 칼을 드리우는 듯한 착각을 아주 한순간에 스치듯이 느꼈다.

폭발적으로 퍼져나가는 냉기 속에서 설익은 마기의 향취도 짙게 드리워졌고 진도건 안에서 혈마도 함께 깨어났다.

“저만큼 끌어낸 건 내게 해방을 바라는 것이로군.”

‘저 정도면 취할 만 하지 않나?’

“불완전한 마성인 것 같다만, 뭐……. 좋다.”

찰나간 머릿속으로 혈마와 의견을 교환하여 방향을 정했다.

파천혈마공.

진도건이 그 파괴적인 진기를 일거에 터뜨렸다. 그 강력한 기세가 얼어붙었던 모든 것들을 부숴버리고 내려앉은 냉기마저 밤하늘로 날려버렸다. 그리고 어느새 진도건의 신형이 사금령의 앞에 도달했다.

동시에 뻗은 진도건의 좌장이 사금령의 목줄을 움켜쥐는 순간, 눈앞이 번쩍였다.

염천혈마의 의지가 사금령 속 음마를 집어삼키면서 그 속에 품었던 모든 것들이 진도건의 의식 속을 관통했다.

* * * *

살수의 길을 가기에 재능이 차고 넘쳤다.

신살수에 이른 다음엔 넷 중 가장 무공이 뛰어났으며 살문주였던 무정도 형망에 가장 가깝기도 했다. 몇 년이면 그의 실력과 무공을 모두 뛰어넘을 평가를 받고 있다는 걸 스스로 매우 잘 알았다.

그래서 기다릴 수가 없었다.

또 형망의 마음이 신살수 금봉 예령에게 닿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계획을 세우고 저질렀다.

금봉 예령을 죽이고 은봉 서파파를 쫓아낸 후, 스스로 살문주가 되어 살문을 완전히 장악했다.

사금령의 욕심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살문주로서 몇 명의 문주, 장문인급의 인물들을 처치하고 그 자리에 ‘월하사신’이라는 글귀를 남김으로서 자신의 존재감을 강호에 알렸다. ‘묵월도(黙月刀)’라는 자신의 본래 별호마저 지우고 스스로 ‘사신’의 위상에 오른 것이다.

무공의 성취도 독보적이었으니 ‘사신’으로서 천하오절조차 심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천하오절은 넘을 수 없는 벽 그 자체였다.

그들은 마치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자들 같았다.

구유무영보의 은신 능력은 강호 최고라고 자부했지만, 천하오절의 말단이라는 칠성도존 구치상이나 철갑권왕 안효철의 감각을 피해 숨지 못하고 번번이 위치를 들통 당하여 제대로 된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멀리서부터 살기를 숨긴 채 어느 정도 거리를 좁힐 정도가 되면 번번이 마치 존재를 느꼈다는 것처럼 눈을 마주쳐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벽을 제대로 한번 느껴보고자 했고, 그렇게 천무경을 찾아갔다.

‘무신(武神)이 여기 있구나.’

그는 벽이 아니었다.

원시천존이었으며, 부처였다.

절대적인 위치에서 그를 굽어보는 존재였다.

지척까지 접근을 허용하면서도 되려 자신의 호리병에 담긴 술을 권하여 한잔하자고도 권한다.

“살문주를 만나다니, 이거 영광이오. 하하하!”

그 무한한 여유에 완전히 기가 죽어버렸다.

그 뒤로 사금령은 강해지고픈 욕망에 완전히 지배당했다.

모든 살업은 부하들에게 인계한 채 수시로 천하를 주유하면서 특히 천하오절의 행보에 주목했다. 그리고 최대한 멀리서 작게 볼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싸우거나 비무를 하는 자리가 있다면 꼭 보려고 했다.

그러다 홍천환의 소문을 입수하게 되었다.

과거 혈마 원건을 만들었던 전설적인 영약의 존재.

결국 입수는 실패했으나 천마신교라는 범상치 않은 단체의 존재와 일월신마라는 자의 가공할 무공까지 엿볼 수 있었다. 또 그는 직접 화산에서 연화봉과 가까우면서도 유일하게 화산파 잔당들이 드나들지 않았던 공주봉에서 그 경악스러운 격전의 현장을 몰래 관망하기도 했다.

또한 염황신마와 강정학이 벌였던 결전과 산서 지역에 나타났던 환도마종, 사천의 사혈마종 등의 정보를 취합하면서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천마신교와 중원무림의 충돌이 기정사실이고 어차피 한쪽 편에 서야 한다면 천마신교의 그늘 아래로 들어가겠노라고.

그렇게 살문을 천마신교에 바쳤다.

교주 단지운은 살문 무공의 중심에 있는 자가 사금령이니 태상교주로부터 마정을 받아서 그만의 마도를 개척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 마정이란 것은 천산에 흐르는 순수한 마기의 결정체였으며 오직 태상교주밖에 다루지 못하는 귀물이라 하였다.

사금령은 기꺼이 마정을 받아 흡수하였다. 그리고 구주마종에 더해질 새로운 천마신교의 기둥이 되길 꿈꾸며, 무림을 지배할 강력한 마공의 고수가 되길 꿈꾸며 새로운 마도를 열고 마성을 일깨웠다.

마정을 환단처럼 섭취하고 운기조식에 들어가는 순간 의식의 확장이 일어났다.

내공의 성질, 근골의 상태 등이 변화하는 걸 느꼈다.

머릿속으로만 그렸던 이상을 요구하자 마성이 깨어나 응답했다. 그것은 사금령이 바라는 것에 맞닿아 있었으며 그가 원하는 무엇이든 이뤄줄 것만 같았다.

그가 아는 천마신교 구주마종의 그 어떤 길과도 다른 새로운 마도가 다가왔음을 느꼈으며 새로운 마공의 경지까지 개척해낼 수 있었다.

그렇게 수개월의 폐관 수련 끝에 스스로 큰 만족감을 얻고 다시 태상교주 단원진의 앞에 섰다.

단원진이 그런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무신경하게 중얼거렸는데 그 말을 평생 잊을 수 없었다.

“실패작이로군.”

* * * *

쨍!

키아아아…….

천돌혈(天突血)에 머물던 음마의 마정이 깨졌다.

그 명징한 무음(無音)은 사금령과 진도건, 혈마만이 들을 수 있었다.

음마의 마정은 그 크기를 가늠해봐야 새끼손톱만 한 지름의 구슬 정도였는데 그 마성이 집약된 탁도가 옅어 보였다.

“역시 어설퍼, 미완성이야.”

혈마가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마정이 깨졌으나 그 형성 자체가 혈마의 말대로 어설프게 응집되어 있어서 절반은 흡수되고 절반은 사금령의 몸에 머문 채 천천히 흩어지는 걸 느끼고 있었다.

“쿨럭!”

사금령이 각혈과 함께 기침했다. 그리곤 이지가 돌아온 눈빛을 한 상태로 진도건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본능적으로 발을 내질렀다.

팡!

진도건은 목줄을 움켜쥐었던 왼손을 놓으면서 사금령의 발차기를 가볍게 막았다. 그리곤 멀찍이 벌려진 거리를 다시 좁히지 않은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사금령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정신이 드시오?”

“콜록! ……너 ……대체 무슨 생각이었느냐? 헉헉…… 날 죽일 기회였을 텐데…….”

“……글쎄.”

진도건은 굳이 그를 위해 대답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사금령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그의 목줄을 쥐었을 때 이전부터 머릿속에 떠오른 상태였다.

화산에서 혈마의 마성에 지배당하던 자기 모습을 직접 마주한 적이 없음에도 음마의 마성에 지배당해 폭주하는 사금령의 모습이 마치 거울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무의식의 공간에 진입하여 혈마가 음마를 흡수하는 과정에서 사금령의 기억 일부를 읽어버린 진도건이었지만, 실제 흐른 시간은 매우 짧았고 정신도 또렷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곧바로 사금령의 목숨을 취할 수도 있었으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파스스…….

“쿨럭! 쿨럭!”

사금령도 진도건의 대답을 재차 요구하지 못했다.

그도 음마의 마성이 소멸했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고 몸 안에 남은 본질적인 마기도 점점 그 색이 바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얼어붙었던 몸에 낀 서리는 부서져 녹아내렸고 뒤틀려버린 기혈로 인해 근골의 깊은 곳에서 시린 통증이 밀려 올라왔다. 홍련화도 녹아내려 출혈로 돌아가니 몸에 덕지덕지 붙어있던 몇 겹 안 남은 옷조각들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사금령이 떨리는 목을 가누어 고개를 들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믐달이 아슬아슬하게 손톱만 한 크기로 달빛을 유지하고 있었다.

분명 내일이면 저 정도의 선명성도 잃어버린 채 희끄무리한 빛 고리만 남은, 어둠에 삼켜진 달이 뜰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예측되는 달의 모습이 흡사 지금의 자신처럼 느껴져 처량하고 추워 보였다.

사금령은 호흡을 고르며 몸을 바로 세웠다.

움직일 때마다 관절 등에서 뿌드득! 소리가 울렸다.

그는 장도를 다시 고쳐 쥐고 진도건을 노려보았다.

“내가 바로 월하사신 사금령이다. 콜록! ……나를 기다리느냐?”

그의 물음에 진도건도 검을 고쳐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고 있었소.”

“클클! 좋다. 너라면 달을 삼킬 어둠으로 적격이다.”

사금령이 속에 응어리진 한(恨)을 긁어내듯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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